최재천 교수의 아들이 교토대학 영장류 연구소의 침팬지 아유무에게 숫자를 기억하는 게임에 패배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줘
이 일화는 최재천 교수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깨고 동물들의 독특한 인지 능력을 설명할 때 단골로 들려주는 아주 유명하고도 유쾌한 에세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최재천 교수의 아들과 세계적인 천재 침팬지 ‘아유무’ 사이에서 벌어진 ‘숫자 기억력 대결’의 전말을 자세히 정리해 드립니다.
1. 배경: 교토대 영장류연구소와의 인연
일본 교토대학의 영장류연구소는 마쓰자와 데쓰로(松沢哲郎) 교수를 필두로 세계 최고 수준의 침팬지 인지 능력을 연구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아유무(Ayumu)’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천재 침팬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유무는 화면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숫자의 위치를 순서대로 기억해 내는 ‘순간 기억력(작업 기억)’ 분야에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능력을 갖춰 전 세계 과학계를 놀라게 한 주인공이었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이 연구소와 학술적 교류가 깊어 자주 방문하곤 했는데, 어느 해 방학 때 아들을 데리고 연구소를 함께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2. 대결의 시작: 컴퓨터 게임 앞에 선 초등학생
마쓰자와 교수는 최재천 교수의 아들에게 침팬지 아유무가 평소에 하는 컴퓨터 모니터 터치스크린 게임을 한번 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게임의 규칙은 단순하지만 매우 잔인(?)했습니다.
모니터 화면에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무작위 위치에 나타납니다.
숫자 1을 터치하는 순간, 나머지 2부터 9까지의 숫자가 전부 하얀 네모 상자(■)로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관람자는 숫자가 있던 위치를 기억해 내어 가려진 상자들을 순서대로(2 → 3 → 4… → 9) 정확하게 터치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숫자가 화면에 떠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인간인 아들도 꽤 잘 맞추었습니다. 최재천 교수는 아들이 척척 맞추는 모습을 보며 내심 '역시 내 아들이라 똑똑하군' 하고 뿌듯해하고 있었습니다.
3. 반전: 무자비한 '아유무 모드'의 등장
아들이 게임에 익숙해지자, 연구원이 "이제 진짜 아유무가 하는 속도로 단계를 올려보겠다"라며 난이도를 조절했습니다.
단계를 올리자, 화면에 숫자가 머무는 시간이 무려 '0.21초(210밀리초)'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시간(약 0.3~0.4초)보다도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화면이 '번쩍' 하고 지나가자마자 숫자가 다 가려져 버리니, 최 교수의 아들은 도저히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고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으며 연이어 실패했습니다. 곁에서 보던 최 교수 역시 눈으로 쫓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방에서 대기하던 침팬지 아유무가 자기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유무는 화면이 '번쩍' 하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툭, 툭, 툭, 툭 신들린 속도로 모니터를 터치해 1부터 9까지 완벽하게 맞추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한 손에는 주스를 들고 마시면서 말이죠.
인간 초등학생이 온 신경을 집중해도 실패한 게임을, 침팬지는 건성건성 백발백중으로 성공시키는 모습을 눈앞에서 직관한 순간이었습니다.
💡 이 패배가 최재천 교수에게 준 깨달음
최재천 교수는 아들의 이 완벽한 패배를 지켜보며 커다란 학문적 전율과 감동을 느꼈다고 회고합니다. 이 일화가 우리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착각의 붕괴: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며 지능이 가장 높다고 자부하지만, '순간 기억 능력'만큼은 침팬지에게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뒤처진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
트레이드 오프(Trade-off)와 진화: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 능력을 잃어버렸을까요?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단기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뇌에 각인하는 능력(시각적 순간 기억)을 버리는 대신, 그 에너지를 '언어와 상징, 추상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숲속에서 포식자를 순식간에 포착하고 열매의 위치를 기억해야 하는 침팬지에게는 이 순간 기억력이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최재천 교수는 이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늘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이곤 합니다.
"인간의 잣대로 동물의 지능을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유무의 눈에는 0.21초짜리 화면도 못 맞춰서 쩔쩔매는 제 아들과 제가 얼마나 멍청한 동물로 보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