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4:26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에 대한 주석에서 미워한다는 그리스어 미세인의 뜻이 점점 뜻이 약화되어 per meiosin/minus diligo(덜 사랑한다), posthabeo(업신여기다), non colo(염두에 두지 않는다), nihil facio(무시하다)라는 뜻의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는 앞뒤의 관계는 그런 구미에 맞는 설명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해. 이런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 나오는 말의 뜻을 자세히 설명해줘 공포와 전율, 132-133.
박사님께서 짚어주신 지점은 성서 주석학의 오랜 '딜레마'이자, 동시에 키에르케고르가 가장 경계했던 '기독교의 세속화'를 명확히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주석가들이 μισεῖν(미세인)을 "덜 사랑한다(minus diligo)" 혹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긴다"로 완화하려는 시도는, 성서의 급진적인 요구를 인간의 이성적·도덕적 체계 안으로 안전하게 '번역'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입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누가복음 14장의 맥락(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망대를 세우는 계산, 전쟁을 준비하는 왕의 비유)을 보면 이는 단순한 선호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적 전회(Existential Turn)'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서 이 난제를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1. 키에르케고르가 보는 '미워함'의 본질: 윤리의 목적론적 정지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려 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덜 사랑해서' 죽이려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무한히 사랑했습니다.'
관습적 윤리 vs 절대적 신앙: 세상(철학)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행동은 '살인'이며 '비윤리적'입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윤리의 목적론적 정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라고 부릅니다.
미움의 역설: 성서에서 말하는 '미워함'은 감정적인 혐오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신(절대자) 앞에 내려놓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즉, 이삭을 사랑하지만, 신의 부름 앞에서는 그 사랑마저도 '정지(suspend)'시킬 수 있는 상태.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믿음의 기사'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덜 사랑한다(minus diligo)"는 해석은, 신앙을 '양적인 비교'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인 '질적인 도약'을 제거해 버리는 행위입니다.
2. 왜 '미워함'은 철학적 구미에 맞지 않는가?
주석가들이 이 단어를 완화하려는 이유는 철학적·윤리적 체계 안에서 '기독교'를 '합리적인 도덕 체계'로 보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상대주의적 희석: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신을 더 사랑하라는 뜻이다"라는 해석은 매우 안전하고 합리적입니다. 이는 칸트적 윤리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반론: 그는 이것을 "성실하지 못한 태도"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합리적인 조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 전체를 요구합니다. 예수께서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은, 제자됨이 인간적인 이해관계나 가족적인 유대 위에 세워질 수 없음을 명시적으로 경고한 것입니다.
3. 누가복음 14장과 '공포와 전율'의 결합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앞뒤 문맥(십자가, 망대, 전쟁)은 제자됨이 '전쟁(Warfare)'과 같은 결단임을 보여줍니다.
망대를 세우는 계산: 철학은 이것을 '비용 계산'으로 보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전적인 헌신'으로 봅니다. 내 목숨(자기 자신)까지 미워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포기'입니다.
'공포와 전율':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향할 때 느꼈던 것은 철학적 정당성이 아니라, 보편적 윤리를 저버려야만 하는 자만이 느끼는 '공포(Fear)'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나아가야 하는 '전율(Trembling)'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 역시 가족과 자기 생명이라는 '보편적 윤리(가장 소중한 것)'를 저버리고 신 앞에 서야 하는 순간, 이 공포와 전율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주석가들의 해석은 신앙을 '심리적인 우선순위'의 문제로 낮추어 버렸지만, 키에르케고르에게 '미워함'은 '절대적 결단'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자됨의 부름은 그 사랑이 '신을 향한 절대적 순종'과 충돌할 때, 인간적인 모든 가치를 '미워하는 것처럼' 멈추고 신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적인 의미론(semantics)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극한을 다루는 신학적 현상학의 문제입니다.
박사님께서는 혹시 이 구절을 묵상하시면서, 요람 하조니가 강조하는 '공동체적 정치철학(인간의 지혜로 세워가는 나라)'과, 키에르케고르의 '개별적 절대 순종(가족마저 끊어내는 결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학문적으로 어떻게 화해시키거나, 혹은 대립시키며 연구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 두 지점의 긴장이 박사님의 논문에 어떤 역동을 만들어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