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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승가의 범위, 어디까지인가 -전재성,각묵,이종철,비구보디,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5.05.21|조회수90 목록 댓글 1

아래는 전재성님과 각묵스님의 글인데 전재성님은 승가에 재가자 포함되고 각묵스님은 승가에 재가자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저는 전재성님의 입장에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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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과 승가, 승원 그리고 진리의 수호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전재성(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1. 초기불교에서의 승가 

  
초기불교에서 교단을 의미하는 승가(僧伽; Samgha)에 관하여 비구승가(比丘僧伽; Bhikkhusamgha), 비구니승가(比丘尼僧伽; Bhikkhunisamgha), 사방승가(四方僧伽; Cattu- disasamgha), 현전승가(現前僧伽; Sammukhisamgha), 승보(僧寶; Samgharatana), 성문승가(聲聞僧伽; Savakasamgha)등의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재가신자인 우바새(優婆塞; Upasika), 우바이(優婆夷; Upasika)의 승가란 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더구나 승가안에 재가신도가 포함되는 것이 옳은지 포함되지 않는 것이 옳은 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사방승가는 시간적으로 삼세에 걸쳐 확대되고 공간적으로는 우주적으로 확대되는 보편적 승가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 사방승가 안에는 재가신도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방승가도 재가신도에 관한 언급이 없이 비구, 비구니 승가의 확장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현전승가는 시간, 공간적으로 제한된 사방승가의 지역승가로서의 생활공동체이다. 이 현전승가 역시 비구 또는 비구니 승가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재가신자인 우바새나 우바이가 없이는 사방승가와 현전승가의 이념이 성립할 수 없음을 경전은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출가자는 생활의 물자를 얻기위해 노동할 수 없음으로, 우바새와 우바이로부터 생활필수품인 의식주를 위한 생필품와 의약품(四資具)을 공급받아야 생활공동체로서의 현전승가가 유지되며, 우바새와 우바이로부터 승가람(僧伽藍), 승가람물(僧伽藍物), (), 방물(房物)등을 기증받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지시켜야 부처님을 상수로하는 승가즉 사방승가가 성립할 수 있다.


  
한편 보라고 하는 것은 불교도의 귀의처로 삼귀의 라고 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가운데 하나가 된다. 초기불교의 경전에서는 그 구체적인 범주가 언급되어 있지가 않다. 그러나 구사론(俱舍論)이나 대지도론(大智道論)에서는 그 범주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승보에는 비구비구니 승가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흐름에 들기 시작한 예류향(預流向)에서부터 열반에 도달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의 네쌍으로 여덟이되는 사쌍팔배(四雙八輩)의 성자승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승보의 개념은 초기경전인 쌍윳따니까야에서 규정하는 성문승가의 이념과 일치한다; “세존의 성문승가는 훌륭한 실행자이며, 진실의 실행자이며, 화합의 실행자이니 곧 사상팔배를 지칭한다.(SN. II. 66)” 승가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와 같이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제어하고 고귀한 지위에 든 여덟 종류의 참사람들의 모임을 승가라고 할 수 있다. 그 여덟 가지 종류의 참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성스러운 진리의 흐름으로 가는 사람(預流向)과 진리의 흐름에 든 사람(預流果), 천상에 가서 열반에 들기 위해 다시 한번 욕계로 돌아오는 지위를 향하는 사람(一來向)과 그 지위를 얻은 사람(一來果) 천상에 가서 해탈하여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 지위를 향하는 사람(不還向)과 그 지위를 얻은 사람(不還果),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생에서 열반을 얻는 지위로 향하는 사람(阿羅漢向)과 그 지위를 얻은 사람(阿羅漢果)의 네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들(四雙八輩)를 말한다.


  
그러나 용수가 규정하는 승보의 개념과 이 쌍윳다니까야에서 부처님이 규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붓다는 결코 성문승가가 비구비구니 승가로 한정한다고 규정하지 않았으며, 글자 그대로 성문승가 즉 제자승가로서 정의했다는 사실이다. 제자승가라고 한다면 우바새와 우바이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가 시사하는 것은 진리의 흐름에 들지 못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는 성문승가나 승보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누가 참사람 또는 성자승인가를 가려내고 인정할 것인가는 난해한 문제에 속한다. 그래서 살다다비니비바사(薩婆多毘尼毘婆娑; 大正23. 506)에서는 귀의의 대상인 승보에 관하여 진속이제(眞俗二諦)의 구분을 하고 있다. 즉 제일의제승은 사쌍팔배를 의미하고 속제승은 사쌍팔배만이 아니라 범부승을 포함한다. 제일의제승이 의존하는 바는 속제승이므로 범부승에게도 존경을 표하고 귀의의 대상이 될수 있다고 논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밑바탕에는 재가신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엿볼수 있다.


  
승가라는 이념이 불교공동체라는 가장 포괄적인 측면으로 분명히 등장하는 것은 아쇼카왕의 사르나트 칙령(Sarnat 勅令)에서 이다. 이 칙령에는 타종교와 구분되는 불교승가로서의 승가 즉 모든 불교도의 공동체라는 말이 분명히 등장한다.

2.
사부대중이란 무엇인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이란 용어는 그렇다면 승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부대중은 분명히 초기불교에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 사부대중이란 말이 곧바로 사부승가란 용어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왜냐하면 모든 초기경전에서 사부대중의 중(; parisā)에 관해서는 승가란 말을 쓰지 않았다. 중이란 말은 단지 어원적으로 둘어 앉는 모임이나 집회를 뜻했다. 초기경전인 디가니까야에서는 사문 고따마는 사부대중에게 공양받으며, 존경받으며, 공경받으며, 숭배받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부대중의 중(: Parisā)과 비구와 비구니 양중(兩衆)의 중(: Samgha)이 혼동된 것은 한역경전에서 양자를 동일한 중으로 번역한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다면 교단을 의미하는 승가의 중과 사부대중을 의미하는 중과는 사용용어의 어원적 의미처럼 엄밀하게 구분되는가? 그렇지 않다. 붓다는 맛지마니까야의 아쌀라야나경에서 성직자만이 이 나라에서 원한을 품지않고 화내지 않고 자비스런 마음을 지닐 수 있는데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가?”라고 반문하면서 성직자만이 최상의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저열하다. 성직자들이야말로 밝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어둡다. 성직자들이야말로 청정하고 다른 계급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척파했는데 물론 그 논의는 바라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한 것이긴하지만 이 논리는 불교의 출가승단이 성직자로서의 특권의식을 가질 경우에 동일한 비판의 화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직자와 재가자의 본원적인 평등을 엿 볼 수 있다.


  
비록 사부승가(四部僧伽)라는 말은 없지만 초기경전인 앙굿따라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수행승이여, 사자(四者)는 총명하고, 수행했고, 숙달했으며, 법을 지키고 법을 여법하게 실천하며, 승가를 장식한다. 그 사자는 누구인가? 그 사자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이다.(AN. II. 8)” "승가를 장식한다(samgham sobheti)"는 말은 승가를 빛내게하고 구성한다는 듯으로 사부대중의 구성원들이 승가를 성립시킨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 가지의 말을 종합해보면, 승가는 제일의제로 보면 승속을 초월한 사쌍팔배의 성자승을 의미하지만 속제적으로 보면 협의의 의미로는 지속적인 수행공동체인 비구와 비구니 승가를 의미하지만 광의로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신앙공동체임을 증명한다.      
                
