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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붓다의 생애와 교단의 성립(김재성)

작성자후박나무|작성시간11.03.02|조회수60 목록 댓글 0
붓다의 생애와 불교교단의 성립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김 재성(metta4u@empal.com)
불교방송 불교강좌 자료(2549.10.24 - )

 1. 붓다의 생애 

불교는 역사적인 인물인 석가족의 성자(석가모니)인 고타마 붓다가 창시한 종교이며,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지만, 본 장에서는 초기불교 문헌을 중심으로 붓다의 생애를 살펴본다. 
 본 장의 내용은 고타마 붓다가 될 것이라는 예언[授記]을 받은 전생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2600여년 전에 인도에서 태어나,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에 이루고, 80세를 일기로 완전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고타마 붓다의 생애를 초기경전이나 율장 또는 불전(佛傳) 문헌을 통해서 연대기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고타마 붓다의 생몰 연대에 대한 이견도 분분한 상황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불기(佛紀)는 남방상좌 전통에서 사용하는 연대이다. 남방 상좌불교에서는 서기 1956년을 붓다 입멸 2500년으로 하고 있으며, 서기 2005년도는 불멸(佛滅) 2549년이 된다.
 붓다의 생애 가운데 우리는 전생의 인연이야기에서 깨달음을 이룬 후 초기 몇 년 동안의 활동에 대한 기술과 80세에 완전한 열반에 들기 직전의 3개월간의 기록을 경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기원 5세기 무렵에 정리된 팔리 주석문헌에는 붓다의 일생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연대기적인 서술을 발견할 수 있어 참고 자료가 된다. (DPPN I 788-803)
이와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본 장에서는 붓다의 생애를 수행과 깨달음, 초기 교단의 형성 등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해본다.

1.1. 고타마 붓다의 먼 전생이야기 - 연등불의 예언[授記]

연등불(Dīpaṃkara)이야기는 팔리 경전 가운데 소부(小部)에 속한 ꡔ붓다왐사ꡕ(붓다의 연대기)와 ꡔ차리야피타카ꡕ에 간단하게 등장하며, 붓다의 전생 이야기 모음집인 ꡔ자타카ꡕ 주석서의 앞부분 <먼 인연 이야기>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 대략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타마 붓다께서는 오래 전(4아승지 10만 겁 전) 연등불이 세상에 출현하여 교화하실 때, 수메다(Sumedha)라는 바라문이었다.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재산으로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한 수메다는 모든 재산을 걸인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출가한다. 출가한 후, 히말라야 산 기슭에서 정진한지 7일 만에 마음집중의 여덟 단계(aṭṭhā samāpattī, 색계사선과 무색계사선의 八定)와 다섯 가지 신통력(abhiññā)을 얻게 되었다. 수메다 현자가 연등불을 만나기 전에 여덟 가지 마음집중과 다섯 가지 신통력을 갖추고 있었던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선정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연등불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마을로 오신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신 일은 귀한 인연임을 알고,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이 도울 일을 묻자, 신통력이 있는 수메다 현자에게 물이 고여 있는 길을 맡겼다. 이 때 자신의 신통력으로 길을 고칠 수 있었으나, 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손 수 길을 고치고 있었다. 하지만 길을 다 단장하기 전에 부처님께서 40만명의 제자와 함께 나타나셨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진흙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메다 현자는 머리카락을 풀고 몸을 던져서 부처님께서 지나가시도록 했다. 그 때, 수메다 현자는 연등불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으로서 번뇌를 끊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도 연등불과 같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리라는 원을 세우고 있었다. 연등불은 수메다 현자의 머리 쪽에 서서 그의 원을  살피시더니, '그대는 4 아승지 10만겁 후에 고타마라는 명호의 붓다가 되리라'하고 예언을 한다. 이 예언이 있고 난 후 수메다 현자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려고 결심한 존재인 보살(菩薩, bodhisatta)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수메다 행자는 마음만 먹으면 아라한에 이르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연등불과 같은 깨달음을 얻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리라는 원대한 원(願)을 가지고 있었기에 붓다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통력으로 보살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을 스스로 알아낸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 한 가지는 고타마 붓다의 전생의 존재인 수메다 현자는 연등불께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은 채 붓다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고, 붓다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원력, 이전에 닦았던 선정수행과 신통력을 바탕으로 붓다가 되기 위한 수행인 열 가지 덕목의 완성(10 바라밀 pārami) 즉 베품(dāna 布施), 규범(sīla 持戒), 욕망을 멀리함(nekkhamma 出離), 지혜(paññā 智慧), 노력(viriya 精進), 참음(khanti 忍辱), 진실(sacca 眞實), 굳은 결심(adhiṭṭhāna 決意), 자애(mettā 慈愛), 평온(upekkhā 平穩)을 닦았다는 점이다. 이 후 보살은 카사파 붓다에 이르기까지 24분의 붓다가 세상에 출현할 때 마다 그 붓다들에게 같은 예언을 받는다.   
다시 정리하면 고타마 붓다의 경우에 보살이 되기 전에 닦은 수행은 선정이고 이 선정에 의해서 다섯 가지 신통을 얻었고, 보살이 되고 난 후에는 붓다가 되기 위한 수행으로 10바라밀을 닦았다는 점이 자타카 등의 팔리문헌이 전해주는 고타마 붓다의 전생의 수행 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닦아온 10바라밀 수행은 2600여년 전의 마지막 삶에서 완성되어 최상의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된 것이다. 

