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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 수행관

아뢰야식과 아말라식의 의미 / 김형효

작성자正 牧|작성시간06.11.22|조회수145 목록 댓글 4
아뢰야식과 아말라식의 의미


부처-중생 이중성 모두 갖고 있어
환영인줄 알고 초탈하면 화엄세상

마명(馬鳴)대사는 『대승기신론』에서 제8식 아뢰야식을 진망화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체유심의 사유에서 보면, 아뢰야식이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곧 진여와 번뇌가 혼재해 있는 중간지대라는 것을 상징한다 하겠다.

아뢰야식에 여래의 종자와 중생의 종자가 혼융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세상도 저 아뢰야식의 이중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뢰야식의 이중성은 그 존재방식이 연기법적이어서, 진여와 번뇌망상이 상호 의타기적이고 따라서 서로 상관적 차이를 지니는 한 쌍의 묶음이라고 봐야 한다.

상관적 차이라는 개념은 원효대사가 묘사했듯이, 같음은 다름에 대한 같음이고, 다름도 같음에 대한 다름이라서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의 존재도 성립할 수 없는 사실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중생도 부처의 중생이고, 부처도 중생의 부처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고, 부처가 없으면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아뢰야식의 진여와 번뇌망상의 존재도 각기 고유한 자가성(自家性)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가성이 없은 두 개의 환영이 만나고 떨어지면서 세상이라는 직물을 짜나가는 상관적 차이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하겠다.

그러므로 부처와 번뇌망상을 각각 따로 단독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 해로운 집착에 불과하다 하겠다. 이것은 염세적 허무주의를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정염(淨染)의 집착이 다 환각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컫는다 하겠다.

내가 부처라고만 생각함은 부처상에 걸려 아만의 극치에 이른 것이겠고, 내가 중생이라고만 생각함은 중생상에 걸려 치유 불가능한 절망의 나락에 빠지는 것이겠다.

아뢰야식이 부처와 중생이 동거하는 곳이라는 의미는 두 얼굴을 가진 한사람이라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것은 로마의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의 얼굴과 같다.

나는 중생이고 동시에 부처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순간적으로 나는 중생이었다가 부처로 변하고, 또 부처였다고 순식간에 중생으로 변하는 이중성을 사실로서 받아드린다.

웬만큼 수행했던 분들을 만나도 이 분들 역시 이중적인 면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한 순간에 부처가 되기도 하고, 중생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부처와 중생은 마치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중성과 유사하다 하겠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저 두 가지 경향을 하나의 환상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환영적 이중긍정은 동시에 이중부정의 초탈을 낳는다. 나는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순간적 중생도, 순간적 부처도 다 환영(幻影)이다. 이것이 초탈한 마음의 경지겠다. 혜능조사가 말한 무선무악(無善無惡)이 이 경지의 것이겠다.

이것이 또한 제9식 아말라식의 경지리라. 이 경지에서 마음은 어떤 세상의 것에 의해서도 끄달리지 않는다. 초탈이고 해탈이다. 이중부정의 차원에서 세상을 다시 살아야 세상에는 어떤 호오(好惡)도 없는 대긍정의 환희심만 있을 수 있겠다.

부처와 중생의 분별이 없으면서 모든 것이 찬란한 법화(法華)와 화엄(華嚴)의 세상 자체와 같다는 말이 헛것이 아니겠다. 마음이 모든 것이라는 말이 정녕 옳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kihyhy@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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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등불 | 작성시간 06.11.22 부처와 번뇌망상을 각각 따로 단독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 해로운 집착에 불과하다 하겠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작성자류미해 | 작성시간 08.01.01 모든것이 찬란한 법화와 화엄의 세상 자체와 같다 마음이 모든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작성자홍련화 | 작성시간 08.07.08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유정해원명심 | 작성시간 09.11.21 제8식 아뢰야식;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진여와 번뇌가 혼재해 있는 여래의 종자와 중생의 종자가 혼융되어 있다. 제9식 아말라식; 나는 중생이고 동시에 부처다. (일념 삼천설) 이 이중설을 사실로 받아드려 환영적 이중긍정은 동시에 이중부정의 초탈은 낳는다 부처도 중생도 다 환영이다 이것이 초탈한 마음의 경지라 이 경지에서 마음은 어떤 세상의 것에 끄달리지 않는다이중부정의 차원에서 세상을 다시 살아야 세상에는 어떤 호모도 없는 대긍정의 환희심만 있다 이것이 제9식 아말라식의 경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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