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토십의론 후서(淨土十疑論後序)
/ 송(宋) 좌선의랑(左宣義郞) 진환(陳瓘) 씀
사람 마음 덧없고, 법 또한 일정함이 없다.
마음과 법이 천차만별이지만, 그 근본은 여기에 있다.
이것을 믿으면 두루 믿게 되나니,
그래서 화엄경에서 열 가지 믿음[十信]을 말씀하셨다.
반대로 이것을 의심하면 두루 의심하게 되나니,
그래서 천태지자 대사께서 정토에 관한 열 가지 의심을 해설하셨다.
의심을 벗어나서 믿음으로 들어가되,
한 번 들어가면 영구히 들어가게 되나니,
여기에서 떠나지 않고 확실히 믿으면 궁극의 경지[究境處]를 얻는다.
극락정토란 바로 그러한 궁극의 경지[究境處]이다.
이곳에 설법하시는 주체가 계시니, 바로 무량수불이시다.
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심은 일찍이 쉬거나 끊인 적이 없건만,
우리 중생들 의심이 귀를 막아 귀머거리처럼 그 설법을 듣지 못하고,
우리 중생들 의심이 마음을 뒤덮어 흐리멍텅하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죄악의 업습에 편안히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생각[念佛]하지 않음을 찬탄하며,
거칠고 산만한 마음을 좋아라고 기뻐[隨喜]하면서,
극락정토에서 연꽃 봉오리를 보금자리로 생겨나는 게
허황된 거짓이라고 망령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썩어 문드러질 이 육신이 어떻게 얻어졌고
또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끝내 생각지도 않는다.
모태의 감옥[胎獄태옥]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으니,
진실(眞實)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로 업식(業識)에만 믿고 의지하니,
진실한 성품 바탕과는 저절로 거리가 멀다.
한바탕 허깨비 같은 꿈속 경계에서 진실[성품]을 못 보고
허깨비[업식]에 매달린 까닭에,
생애생애마다 신령스러움을 잃고 성인의 길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석가여래께서 대자비와 연민심을 내시어,
사바고해 오탁악세에서 큰 소리로
저기 서방정토의 지극하고 미묘한 즐거움을 찬탄하셨다.
생사윤회의 고해 가운데 위대한 뱃사공[船師선사]이 되시어,
우리 중생들을 진리의 배[法船법선]에 실어 날라
저 쪽 극락 언덕[彼岸피안]으로 건네주시면서,
밤낮으로 중생을 제도하심에 잠시도 쉴 틈이 없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아미타불의 언덕(정토)은 본디 피(안)차(안)가 없고,
석가여래의 배는 실제로 오고 감[往來]이 없다.
비유하자면, 한 등불이 팔방의 거울에 각각 나누어 비치는 경우에,
거울의 위치는 동쪽과 서쪽이 있을지라도
빛과 그림자는 결코 둘이 아닌 것과 같다.
아미타불의 설법은 팔방의 거울에 두루 빛을 비추는데,
석가여래의 방편 법문은 오직 서쪽 거울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피안에 다다른 이는 피안과 차안(의 구별)을 잊을 수 있지만,
아직 법계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들이
어떻게 스스로 동쪽과 서쪽(정토)을 분간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법문 가운데서 아직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방향에 얽매이지도 말고 피(안)차(안)도 가리지 말며,
단지 부처님 말씀을 올바른 생각으로 굳게 믿기만 하면 된다.
이 점이 바로 두 성인(아미타불과 석가여래)의 본래 의도이며,
또 지자 대사께서 믿음을 내신 까닭이다.
믿음이란 모든 선행의 어머니이며, 의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이다.
[信者 萬善之母 신자 만선지모, 疑者 衆惡之根 의자 중악지근]
선행의 어머니(믿음)에 순응하여 죄악의 뿌리(의심)를 솎아낼 수 있다면,
앞에서 의심의 업장에 귀와 마음이 막힌 중생들도
귀가 트여 다시 듣고 마음이 열려 다시 깨닫게 된다.
또 아직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생사윤회를 벗어나고,
극락정토에 왕생하지 못한 중생은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석가여래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라 아미타불을 향해 극락왕생하고,
다시 아미타불의 원력에 따라 나와 석가여래를 돕게 될 것이다.
이렇듯이 시방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
서쪽을 향하여 팔방의 모든 거울에 두루 들어가는 셈이다.
두 성인께서 정토법문을 세우신 이래
이와 같이 행한 사람들이 갠지즈 강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데,
어찌하여 믿지 아니하고, 또 무엇을 의심한단 말인가?
이러한 법문(진리)을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면,
또 좋은 방편을 마련하여 아직 믿지 못하는 뭇 사람들한테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일깨워야 하리라.
바로 그 때문에 천태지자 대사께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이 정토십의론을 설하신 것이다.
명지(明智) 대사께서 한가운데 우뚝 서서 지자 대사의 도를 배워 본받으셨는데,
그 문장은 따라갈 수 없지만 그 대자비심만은 따르실 만하다.