 1.2. 탄생과 성장

 2600여년전, 무사(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한 정반(숫도다나)왕은 현재 네팔 국경지역 근처의 카필라성에서 석가(釋迦, Sākiya)족의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고, 정반왕을 아버지로 마하마야 왕비를 어머니로 하여 보살은 탄생한다. 태어나기 직전의 마지막 생은 도솔천(Tusitadeva)의 천인이었다고 한다. 보살이 도솔천에서 하강하였다는 이야기는 숫타니파타와 같은 경전에도 등장한다.(Sn 955) 보살의 탄생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자타카에 상술되어 있다.(Ja I 50-52)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북쪽으로 7걸음을 걷고 난 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agga)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연장자(jeṭṭha)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seṭṭha)이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jāti)이다, 다시 태어남은 없다."(DN I 15)라고 선언하였다. 한역의 ꡔ장아함경ꡕ에는 <천상천하유아위존(天上天下唯,我 爲尊) 요도 중생생노병사(要度衆生生老病死) 대정장 1, 4c)로 되어 있지만,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표현은 설일체유부 문헌(대정장 24, 298a)과 현장삼장의 ꡔ대당서역기ꡕ(대정장 51, 902a)에 보인다.
붓다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아쇼카왕(기원전 3세기경 인도를 통일한 왕)의 석주(石柱)가 19세기 말에 붓다 탄생지인 룸비니에서 발견되었다.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 (hida budhe jāte Sākyamuni)
왕자가 태어난 후, 아시타 선인이 방문하여 왕자는 최고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Sn 693) 부왕인 정반왕은 현자들을 청하여 작명을 부탁하자,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 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며, 왕자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 또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正等覺者)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탄생이후, 출가하기 전까지의 왕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술은 자타카를 제외한 초기경전과 율장에서는 그다지 발견할 수 없다. 때로 붓다가 출가하기 전을 회고하면서 간단하게 말한 곳이 보일 뿐이다. 자타카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어린 시절의 생활의 일면을 살펴보자. 
먼저, 어머니인 마야 왕비는 왕자를 낳고 7일 만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마야 왕비의 동생이자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왕비가 되어 양육된다. 정반왕과 마하파자파티 왕비 사이에는 난다(Nanda)가 태어나며, 후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다. 마하파자파티 왕비는 정반왕 사후에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가 된다.
싯닷타 왕자는 부왕의 배려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왕자 시절을 보낸다. 왕자의 나이 7세 전후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고, 무예도 익혔다. 부왕이 참가하는 농경제에서 왕자는 나무 아래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수식관을 통해서 색계 사선 가운데 첫 번째 선정을 체험한다.(Ja I 58) 이 선정 체험은 후에 고행을 그만두고 난 후에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는 열쇠가 되었다.  
왕자가 16세가 되던 해, 부왕은 건기와 우기 등의 계절에 맞는 궁전을 세 곳에 마련해주었고, (AN I 145-146; Ja I 58) 우리에게 야소다라로 알려진 라훌라의 어머니(DPPN II 741-744)가 될 여인을 왕자비로 맞이하였다. 
왕자는 유복한 젊은 시절을 보내는 가운데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찰하고는 젊음의 도취(yobbana-mada), 건강의 도취(ārogya-mada), 살아있음 도취 (jīvita-mada)를 완전히 버렸다고 회고하고 있다.(AN I 145-146) 왕자로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면서도 출가하게 된 것은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알려져 있는 4가지 충격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피할 수 없는 실존적인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여 두려운 마음(saṃviggahadaya, Ja I 59)을 일으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출가 수행자를 만나서 자신의 길도 출가하여 죽음이 없는 열반의 경지를 얻는 것이라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MN I 163) 자타카에서는 천신들이 왕자가 출가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노인, 병자, 죽은 자 그리고 출가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Ja I 59)
사문유관의 경험을 하고 성에 돌아온 왕자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라훌라가 태어났다. 속박이 태어났다.(Rāhulo jāto, bhandanam jātam, Ja I 60)"고 외쳤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부왕 정반왕이 손자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이름 지었다. ‘라훌라’는  속박과 비슷한 의미이고, 싯닷타 태자에게는 자식에 대한 정은 끊기 어려운 속박이라는 느낌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1.3. 출가와 수행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부터, 삶의 총제적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결심하며, 젊음과 건강 그리고 수명에 대한 도취를 버린 왕자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아내 <야소다라>가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를 낳은 그날 밤(자타카에 의하면 7일 후)에, 아내와 아들, 아버지 그리고 권력과 세속적인 영화가 약속되어 있는 왕좌를 모두 떨쳐버리고 선(善, kusala)을 구하기 위해서 출가를 한다. (DN I 114-115, MN I 163, MN II 151) 선이란 최상의 행복, 안온,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세속적인 가치를 버리고 변하지 않는,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싯닷타 왕자의 출가를 우리는 위대한 버림(mahābhinikkamana, Ja I 62)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과 일체중생을 위해, 늙고 병들고 고통 받고 죽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적인 길을 찾아 나선 것은 지혜와 깊은 자비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완성을 위한 지혜와 남을 돌보기 위한 자비심이라는 두 가지 덕목은 불교의 근원이다.
출가하여 머리를 자르고, 남누한 수행자의 옷을 입은 보살은 카필라성을 떠나 당시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왕사성)으로 향했다. 당시 마가다국왕이었던 빔비사라왕과의 만남이 ꡔ숫타니파타ꡕ <출가>라는 장(Sn 410-424)과 자타카(Ja I 65-66)에 서술되어 있다. 번뇌의 때가 쌓이느 재가생활을 떠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출가 생활에 들어선 후, 보살은 몸과 입으로 짓는 악행을 완전히 버렸다. 즉 자율적인 규범으로서 계(戒)를 완벽하게 실천하였다. 출가는 이처럼 계행을 지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살이 의연하고 산만하지 않고 고결하게 걸식하는 모습을 본 빔비사라왕은 보살이 머무는 산 속으로 찾아가서 군대와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하면서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권한다. 즉 세속의 부와 권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다. 보살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설명한 후, 욕망에는 근심이 따르는 것을 알고, 욕망을 멀리하는 삶을 즐기고 있으며, 최상의 깨달음(paramābhisambodhi)를 얻기 위해 출가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빔비사라왕은 깨달음을 얻으면 먼저 자신의 왕국을 방문해달라고 말한다. 보살은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다.(Ja I 66) 이것이 빔비사라왕과 붓다의 첫 번 째 만남이다. 두 번 째 만남은 깨달음을 이룬 후에 이루어지며, 이 때 왕은 붓다에게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를 기증한다.

