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는 맞는 얘기일까?
구약성서(히브리 성서)가 '믿음'을 강조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신학 및 성서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구약성서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현대적 의미에서 흔히 생각하는 '개인적인 신념'이나 '지적인 동의'로서의 믿음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입니다.
질문자님께서 관심을 두고 계신 요람 하조니나 메이르 스텐버그와 같은 학자들의 관점을 포함하여, 구약성서에서 믿음의 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몇 가지 핵심 요소를 정리해 드립니다.
1. '믿음'의 본질: Emunah vs. 현대적 신념
구약성서에서 믿음으로 번역되는 핵심 단어는 '에무나(Emunah)'입니다.
관계적 신뢰: '에무나'의 어원은 '진실하다', '확고하다', '지지하다'를 뜻하는 '아만(Aman)'에서 왔습니다. 이는 추상적인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언약을 맺은 상대(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실함과 의탁을 의미합니다.
행동 중심성: 구약에서 믿음은 결코 행동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믿는 것'은 곧 '그 언약의 내용을 따라 사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느냐'는 질문은 '교리를 믿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적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됩니다.
2. 구약의 핵심 가치들: '믿음' 그 너머
구약성서가 '믿음'만을 단일하게 강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성서는 더 넓은 범위의 '삶의 지혜'와 '언약적 삶'을 이야기합니다.
언약(Covenant)과 법(Law): 구약의 근간은 '율법(토라)'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믿음'보다 '언약에 대한 순종'이 성서의 더 큰 구조적 축이라고 지적합니다.
정의(Mishpat)와 공의(Tzedakah): 예언서들을 보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나 추상적 믿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공적인 영역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경험(History/Memory): 요람 하조니가 강조하듯, 성서는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역사적 경험의 축적입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했는지가 성서의 핵심입니다.
3. 요람 하조니의 관점: '이성'과 '경험'의 중시
질문자님께서 이전에 언급하신 요람 하조니의 『구약성서로 철학하기(Philosophy in the Hebrew Bible)』에 비추어 보면, 그는 성서를 '맹목적인 믿음의 체계'로 보지 않습니다.
하조니는 성서가 '철학적 저작'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성서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경험적으로 검증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그에게 구약성서의 핵심은 '믿음'이라는 단어 하나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지혜롭게 선택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다루는 철학적 담론에 가깝습니다.
요약하자면
구약성서에서 '믿음'은 분명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성서의 전부이거나 다른 가치보다 압도적으로 우선하는 단일 가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성서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약(Covenant)이라는 틀 안에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며(Experience), 그분의 법도(Law)에 따라 정의로운 삶(Justice)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것(Faithfulness).
질문자님께서 연구하시는 고대 근동의 언어적 맥락이나 문학적 분석을 고려할 때, 성서의 텍스트가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 가두기엔 훨씬 더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궤적을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혹시 특별히 주목하고 계신 구약의 특정 본문이나, 비교 연구를 염두에 두고 계신 학파가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