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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스크랩]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열린선원 무상법현스님 3월 설법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5.05.18|조회수41 목록 댓글 0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열린선원 무상법현스님 3월 설법

드디어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은 지나가고
복수초 매화꽃봉오리들이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들이더니
얼음장 밑으로도 물길이 흘러흘러 봄 냄새가 메아리치기 시작합니다.
매서운 추위를 맛보지 않고는 매화가 향기를 내기 않는다는
옛 조사스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머리를 깎은 수행자라면 당연히 매화처럼 진한
깨달음의 향을 머금고 세상에 내면서 살아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법문의 주제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입니다.

앞에서 두 번에 걸쳐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해서 공부를 했고
이어서 삼보의 마지막이며 현재형인 스님(들)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경전의 말씀을 읊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삼보 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가까이서 현재형으로 만날 수 있는 스님에 관해서도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엮은 『상윳따니까야』의 1권에 실린
「깃발경(다작가숫따)」에 담겨있는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상윳따니까야』는 부처님 당시의 구어(口語)인 빠알리어로 된 경전묶음 가운데
주제별로 묶은 가르침 또는 가르침의 제목과 내용이
서로 상응하는 것들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스님들은 단수로서의 한 분의 스님도 가능하지만
대개는 복수의 스님들로서 승단(僧團)을 뜻합니다.
인도말로는 sangha이고 중국어로 음역한 것이 승가(僧家)이며,
우리말로 옮긴 것이 스님들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깃발경(다작가숫따)」의 말씀에 의하면

“진지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

정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

올바르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

여법하게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세상의 창조자를 긍정하는 종교인들인
브라흐만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人間)의 주체적 능력을 긍정하면서
수행을 통해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관심이 있는 종교가들을
인도에서 사문(沙門 samanna)라고 했습니다.
사문이라고 불리는 대표적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가운데 일곱 사람이 제일 유명했습니다.
뿌란나깟사빠(Pūranna Kassapa), 마칼리고살라(Makkhali Gosala),
산자야벨라티뿟따(Sanjaya Belathiputta),
아지따께삼발린(Ajita Kesambalin), 빠꾸다깟짜야나(Pakudha Kaccāyana),
니간타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가 그들입니다.
일곱사람이 모두 나오지만 그 가운데 산자야와 니간타가 경전에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 부처님도 그들 사문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깨달음을 얻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어
사문하면 ‘붓다와 그 제자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붓다(Buddha)'라고 하고
깨달아서 ’세상에 가장 존귀한 분‘이어서 ’세존(世尊)‘이라고 불립니다.

수행가들 가운데 정말 진지하게 수행하는 제자들이 바로 스님들이라는 말입니다.
진지하게 수행하되 그 과정과 결과가 분명하게 참 행복인
닙빠나(열반)에 이르게 하는 정확한 수행을 하는 이들이 스님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행은 오로지 열반만을 향하여,
반드시 열반에 이르게 하는 수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올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진리에 맞는, 진리로 이끄는 수행만을 합니다.
여법하게 수행하는 제자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냥 ‘스님’이라고 했지만
‘진지하고 정확하며 올바르고 여법하게 수행하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수행하는 이들이 수행의 과정에서
일정한 수준 이상의 결과를 얻은 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 자세하게 경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귀의해야할 대상인 스님들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역시 「깃발경(다작가숫따)」의 말씀을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분들 네 쌍의 대장부요,

여덟 무리의 성자들,

이분들이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들(상가)이니,

공양 올릴 가치 있는 분들,

환영할 가치 있는 분들,

시주 올릴 가치 있는 분들,

합장 공경할 가치 있는 분들이며,

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복을 심는 대상입니다.“

앞에서 부처님과 가르침에 관해서 공부할 때
이미 말씀드린 것이지만 깃발경의 내용은 정말로 의지해서
두려움이나 공포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제대로 의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를 의지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나타내는 뜻을 이해하면
깨달음을 얻은 붓다와 깨달음을 얻게 하는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하고 얻어가며 얻은 스님들을 의지하면
두려움도 공포도 사라지고 평안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세 번째 내용에 들어있는 것이 바로 지금 읽은 경전의 내용입니다.
스님들은 바로 네 쌍의 대장부요, 여덟 무리의 성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한자어로 4쌍8배라고 합니다.
4쌍4배라고 하면 12명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8명이거나 4명이라고 이해하면 쉽니다.