1.4. 두 스승
빔비사라왕과 헤어진 보살은 선정수행의 대가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두 현자에게 선정의 경지(samāpatti)을 배워 오래지 않아 각 스승이 도달한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定)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 아니다.”라고 그 경지에 이른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Ja I 66-67, MN No.26, I 160, No.36, I 240, No.85, II, 91, 대정장 1 776bc) 여기서 보살이 실제로 두 현자를 찾아가서 선정을 배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두 현자의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초기경전에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보살이 두 현자의 가르침을 받고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서 “라마에게만 믿음(信), 노력(精進), 마음챙김(念), 마음집중(定), 지혜(慧) - 이상 다섯 가지 덕목은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자질인 오근(五根)을 말한다.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믿음(信), 노력(精進), 마음챙김(念), 마음집중(定), 지혜(慧)가 있다고 회고하였다고 한다.(MN I 160, 237, II 91). 보살은 두 스승이 갖춘 오근을 자신도 갖추고 있으며, 그들이 도달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이 경지는 자신이 얻고자하는 최상의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또 다른 수행법인 고행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두 현자에게서 배운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순수한 정신적인 경지인 사무색계정의 마지막 두 단계에 해당한다. 

1.5. 고행 그리고 깨달음
 더 이상 배워야할 스승이 없는 보살은 근처의 우루벨라라는 고행자들이 모여 사는 숲으로 들어가 6년간의 고행에 들어간다. 자타카에 의하면 부왕이 보낸 5명의 석가족의 청년 콘단냐, 밧디야, 왓파, 마하나마, 앗사지와 함께 고행을 시작했다. 이들 5명의 동료는 후에 붓다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보살의 고행은 철저했다. ‘나는 고행을 철저히 했다.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열심히 했다. 나의 사지는 말라 시들어버린 갈대처럼 되었다'  
 6년간의 전무후무한 고행(MN No.36, I 246-247)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었지만, 고행을 통해 엄청난 정진력을 얻었고. 고행을 할 때 오근(信, 精進, 念, 定, 慧)을 갖추고 있었음을 숫타니파타(Sn 432-435)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자의 고행은 비판하고 있지만(Sn 249), 고행에 가까운 13가지 두타행에 보이는 철저한 수행생활의 전통은 초기불교 교단에서도 중요시 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진의 한 방법으로 고행(tapas)을 행하는 것은 장려되기도 하였다.(Sn 77, 655, Dhp 395, DN II 49)는 점에는 주목해야 한다.   
고행자의 고행을 그만 둔, 어느 의미에서는 고행을 완성한 보살은 수자타라는 여인이 제공한 우유죽을 먹고 몸의 기운을 회복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5인의 고행 동료들은 보살이 타락했다고 비판하면서 떠나간다. 이제 보살은 깨달음을 이루기 직전, 보리수로 불리게 된 핍팔라(pippala)라는 나무 아래 앉아서 마지막 결의를 다진다. "이 몸이 가죽과 힘줄, 뼈만 남고 피와 살은 다 말라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완전한 깨달음(正等覺)을 이루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노라." 
보살은 고행에서 얻은 정진력을 바탕으로 네 가지 선정(ꡔ사차카경ꡕ의 주석서<MN-a II 291>에 의하면, 태자시절에 농경제에서 경험한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인 입출식념 ānāpānasati에 의해서 얻은 초선을 바탕으로 해서 사선(四禪)을 이루었다)을 이루었고, 이 선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전생을 아는 숙명지(宿命智), 다른 중생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사생지(死生智), 그리고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를 체득함에 의해서 모든 번뇌를 끊어버린 누진지(漏盡智)를 얻어 붓다가 되었다.(MN No.36, I 247-249) 
누진지에서 끊어진 번뇌에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欲漏, kāmāsava), 존재에 대한 번뇌(有漏, bhavāsava), 어리석음의 번뇌(無明漏, avijjāsava)가 있다.
『숫타니파타』「大品」의 「정진경」에 의하면 보살이 제거한 번뇌(악마의 군대)는 ①감각적 쾌락, ②불쾌, ③배고픔과 목마름, ④갈망[渴愛], ⑤혼침(昏沈)과 졸음[睡眠], ⑥공포, ⑦회의적 의심[疑], ⑧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것과 고집, ⑨이익, 칭찬, 존경받음, 잘못 얻은 명성, ⑩자신에 대한 칭찬과 타인에 대한 비방이었다.(Sn 436-438) 이 10가지 악마의 군대들은 실제로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딪쳤던 내면의 번뇌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번뇌가 모두 사라지고 지혜가 열리면서 보살은 마침내 번뇌를 모두 소멸시킨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된 것이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깨달음의 과정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대략 10여지 주장이 있으며, 이를 크게 나누면 4가지로 요약된다.
1. 사성제와 12연기와 같은 이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설(Ud 1-3, Vin I 1-7), 2. 사념처에서 팔정도에 이르는 37가지 깨달음의 요소(三十七助道)라는 수행도를 완성했다고 하는 설, 3. 오온, 12처 등과 같은 모든 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설, 4. 사선(四禪)과 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해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설이다. 깨달음의 내용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제시된 이유는  법을 듣는 자의 능력(근기)에 맞게 붓다는 다양하게 설법을 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깨달음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붓다는 하나의 확신에 이른다. 그것은 스스로 발견한 담마(dhamma, 법)이 최고의 권위라고 하는 확신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에 존경하고 의지할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존경하고 의지할 것은 오직 바른 법(正法, saddhamma)뿐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이었다. (SN I 138-140) 이 경전에서 붓다는 법을 발견하였고, 의지하고 존경할 것은 오직 법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법의 내용은 믿음(saddhā, 信), [스스로] 부끄러워함(hiri, 慙)과 [남에게] 두려워함(ottappa, 愧), 가르침을 많이 들음(bāhussuta, 多聞), 노력정진(āraddhaviriya, 努力精進) 마음챙김(sati, 念), 지혜(paññā, 慧)의 7 가지 덕목이다.(MN I 356)