3.
승가와 다르마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parinibbanasutta DN. II. 100)에서는 붓다는 승가를 조성하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며, 승가가 자신에게 의존한다던가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붓다는 모든 다르마()는 안팎이 없이 여래에 의해서 설해졌으므로 특정한 승가에 귀의하기보다는 여래의 가르침인 다르마에 의존할 것을 유훈으로 남긴 바가 있다. 여래의 가르침인 다르마는 곧 진리를 뜻한다. 다르마를 통해 연기의 이법을 깨달음으로서 우리는 열반을 성취한다. 모든 현상, 사물, 존재, 세계, 정신적인 개념들은 모두 연기적인 특성을 지녔으므로 상호의존적으로 끝임없이 변화(無常)하고 불안정()하고 항상 열려져(無我)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홀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연기라는 중중무진한 상호의존관계속의 깨달음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  


  
깨달음은 설사 돈오일지라도 홀로 갑자기 깨닫는 것이 아니다. 돈오의 돈()의 어원은 yugapad는 원래 두 마리의 소가 끄는 멍에를 의미하며, 그 개념이 발전해서 동시에또는 갑자기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돈오는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의 법칙과 더불러 동시에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깨달음은 결코 연기법을 떠나서 결코 생명이나 인간관계를 떠나 비사회적인 독존 속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하빠자빠디 고따미(Mahapajapati Gotami)의 비유경(Apadana)을 비롯한 몇몇 경전에 등장하는 최상의 열반의 도시(nibbana- purattamam)"란 말은 궁극적인 깨달음인 열반에 대한 사회적이고 더 나아가서는 시민사회적인 특성을 잘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붓다 당시에 승려들의 처소인 가람은 비유적으로 환희의 도시(puro rammo)라고 불리웠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비유적이긴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의 공동체적이고 시민사회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교단을 뜻하는 승가라는 말도 어원자체는 붓다 당시의 도시국가의 시민대표자들이 의회에 모여 공공의 관심사를 토의하는 회의를 뜻했다. 대반열반경에서는 당시의 밧지( Vajji)라고하는 국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대표자들은 자주 모여 상가(Samgha)을 개최하고 토론하고 화합으로 국사를 처리했으며, 불화가 생기면 그 쟁점을 다시 토의에 붙여 투표하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그들은 관습법을 무시하지 않고 어른을 존경했으며, 여성과 이방인을 보호하고 영묘를 존중했으며, 성자들을 공경했으므로 붓다는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했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을 따르는 모임에도 상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불교의 교단운영은 율장에 상세히 명시되어 있는데 도시국가의 민주적인 시민사회의 운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한 시민사회적 모임을 뜻하는 승가라는 말은 초기불교에 수용되어 여러 유형으로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불교의 흥기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부처님 당시에는 농경사회의 틀을 벗어나 무역과 상공업이 부흥하면서 도시국가적인 시민사회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시대였고, 대도시 중심으로 화폐경제가 발달하여 모든 분야에서 보다 긴밀한 상호의존적인 연기관계가 증폭되었던 시대였다. 따라서 여실지견에 의한 올바른 상호 의존관계는 시대적인 명제로 부상하고 있었고 붓다의 연기법은 이러한 본질을 꿰뚫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승가는 곧 시민사회적으로 다시말해서 민주적으로 상호의존관계를 실현하는 불교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공동체는 초기불교에서 진리의 도시(dhammanagara)", "열반의 도시(nibbanapuro)", "환희의 도시(puro rammo)"등으로 불리운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다. 불교공동체는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시민 사회의 핵으로서의 공동체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승단을 비구나 비구니의 승가로 한정시키려 했던 것은 자주 모여 많은 회합을 가질 수 있었던 그러한 승가에 편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에 불과했다. 더구나 역사적인 불전결집이 비구승단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공동체로서의 현전승가나 이념적 공동체로서의 사방승가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사부대중은 모두 승가를 장엄하는 상보적인 구성원으로 자주모여 회합을 갖는 공동체로 성장해갔다고 볼 수 있다.

5.
초기불교에서 승가와 승원의 성립

  
초기교단에서는 승원은 필수적이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제자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승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차츰 수행승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우기에 수행승들이 함께 모여 수행하는 일시적인 정주지로서 주처인 Avasa와 승원인 Arama의 두가지 형태가 생겨났다. 거기에는 수행승의 거주를 위한 작은 집이 Cullavagga에는 提婆의 五事로서

 

[비구들은 1) 숲 속의 거주자로서 마을에 들어가면 죄가 될 수 있다. 2) 걸식자로서 청식을 하면 죄가 될 수 있다. 3) 분소의를 입는 자로서 거사의 옷을 받으면 죄가 될 수 있다. 4) 나무 아래 사는 자로서 옥내에 거주하면 죄가 될 수 있다. 5)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않는 자로서 물고기와 고기를 먹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초기의 유행자들의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비구생활의 승원화에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초기불교에서 vihara는 비구들이 명상하는 주거, 삼림에서의 주거, 일시적인 숙박소로서의 의미이외에는 지니고 있지 않았다.]      


있었으며 Vihara는 원래는 이러한 가건물에 부여된 명칭이었다. 그래서 일인 또는 소그룹의 비구가 거주했으며 각 비구의 방은 Parivena라고 불렸다. MahavaggaVI. 23. I
또한 비구에게 허용된 물건을 공동으로 보관하는 용방(kappiyakuti)이 있었다. Cullavagga VI. 4-9.
  
  
대품의 安居犍度에는 Avasa의 경계결정, 구조, 단체생활을 위한 규칙을 취급하고 있는데 소위 주처 즉 Avasa는 주거를 의미한다. 초기단계에는 단순한 비를 피하기 위한 피난처에 불과했다. 안거건도에 따르면, 우안거로 허용된 장소는 외양간이나 캐러반(隊商)의 막사같은 곳이고 금지된 장소로는 나무 밑의 동굴, 나무가지, 노지, 와죄구가 없는 곳, 납골당, 우산밑, 항아리안에 거주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Avasa는 수행승들이 거주하는 일시적인 주처로서 우안거가 끝나면 황폐하게 내버려둔 곳이다.
  
그것에 대하여 Arama는 본래 환희를 부여한다는 장소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마을이나 교외에 낙원, 과수원, 화원등으로 사용되던 것을 승가에 영구적으로 기증하여 명상과 토론의 장소로 쓰인 僧園 또는 승가람(samgharama)을 말한다. Arama는 개인에서 승가로 이전되었지만 그 관리는 기증자가 자발적으로 그 재산을 관리 유지했다. 대품의 藥犍度에는 Mahavagga VI. 15. 1-4


Pilindavaccha
Rajagaha에 산협에 동방(洞房)를 만들 때에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500인의 淨人(aramika)을 시여하여, 淨人村(aramikagāma)을 만들어졌고 그들은 승원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淨人主(aramikapesaka)에 의해서 통솔되었다.


소품의 臥座具犍度에 의하면, Mahavagga VI. 4. 9-10


와좌처제정의 기원에 관하여 설하고 있다. 승원 가운데 정사가 건립되기 전에는 수행승은 숲 속이나 나무 밑이나 산중이나 동굴이나 산굴이나 무덤가나 산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에 거주하며 아침 일찍 그곳에서 나와 경행을 하며 관법을 수행했다. 이 무렵 Rajagaha에 장로가 Vihara를 기증을 받아 줄  것을 부처님에게 요청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5종류의 와좌처(panca senasani 또는 五種의 僧園 panca leani=精舍vihara, 平覆屋addhayoga, 樓閣pasada, 樓屋hammiya, 窟院guha)를 허가해서 장자가 하루에 60개의 정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정사의 건축구조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간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와좌처는 춥고 더운 것, 맹수나 뱀, 모기, 비나 폭풍, 열기를 차단하고 선정에 들어 정관하기 위해 필요했던 만큼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Ārāma에 있는 수행승의 대중들은 종교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모두가 참여하는 회당이 필요했다. 布薩犍度에 의하면, Mahavagga, II. 8. 1


포살을 위해 집회하는 장소로서 규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수행승의 개별적인 방인 Parivena에서 바라제목차를 암송했지만 각 비구가 어디에서 포살이 행해져야하는 가에 대해 혼선이 왔기 때문에, 미리 장소를 표시하여 각 방에서 암송이 금지되고 승가에서 바라는 Vihara를 포살당(uposathagara)으로 정해서 포살을 행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또한 포살당이 작아서 전원을 수용하지 못한 때에는 포살당의 마당을 결계하여 사용되었다. 우리는 초기의 전설에 Ārāma의 구체적인 예를 볼 수 있다.

