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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사상 이야기

원효대사 일대기 / 강승환

작성자청련|작성시간13.05.28|조회수389 목록 댓글 23

1. 앞글

 

원효元曉는 숙세宿世에 많은 공덕을 쌓았으나 복 많은 시대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는 흐르는 별(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그를 배었고, 그를 해산할 때는 5색 구름이 땅을 덮었으며, 나면서부터 빼어나고 특이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시대는 삼국통일이라는 전란기였고, 골품제라는 신라 독특한 계급사회였다. 일 년에 몇번씩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없는 시대였으며, 그 자신 6두품 출신으로 추정되니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분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원효는 상당히 고민한 것 같다. 자기의 포부와 현실을 조화시켜야 했으니. 그래서 그는 불교에 뛰어들었고 거기서 이 둘을 조화한 것 같다. 당시 불교는 신분에 비교적 자유로웠고 마음대로 자기 뜻을 펼 수 있었으니.

이는 곧 진리 탐구에 대한 그의 욕구와 현실의 조화이기도 하고, 무지몽매한 중생에게 불법佛法을 가르쳐야 하는 그의 업보業報이기도 하다.

 

그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보면 알 수 있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이 차도, 불 쬘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하기 힘든 수행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위대한 학문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에 관한 것이고, 둘은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여러 파벌派閥의 화합을 부르짖었고, 개인적으로는 3계三界를 뛰어넘는 깨침을 구했다. 앞의 것은 화쟁사상和諍思想, 곧 어우름 사상으로 나타나고, 뒤의 것은 무애행無碍行, 곧 거리낌 없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 둘은 철저한 학문과 수행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학문에 통달했기 때문에 모든 것의 화합을 주장할 수 있었고, 최고의 수행을 이루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는 행동을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잘 통한다. 화쟁和諍이 있어야 무애無碍가 되고, 무애가 있어야 화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원효의 이러한 사상과 행동을 당시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했다. 당시 100명의 고승이 참여하는 백고좌회百高座會, 일명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라는 국가적 기원제가 있었는데 원효는 거기에 한 번도 초청받지 못했다. 신라 100명의 고승 중에도 끼지 못한 것이다.

소소한 파벌을 형성하여 그 속에서 자기의 명예와 부귀를 누리려는 사람들이 모든 파벌을 타파하여 일체의 화합을 주장하는 원효를 이해할 리 만무했고, 근엄한 권위와 형식에 집착하여 백성에 군림하는 종교인들이 중생이 곧 부처라며 기생이나 거지와도 어울리는 원효를 인정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효는 당시에는 철저히 배척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효가 돌아가신 뒤 1,3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모든 것이 거꾸로다. 백고좌회에 참석했던 100명의 고승, 그 누구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그들의 글귀 한 구절도 전하지 않는다.

오직 원효元曉라는 이름과 그의 소중한 글들만이 전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인도를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개인의 철학이 세계적으로 연구되는 분은 원효대사 한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복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가장 복 많게 살다 간 것이다. 철저한 학문과 수행을 통해서.

 


2. 일대기


원효대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태어나, 31대 신문왕 6년(686) 음력 3월 30일 70세로 열반했다. 당시로 봐서는 무척 오래 사신 셈이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행적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이하는 여러 사람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해 본 것이다.

서기 617년(眞平王39, 1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원효는 성이 설薛이고,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에서 담날내말談捺乃末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고,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압량군은 지금 경북 경산 자인면이고, 내말乃末은 내마柰麻로 신라 17관등 중 11번째이다. 한편 설薛씨 족보族譜에 의하면 아버지는 내옥乃玉이고, 어머니는 갈산 용씨葛山 龍氏이다. 둘째 아들로 이름은 사思이다.

 

625년(眞平王47, 9세):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태어남.

632년(善德女王1, 16세): 이때 출가出家한 것으로 추정됨. 32살에 출가했다는 설도 있음. 일정한 스승 없이 홀로 공부함. 중국에서는 법상종法相宗의 개조開祖 규기窺基(632-682)가 태어남.

634년(善德女王3, 18세): 선덕여왕이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함.

643년(善德女王12, 27세): 중국 화엄종 제3조祖 법장法藏(643 -712) 태어남.

645년(善德女王14, 29세): 중국 삼장법사 현장玄奘(600-664) 5년 유람 후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옴.

647년(眞德女王1, 31세): 낭지郎智 스님을 찾아가 법화경(?)을 배움. 낭지스님께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지어 올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음.