1.6. 최초의 설법
깨달음을 얻은 직 후 7주 동안 붓다는 해탈의 행복(vimuttisukha)을 맛보며 지냈다.(Vin I 1-3, Ja I 80, Ud 1-3) 붓다는 중생들의 근기가 자신이 깨달은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설법을 주저하였지만, 법을 들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중생들도 있다는 범천의 권청으로 설법을 결심하였다. “내가 깨달은 이 법(法, Dhamma)은 심오하여 알아차리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여 그 즐거움에만 탐닉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열반을 이해하기는 어려우리라." (SN I 136, Vin I 4-5, Ja I 85) 범천의 설법 권청을 듣고 나서 세계를 둘러보니,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량한 자질을 가진 사람, 나쁜 자질을 가진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어려운 사람, 현재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위험에 당면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두루 섞여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였다. 이 가운데 법을 펴서 제도할 사람들이 있음을 보시고 설법을 결심하였다.
처음에 법을 설명해줄 대상에 대해 생각하던 붓다는 처음 출가했을 때의 두 스승을 떠올렸으나,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6년간 함께 고행을 한 5인의 수행자들을 최초의 설법의 대상으로 정하였다.(MN I 169-170, Vin I 7). 5인의 수행자는 바라나시(베나레스)의 사슴동산(녹야원)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붓다는 붓다가야에서 약 250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길을 가야만 했다. 가는 도중에 우파카라고 하는 수행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으나 지나쳐버리고 만다. 
녹야원에 도착한 붓다는 5인의 수행자와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가르친다.(MN I 171-173, Vin I 10, Ja I 81-82, 대정장 1 777c) 이 때 두 차례의 법문을 하였으니, 처음 법을 설한 ꡔ초전법륜경ꡕ(SN V 420-424, Vin I 10)과 ꡔ무아상경ꡕ(SN III 66-68, Vin I 13, Ja I 82)이었다. 
첫 번 째 설법에서 붓다는 쾌락과 고행의 중도(中道, majjjimā paṭipadā)인 여덟 갈래의 바른 길(八正道)을 설하고, 괴로움(苦), 괴로움의 발생(苦集), 괴로움의 소멸(苦滅),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를 설하였다. 
첫 번째 법문에서 제시된 중도는 출가자들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생활을 버리고 바른 길을 가는 것이었다. 즉,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일은 저열하고, 천박하며, 세속적이고 성스럽지 못하며, 유익함이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하고, 고통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며 유익함이 없는 고행도 버려야 한다. 여래는 이 두 극단을 피해서 중도를 깨달았으니 이는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가져오며 고요함과 신통지,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끈다. 중도란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支聖道)이다. 정견(正見,  바른 견해) 정사(正思  바른 의도)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행위) 정명(正命,  바른 생활수단)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정정(正定  바른 마음집중)이다. 
이 첫 번째 법문을 듣고 콘단냐는 법의 눈(dhammacakkhu)이 열렸다. 그 때 깨달은 법의 내용을 경전은 간단하게 ‘생겨나는 속성을 지닌 모든 것은 소멸하는 속성을 지닌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 taṃ nirodhadhamman. SN V 423)라고 전하고 있다. 이른바 조건에 의한 발생과 소멸을 말하는 연기의 이법을 체험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법의 눈이 열리는 이 체험에 의해서 콘단냐는 첫 번째 성인의 깨달음인 소타판나(수타원, 예류)가 된다. 나머지 4명의 수행자도 차례로 소타판나가 되었으며, 이어서 붓다는 이들에게 ꡔ무아의 특성에 대한 가르침(無我相經)ꡕ을 가르친다.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의 다섯가지 무더기(五蘊; 色受想行識)는 변하고(無常), 괴로우며(苦),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無我)는 가르침을 듣고 5명의 수행자는 집착이 없고,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여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게 되었다. (SN III 68, Vin I 13-14) 5인의 수행자는 붓다의 최초의 출가 제자가 되었으며, 비로소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를 갖추게 되었다. 