1) Ve
uvanarama(竹林精舍)

대품의 大犍度에 의하면, Mahavagga, I. 22. 1
세존께서는 성도후에 Rajagaha Latthivanuyyana(竹林園) Supatitthacetiya(善住靈廟)에 거주했지만 Magadha Seniya Bimbisara도시에서 멀지 않고 왕래가 편하고 모든 원하는 사람의 왕래가 용이하고 낮에는 시끄럽지 않고 밤에는 말소리가 적어 인적이 끊기고 사람을 떠나 조용히 선정에 들기 좋은 곳이라는 조건으로 Ve
uvana를 선택하여 비구승가에 기증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Arama였다.

2) Jivakarama

대품의 衣犍度에 의하면, Jivaka는 창부 Salavati가 버린 아이로 Abhaya왕자에 의해서 진흙더미에서 발견되어 당시에 학문의 중심지 Takkasila에서 의학을 연구했다. Rajagaha에 돌아와 의사로서 부를 축적했다. 부처님의 인격에 감동을 받아 질병을 몇번 치료해주었을 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의 소유의 라자가하의 Ambavana를 기증하였다. 그것을 Jivakarama라고 한다.

3) Ambapalivana(
菴婆薛林)

VV    



Vesali
에 위치했다고 하는 숲은 대품의 藥犍度에 의하면 세존께서 최후의 여행을 행할 때에 Ambapali가 부처님께 승가에 기증한 것이다.

4) Udumbarikarama(
優曇婆羅林)

Udumbarikarama
는 부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행자를 위해 설치된 arama였다. Udum- barika sihanada Suttanta에 의하면, 여기서 부처님은 Nigrodha라는 유행자에게 고행의 잘못에 관해 설하고 계율의 수호와 선정에 관해 설했다.

5) Kukku
arama(鷄林精舍)

Pataliputta
의 유원지로서 초기불교시대부터 부처님이나 비구의 수행처였다. Kosambi의 상인 Kukkuta에 의해서 지워진 ārāma여서 鷄林(Kukkuarama)이라고 불렸다. 훗날 Asokarama는 옛 Kukkuarama 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6) Ghositarama(
美音精舍)

Kosambi
Ghositarama Ghosita에 의하여 건축되어 기증된 것으로 부처님도 점차 이곳을 이용하였으나 후에 Devadatta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Ajatasattu를 이용할 것을 생각하기도 했다.

7) Pavarikarama(
망고나무 승원)

Ghosita
Kukkuta의 친구로서 Kosambi Pavarika도 망고 숲을 기증하였는데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Pavarikarama했다.

8) Jetavanarama(Anāthapindikassa arama:
祇樹級孤獨園)

소품의 臥座具犍度에 의하면, Cullavagga, IV. 4. 1-10.
Anathapindika
는 라자가하의 장자의 처남이었는데 장자의 집에서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대되었을 때에 부처님의 인격에 감동을 받아 후에 승원을 물색하던중 Jeta 태자의 숲이 적당한 것을 알고 왕자에게 그 땅을 팔 것을 요구하였으나 금으로 숲을 덮어도 팔 수 없다고 하자 Anathapindika는 금으로 땅을 뒤엎기 시작했는데 이에 감동을 받은 Jeta태자가 숲을 기증함으로서 성립된 승원이다.

9) Badarikarama(
대추나무 승원)

Kosambi
근처의 Ārāma인데 Khemaka가 병들었을 때에 있던 곳인데 Ghositarama에서 수행승들이 그곳을 방문했다.

10) Nigrodharama(
벵골보리수 승원)

Kapilavatthu
가까이에 부처님께서 성도한 해에 이 곳에서 지냈는데 그것을 석가족의 Nigrodha가 승가에 기증한 것이다.  많은 석가족의 출가자가 이곳을 방문했고 Mapajapati Gotami가 승단의 입단을 요청한 곳도 이곳이나 처음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상의 초기전승의 arama Rajagaha, Vesali, Pataliputta, Kosambi, Savatthi, Kapilavatthu의 도시근교에 소재했다. 그래서 도시로부터 멀지 않고 왕래가 편하고 조용해서 선정에 몰두 할 수 있는 곳이었고 국가 권력자나 부호들의 기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가운데 Rajagaha Jivakarama, Savatthi Jatavanarama, Kosambi Ghositarama는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어 Jivakarama의 발굴 결과 승원은 사각형의 담에 둘러싸여 있고 넓은 마당을 둘러싸고 병행한 두 개의 타원형의 건물과 두 개의 긴 강당의 기초가 발견되고 쇠못, 적토의 둥근 벽돌, 동물의 테라코타, 조잡한 도기등이 발견된다. 또한 Ghositarama의 발굴결과 그 유적인 BC. 6세기에서 AD. 4세기까지 성립되었는데, 사변형으로 일열로 나란히 있는 방사와 거기에 부가된 베란다가 있었다. 내부의 한 가운데에는 주탐이있고 몇개의 종탑에 둘러싸여 있었다. 최초 거주기의 유물가운데 북방의 검게 빛나는 토기가 발견되고 토환을 사용하지 않고 기둥을 흙 가운데 박은 갱()이 특색이 있다. 주탑이  최초로 건립된 것은 B.C. 5세기였다.


그리고 참고로 율장 대품의 安居犍度에 Mahavagga III. 5. 5-6


묘사된 Jetavanarama의 시설은 후기에 완성된 승원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1) 精舍(vihara), 2) 平覆屋(addhayoga), 3) 殿樓(pasada), 4) 樓房(hammiya), 5) 窟院(guha), 6) 房舍(parivena), 7) 倉庫(kotthaka), 8) 勤行堂(upatthanasala), 9) 火堂(aggisala), 10) 用房(kappiyakuti), 11) 廚房(vaccakuti), 12) 經行處(cankama), 13) 經行堂(cankamanasala), 14) 우물(udapana), 16) 煖房(jantaghara), 17) 煖房堂(jantāgharasala), 18) 연못(pokkharani), 19) 庭園(arama), 20) 庭園地(aramavatthu)    
오늘날의 암자와 같은 건물은 굴원(guha)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종류로는 기와굴, 석굴, 목조굴, 토굴(itthakaguha, silāgūha, daruguha, pamsuguha)이 있었고 자연의 동굴은 없었다.  
이렇듯 승원은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 필요에 따라 불탑이 세워지고 각나라에서는 그 실정에 맞도록 발전되거나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변형되어 왔다.

4.
승가의 개혁과 진리의 수호

  
승가의 개혁은 모름지기 승가의 초기적인 이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이념을 시대에 맞도록 다시 구현하는데 있다. 불교도의 공동체인 승가라는 말은 자주 환희의 도시, 열반의 도시, 진리의 도시로 불리웠다. 대반열반경에서 붓다가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 중의 하나가 자주 모여 회합을 갖는(abhinham samnipata samnipatabahalo)" 소위 시민사회적인 승가였다. 불교의 공동체는 이러한 시민사회적인 모범을 그대로 따르는 불교적인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불교도의 승가는 아쇼카왕 칙문에도 나와 있드시 불교승가의 이념을 받들어서 전 불교도 사부대중이 화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주 모여 회합을 갖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물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연기적인 관계에 있음을 확인시키며 승가공동체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공동체가 시민사회적인 공동체와 다른 점은 상호의존관계를 여실지견하기 위해서는 불교도들은 보다 객관적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제거해서 올바른 상호의존관계를 지향해 나가야한다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 윤리적인 가르침인 계와 정신적인 수행인 정과 연기법에 대한 통찰을 뜻하는 혜의 삼학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일반론은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다만 사부대중이 자주 모여 많은 회합을 갖는 대화모임을 통해 승가는 과거 보다 엄청나게 증가된 정보사회에서 보다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를 올바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 시민사회의 기본적인 진리수호에 가장큰 장애가 되는 것은 이것이야 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하는 도그마에 입각해서 상호의존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맛지마니까야의 짱끼경(MN. 95)에서 붓다는 진리의 수호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했다;


  “
만일 나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와 같이 믿는다라고 말하며, ‘이것이야 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좋아함이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이것이야 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배운바가 있다면 나는 이와 같이 배웠다라고 말하며, ‘이것이야 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수호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사물에 대한 분석이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사물에 대해 분석한다고 말하며 이것이야 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수호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념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와 같이 나는 이념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야 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수호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
이것이야 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도그마에 입각한다면, 그 도그마는 어떠한 집단이건 그 구성원을 외부적으로 증오에 사로잡히게 하고 내부적으로 노예화시킨다.  불교도의 승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도그마에서 벗어나 상호의존관계의 흐름속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여법하게 개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한 사부대중이 되도록 자주모여 많은 회합을 가지면서 진리의 도시, 열반의 도시, 환희의 도시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수호이고 불교자주성의 확보이며, 지속적인 승가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다.                    

