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내겐 만화에 대한 추억 같은 게 별로 없다. 어릴 때, 친구들이 애타게 차례를 기다려 돌려보던 '엄희자'니 '민애니' 같은 순정만화들도, 그저 어깨 너머로 흘낏 건너다보았을 뿐, 애써 읽어야겠다고 안달해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생래적으로 가벼운 것보다는 진지한 것이,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좋아서 그토록 빠르게 책장이 넘어가는 만화에는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 시절, 저녁밥 먹을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오빠를 찾아서 만화방엘 가곤 했는데, 밥 먹으러 오란다고 불러도 오빠는 바로 뒤따라 나서는 법이 없었다. 먼저 가 있으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만화에 고개를 파묻곤 했다.
그 시절의 만화방 풍경이 떠오른다.
어딘지 달짝지근한 표정으로 만화에 빠져있던 사람들. 만화의 어떤 매력이 그토록 그들의 혼을 쏙 빼놓았을까.
지금도 가장 감명 깊게 본 만화와 만화가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는 사람들을 만나면, 살면서 무언가 재미있고 즐거운 코드 하나를 영영 놓쳐 버리고 만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낀다.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과장 단순화 변형
196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 팝아트의 특징적 요소를 살펴보면 미술과 사회에 대해 그들이 꽤 도전적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중적일 것. 일시적일 것. 소모적일 것. 값이 쌀 것. 대량생산될 수 있는 것. 젊음의 표상이 될 것. 위트가 있는 것. 섹시한 것. 상업적일 것."
처음에 사람들은 이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예술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개척해나가는 고귀한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앤디 워홀이 사용한 마릴린 먼로의 사진과 코카콜라와 캠벨 수프 광고 이미지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사진이나 상표나 만화 등은 이미 알려진 대상들이다. 대량복제 사회에서 이 친숙한 이미지들은 뜻밖에도, 소비가 미덕인 미국사회의 대중들에게 빠르게 파고들었다. 팝아트는 단기간에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들은 주변의 요구에 맞추어 작품을 제작하였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기존 만화의 기법을 그대로 빌려왔으며 앤디 워홀은 도처에서 반복되는 광고의 속성을 차용해왔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좋아했다. 앤디 워홀과 함께 1960년대 미국 팝아트의 선두주자였던 그는, "다층적 감정을 가진 만화와, 만화 특유의 쿨한 표현 방법이 갖는 긴장감이 나를 매료시킨다."라고 말했다. 만화는 인생의 다양한 모습들을 과장하고 단순화시키고 변형시킨다.
"아빠는 이 만화보다 못 그리잖아요"
국내에서는 '행복한 눈물'로 잘 알려진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자신의 회화에 만화 이미지를 차용한 데에는 일화가 있다.
뉴욕에서 태어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입체주의나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당시의 유행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 때문이었는지, 1950년대부터 꾸준히 발표한 작품들은 팔리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미술 흐름보다는 미국의 일상적인 현실에 관심이 더 많았다.
어느 날, 미키마우스 만화에 푹 빠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아들이 "아빠는 이 만화처럼 잘 그리지 못할 거예요."라고 말했단다. 그는 아들의 이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만화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에게 현실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아들을 위해서, 처음으로 만화를 차용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바로 '이것 좀 봐, 미키'(Look Micky, 1961년)였다.
그는 고급예술에 익숙한 대중에게 가장 저급하게 인식된 만화를 차용함으로서 논점을 만들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로 미키마우스, 뽀빠이, 수퍼맨 등 대중적 인기를 끈 만화주인공을 묘사한 작품을 61년 카스텔리(Castelles)화랑에서 선보였다. 곧이어 이듬해 62년에 열린 첫 개인전에서 이러한 만화를 차용한 이미지가 주는 시각적 호소력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는 마침내 미국 미술계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차라리 물에 빠져버리는 게 나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 '물에 빠진 소녀'(drowning girl, 63, 캔버스에 마그나와 유화, 171.6×169.5cm)를 보았다. 이 작품의 원작은 62년, 미국의 DC 만화책들에 발표된 만화 중 하나이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만화가 마이크 세코스키(1923~89)의 만화 '사랑을 갈구하다(Run for Love)'에서 차용한 것이다.