1.7. 야사와 그 친구들의 교화와 전도의 선언 

붓다는 바라나시에 계속 머물면서 5비구에 이어 야사라는 바라문 청년을 가르쳐 아라한이 되게 하였고,(Vin I 15-18, Ja I 82) 이어서 야사의 친구 4명도 붓다의 법을 들고 아라한이 되어 총11명의 아라한이 된다. 다시 야사의 친구 50명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어 세상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있게 되었다.(Vin I 18-20, Ja I 82)
이상 60명의 제자들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붓다는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유익함을 위해서 법을 전하라는 전도의 선언을 한다. (SN I 105-106, Vin I 20-21)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에서 해방 되었다. 그대들도 역시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방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유익과 행복을 위해 편력하라.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같이 가지 말라. 그래서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이 법을, 의미와 표현을 구족한 가르침을 설하라. 청정한 삶, 완전하고 순결한 이 성스런 삶(梵行)을 드러내라. 세상에는 더러움에 의해 눈이 그다지 때 묻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법을 듣지 못하면 [바른 길을 벗어나] 타락하고 말 것이다. [법을 들으면]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로 갈 것이다.’

이 전도선언에서 우리는 붓다가 법을 펼치는 이유와 목표를 알 수 있다. 붓다는 자신의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자신의 행복을 완성한 분이다. 아라한이 된 제자들도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완전히 없애버린 자유인이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조용히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며 지내는 일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자비심을 지니고 때가 덜 묻어 법을 들으면 번뇌에서 벗어나 궁극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이들을 위해 법을 전하는 일이었다. 초기 교단이 급속도로 성장해간 배경에는 이와 같은 적극적인 전도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불을 섬기는 바라문인 가섭 3형제와 사리풋타(사리불)와 목갈라나(목련) 등의 훌륭한 제자들이 승단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2. 초기 교단의 형성 

2.1. 카사파(가섭) 삼형제와 그 제자들의 교화 

바라나시에서 60명의 아라한에게 전도를 선언한 후, 붓다는 출가하여 최초로 방문했던 마가다국으로 간다. 그 도중에 붓다가 고행을 실천했던 우루웰라에서 당시에 유명했던 불을 섬기는 바라문 우루웰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의 삼형제를 신통력으로 교화하여 그들을 따르던 천명의 수행자가 승단으로 들어오게 되었다.(Vin I 24-34, Ja I 82) 카사파 삼형제와의 사건을 율장에서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가섭 삼형제가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붓다는 카사파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들을 교화하였고,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왕사성)으로 향하던 도중에 가야시사(象頭)산에서 설한 「불의 가르침」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Vin I 34-35) 불을 섬기던 바라문들에게 세상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불에 의해서 생노병사 등의 불에 의해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모두 불타고 있다는 불의 비유에 의한 가르침을 설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하게 하였던 것이다. 카사파 삼형제를 위시로 한 천명의 비구들이 승단으로 들어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초기 승단은 마가다국에서의 교단형성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가섭 3형제의 제자들 천명과 함께 붓다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들어와서 빔비사라왕을 만나게 된다. 빔비사라왕의 죽림정사 기증과 후원은 초기 교단의 안정적인 성장에 큰 기반이 되었다.
2.2. 붓다의 두 수제자 -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당시 라자가하에는 유명한 사문 가운데 한 사람인 회의론자 산자야라는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250명의 제자가 있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산자야의 제자였다. (Vin I 39) 사리풋타가 붓다의 최초의 제자인 5비구 가운데 한 명인 아싸지(馬勝) 비구를 만나서 누구를 스승으로 해서 누구의 법을 즐기고 있는가라고 묻자, 다음의 시를 들려주었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여래께서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것들의 소멸에 대해서 말하셨나니, 이것이 대사문의 가르침이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m vādi mahā samano (Vin I 40-41)
如來說因緣生法 亦說因緣滅法 若法所因生 如來說是因 若法所因滅
大沙門亦說此義 此是我師說 (四分律, 대정장 22 798c)

이 시는 붓다의 제자들이 첫 번째 성인의 경지를 체험하여 법의 눈을 얻을 때 이해하는 연기의 진리였다. 이 시를 듣고 사리풋타는 그 자리에서 법의 눈이 맑아져 소타판나가 되었다. 사리풋타는 친우 목갈라나에게 가서 이 시를 알려주자 목갈라나도 법의 눈을 얻게 되었고, 산자야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의 붓다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붓다는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문을 보고 이들이 두 명의 수제자가 될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을 했다. 이렇게 하여 왕사성에 사는 많은 양가의 자제들이 출가하게 되었고, 사리풋타는 법의 장군(Dhammasenapati)인 지혜제일로 목갈라나는 신통제일의 제자가 되었으며, 사리풋타는 붓다를 대신하여 자주 설법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카사파 3형제와 그 제자들 천명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합하면, 1250명이 된다. 이 숫자는 이 후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구 대중의 숫자로 유명하며, 승단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팔리 율장의 「대품」에 기술되어 있는 붓다의 생애는 일단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Vin I 44) 이 후의 붓다의 행적에 대한 연대기적인 기록이 초기경전이나 율장에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붓다의 행적을 알 수 없다. 