 

http://www.kptsoc.org/

 

 

 

모든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 승가는 비구 비구니의 출가대중만을 뜻합니다. 재가자는 승가가 아닙니다.-각묵-

 

며칠 동안 인터넷이 안되는 곳에 머물다 보니 일주일 정도를 까페에도 제대로 들어와 보지 못했고 법우님들께 새해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신묘년 새해에도 법우님들이 모두 건강하시고 법우님들과 법우님들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늦게나마 기원 드립니다. 저는 건강이 아주 호전되고 있습니다. 수술 자국이 아직 많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것은 몇 달이나 몇 년 후면 좋아질 듯합니다.

 

며칠 만에 까페에 들어와 보니 승가(상가, san#gha)에 대한 동의할 수 없는 논의가 진행이 되었고 대부분의 법우님들이 거기에 동의하고 있는 듯해서 그냥 지나치면 안되겠다 싶어서 오랜만에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긴 논의는 생략하고 승가(상가, san#gha)는 중국에서 승가로 음역하기도 하고 승()으로 줄여서 음역하기도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여기서 승가(상가, san#gha)는 초기불전이나 대부분의 후대의 대승불교 전적에서도 예외 없이 불교의 출가자들 즉 비구와 비구니들만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초기불전의 어디에도 재가자는 승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초기불전의 여러곳에 비구 승가(bhikkhu-san#gha)와 비구니 승가(bhikkhuni-san#gha)라는 표현은 많이 나타나지만 초기경의 그 어디에도 청신사 승가나 청신녀 승가와 같은 표현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청신사와 청신녀는 그냥 upaasakaupaasikaa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특히 고다 경(S55:23) 참조)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가 남자신도와 여자신도는 절대로 승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님들만이 승에 포함되는 요즘의 어법과도 그대로 일치합니다.

 

이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부대중(四部大衆, cataso parisaa)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부승이 아니고 사부대중으로 나타나며 대중과 승은 초기불전에서는 전혀 다른 개념의 술어입니다. 이것도 상식의 문제라고 봅니다. ‘사부대중으로 옮긴 원어는 cataso parisaa인데 여기서 parisaapari(주위에)+sad(to sit)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 저는 주로 회중(會衆)으로 옮겼고 문맥에 따라 대중, 무리 등으로 옮겼습니다.

 

이처럼 사부대중(cataso parisaa)과 승가(san#gha)는 용어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초기불전에 의하면 승가는 비구와 비구니라는 출가대중만을 뜻하고 사부대중은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의 4무리의 불교를 구성하는 대중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초기경에서 승가는 비구와 비구니의 출가대중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삼귀의의 상감 사라남 갓차미의 상가도 당연히 출가한 스님들만을 뜻합니다. 여기에 예외규정은 없습니다. 물론 귀의의 대상이 되는 승가는 48배로 표현되는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깨달은 스님들일 것이고 초기경의 여러곳과 청정도론 등에서도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모든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 승가는 비구 비구니의 출가대중만을 뜻합니다. 재가자는 승가가 아닙니다. 물론 사부대중에는 속하고 불교의 중요한 구성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재가자를 승가에 넣으려는 시도는 초기불교에 의하면 결코 그 출처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

 

저는 스님들을 높이려는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이유 없는 존경은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위상과 역할이 재가불자님들께도 걱정꺼리가 되고 우리사회에 부정적인 역할을 해오다보니 출가자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불자들에게 조차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라서 승가에 스님들만을 넣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저는 잘 압니다. ...

 

그러나 본 까페가 초기불전을 근본으로 표방하는 곳이기 때문에 상가라는 이렇게 중요한 술어에 대한 법우님들의 아무 근거 없는 자의적인 해석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위험하다고 판단되어서 이렇게 두서없이 막 글을 적고 있습니다. 존경은 하지 않더라도 술어에 대한 바른 이해는 특히 초기불교에서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 까페의 운영자로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변명합니다. 이해해주시고 저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공감해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오랜만에 자판을 막 두드리다보니 조금 힘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드리고자하는 말씀에 충분히 공감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모든 법우님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각묵 합장

 

 

 

아름다움 경(A4:7)

Sobhana-sutta

1. 비구들이여, 입지가 굳고 잘 훈련되었고 대담하며 많이 배우고 법을 바르게 호지하고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네 무리의 [제자]들은 승가를 아름답게 한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입지가 굳고 잘 훈련되었고 대담하며 많이 배우고 법을 바르게 호지하고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비구는 승가를 아름답게 한다. 비구니는 청신사는 청신녀는 승가를 아름답게 한다.

비구들이여, 입지가 굳고 잘 훈련되었고 대담하며 많이 배우고 법을 바르게 호지하고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이러한 네 무리의 [제자]들은 승가를 아름답게 한다.”

2. 입지가 굳고 대담하며

많이 배우고 법을 바르게 호지하고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자

이를 일러 승가를 아름답게 하는 자라 하노라.

계를 구족한 비구와 많이 배운 비구니

믿음 가진 청신사와 믿음 가진 청신녀

이들은 승가를 아름답게 하나니

이들은 승가를 아름답게 하는 자들이니라.”

 

7. Sobhanasutta
sobhentisuttaṃ
  • Buddhajayantītripiṭakagranthamālā 2501–2531 (1957–1989)

C“C115A4:44“Cattārome, bhikkhave,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bahussutā dhammadharā dhammā­nu­dhammap­paṭi­pannā saṃghaṃ sobhenti. Katame cattāro? Bhikkhu, bhikkhave, viyatto vinīto visārado bahussuto dhammadharo dhammā­nu­dhammap­paṭi­panno saṃghaṃ sobheti. Bhikkhunī, bhikkhave,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bahussutā dhammadharā dhammā­nu­dhammap­paṭi­pannā saṃghaṃ sobheti. Upāsako, bhikkhave, viyatto vinīto visārado bahussuto dhammadharo dhammā­nu­dhammap­paṭi­panno saṃghaṃ sobheti. Upāsikā, bhikkhave,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bahussutā dhammadharā dhammā­nu­dhammap­paṭi­pannā saṃghaṃ sobheti. Ime kho, bhikkhave, cattāro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bahussutā dhammadharā dhammā­nu­dhammap­paṭi­pannā saṃghaṃ sobhentīti.

 

215A4:45Yo hoti viyatto ca visārado ca,
Bahussuto dhammadharo ca hoti;
Dhammassa hoti anudhammacārī,
Sa tādiso vuccati

saṃghasobhano

saṃghasobhaṇo
  • Maramma Tipiṭaka 2541 (1997)

 

.

315A4:46Bhikkhu ca sīlasampanno,
bhikkhunī ca bahussutā;
Upāsako ca yo saddho,
yā ca saddhā upāsikā;
Ete kho saṅghaṃ sobhenti,
ete hi saṅghasobhanā”ti.