 

서쪽 골짜기의 사미(원효)는 동쪽 언덕의 상덕고승(낭지)에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립니다.

잔 먼지를 불어서 영취산에 보태고 작은 물방울을 날려서 용연에 던집니다.

 

西谷沙彌稽首禮 東岳上德高嚴前 吹以細塵補鷲岳 飛以微滴投龍淵

 

650년(眞德女王4, 34세): 의상대사와 함께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서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운 것으로 추정됨. 의상과 함께 요동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려다 간첩혐의로 고구려에 붙잡혀서 되돌아옴.

655년(武烈王2, 39세): 이 시기 깨침을 얻음(?).

660년(武烈王7, 44세): 백제 멸망함.

661년(文武王1, 45세):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당성黨城에 이르렀다가 해골 물을 마시고는 크게 깨쳐 중국에 가는 것을 포기함. 의상 혼자 중국으로 들어감.

667년(文武王7, 51세): 요석공주瑤石公主를 맞이해 설총薛聰을 낳고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함. 이후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르며 곳곳을 다닌 것으로 추정됨. 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智儼(600-668) 입적함.

668년(文武王8, 52세): 소정방蘇定方이 그려 보낸 난독화鸞犢畵, 곧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그림을 풀이함. 뜻은 즉시 회군回軍하라는 것임. 이 해 고구려 멸망함.

672년(문무왕12, 56세):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면서, 사복蛇福을 만남. 이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많은 저술을 지은 것으로 추정됨,

676년(문무왕16, 60세): 이때를 전후해서 대안大安 스님을 만나고,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풀이하여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에서 강설한 것으로 추측됨. 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에게 삽관법(鍤觀法? 淨觀法?)을 지어준 것으로 추정됨.

686년(神文王6, 70세): 분황사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제40 회향품廻向品까지 쓰고 붓을 놓음. 경주 남산南山 혈사穴寺에서 3월 30일 열반함. 그 후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遺骸로 진용소상眞容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함. 설총이 지극한 예를 올리자 소상塑像이 돌아봄.

702년(성덕왕1, 滅後16): 의상대사義湘大師 입적함. 이 무렵 동경東京 흥륜사興輪寺 금당金堂에 소상塑像으로 안치되어 10성十聖으로 받들어짐. 10성十聖은 동쪽 벽에는 표훈表訓 사파虵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고 서쪽 벽에는 아도我道 수촉獸觸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임

779년(惠恭王15, 滅後93): 손자 설중업薛仲業이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극진한 대접을 받음.

785년(元聖王1, 滅後100): 열반 100주년 기념으로 음리화(音里火 경북 상주 청리) 3천당주三千幢主 급찬級飡 고금(高金)이 서당화상탑비誓幢和尙塔碑를 세움. 비석 일부분이 전함.

935년(敬順王9, 滅後249): 신라 멸망. 고려 건국.

1101년(고려 15대肅宗6, 滅後415): 원효대사에게 화쟁국사和諍國師, 의상대사에게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시호가 주어짐.

1171-1197년(고려 明宗1-27, 滅後485-511): 이 무렵 분황사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세워짐. 고려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어서 오금석烏金石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음.

1967년: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 경내에 원효대사 동상이 세워짐.

매년 음력 3월 30일(?) 경주 망월사에서 대재大齋를 지냄.


*참조. 

국역원효성사전서(대한불교원효종, 제일출판사, 1988. 2. 15)

원효연구론선집5권(원효성사연보, 양은용, 중앙승가대학)

 


3. 행적

 

원효가 진실로 크게 깨친 것은 무덤방에서 해골 물을 마신 일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효는 45살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째로 당唐나라에 들어가려 했다. 당성(지금의 남양 또는 당진) 부근에서 밤에 비를 만났는데, 마침 옆에 사당(실제는 무덤방)이 있어서 곤히 잤다. 그리고 시원한 물도 마셨다. 이튿날 날이 밝자 견딜 수가 없었다. 사당이 아니라 무덤방이었고 시원한 물이 아니라 해골 썩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 계속 내리고 길도 질퍽해 한 걸음도 옮길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룻밤 더 묵기로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잘 수도 없었다. 귀신들이 덤비기 때문이다. 원효는 크게 깨달아 탄식했다.


지난밤에 묵었을 때는 토굴이라 곧 편안하다 했더니

오늘밤에 묵으려니 귀신 집이라 빌미가 많구나.

아하! 알겠구나.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닌 것을!