2.3. 마하 카사파(대가섭)의 출가
마가다국의 바라문 출신 마하카사파는 부모의 요청으로 결혼은 하였으나, 부인과 함께 정신적인 길을 가기로 약속한 후 헤어진 다음, 마가다와 나란다 사이에서 붓다를 만나게 된다. 붓다를 보자마자 이분이 자신의 스승임을 바로 알고 제자가 된다. 마하 카사파의 출가는 붓다가 마가다국에 머물 때 있었던 일이며(SN II 220, DPPN II 477) 여래의 신체적인 특징인 32상 가운데 7 가지를 갖춘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하카사파는 붓다 입멸 후 초기 승단의 지도자로서 제 1차 결집을 주도했으며 엄격한 수행자(두타행의 대가)로 유명하다.
붓다가 마하카사파가 제공한 가사를 방석 대신 깔고 앉았을 때, 가사가 부드럽다고 하자 그 가사를 붓다에게 드렸고, 대신에 붓다의 남루한 가사를 받았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엄격한 수행을 행하는 두타행의 모범적인 실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2.4. 고향 카필라성의 방문과 석가족의 출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후 마가다국의 왕사성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다는 사실은 멀리 고향의 부왕에게 전해졌다. 부왕은 신하를 보내어 붓다가 고향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한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지 2년 만에 고향 카필라성을 방문한다.(Ja I 88) 고향으로 향하던 길은 출가해서 수행을 하기 위해서 마가다국을 방문하던 길이었다. 붓다는 천천히 많은 비구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을 방문한 붓다는 사키야족의 아만심을 다스리기 위해 신통력을 보였고, 이에 부왕을 비롯한 사키야 족 사람들은 교만심을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외아들 라훌라(최초의 사미), 사촌 동생인 아누룻다(천안제일)와 데바닷타, 이복동생인 난다, 이발사인 우팔리(천민 출신, 율의 대가) 등의 석가족의 젊은이들이 출가한다. 
팔리 불전에 의하면 아난다(아난)는 붓다와 생년 생일이 같다고 한다.(DPPN I 249f) 아난다는 붓다의 가르침인 법의 보호자로 법의 보고(寶庫 Dhammabhandagarika)로 불렸다. 그리고 55세 이후 붓다의 시자가 되어 80세 까지 25년간 늘 가까이서 붓다를 모셨다. 아난다는 따뜻하고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로 비구니 출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비구니로 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아난다는 법의 장군 사리풋타와 함께 초기 승단에서 붓다의 법을 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마하카사파의 주도하에 1차 결집 때  법(경전)을 암송하는 주역을 맡았다. 승단의 규범인 율은 우파리가 암송하였다. 

2.5. 비구니 승단의 탄생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서 여성 전문 수행자의 탄생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당시 여성은 독립적인 사회적 위치가 없이 남성에 예속된 존재였다. 붓다가 깨달은 지 5년이 되던 해에 부왕이 죽자, 붓다의 이모이자 양모인 마자파자파티 왕비는 500명의 남자들이 출가하여 비구가 된 석가족의 500명의 여성들과 함께 출가하여 수행자가 될 것을 간청하였다. 세 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세 번 거절하고서 베살리로 갔다. 여성들은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고서는 붓다를 따라갔고, 여성도 출가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붓다의 말씀을 방패 삼아 아난다의 권유로 비구를 대하는 여덟 가지 규정(八敬法)을 전제로 비구니 승단이 탄생하게 되었다.(Vin II 253f, AN IV 274, DPPN I 797, II 522-523) 한 경전(ꡔ난다카의 가르침ꡕ)에 의하면 이 비구니들은 비구 장로가 순서대로 가르쳤으며, 난다카가 설명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과 7각지에 대한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MN No.146, III 270-276) 깨달음을 얻은 비구니의 심경을 노래한 장로니게(Therigāta)에는 비구니들의 출가와 수행 그리고 깨달음이 표현되어 있다. 

2.6. 초기 교단의 후원자들
붓다의 활동 무대는 북인도의 여러 나라의 중심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출가 수행자들이 도시나 마을 근처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을 교화하는 일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초기 경전에 나오는 전체 지명은 1009개인데 이 가운데 843(84.43%)곳이 다섯 도시이며, 나머지 167(16.57%)곳은 76 곳이라고 한다. 다섯 도시는 사와티(593), 라자가하(140), 카필라성(56), 웨살리(38), 코삼비(15)이다.(Gokhale, 1982. Schopen 2004:396f) 
이처럼 초기 불교 교단은 도시의 발달과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인 도시를 중심으로 불교는 전파되었던 것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붓다는 사와티에서 가장 많은 우안거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록도 실제 경전에 나타나는 지명의 분석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활동무대가 된 주요 도시에는 유력한 재가의 후원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이나 부호들(상인)이었다.     
앞서 붓다와 마가다 국왕 빔비사라왕과의 인연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빔비사라왕을 만난 적이 있었고, 깨달음을 얻은 이듬해에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을 방문해서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 받는다. 이 죽림정사는 초기 교단이 발전하는 터전이 된 곳으로 유명하며, 붓다는 여러 차례의 우안거를 이곳에서 보낸다. 부왕인 빔비사라왕을 유폐시키고 왕위에 오른 아자타삿투왕도 붓다에게 귀의하여 불교 교단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초기 교단 발전의 결정적인 기반이 된 곳은 붓다 시대 상업의 중심지였던 코살라국의 사와티의 수닷타 장자의 기원정사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지 3년이 되던 해, 유명한 재가 후원자 수닷타 장자가 붓다께 귀의하였다. 이 사람은  <아나타핀디카> 즉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돌봐 주는 분'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코살라국의 사와티(舍衛城) 사람인 그는 마가다국의 라자가하에 왔다가 붓다가 출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법문을 들었다. 삼보에 깊은 신심을 내게 된,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소타판나의 경지를 성취했다. 그 후 그는 붓다의 주요 후원자로, 오늘날 사헤트-마헤트로 불리는 사왓티에 유명한 제타바나 사원(祇園精舍)을 지어 붓다와 제자들에게 기증했다.(Vin II 154, Ja I 92) 기원정사는 붓다가 가장 많은 우안거를 보냈던 곳이며, 가장 많은 설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외 사와티의 동문에 동원 녹자모 강당(여성신자  위사카 기증) 등이 설립되었다. 
코살라의 국왕인 파세나디왕도 붓다와 친분이 두터웠다. 붓다는 과식 때문에 고생을 하던 파세나디왕에게 음식을 먹을 때 마음챙김을 지니고 그 양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기고 하였다. ‘항상 마음챙김(sati)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양을 안다.’ (manujassa sadā satīmato, mattam jānato laddha-bhojane. SN I 81)
이외에도 말라국의 파와에 사는 금세공인 춘다도 초기 교단의 후원자로 등장한다. 이처럼 붓다의 교화를 받은 왕이나 부호들의 후원으로 초기교단은 북인도의 5대 도시를 중심으로 확고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2.7. 서방지역으로의 전도와 교화 
붓다의 활동 무대는 서방지역으로 이어졌다. 특히 쿠루국(현재의 델리 부근)의 캄마사담마와 왐사국의 코삼비가 주요 활동 도시였다. 쿠루국의 캄마사담마에서 설한 경전의 내용은 12연기, 사념처, 대공법(大空法), 육육법(六六法: 六根, 六境, 六識, 六觸, 六受, 六想) 등의 철학적이며 실천적인 법을 설하였다. 
 붓다 시대의 4대 강국의 하나인 우대나왕의 왐사(Vamsa)국의 코삼비에서 성도 후 9년 째 우안거를 고시타 장자가 기증한 정사에서 지낸다. 붓다는 고시타 정사를 중심으로 하여 교단의 계율에 관계된 법을 많이 설하였다. 목갈라나와 함께 신통력으로 유명한 아라한 핀도라 바라드바자는 코삼비 출신(DPPN II 202)으로 선정과 신통력으로 코삼비에서 교화활동을 하였다.
 서남 해안지방의 아반티국은 이곳 출신의 제자인 카차야나와 푼나가 교화를 하였다. 
 푼나(부루나)의 교화 활동은 인욕과 희생정신으로 적극적인 교화를 한 모범적인 예가 되었다. (MN No.145, III 267f))
  