 

 

 

 

승가의 범위, 어디까지인가
이종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
[1호] 1999년 12월 10일 (금) 이종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

1. 스님·승가·승보

우리말로 굳어져 있는 ‘스님’은 원래 출가 승려가 그 스승을 일컫는 말로 사승(師僧)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스님’이란 어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승(僧)님’이라 하다가 이응 받침이 탈락되어 생긴 말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출가 수행하는 승려를 통틀어 일컫는 흔한 말로 전락해 버렸지만 ‘스님’의 의미를 두레박을 타고 근원까지 추적해 보면, 우리가 지금 다루게 될 ‘승가(僧伽)’란 말과 만나게 된다. ‘승가’의 줄임말이 ‘승(僧)’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말에도 사회적 생명력이 있어서 어떤 말은 인간의 오만방자한 마음에 걸러질 때 본래 지녔던 중후한 맛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큰스님’이란 말도 내가 어릴 때에는 좀처럼 듣기 어려울 정도로 가려서 쓰였던 것 같은데 요즘은 사방에 ‘큰스님’ 투성이니 시대가 바뀌기는 바뀐 모양이다. 심지어는 전화로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아무개 스님입니다’ 하니, 스님이 자신을 ‘스님’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말 어법에 딱히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에게 존칭을 사용하는 우스운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겸양지덕을 더 이상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서 생긴 골계일 것이다. ‘승가’는 산스크리트 어 ‘상가(sam.gha)’를 중국의 번역자가 음사(音寫)한 말인데,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므로 여기서는 ‘승가’로 쓰기로 하겠다. 불교 신자라면 누구나 불·법·승 삼보에 귀의(三歸依)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실제로 삼귀의는 재가 신자뿐만 아니라 출가 승려도 당연히 표명해야 할 덕목으로 인정된다. 사미십계를 받을 때 삼귀의를 하거니와 비구, 비구니가 된 뒤에도 매일 독송하는 예불문에는 어김없이 삼귀의가 등장한다. 산스크리트 어로 쓰여진 불교 사본에서도 경전이나 논서의 첫머리에 삼귀의를 하나로 뭉뚱그려 ‘나무삼보(南無三寶)’로 표현하는 경우를 자주 대할 수 있다.

‘승가’는 이 삼보 가운데 ‘승보(僧寶)’에 해당하는 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여 제이, 제삼의 부처님이 되기 위한 길을 걸어가는 공동체를 뜻한다. 그렇다면 ‘스님’이 ‘승가’와 같은 말인가? 불교도의 귀의의 대상이 되는 승보가 곧 스님인가? 이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오늘날 종교학에서는 종교의 필수조건으로 교주·교의(敎義)·교단, 이 세 가지를 꼽는다.

샤마니즘이나 일본의 신도(神道)와 같은 자연종교, 힌두교나 유대교와 같은 민족종교 가운데는 교주가 없거나 교의가 없는 등,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모자라는 경우가 있지만, 이른바 ‘세계종교’는 어김없이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법·승 삼보도 어느 정도 교주·교의·교단에 대응한다고 보아도 좋을 듯 싶다. 교단이란 관점에서 승보를 바라보면 스님은 당연히 승보가 될 것이고, 이 점에 대해서 아마도 별다른 이의는 제기되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재가 신자도 당연히 교단에 속하지만, 재가 신자를 승보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님만이 승보일까? 여전히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또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 우리는 교단적 관점에서 말하는 승가와 승보의 관점에서 말하는 승가를 구분하는 편이 좋겠다.

재가 신자와 출가 스님의 관계 설정이 방향성을 잃고 헤매는 것도 실은 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는 데서 야기된 ‘그릇된 문제제기’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스님’이란 말이 내포하는 함의와 외연적인 범위가 불교의 컨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한 통로를 마련해 보기로 하자.

2. 승가의 유래와 기본정신

‘승가’는 부처님 당시 사문(沙門, saman.a)으로 불리었던 수행자를 좇아 형성된 제자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문이 다른 말로 ‘승가의 소유자(sam.ghin)’로 불리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사문을 지도자로 삼아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체가 바로 승가였으며, 이 점에서 ‘승가’는 불교 교단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다.

사성계급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바라문과는 달리, 사문은 카스트 또는 출신 성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승가의 구성원도 사문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신분이 보장되었는데, 우리가 ‘출가(出家)’라 부르는 과정이 아마도 이와 같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카스트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흡수력은 대단하기 때문에 출가하는 본인으로서는 자유로 향하는 길이었는지는 몰라도 일반 사회인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도인으로서 인도에서 살면서 카스트를 벗어난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자유를 얻기 위한 ‘죽음을 건 모험’이기 때문이다.

출가(出家, pravrajita)란 집(家)이 상징하는 바 세속적인 온갖 규제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흔히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각자의 이름을 잃어 버리고 바다의 한 맛으로 합쳐지는 사태에 비유된다. ‘강’이 출가하기 전에 각자가 갖고 있던 사회적 계급이나 지위·성명 등을 뜻한다면, ‘바다’는 그와 같은 온갖 세속적 차별을 벗어나 해탈의 맛 하나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뜻한다.

절에 자주 다녀본 사람이라면, 일주문에 새겨진 글을 유심히 본 적이 있을 것이다. “入此門來 莫存知解(이 문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승가는 원래 이와 같이 ‘정신적 대전회(大轉回)’를 거쳐 세속의 출신성분, 알음알이를 모두 벗어 버리고 오직 완전한 자유만을 위해서 모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초기 불교의 자료를 보면, 승가의 구성원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모이며, 화합의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자주 회의를 열어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는 등 공동체에 관한 일을 결의하거나 그 밖의 공동체에 관련된 사안들을 만장일치제로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승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전제조건이 충족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첫째, 사문과 같은 종교적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둘째, 승가의 구성원은 세속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신분이어야 한다.

셋째, 만장일치로 공동체의 일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상호 화합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넷째, 승가는 해탈이라는 한 목적을 향해서 운영되어야 한다.

 

3. 교단으로서의 ‘승가’

종교학에서 말하는 ‘교단’과 승가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사부대중(四部大衆)’ 또는 ‘사중(四衆)’이 불교의 ‘교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大衆은 ‘paris.ad’의 번역어로 徒衆, 眷屬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사중’은 비구·비구니, 우바새·우바이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로,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자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또는 출가 수행자에 사미·사미니·식차마나를 포함시켜 ‘七部大衆’ 혹은 ‘七衆’이라 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비구·비구니는 출가 수행자이다. 한편 우바새·우바이는 ‘근사남(近事男)’ ‘근사녀(近事女)’로 번역되기도 하듯이, 부처님이나 그 제자께 가까이 가서 섬기는 자를 뜻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공양을 모시는 재가 신자가 이에 속한다.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지 몰라도 불전(佛典)에서 ‘승가’는 사중(四衆)과 엄격하게 구별된다 .

우바새·우바이는 승가에서 제외되며, 비구·비구니를 비롯한 출가 수행승만 승가로 분류된다. ‘사중’이 현대적인 의미로 ‘교단’에 해당한다고 하면, ‘승가’는 현대적인 의미로 ‘성직자(聖職者)’에 해당한다. 물론 ‘성직자’가 신(神)을 전제로 한 말이라고 한다면 승가를 성직자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불교 교리체계와 상치되는 일이겠지만 ‘성직자’를 말 그대로 ‘성스러운 직업을 갖고 있는 이’로 해석하는 경우에, 승가는 성직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바꾸어서 ‘교단’에 넓고 좁은 의미를 둔다면, 사중은 넓은 의미의 교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승가는 좁은 의미의 교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다섯 비구가 생긴 초전법륜 때를 최초로 승가가 성립한 시점으로 보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아함경》이나 팔리 니카야에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만나기 전에 상인 두 명을 만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두 사람은 부처님께 우바새로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했고 부처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는 아직 불·법 이보(二寶)밖에 없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나중에 생길 승가 곧 승보에도 귀의하도록 권하였다. 이 때문에 이 두 상인은 ‘이보(二寶)에 귀의한 우바새’로 불리우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 두 사람이 ‘삼보에 귀의한’ 우바새로 표현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고, 또한 불·법 이보에 귀의했다고 해서 승가로 인정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단적 관점에서 승가가 출가 수행자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경·율·론 삼장(三藏) 중 율장의 내용을 분석해 보아도 명백하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율장은 그 모두가 출가 수행자 공동체에 대한 규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율장 속에 비구 승가·비구니 승가에 관한 용례는 있어도 우바새나 우바이를 승가에 포함시키는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교단은 승가와 재가 신자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편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팔리 니카야에서는 이와 같이 출가 수행자로만 이루어진 좁은 의미의 교단을 ‘삼무티상가(sammutisan.gha ; 世俗僧伽 곧 세상에서 말하는 승가)’로 표현한다. 우리가 ‘스님’이라 부르는 출가 수행자가 바로 이 세속승가(世俗僧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4. 승보로서의 ‘승가’

‘스님’이 내포하는 함의내용과 외연적 적용범위를 철저하게 따져 묻기 위해서는 우선 세속승가와 승보를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출가 승려를 통틀어 일컫는 ‘스님’의 일상적 용법이 세속승가와 연결된다면, 사승(師僧)을 가리키는 ‘스님’의 원래 의미는 승보와 연결된다.