3세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 가지 법은 오직 가리새뿐임을!

마음 바깥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별도로 구하겠는가.

 

前之寓宿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託鬼鄕而多崇. 

則知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三界唯心萬法唯識. 

心外無法胡用別求(『송고승전』, 『당신라국의상전』)



원효는 이렇게 말하며 모든 것이 마음뿐임을 알고는 되돌아 왔다. 의상 혼자만 당으로 들어갔다. 원효의 이 글은 『대승기신론』의 구절과 통한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더 간단히 줄이면 『화엄경』의 글귀와 통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다.

 

一切唯心造


원효는 51살 무렵에 요석공주瑤石公主를 맞이해 설총을 낳았는데 그때 부른 노래는 이렇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한다면

나는 하늘을 받들 기둥을 찍겠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삼국유사』, 『원효불기』 )


자루 빠진 도끼는 홀로 된 여자를 뜻하고, 하늘을 받들 기둥을 찍겠다는 것은 훌륭한 인물을 낳겠다는 뜻이다.

이 뜻을 알아들은 이가 무열왕이다. 곧 자기의 둘째 딸(?)로 하여금 원효를 맞이하게 했다. 남편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해 혼자 살고 있는 터였다.

설총이 태어난 뒤 원효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거리낌 없는(無碍) 생활을 하였다. 고려 문장가 이규보가 한 수 올렸다.


머리를 깎아 맨 머리가 되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길러 두건을 쓰면 소성거사라.

비록 몸을 천백으로 나타내지만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으니,

이 두 가지의 아주 다른 모습을 짓는 것도

단지 한 마당 놀음뿐이로구나.

 

剃而髠則元曉大師

髮耳巾則小性居士

雖現身千百 如指掌耳

此兩段作形 但一場戱(『동문선』, 제50권)


거리낌 없는 모습이 보인다. 소성거사 원효의 행동은 어떠했을까. 고려 박인로의 글을 보면 조금 알 수 있다.

 

옛날 원효 대성인이 백정 술장사들과 어울러 살았다. 일찍이 목이 고부라진 호로병을 어루만지며 저잣거리에서 춤을 추었는데 무애(無碍, 거리낌 없음)라 이름했다.

뒷날 일 꾸미기 좋아하는 이가, 쇠 방울을 위에 묶고 채색 비단을 아래로 늘어뜨려서 그것을 두드리며 앞뒤로 나아가니, 모두 가락에 맞았다.

또 경론에서 노래 구절을 따와서는 무애가無碍歌라 이름했다. 밭에서 일하는 늙은이까지 그것을 본받아 유희로 삼았다.

(고려 숙종 때) 무애지국사가 일찍이 시를 지어 말했다.

 

이 물건은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을 쓰게 했고

옛사람의 이름 없는 것을 다시 이름있게 했다.

요사이 산에 사는 관휴라는 사람이 시를 지어 말했다.

양 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번뇌, 소지) 2장애를 끊었기 때문이고,

발을 3번 드는 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 3세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 춤이 모두 진리를 비유한 것이다.

나(박인로) 또한 그 춤을 보고 기려서 말했다.

 

배는 가을 매미같이 (비었고)

목은 여름 자라같이 (굽었다)

그 굽은 것은 사람을 따를 만하고(사람에게 순종함)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 만하다(만물을 용납함).

밀석(깐깐한 사람?)에게도 거슬림을 볼 수 없고

규효(너그러운 사람?)에게도 비웃음을 볼 수 없다.

한상(인명)은 이와 같이 해서 세상에 숨었고

장자(인명)는 이와 같이 해서 세상에 떠다녔다.

누가 그를 이름했던가. 소성거사(원효)라고.

누가 그를 기렸던가. 농서타이(인명)라고.(『파한집』, 하권)


이것만 가지고 모습을 살피기에는 부족하나 대충 말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넉넉한 옷을 입고서 목을 움츠리고 허리를 굽힌다. 손에는 끈이 달린 쇠 방울을 들었는데 방울 밑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을 매달았다. 그리고는 그 방울을 치면서 앞뒤로 나아가며, 아울러 소매가 긴 두 손을 머리 위로 휘두르기도 하고, 발을 3번씩 들기도 한다.

두 손을 휘두르는 것은 2가지 장애를 벗어났음을 뜻하고, 발을 3번 드는 것은 3계를 벗어났음을 뜻한다. 곧 해탈의 경지를 뜻한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엎드린다는 뜻이니 순종이고, 허리를 굽히는 것은 만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니 용납이다. 곧 이는 사람과 존재(人法)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완벽한 자유인임을 뜻한다.