물론, 사람 숫자의 8명이나 4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도 특유의 중첩적 표현이 들어있는 단어이지요.
공양, 환영, 시주, 공경할 만한 그런 위치, 그런 인격,
그런 과위를 얻으신 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수다원(향=도,과),사다함(향=도,과),아나함(향=도,과),아라한(향=도,과)의 넷입니다.
향(向) 또는 도(道)라고 옮기는 magga 와 과(果)라고 옮기는 phala를 붙여서
네 과정의 수행을 하고 있는 분들과
네 과정의 수행 결과를 얻은 분들이라는 뜻이지요.
하나에 둘 씩이 있으므로 4쌍이며,결국 여덟이므로 8배가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분들은 한 번 이런 위치에 들어가게 되면
꼭 지향하는 결과를 이루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수다원도에 들면 수다원과를 얻고, 아라한도에 들면 아라한과에 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의 마음(道心)을 내면 과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화엄경(華嚴經)』「범행품(梵行品)」의 말씀입니다.
대개 ‘첫 마음을 낼 때 문득 정각(바른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바로 ‘도의 마음(道心)’이라는 것을 잊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입니다.
화엄경은 대승의 경전이지만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이어받되
더욱 발전시키려고 노력한 경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해설할 때도 그 정신을 이해하고 해야 합니다.
대승경전이므로 보살(菩薩)의 마음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보살은 붓다, 부처님의 전생 수행자로서 치열한 구도열로
스스로도 구도에 힘쓰지만 다른 존재들도 구도에 힘쓰게 하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기울여 자비심을 베풉니다.
그러기에 보살의 마음, 구도의 마음, 도의 마음을 내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고 이미 보살의 마음, 도의 마음이라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과를 이루게 된다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튼 4쌍 8배의 성자이신 스님들은 다음과 같은 분들입니다.

수다원((須陀洹)원은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豫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갑니다.

사다함(斯陀含)은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엷어져서 한 번 만 더 돌아올 자[一來者]가 되어,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의 끝을 만듭니다.

아나함(阿那含)은 다섯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고[不還者]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듭니다.

아라한(阿羅漢)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분들입니다.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무르는 분들이지요.

이런 내용들은 『앙굿따라니까야』의「사문 경」(A4:239),
「족쇄경」(A4:88) 뿐만 아니라 여러 경전에 나옵니다.

스님들은 바로
수다원도에 드시고 과를 얻으신,
사다함 도에 드시고 과를 얻으신,
아나함 도에 드시고 과를 얻으신,
아라한 도에 드시고 과를 얻으신
분들을 말한다는 것이 경전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삼귀의에 ‘거룩한 스님들’이라 한 것입니다.
‘그냥 스님들이 아니라 거룩한 스님들’이라는 것이
본디의 뜻입니다만 모두들 붓다를 지향하고 깨달음을 지향하면
반드시 ‘이미 거룩한 스님이거나 지금 거룩한 스님이거나
앞으로 거룩한 스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스님들을 대할 때 그렇게 생각해 주시고
우리 스님들은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가니까야』의 「대반열반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 맞이하신 제자인
수밧다(Subhadda)에게 스님이 반드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간곡하고도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다.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8정도를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님 또는 비구에 관한 개념 가운데
조금 새로운 것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보통 ‘비구’하면 소유를하지 않아‘얻어먹는 이(乞士)’라고 풀이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는 서구적 개념으로 잘못 이해한 결과라는 주장이 있는 것입니다.
출가수행자를 뜻하는 비구의 빠알리어는 ‘빅쿠(bhikkhu)’입니다.
빅쿠는 biks를 뿌리로 하여 파생된 명사로서
두려움을 뜻하는 ‘바야(bhaya)’와
본다는 의미를 가진 ‘익쿠(ikkhu)’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청정도론에
"Saṃsāre bhayaṃ ikkhati ti bikkhu(삼사-레 바얌 익카띠 띠 빅쿠)"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비구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 깊이 들여다보면 ‘윤회를 두려워하고’,
‘윤회를 싫어해서’ 열심히 수행하는 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바로
‘윤회를 두려워 하고 싫어해서
8정도를 수행하여 3~5가지 낮고 높은 단계의 족쇄를 제거하고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길을 가서 과위(果位)를 성취하였거나
하거나 할 성자들’이 곧 ‘스님들’,‘거룩한 스님들’에 담긴 뜻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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