2.8. 성도 이후 붓다의 활동지 
 45년이라는 긴 교화기간 동안, 붓다는 인도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셨다. 하지만 우기(雨期)의 안거 때에는 한 곳에 머무셨다. 다음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우안거를 보낸 지역들을 경전과 주석문헌에서 간추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DPPN I 791-799 참조)
첫해 : 바라나시- 7월 보름에 초전법륜을 설하고 첫 우기를 녹야원(이시파타나)에서 보내면서 야사와 그 친구들을 교화하였다. 
2,3,4년째 :라자가하(王舍城)의 벨루바나(竹林精舍)에서 지낸다. 유명한 수닷타 장자가 귀의한 것은 3년째 되던 해이다. 
5년째 : 웨살리(vesāli )-붓다는 중각강당(重閣講堂)에서 지내셨다. 부왕이 이 해에 병이 들었다. 붓다는 부왕(父王)을 찾아가 법을 설해 드렸다. 법문을 들은 왕은 아라한과를 얻었고, 일주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린 후 입적했다. 부왕의 사후 왕비 마하파자파티를 중심으로 하여 비구니 승단이 탄생했다.
6년째 : 만쿨라 언덕 - 여기에서 붓다는  친족인 석가족의 아만심을 꺽기 위해서 카필라바투에서 쌍신변(雙身變)이라는 신통력을 보여주었다.
7년째 : 이 해의 우안거 3개월 동안 붓다는 욕계 천상인 삼십삼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 왕비를 필두로 한 천신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8년째 : 베사칼라 숲 
9년째 : 코삼비의 고시타 정사
10년째 : 파릴레이야카 숲 - 코삼비에서 한 비구가 저지른 사소한 잘못을 놓고 비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 해의 일이었다. 그들은 붓다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으므로 붓다께서는 이 숲으로 물러나셨다. 안거가 끝날 무렵 분쟁은 해결되어 비구들은 사왓티로 와서 붓다께 용서를 빌었다.
12년째 : 베란자(Verañjā )마을-붓다께서 율(律)을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13년째 : 찰리야 바위산(찰리카 시 부근) - 메기야 장로가 붓다의 시자였다
14년째 : 사왓티의 기원정사 -이 때, 사미였던 외아들 라훌라 존자가 20세가 되어 비구계를 받았고, 아라한이 되었다. 
15년째 : 카필라성. <야소다라>비의 아버지 <숟파붇다>왕이 죽음.
16년째 : 알라비 시(市)- 이 해에 붓다는 사람 잡아먹기를 즐기는 야차 <알라바카>를 교화하였다. <알라바카>와의 문답은 ꡔ숫타니파타ꡕ의 알라바카경에 자세히 나온다.
17년째 : 라자가하의 죽림정사
18년째 : 찰리야 바위산
19년째 : 찰리야 바위산
20년째 : 라자가하-죽림 정사
21년부터 43년 : 사왓티. 이 스물 네 번의 우안거 중 열여덟 안거는 기원정사에서, 나머지 안거는 동원정사(東園精舍 鹿子母講堂)에서 지내셨다. 이 기간 동안은 <아나타핀디카>와 <비사카>가 주된 후원자였다.
44년째 : 벨루바 마을(베살리 근처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추정됨). 이곳에서 붓다는 크게 앓으셨으나 의지력과 선정력으로 이겨냈다.
45년째 : 붓다는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5월 보름에 쿠시나라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2.9. 초기승단의 분열 - 데바닷타의 문제
붓다의 교화활동의 말년(입멸 8년 전)에 데바닷타가 야욕을 드러냈다. 마가다국의 왕자 아자타사투와 음모하여 아버지 빔비사라왕의 왕위를 빼앗게 하고 자신은 승단의 지도자로 나서려고 하였으나 붓다에 의해서 거절당한다. (Vin II 188, DPPN I 1106f) 붓다는 수제자인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도 공식적인 후계자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이 가르친 법과 율을 입멸 후에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데바닷타는 5 가지 사항을 제안하였으며(Vin III 171), 이는 일종의 고행주의적 입장이었다. (1)비구는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만 지낸다.(2) 탁발만으로 생활한다, (3) 분소의만을 입는다. (4) 나무 아래에서 머물고 집안에서 머물지 않는다. (5) 물고기나 육식을 하지 않는다. 데바닷타의 제안은 거절되었으며,  왓지족 출신의 비구 500명이 데바닷타를 따라서 붓다의 승단을 떠났다고 한다.(DPPN I 1109)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붓다의 승단이 처음 분열한 사건이 된다. 데바닷타는 붓다를 시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데바닷타를 따르던  아자타사투왕도 붓다에게 귀의하게 된다. 