그래서 또 이 정토십의론을 다시 인쇄 발행하시게 되었는데,
맨 앞의 서문은 양공이 쓰셨으니,
이에 법문이 더욱 널리 전파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여 몇 자 부연 서술한다.
·옮긴이 소감·
모든 종교 수행은 믿음〔信〕을 기본 바탕으로 비롯합니다.
기독교에서 ‘믿음·소망·사랑’을 말하고,
불교에서 ‘신(信)·원(願)·행(行)’을 말하는 이치는 똑같습니다.
화엄경에서 “믿음은 도〔진리〕의 근원이자 공덕의 어머니이다〔信爲道源功德母〕.”
라고 말씀하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진리〔道〕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모든 수행은 이 ‘믿음’을 내어 크고 깊게
확대 심화시켜 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 수행이 깊어지고,
수행은 그 믿음의 성장 발전을 확인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양 극단은 서로 만난다’는 서양 속담도 있듯이,
상대적인 현상세계의 본질상 진리는 역설적 속성이 있기에,
믿음을 내고 확대 심화시키는 방법도 때로는 역설적으로
‘의심’이라는 수단방편을 통하기도 합니다.
바로 ‘화두선(話頭禪)’이 그 대표입니다.
터무니없이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듯한 ‘말대가리〔話頭〕’를
의심덩어리〔疑團〕 삼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이를 깨쳐 풀어버릴 때 그 안에 본래 들어있던
‘믿음’의 광명이 눈부시도록 찬란히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는 불성(佛性) 자리의 믿음을
확실하고 철저히 확인하고 체득하기 위하여,
그토록 크고 단단한 의심덩어리를 자나깨나 골똘하게 되씹는〔參究〕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 수행을
굳이 꼭 ‘역설’적인 역공법(逆攻法)으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람을 등지고 물 흐름 따라 순항(順航)하는 배가 안전하고 빨리 나아가듯,
이왕이면 진리에 순응하여〔順理대로〕 ‘의심’할 필요 없이
확실한 ‘믿음’으로 공부하는 정공법(正攻法)이
더욱 자연스럽고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본래진면목인 ‘불성’자리,
특히 그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극락정토’에 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당부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간절하고 독실하게 염불(念佛) 수행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신·원·행’의 삼요소가 삼위일체로 융합되어 실현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무명(無明)의 업장에 가리어
‘불성(佛性)’ 광명을 보지도 못하고 믿기조차 매우 어렵습니다.
불성 광명에 대한 믿음과 발원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가로막고 있는 무명과 의심의 업장을 풀어헤쳐야 합니다.
화두가 그 의심(무명) 덩어리를 몸소 참구해 풀라고 던져주는 열쇠구멍이라면,
염불은 극락정토〔佛性光明〕의 대문을 불보살님과 역대 선지식들이
대를 이어가며 친히 활짝 열어 제치고 그 뜨락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우리더러 그 쪽을 향해〔發願〕 발걸음을 옮기기만〔念佛〕 하면
된다고 가리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대문의 빗장을 채워둘 필요도 없거니와,
까다로운 자물쇠를 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많은 경전에서 곡진하고 자상하게 설법하셨고,
역대 조사(祖師)님들이 극락정토와 염불수행에 관한
세간〔중생〕의 의혹들을 하나하나 문답방식을 통하여
누구나 납득할 만큼 충분히 합리(合理)적이고 합정(合情)적으로
여법(如法)히 해설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일반 중생들한테 믿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제쳐
자성미타(自性彌陀)와 유심정토(唯心淨土)의 부처님 광명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화두라는 의심덩어리는
밖에서 스스로 빗장을 풀어야 비로소 문이 열리는 관문(關門) 체계인지라,
안에서 부처님이나 선지식들이 아무리 자상한 말씀으로 해설하여
열어 주려고 해도 안 됩니다.
밖에서부터 안으로 빗장을 풀고 들어가는
순수 자력(自力) 수행이 화두선이라면,
안에서 집주인(부처님)이 몸소 빗장을 풀고 대문을 활짝 열어
손님(중생)을 맞아들이는 타력가피(他力加被)의 수행이 바로 염불입니다.
물론 밖에서 안을 향하려는 자기 의지〔발원〕와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발행진〔自力수행〕은 최소한 필요합니다.
따라서 자력(自力)과 타력 가피가 서로 감응(感應)하여
혼연일체가 되는 염불 수행이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흔히 ‘믿음도 은총’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경전 말씀에도
“자그만한 선근이나 복덕의 인연으로는 (극락정토에 대한 믿음과 발원을 내어)
극락왕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선근과 복덕의 인연을 지어가야 믿음도 커지고 발원도 간절해집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선근과 복덕을 짓는 인연은 염불보다 더 큰 게 없다고 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따로 없이, 믿음과 염불이 말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不信〕 의심’이 아니라,
조사의 말(화두)을 ‘믿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일 따름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불자님이라면
이제 답답한 화두에만 매달리지 말고,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마음으로
자나깨나 염불수행하여 극락왕생하시길 지심으로 발원하옵니다.

《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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