흔히 ‘스님’을 승보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불교도가 귀의의 대상으로 삼는, 승보로서의 승가는 외형적인 삭발 형상이나 승복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스크리트 어 불교문헌이나 팔리 니카야에서 세속승가와 대비시켜 사용하는 말로 ‘아리야상가(a yasan.gha)’가 있다.

‘아리야상가’는 ‘성승(聖僧)’ 또는 ‘성중(聖衆)’으로 번역되는데, 우리가 ‘승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성승(聖僧)’ 곧 ‘성스러운 승가’이다. ‘스님’의 원래 의미가 이 ‘성스러운 승가’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출가 수행자만을 적용대상으로 하는, 좁은 의미의 교단으로서의 승가가 세속승가 곧 세속적 의미의 승보라고 한다면, ‘성승(聖僧)’은 진정한 의미의 승보이다. 이 구별은 우리가 성직자를 말뿐인 성직자와 진정한 성직자로 구별하는 것과 대응한다.

‘스님’에도 말뿐인 스님과 승보로서 귀의의 대상이 되는 진정한 스님, 이 두 부류가 불교 문헌 안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성승은 ‘성자(聖者, a yapudgala)’로도 표현되는데, 흔히 불교문헌에서 성자(聖者)와 현자(賢者)가 구별되어 쓰이듯이, 성자는 수행계위에서 보면 견도(見道) 이상의 경지에 달한 사람을 말한다.

아라한을 지향하는 부파불교에서는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 아라한의 이른바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여덟 성인이 이 성자(聖者)에 들어간다. 부파불교에서는 출세간주의적 경향이 강해서 ‘성자’라 하더라도 주로 출가 수행승을 대상으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가 신자가 성자의 반열에 들 수 없다는 제한은 없다. 실제로 ‘거사(居士)’로 대표되는 재가 신자가 아라한에 이를 수 없다는 견해는 초기 경전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앙굿타라니카야》에서는 21명의 거사 아라한이 언급되고 있으며, 또한 출가 수행 생활을 하는 것만이 성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어떤 확실한 문헌적 증거도 없다. 재가 신자라 하더라도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그는 승보로서의 ‘승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살을 이상으로 삼는 대승불교에서 부파불교 시대만큼 재가와 출가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일은 재가불교운동에서 발전한 탓인지 출가보살보다는 재가보살이 대승경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유마경》의 유마 거사, 《승만경》의 승만 부인, 《반주삼매경》의 발타화 보살 등이 대표적인 실례에 속한다. 부파불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형식에 치우친 부파불교의 입장에서는 세간승가와 성승을 동일시하게 마련이다. 곧 승보는 구족계를 받은 비구·비구니만으로 구성된다.

현재 불교학계의 한 학설에 따르면, 대승불교의 출가보살의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부파교단의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 학설이 옳다고 한다면 대승의 출가보살이 부파불교의 전통적인 세속승가에 속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로 보인다. 구족계를 받지 않은 출가보살의 교단은 부파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승보로서의 승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이것이 부파불교 시대에 승보에 대한 지배적인 원칙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 용례에서 쓰이는 ‘스님’을 승보로 여기는 것은 싫든 좋든 부파불교의 지나친 형식주의가 망령처럼 되살아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대승불교의 쌍벽이라 일컬어지는 유식사상과 중관사상의 창시자인 세친과 용수의 전기(傳記)를 조사한 한 연구는, 세친이 설일체유부에서 구족계를 받은 적이 있는 출가보살이었던데 비해, 용수는 구족계를 받지 않은 출가보살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대승불교의 승가는 승보로서의 승가를 지향하고 있지, 세속승가로서의 승가를 추구하는 공동체는 아니다.

재가보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재가보살이 삼귀의, 오계를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부파교단의 세속승가에 귀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일(齋日)에 팔재계(八齋戒)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부파교단의 승가람(僧伽藍)에 가는 것이 아니라 탑사(塔寺)에 참배하러 가는 것이었다.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승보였지 세속승가가 아니었다. 세친은 《섭대승론세친석》 귀경게(歸敬偈)에서 삼보에 귀의를 표명한다.

그 가운데 승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승보로서의 승가가 어떠한 내포적 의미를 지니는지, 어떠한 외연적 적용범위를 갖는지에 대해서 좋은 안내역을 해줄 것이다.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과(果)에 머물며, 그 [과에 이르는] 도(道)를 행하는, 다른 승가에 비해 월등한 부처님의 승가는, 올바른 서원(誓願)으로 티없는 공덕을 성취하고 있으니, 그 [‘승가’라는] 무상복전(無上福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선(善[業])을 짓는다면 지혜로운 이는 대지나 허공과 같이 광대한 해탈을 성취하리라.

불교도가 귀의하는 승보로서의 승가는 유학과 무학의 과(果)와 도(道)로 표현되듯이, 부파불교에서는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에서는 팔성도(八聖道)와 해탈(解脫)·해탈지(解脫智)에 통달한 성자(聖者)들의 집단으로, 다른 공동체에 비해 수승하다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지만, 여기서 재가와 출가의 구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조건을 갖출 때 ‘승보’로 불리우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세친의 《구사론》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대승이건 소승이건 승보의 이념적 함의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인용을 끝으로 우리의 글을 마무리짓기로 하자. 귀의승(歸依僧)하는 이는 승가를 형성시키는 주요한 원인인, 유학·무학의 제법에 귀의한다.

그 [유학·무학의 제법]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팔성인(八聖人)은 승가가 된다. [천(天)을 포함해서 세간의 힘으로는] 깨뜨릴 수 없기 때문에 [‘승가’라 한다. 화합체(samagra)와 같이 깨뜨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냐 아니면 한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냐? 이치로 보아 모든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다. 도(道)에 상충되는 모습은 없기 때문이다.”(AKBh p.216, 22-24) <끝>

이종철
서울대 철학과 및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32

 

 

 

 

교단과 승단의 차이점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불멸후 불교교단은 승단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불교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느 나라의 불교이든 승단이 분열하지 않고 청정성이 유지되었을 때에는 교단이 발전했지만, 승단이 분열하거나 청정하지 못했을 때에는 교단이 쇠퇴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한국불교 승단은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잃어버린 총체적 위기 상황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승단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가 율장에 근거한 청정한 승단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재가신자들로부터 존경받게 될 것이며, 잃어버린 승단의 권위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한국불교의 승단을 쇄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승려들의 비리가 폭로될 때마다 자주 거론되는 것이 스님들에게 귀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불교도의 신앙의 대상은 붓다(Buddha, 佛陀)·담마(Dhamma, 曇磨)·상가(Sa?gha, 僧伽)이다. 이것을 불교의 세 가지 보배[三寶]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불교도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보배 가운데 ‘상가’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선 교단(敎團)과 승단(僧團)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교단은 출가자와 재가자 집단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른바 ‘짜땃소 빠리사(cattaso paris?, 四衆)’을 일컫는다. 한편 승단은 ‘상가(Sa?gha, 僧伽)’를 번역한 말로 출가자 집단만을 일컫는 말이다. 이른바 비구·비구니의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상가에는 재가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재가자도 상가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의 ‘세계불교승가회(The World Buddhist Sangha Council, WBSC)’에는 재가자가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상좌불교 국가의 여러 가지 ‘상가의 모임[僧伽會]’에 재가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일부의 초기경전(SN Ⅱ, p.8)에서는 우바새(청신사)·우바이(청신녀)를 승가에 포함시킨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승가라고 하면 재가자가 포함되지 않은 순수한 승려 집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러면 왜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빠리사(paris?)’와 ‘상가(Sa?gha)’의 개념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불교사전에는 ‘승가(僧伽)’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승가(僧伽): 범어 sa?gha의 음사. 중(衆)·화합중(和合衆)이라 번역.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그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화합하고 있는 불교 교단. 보통은 출가자의 집단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재가(在家)의 신도도 포함함.