2.10.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붓다의 입멸 전후의 마지막 3개월을 기록한 ꡔ대반열반경ꡕ(DN No.16, II 72-168)을 통해서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과 교단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붓다 입멸 후에는 법과 율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과 법(경전에서는 사념처를 말하고 있다)을 의지처로 하라고 가르쳤다.(DN II 100f)
"아난다여! 그대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스승의 말씀은 끝났다. 우리는 이제 스승 없이 지내야 한다.' 그러나 아난다여!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입적한 후에는 내가 설한 법과 내가 정한 율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도록 하라."(DN II 154)
이와 같이 말씀하신 후, 승단을 향해 의혹이나 의문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질문하는 제자가 없자 마지막 유훈을 말씀하셨다. 

"그럼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지금 너희들에게 이르노라. 모든 형성된 것은 소멸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諸行壞法) 게으르지(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Vayadhammā sam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
이것이 붓다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붓다는 초선에서 시작하여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상수멸정(想受滅定)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상수멸정에서 나와서 무색계정을 거쳐 색계 제 4선, 3선, 2선 초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2선, 3선, 4선에 들었다가 나온 직후에 입멸하였다. 마지막 입멸 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붓다가 가르친 수행법으로 선정의 중요성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이외에는 없는 상수멸정을 다시 경험한 내용과 색계 제 4선이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 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2.11. 붓다의 45년 동안의 핵심적인 가르침 :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이루신 후 45년 동안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 핵심적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한때 세존께서는 코삼비(알라하바드 근처)의 신사파 나무숲에서 머무셨다. 붓다께서는 손에 신사파 나뭇잎들을 주워 들고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에 있는 신사파 잎사귀와  숲에 있는 잎들과 어느 쪽이 더 많은가 라고 물으신 후, 나무에 있는 잎이 많다고 답하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비구들이여, 내가 완전히 깨닫고서도 너희들에게 설하지 않은 것은 많다. 내가 너희들에게 설한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비구들이여! 왜 내가 그 모두를 설하지 않는가. 그것들은 유익하지도 않고 청정한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 열반으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그것들을 설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시면서 유익하고 청정한 삶에 반드시 필요한 사성제라고 하신다. (SN V 437-438)
붓다는 역설하신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전에도 지금도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친다.” 
ahaṃ bhikkhave etarahi ca dukkhañ 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ṃ (MN No.22, I 140) 
  
2.12. 붓다의 생애가 보여주는 교훈
29세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행을 실천하기 시작하였고, 두 스승에게서 선정 수행을 배웠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고행을 6년 동안 해내며 정진의 힘을 길렀던 보살이 사선(四禪)을 바탕으로 한 지혜의 힘에 의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뿌리를 제거하여 아라한이 되는 순간, 붓다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었다. 
붓다의 제자들은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이라는 최고의 성자를 목표로 해서 수행을 했으며, 최초의 제자들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었다.’ ‘7명의 아라한이 있었다.’고 율장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라한이 붓다와 같이 번뇌를 소멸하였다고 해서 붓다 혹은 여래가 된 것은 아니었다. 붓다는 자신이 닦아온 수 많은 삶 속에서의 보살행이 완성되면서 사성제를 깨달아 스스로 아라한이 되었다면,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서 사성제를 깨달아 번뇌를 소멸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으며, 신사파 숲에서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듯이 붓다는 가르친 것보다 많은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제자들에게는 핵심적으로 괴로움의 소멸을 목적으로 한 가르침만을 제시했음도 알 수 있다. 
붓다는 여러 경전에서 보이듯이 다양한 제자들의 능력에 따라서 각 제자에게 가장 효과적인 가르침을 제시했다. 하지만, 가르침을 받아 아라한의 깨달음에 도달한 제자들은 각자가 이해하고 실천한 길을 그들의 제자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붓다 당시에도 제자들은 각자 지도하는 그룹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경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MN  No.32 마하고싱가경, I 212-219)  
 붓다는 천신들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자비심에 의해서 45년 동안 교화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붓다의 제자들도 전도선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교화활동에 전념하였다. 붓다의 구도에서 깨달음 그리고 교화활동의 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계정혜(戒定慧)와 해탈 그리고 자비심의 이타행의 실천은 바로 붓다가 가르친 수행과 회향(回向)의 길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자신을 위한 수행(自利行)으로서 계정혜를 닦았으며, 타인을 위한 실천행(利他行)으로 자비를 실천한 것이었다. 
붓다의 삶과 가르침은 붓다 입멸 후에 제자들의 노력으로 가르침의 결집이라는 형태로 정리되었다. 마하 카사파의 주도로 붓다 열반 3개월 후에 마가다국왕 아자타삿투의 후원으로 라자가하에서 이루어진 1차 결집에서  법(아난다)과 율(우팔리)을 함께 외워(合誦) 그 가르침을 전하였고, 이 후 약 200년 후 아쇼카 왕 때까지 초기 승단의  전통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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