'물에 빠진 소녀'는 원작에 있는 만화 소재를 확대시켜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그린 그림이다. 소녀의 표정이 크고 생생해서 드라마틱한 이미지로 되살아나서 도판에서 보았던 만화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 그림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그린 울고 있거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많은 소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만화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솔직하고 감성적이다. 빨간 입술을 반쯤 벌리고 애처로운 눈빛을 한 그녀들은 감정의 노출이 심해서 어딘지 격정적이고 더러는 위험해 보인다.
'물에 빠진 소녀'는 소용돌이치는 파도에 휩싸여 울고 있다. 그녀는 브래드라는 남자친구에게서 버림을 받았거나 상처를 받은 것 같다. 그녀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것은 대화풍선에 나타난 문자뿐이다.
"도움은 필요 없어. 브래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버리는 게 나아."
자존심을 다친 그녀는 브래드란 남자에 대한 원망으로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장식적인 느낌이 드는 파도는 일본 호쿠사이의 유명한 판화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그림을 마이크 세코스키의 원작 만화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원작에는 물에 빠진 소녀의 남자친구가 뒤집힌 배에 찰싹 달라 붙어서 소녀 쪽을 지켜 보고 있는 배경그림이 나타나는데 대화풍선에 적힌 문자도 조금 다르다. 남자의 이름은 맬(MAL)인데 아마도 가장 미국적이고 일반적인 이름을 쓰기 위해서 브래드(BRAD)로 바꾼 게 아닌가 싶다. 또 원작에 있는 대화풍선의 한 문장을 삭제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앤디 워홀도 부러워한 점묘법 같은 망점의 효과
'행복한 눈물'(happy tears, 1964, 캔버스에 마그나와 유화)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여성 캐릭터에서 자주 보는 눈물흘리는 이미지인데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있다. 이 작품에서도 원화를 다소 변형시키고 있는데 눈물짓고 있는 여성의 검은 머리를 붉은 머리로 바꾸어서 여성적 감성을 살렸다. 그는 이렇게 만화를 이용해서 약간의 수정작업을 통한 새로운 이미지 변신을 꾀한다. 평면적이고 대담한 만화의 구성방식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즉흥적 영감을 끌어내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 만화 그림은 도판만 보아도 인쇄물을 확대해 놓은 듯한 망점이 크게 확대된 것처럼 보이는 '벤데이 망점(Ben-day dot) 효과'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 망점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창작은 아니다. 미국의 미술가이자 발명가인 벤저민 데이가 광학원리에 대한 연구 끝에 나온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이 '벤데이 망점'이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그림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앤디 워홀이 무척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이 망점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회화에서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벤데이 망점'은 그의 만화 그림에서 더욱 돋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쇠라의 '점묘법'이 떠오르는 이것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한 이미지의 기계적 변형을 통해 독특한 분위기의 메카니즘을 보여준다.
'벤데이 망점'은 그림에서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양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팝아트 수집가인 건축가 필립 존슨은 "미술이 해야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세상을 즐겁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인데 팝 아트가 이런 일을 시도한 금세기 유일한 미술사조"라고 말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저급문화로 인식되었던 만화를 회화에 도입하여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고 양식면에서도 '벤데이 방점'을 통한 지속적인 시도를 보였으며 색상에서도 실제의 만화보다 더욱 원색적이고 만화적인 그림으로 완성했다.
우리는 팝아트의 오브제들을 보면서 세상을 좀 더 즐겁고 살기 좋은 곳으로 느끼고, 사물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속에서 숨겨진 유머를 발견하는 유쾌한 경험을 하게 된다. jul6090@hanmail.net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97)
뉴욕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평온한 유년을 보냈다. 청년시절 재즈에 심취한 일은 그가 후에 미술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다가 61년 이후에 만화를 차용한 최초의 팝 회화들을 그리면서 명성을 얻었다. 5년간 대학교수를 지내다 전업으로 돌아섰다. 77년부터는 채색된 브론즈 조각을 시리즈로 제작했으며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팝아트의 창시자로 기록됨.
출처-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