쇠 방울에 비단을 매단 것은 근엄한 격식을 벗어난 것이니, 진리 탐구에는 격식이 없음을 뜻하고, 노래를 부른 것은 무지한 중생들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중생에 대한 교화를 뜻한다.


56살 무렵에 사복을 만난 것 같은데, 이 사복虵福은 우리나라 역사상 기록에 나오는 사람 중 최고의 수행가가 아닌가 한다. 감히 원효를 꾸짖었기 때문이다.

원효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을 때 사복이 찾아왔다. 원효가 예를 올리자 사복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자기 어머니가 죽었으니 장사지내러 가자고 했다. 원효가 함께 가서 장사를 지내며 마지막 축문을 했다.


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괴로우니,

죽지 말지어다 나는 것이 괴로우니.

 

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삼국유사』, 『사복불언』)


그러자 사복이 핀잔을 주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번거로운가. 몇 자 되지 않는 글이 번거롭다 하니, 원효가 할 수 없이 다시 지었다.


나고 죽는 것이 괴롭다.

 

死生苦兮(『삼국유사』, 『사복불언』)

 

그러나 정작 사복 자신이 죽자, 그는 죽기 전에 꾀나 긴 시(?)를 지었다.


지난날 석가모니 부처께서는, 사라 나무 사이에서 열반하셨네.

이제 또한 그와 같은 이가 있어, 연꽃세계에 들어가려 하네.

 

往昔釋迦牟尼佛 娑羅樹間入涅槃

于今亦有如彼者 欲入蓮華藏世界(『삼국유사』, 『사복불언』)

 

신라에는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가 있었다. 100명의 고승이 참석해 신라와 왕실이 잘 되기를 비는 제도이다. 그러나 원효는 공부만 했지 격식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품위와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한 것 같다. 인왕경대회에 뽑히지도 못했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저술을 훔쳐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뒤 당시 성인으로 추앙받던 대안법사大安法師의 추천을 받아 『금강삼매경론』을 지어 분황사에서 임금을 비롯한 구름 관중 앞에서 강연을 한 후, 원효는 한마디 한다.


지난날 백 개 서까래를 모을 때는 (나는) 비록 참여하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 놓는 것은 오직 나 혼자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그려.

 

昔日採百椽時雖不預會 

今朝橫一棟處唯我獨能(『송고승전』, 『황룡사원효전』)


원효는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지어 자찬훼타自讚毁他, 곧 나를 기리고 남을 헐뜯는 것을 극히 금했다. 그런데 슬쩍 남을 비꼬는 말을 했다. 그동안 서운함이 많아서였을까,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을까. 이 말을 한 뒤 부끄러워서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지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원효의 공부는 막힘이 없다. 그의 힘은 실력에서 나온다. 고려 김부식이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 한 수 올렸다.


恢恢一道落落音機 聞自①同異大小淺深

如三舟月如萬竅風 至人大鑿卽異而同

瑜伽名相方廣圓融 自我觀之無徃不通

百川共海萬像一天 廣矣大矣莫得名焉(『동문선』, 제50권)

 

①원문 同 없음. 8자 시로 추정되며 아래 구절 卽異而同을 고려할 때 同이 빠진 것으로 추정됨. 원효의 글에는 동이同異 동정動靜 염정染淨 진속眞俗 공유空有 같은 대구對句가 많음.


넓기도 넓구나 하나의 길이여, 넉넉하기도 넉넉하구나 그 말소리여.

같고 다름, 크고 작음, 얕고 깊음을 스스로 들었구나.

3강의 달 같고, 만 방향의 바람 같구나.

지극한 사람의 뜻을 크게 살펴보니,

다른 것이 곧 같다는 것이라.

유가의 이름과 모습[분석적], 대승경전의 둥글게 합침[종합적]

스스로 그것을 보아 통하지 않는 것이 없구나.

백 가지 물줄기가 바다를 함께하고,

만 가지 물건들이 하늘을 함께하는 것 같구나.

넓기도 해라 크기도 해라, 이름을 붙일 수가 없구나.


원효가 열반하자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遺骸를 소상塑像으로 만들어 분황사芬皇寺에 모셨다. 설총이 제를 올리자 유해가 돌아다보았다.