[곽철환, 『시공불교사전』(서울: 시공사, 2003), p.407]

 

위 사전에서는 승가에 재가의 신도도 포함된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가’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빠리사’를 설명한 잘못된 해석이다. 빨리어 빠리사(paris?)는 ‘사람으로 에워쌈(surrounding people)’, ‘무리(group)’, ‘모임(collection)’, ‘동료(company)’, ‘회중(會衆, assembly)’, ‘회(會, association)’, ‘군중(群衆, multitude)’ 등의 뜻을 갖고 있다. 한문으로는 ‘중(衆)’ 혹은 ‘회중(會衆)’으로 주로 번역되었다. 앞에서 말한 ‘짜땃소 빠리사(cattaso paris?, 四衆)’은 붓다의 교단을 대표하는 네 가지 그룹을 말한다. 이른바 비구중(比丘衆, bhikkhu-paris?), 비구니중(比丘尼衆, bhikkhun?-paris?), 우바새중(優婆塞衆, up?saka-paris?), 우바이중(優婆夷衆, up?sik?-paris?)이다.

 

여기서 말하는 빠리사(衆)를 승가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승가를 한문으로 ‘중(衆)’으로 번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빠리사와 상가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 왔기 때문에 혼란이 생겼다. 흔히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할 때의 중(衆)은 상가가 아닌 빠리사, 즉 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네 가지 회중(會衆)’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교단이라는 말은 빠리사에 해당된다. 니까야에서 빠리사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다시 도반들이여, 계를 가지고 계를 갖춘 자는 끄샤뜨리야의 회중(會衆)이든 바라문의 회중이든 장자의 회중이든 수행자의 회중이든 그 어떤 회중에 들어가더라도 두려움이나 창피함이 없이 들어갑니다. 이것이 계를 가진 자가 계를 받아지님으로써 얻는 세 번째 이익입니다.

(DN Ⅲ, p.236: “Puna ca para? ?vuso duss?lo s?la-vipanno ya? yad eva parisa? upasa?kamati, yadi khattiya-parisa? yadi br?hma?a-parisa? yadi gahapati-parisa? yadi sama?a-parisa?, avis?rado upasa?kamati ma?ko-bh?to. Aya? tatiyo ?d?navo duss?lassa s?la-vipattiy?.”

 

이와 같이 교단과 승단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길을 가고 있는 제자의 무리를 상가(Sa?gha, 僧伽)라고 한다. 승가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즉 세간의 승가(sammuti-sa?gha, 俗僧伽)와 성자의 승가(ariya-sa?gha, 聖僧伽)가 그것이다. 세간의 승가는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의 승가를 말하고, 성자의 승가는 위없는 승가(ga?a-uttama)로서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도(道)와 과(果)를 증득한 분들로 사쌍팔배(四雙八輩)를 뜻한다. 전자를 현전승가(現前僧伽), 후자를 사방승가(四方僧伽)로 이해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수행의 네 단계에 있는 성자, 즉 사쌍팔배를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첫째, 수다원(須陀洹)은 빨리어 소따빤나(sot?panna)의 음사다. 예류(預流)·입류(入流)라고 번역된다.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를 말한다. 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입류라고 한다.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예류향(預流向)이라 한다.

 

둘째, 사다함(斯陀含)은 빨리어 사까다가민(sakad?g?min)의 음사다. 일래(一來)라고 번역한다. 욕계(欲界)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성자를 말한다. 그러나 이 성자는 그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인간계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래’라고 한다. 이 경지를 사다함과(斯陀含果)·일래과(一來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사다함향(斯陀含向)·일래향(一來向)이라 한다.

 

셋째, 아나함(阿那含)은 빨리어 아나가민(an?g?min)의 음사다. 불환(不還)?불래(不來)라고 번역한다. 욕계의 수혹(修惑)을 완전히 끊은 성자를 말한다. 이 성자는 미래에 색계?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환(不還)이라 한다. 이 경지를 아나함과(阿那含果)·불환과(不還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나함향(阿那含向)·불환향(不還向)이라 한다.

 

넷째, 아라한(阿羅漢)은 범어 아르하뜨(arhat)의 주격 아르한(arhan) 혹은 빨리어 아라한뜨(arahant)의 주격 아라항(araha?) 혹은 아라하(arah?)의 음사다. 성문(聲聞)들 가운데 최고의 성자, 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한다.

 

이러한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자를 아리야 상가(ariya-sa?gha, 聖僧伽)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리야 상가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 비구·비구니를 사뭇띠 상가(sammuti-sa?gha, 俗僧伽)라고 한다.

 

불교도들이 행하는 삼귀의례에서의 승(僧)은 아리야 상가, 즉 성승가(聖僧伽)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도들이 신앙적으로 귀의하는 대상은 삭발염의한 비구·비구니가 아니라 불교도들의 이상인 사쌍팔배의 성자인 것이다.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 조차 모르고, 일부의 사람들은 불(佛)과 법(法)의 이보(二寶)에 귀의하고, 나머지 스님(一寶)에게는 귀의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무식한 발언인가!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현행 한글 삼귀의문의 내용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현행 삼귀의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歸依佛兩足尊)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歸依法離欲尊)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歸依僧衆中尊)

 

수정한 삼귀의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Buddha? sara?a? gacch?mi)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Dhamma? sara?a? gacch?mi)

거룩한 승가에게 귀의합니다. (Sa?gha? sara?a? gacch?mi)

 

 

 

 

 

 

 

 

 

 

 

                      SAṄGHA The Pāḷi word Saṅgha means ‘group’ or ‘congregation’ and is the name given to the body of the Buddha’s disciples. The Buddha mentions two saṅghas – the monastic saṅgha and the noble saṅgha. The monastic Saṅgha is the congregation of properly ordained monks and nuns. The noble Saṅgha (ariya saṅgha or sometimes sāvaka saṅgha) is composed of all those who have attained the first stage of enlightenment or higher. However, in the broadest sense, the Saṅgha is all those, ordained or not, enlightened or not, who are fully committed to the Buddha’s teachings. The Buddha said: ‘Whoever is wise and confident, learned, upholding the Dhamma and living in accordance with it, they are called Light of the Saṅgha. The monk who is virtuous, the nun who is learned, the lay man or lay woman who is full of faith, they are rightly called Light of the Saṅgha.’ (A.I,8). See Basis of Community. - See more at: http://www.buddhisma2z.com/content.php?id=356#sthash.XEjylqtI.dpuf

 

 

 

Sangha - By Bhikkhu Bodhi
The Buddha’s dispensation is founded upon three guiding ideals or objects of veneration: the Buddha, the Dhamma and the Sangha. The Buddha is the teacher, the Dhamma is the teaching and the Sangha is 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realized the teaching and embody it in their lives. These three are together called the Three Jewels or Triple Gem. They are called the Three Jewels because for one who is seeking the way to liberation, they are the most precious things in the World.

The word ‘Sangha’ means those who are joined together, thus a Community. However, "Sangha" does not refer to the entire Buddhist Community, but to the two kinds of Communities within the larger Buddhist Society:

They are -

  • The Noble Sangha (Ariya Sangha).The community of the Buddha’s true disciples.
  • The conventional Sangha. Fully ordained monks and nuns.

