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혀는 타지 않으리
큰 법을 전할 수 있어 어리석은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쿠차의 키질석굴 앞에 놓여진 구마라집 동상
역경사적譯經史的 관점에서 전형적인 서역인으로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구마라집일 것이다. 그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인 쿠차의 왕족 출신으로 인도로 유학 가서 대·소승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했고, 뒷날 중국 장안에서 불경의 한역을 주도한 대역경가이다. 인도와 중국을 매개하는 서역 출신인 그는 역경의 더없는 적격자로서 그 몫을 다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다원과를 얻은 비구니 스님인 어머니에게서 영재 교육을 받았다. 모친의 감독 아래 끊임없이 경전을 암기해야 했다. 어린 그의 학문 진보에는 어머니 기바스님도 놀랄 지경이었다.
하루는 어린 구마라집이 길을 가다가 아주 큰 발우를 발견하고는 신기한 마음에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발우는 이렇게 큰데 어째서 이다지도 가벼울까?” 라고 생각한 순간 무거워서 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영겁 결에 소리를 지르면서 내려놓았다. 이에 어머니는 “네 마음속에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발우의 가볍고 무거움이 생겼을 뿐이니라” 라고 설명해 주었다.
어머니는 일곱 살인 아들 구마라집을 출가시켜 아홉 살에 인도의 계빈국(캐시미르)으로 유학을 보낼 때 함께 따라갔다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같이 귀국했다. 구마라집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다시 인도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모자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그녀는 아들에게 당부했다.
“방등方等의 깊은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어떻게 전하는가 하는 일은 오직 너의 힘이지. 하지만 너 자신에게만은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살은 타인을 이롭게 하고 자신의 일은 잊을 따름입니다. 만일 큰 법을 전할 수 있어 진리에 어두운 어리석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제 몸이 뜨거운 가마에서 불에 타는 고통을 받아도 여한이 없을겁니다.”
인도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이미 서역 불교를 대표하는 유명한 인물로 그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러나 그런 소문은 이내 화근으로 변했다. 고국이 그 때문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전진前奏의 왕인 부견338~385은 쿠차 지방에 칠만 명의 병력을 보내어 선전포고를 했다.
“이 전쟁은 덕을 갖춘 사람을 초청하기 위한 것이다. 짐이 듣건데 서역에 구마라집이라는 인물이 불교의 진리에 정통하여 후학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어진 사람은 나라의 큰 보물이다. 쿠차를 쳐서 구마라집을 초청해 오라.”
총사령관은 여광呂光이었다. 쿠차는 이내 정복당했고 구마라집은 포로가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여광의 군대가 귀국하기도 전에 본국이 망해버렸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여광은 고장姑藏 지방에 터를 잡고 후량後凉을 건국했다. 그러나 그 나라 역시 내부의 혼란이 겹쳤다. 그런 가운데 구마라집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착실히 중국어를 익혀 사상적 체계를 함께 가꾸어갔다.
구마라집의 주변에 승조僧肇(384~414) 등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때 숭불천자崇佛天子로 불리는 후진後奏의 왕 요흥姚興(366416)이 등장하여 고장姑藏을 평정한 뒤 구마라집과 그의 제자들을 장안으로 모셔갔다. 구마라집의 나이 쉰세 살 때였다. 서역 쿠차에서 중국 장안까지 오는 데 무려 십칠 년이 걸린 셈이다. 그런 보림保任의 세월이 뒷날 대단위 역경 작업을 가능하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탄탄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데다 수행 경지가 높고 깊었다. 중국 스님들과도 물과 우유처럼 잘 융합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그가 장안의 소요원道違院과 대사大寺에 머무는 동안 적을 때는 팔백 명, 많을 때는 삼천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십 년401 ~409이라는 길지도 않은 시간에(「개원석교록」에 따르면)74부 384권이라는 많은 분량을 번역할 수가 있었다.
그가 인도 원문을 손에 들고 입으로 번역을 하면 다른 스님들이 세 번 되풀이해서 읽으며 확인했다. 정성스럽게 다듬고 연구하여 원전의 뜻을 제대로 전하려고 한 까닭에 문장은 간략하면서 잘 통했고 의미 또한 분명했으며 어려운 말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특히 스스로 잘 알지 못하는 경전을 번역할 때는 더욱 신중하게 다루었다. 화엄경 십지품인 「십주경十住經」의 번역을 부탁받고서는 한 달 동안 스승인 불타야사佛陀耶舍를 청해 상의한 뒤 경전의 대의를 분명히 알고 나서야 비로소 번역을 했다. 또 그가 번역하고자 하는 경전이 이미 번역이 되어 있을 경우 새롭게 정정하면서 옛 번역의 장단점을 알고 나서야 취사선택을 했다. 곧 인도 원문과 기존 번역문을 놓고 중국말로 읽어 내려가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음을 풀이하고 문장의 의미를 번갈아 가며 해명하여 뜻이 쉬우면서도 근본적인 본래의 숨은뜻을 나타낼 수 있도록 했다. 서역본의 음역이 부정확한 곳은 인도어를 사용하여 정정하고 중국어의 번역이 틀린 곳은 다른 적당한 언어를 찾아 정리했다. 변화가 필요 없는 곳은 바로 기록하고 이명異名은 바르게 고쳤는데 고친 서역 음이 반 이상이니 이는 실로 번역자의 공정 근엄함이요, 집필의 신중함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유언에는 역경가로서의 자신감과 아울러 고뇌가 절절히 배어 있다.
“내가 번역하여 전한 경전은 모두 충실하다. 여러분과 함께 번역한 경전이 후세까지 널리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읽히길 바랄 뿐이다. 지금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고하노니 만일 나의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내 시신을 화장한 뒤에도 혀가 타지 않을 것이다.”
다비식 때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형체를 잃었지만 오직 그의 혀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원철스님의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에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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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파란하늘 작성시간 11.11.27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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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법행 작성시간 11.11.27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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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法境華 작성시간 11.11.27 보살은 타인을 이롭게히고 자신의 일은 잊을 따름이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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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초연 작성시간 11.11.28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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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APPY 작성시간 11.11.28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