희대의 철학가요 평범한 생활인이자, 임금의 사위요 길거리 거지인 원효성사의 한바탕 춤이 다 끝난 것이다. 일연스님이 한 수 올렸다.


뿔 탄 수레(원효)가 삼매경의 두루마리를 처음으로 여니,

춤추는 호롱박이 마침내 수 만 거리의 바람에 걸렸구나.

밝은 달 요석공주와의 봄꿈은 가고,

문 닫은 분황사엔 돌아보는 소상도 비었다.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삼국유사』, 『원효불기』)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이고, 불교식 이름은 원효이나, 우리말 이름은 새부이다. 중국에서는 구룡이라 불렀으며 시호는 화쟁국사이다.

서당誓幢이나 서동誓童은 이름이라기보다는 뛰어난 어린이에게 붙이는 일반적 명칭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효元曉는 불교식 이름인데 처음으로 밝아온다는 뜻이다. 곧 새벽이다. 새벽을 이두吏讀식으로 쓴 것이 새부塞部가 아닌가 한다.

구룡丘龍이란 청구靑丘, 곧 우리나라의 용이란 뜻이다. 용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상스럽게 여기는데, 그들이 원효에게 용자를 붙인 것이다. 또 중국에서는 원효의 학설을 원효종元曉宗, 해동종海東宗, 분황종芬皇宗이라 하며 별도의 지위를 인정해 주었다. 자존심 강한 중국인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화쟁和諍이란 화합한다, 어우른다는 뜻이다. 모든 논쟁을 어우른다는 말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 별기』에서 말한다.


‘백 가지 논쟁을 아우르지 못할 것이 없다.’

 

百家之諍無所不和


의천국사가 『화쟁론和諍論』을 지어 원효를 기렸다.


사람 마음은 남쪽과 북쪽이 다르나

부처 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참된 것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속된 것을 밝히며

빛깔(물질)에 의해서도 다시 빈 것을 풀이한다.

그윽함을 살펴서 오직 모습을 없애며

뜻을 잃지 않고도 어린 아이를 깨우친다.

집착함이 있는 것, 이것은 다툼거리가 되나

생각(뜻)을 버리면 스스로 통하는 것이다.

 

人心南北異 佛法古今同

不壞眞明俗 還因色辨共

探幽唯罔象 失旨倂童蒙

有著斯爲諍 妄情自可通


원효의 수행은 어느 정도일까. 그의 존칭을 본다. 대사, 법사, 성사, 대성, 보살, 교주, 구룡 등등이 있다. 대사大師나 법사法師는 흔히 쓰는 말이다. 큰 스님, 법을 깨친 스님이란 뜻이다.

그런데 원효에게는 대부분 성聖자가 따라다닌다. 성사聖師나 대성大聖이 그것이다. 성인 같은 스님, 큰 성인이란 말이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보살, 교주라고도 한다. 보살菩薩이란 부처 바로 다음 계급(?)이고, 교주敎主란 원효종의 교주, 해동종의 교주란 말이다.

또 구룡丘龍이라고도 한다. 해동의 용이란 뜻인데 주로 중국에서 썼다. 중국에서 활동한 신라 견등見登스님의 글을 본다.


신라 원효법사는 날으는 용의 술법(비룡지화)으로 우리나라(청구)에 비를 뿌렸기 때문에 구룡丘龍이라 이름하며,

대주 법장화상은 코끼리를 타는 덕(가상지덕)으로 당나라(당)에 깃발을 나부꼈기 때문에 향상(香象)이라 이름한다.

 

新羅 元曉法師 飛龍之化 灒于靑丘 故字丘龍

大周 法藏和上 駕象之德 振于唐幡 故字香象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성사를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의 수준으로 본다.


논을 짓고 경을 풀이하여 큰 법을 드러냈으니

마명보살 용수보살의 공적, 그들의 무리로구나.

오늘날 학문이 게을러 (원효를)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마치 (공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옆집 사람이)

우리 집 동쪽에는 공구라는 사람이 살지요라고 하는 것 같구나.

 

著論宗經闡大猷 馬龍功業是其徒

如今惰學都無識 還似東家有孔丘(『대각국사문집』)


임춘(林椿)은 동행기(東行記)에서 원효를 유마거사에 비유한다.


일찍이 거사를 늙은 유마라고 들었는데

길을 가면 능히 허공에 만 리를 간다.

이미 글 구절과 와서 묻는 것도 버려서

응함 없고 일함 없이 사는 곳을 훌쩍 나온다.

이를테면 (이 분이) 원효이다.

 

曾聞居士老維摩 飛錫凌空萬里過

已遣文珠來聞疾 不應無事出毗耶 謂元曉也(『서하집』 권5)


4. 저술

 

원효는 경흥憬興, 태현太賢과 함께 신라 3대 저술가로 꼽히는데, 그는 대략 100가지에 200여 권의 책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중 일부분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21가지 26권 정도이다. 나머지는 책 이름만 전한다.

남아 있는 글만 보면 원효의 글은 크게 3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경론經論을 풀이한 것이다. 이는 대개 소疏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논論은 경을 풀이한 것으로 보살이 지으며, 소疏는 경이나 논을 더 자세히 풀이한 것으로 그 다음 사람이 짓는다.

원효는 경론이 짧은 경우, 소를 지어 낱말 하나하나를 풀이했다. 이에 해당되는 것은 8가지다.

둘은 요점을 정리한 것으로 종요宗要라는 이름을 붙였다. 종宗이란 전체 줄거리를 함축했다는 말이며, 요要는 요점 되는 내용을 자세한 풀이했다는 말이다. 대의大義가 종宗에 해당되고, 글 풀이(釋)가 요要에 해당된다. 전체적인 것과 부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구분하지 않고 그냥 요점이라 한다. 이에 해당되는 것은 5가지이다.

셋은 자기 자신의 글이다. 경론을 인용하여 자기의 견해를 편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것은 8가지이다.

원효는 상대적으로 쉬운(?) 수행단계를 정리한 후에 이론을 정리한 것 같다. 참고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글을 쓴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글 쓴 순서>

능가경소와 능가경종요와 이장의>열반경종요

능가경료간>무량수경종요

일도장>본업경소와 중변분별론소와 이장의

일도장(?)>기신론별기>이장의>기신론소>금강삼매경론


<원효의 남아 있는 저술(21)>

소(8)-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별기, 범망경보살계본사기, 아미타경소, 보살영락본업경소, 중변분별론소, 해심밀경소서, 화엄경소

종요(5)-대혜도경종요, 무량수경종요, 미륵상생경종요, 법화경종요, 열반경종요

자기 글(8)-대승육정참회, 미타증성게, 발심수행장, 십문화쟁론, 보살계본지범요기, 유심안락도, 이장의, 판비량론


지금 원효대사의 글이 일부나마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노력 덕분이 아니다. 이렇게나마 볼 수 것은 일본 사람들 덕분이다.

일본 사람들은 1924년-1929년 사이에 3,053가지(종류) 11,970권, 85책짜리 인쇄본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만들었다. 목판본인 우리의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1,511가지 6,802권, 48책의 약 2배 분량이다. 여기에 원효대사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원효대사의 글을 베낀 연대를 보면 대부분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해당된다. 이는 곧 고려시대나 이조 초기에는 원효대사의 글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다 없어져 지금에 와서는 일본사람이 만든 대장경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일부 인사들은 고조선古朝鮮이나 단군사화檀君史話 그리고 우리의 고유문화, 곧 굿 장승 서낭제 단오제 하는 것을 신화나 미신이라 치부하여 배척한다. 이것들을 보존하고 체계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5백년, 천년 후에는 우리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 또 다시 일본이나 중국의 문헌을 뒤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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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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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悲朗子 | 작성시간 13.05.29 " 그는 복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가장 복 많게 살다 간 것이다. 철저한 학문과 수행을 통해서.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파

  • 답댓글 작성자悲朗子 | 작성시간 13.05.30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적 있는데....
    달마대사가 무제의 질문에
    " 선지식(?)이 바로 옆에 있어도 볼 눈이 없고, 들을 귀가 없다" 고 한 말이
    정말 칼날같이 섬뜩하게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눈이 있으되 볼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들을 줄 모르는 ....
    이렇듯 청련님의 눈과 귀가 열려 있음이 존경스럽니다.
    또한,
    원효스님을 제대로 평가하신 분들이 계시기에 또한 오늘 우리들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나 싶네요.
    지금 현시대에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스님이 계시니 우리들의 기쁨인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파
  • 작성자공공 | 작성시간 13.05.29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 작성자무진 | 작성시간 13.06.23 원효성사의 원본을 일본으로부터 환수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번역이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하면 안되고 원효성사를 사랑하시는 스님.
    작가, 재가자, 다양한,형식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너무 번잡스럽게 책을 만들면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광혜의하루 | 작성시간 16.10.07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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