In principle, the word Sangha includes bhikkhunis - that is, fully ordained nuns - but in Theravada countries the full ordination lineage for women has become defunct, though there continue to exist independent orders of nuns.

The holy life requires purified conduct but household life stimulates many desires that run contrary to pure conduct. The homeless life is a life of meditation calling for constant mindfulness, clear awareness and contemplation. All this needs time, a calm environment, freedom from external pressures and responsibility. The Buddha founded in Sangha in order to provide such objective conditions.

The bhikkhu, the Buddhist monk, is not a priest; he does not function as an intermediary between the laity and any divine power, not even between the lay person and the Buddha. He does not administer sacraments, pronounce absolution or perform any ritual needed for salvation. The main task of a bhikkhu is to cultivate himself along the path laid down by the Buddha, the path of moral discipline, concentration, and wisdom.

 

 

 

Sang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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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s about the concept of Sangha in Buddhism. For other uses, see Sangha (disambiguation).
Some of the monks outside the temple at the Tibetan Buddhist monastery, Rato Dratsang, in India, January 2015

Sangha (Pali: सङ्घ saṅgha; Sanskrit: संघ saṃgha; Chinese: 僧伽; pinyin: Sēngjiā[1]; Tibetan: དགེ་འདུན་ dge 'dun[2]) is a word in Pali and Sanskrit meaning "association", "assembly," "company" or "community" and most commonly refers in Buddhism to the monastic community of ordained Buddhist monks or nuns. This community is traditionally referred to as the bhikkhu-sangha or bhikkhuni-sangha. As a separate category, those who have attained any of the four stages of enlightenment, whether or not they are members of the bhikkhu-sangha or bhikkhuni-sangha, are referred to as the ariya-sangha or "noble Sangha".[3][4][5]

The Sangha also includes laymen and laywomen who are personally dedicated to the discipline of Dharma-Vinaya. This use of the word "Sangha" is only sometimes found in the Pali texts.[6][7][8]

 

 

 

 

 

깃발 (S11:3)

Dhajagga-sutta

 

[본경은 스리랑카에서 Maha Pirit Pota( 보호주를 모은 ) 포함되어 보호주(paritta) 널리 독송되고 있다. 북방불교에서도 중국과 티벳에서 번역되었으며 산스끄리뜨로 경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1. Evamme sutam* -- ekam* samayam* bhagavaa saavatthiyam* viharati jetavane anaathapin*d*ikassa aaraame.

2. Tatra kho bhagavaa bhikkhuu aamantesi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uu bhagavato paccassosum*.

Bhagavaa etadavoc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bhuutapubbam*, bhikkhave, devaasurasan#gaamo samupabyuul*ho ahosi/

atha kho, bhikkhave, sakko devaanamindo deve taavatim*se aamantesi --

비구들이여, 옛날에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 구들이여, 그때 신들의 삭까가 삼십삼천의 신들을 불러서 말했다.

 

`sace, maarisaa, devaanam* san#gaamagataanam* uppajjeyya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mameva tasmim* samaye dhajaggam* ullokeyyaatha/

maman$hi vo dhajaggam* ullokay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issati'/

존자들이여, 신과 아수라들 간에 전쟁이 발발했을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을 느끼게 되면 그때 나의 깃발을 올려다보시오. 그대들이 나의 깃발을 올려다보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오.

 

`no ce me dhajaggam* ullokeyyaatha,

atha pajaapatiss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eyyaatha/

pajaapatissa hi vo devaraajassa dhajaggam* ullokay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issati'/

만일 나의 깃발을 올려다볼 없으면 신의 빠자빠띠의 깃발을 올려다보시오. 그대들이 신의 빠자빠띠의 깃발을 올려다보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오.

 

`no ce pajaapatiss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eyyaatha,

atha varun*ass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eyyaatha/

varun*assa hi vo devaraajassa dhajaggam* ullokay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issati'/

만일 신의 빠자빠띠의 깃발을 올려다볼 없으면 신의 와루나의 깃발을 올려다보시오. 그대들이 신의 와루나의 깃발을 올려다보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오.

 

`no ce varun*ass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eyyaatha,

atha iisaanass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eyyaatha/

iisaanassa hi vo devaraajassa dhajaggam* ullokay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issatii'''ti/

만일 신의 와루나의 깃발을 올려다볼 없으면 신의 이사나의 깃발을 올려다보시오. 그대들이 신의 이사나의 깃발을 올려다보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오.’”

 

4. ``tam* kho pana, bhikkhave, sakkassa vaa devaanamindassa dhajaggam* ullokayatam*,

pajaapatissa va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ayatam*,

varun*assa va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ayatam*,

iisaanassa vaa devaraajassa dhajaggam* ullokay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ethaapi nopi pahiiyetha/

비구들이여, 그러나 신의 삭까의 깃발을 올려다보거나 신의 빠자빠띠의 깃발을 올려다보거나 신의 와루나의 깃발을 올려다보거나 신의 이사나의 깃발을 올려다보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지기도 하고 없어지지 않기도 것이다.

 

``tam* kissa hetu? sakko hi, bhikkhave, devaanamindo aviitaraago aviitadoso aviitamoho bhiiru chambhii utraasii palaayiiti/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신의 삭까는 탐욕을 제거하지 못했고 성냄을 제거하지 못했고 어리석음을 제거하지 못했고,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고 떨면서 도망갈 있기 때문이다.”

 

5. ``ahan$ca kho, bhikkhave, evam* vadaami -- `sace tumhaakam*, bhikkhave, aran$n$agataanam* vaa rukkhamuulagataanam* vaa sun$n$aagaaragataanam* vaa uppajjeyya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mameva tasmim* samaye anussareyyaatha -- itipi so bhagavaa araham* sammaasambuddho vijjaacaran*asampanno sugato lokaviduu anuttaro purisadammasaarathi satthaa devamanussaanam* buddho bhagavaa'ti/ maman$hi vo, bhikkhave, anussar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issati/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비구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서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을 느낀다면 그때는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正等覺]이시며, 명지와 실천이 구족한 [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가신 [善逝]이시며, 세간을 알고 계신 [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은 [無上士]이시며, 사람을 길들이는 [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깨달은 []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라고 오직 나를 계속해서 생각하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나를 계속해서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6. ``no ce mam* anussareyyaatha, atha dhammam* anussareyyaatha -- `svaakkhaato bhagavataa dhammo sandit*t*hiko akaa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m* veditabbo vin$n$uuhii'ti/ dhamman$hi vo, bhikkhave, anussar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issati/

만일 나를 계속해서 생각할 없다면 법은 세존에 의해서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7. ``no ce dhammam* anussareyyaatha, atha san#gham* anussareyyaatha -- `sup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ujup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n$aayap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saamiicippat*ipanno bhagavato saavakasan#gho, yadidam* cattaari purisayugaani at*t*ha purisapuggalaa esa bhagavato saavakasan#gho, aahuneyyo paahuneyyo dakkhin*eyyo an$jalikaran*iiyo anuttaram* pun$n$akkhettam* lokassaa'ti/ san#ghan$hi vo, bhikkhave, anussaratam* yam* bhavissati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vaa, so pahiiyissati/

만일 법을 계속해서 생각할 없다면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하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8. ``tam* kissa hetu? tathaagato hi, bhikkhave, araham* sammaasambuddho viitaraago viitadoso viitamoho abhiiru acchambhii anutraasii apalaayii''ti/ idamavoca bhagavaa/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자 탐욕을 제거했고 성냄을 제거했고 어리석음을 제거했고, 려워하지 않고 공포를 느끼지 않고 떨지 않고 도망가지 않기 때문이다.”

 

9. idam* vatvaana sugato

athaaparam* etadavoca satthaa --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승이신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aran$n$e rukkhamuule vaa, sun$n$aagaareva bhikkhavo/

anussaretha sambuddham*, bhayam* tumhaaka no siyaa//

숲에서나 나무 아래서나 빈집에서나 비구들은

완전하게 깨달은 분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나니

그러면 그대들에게 두려움은 없을 것이로다. {868}

 

``no ce buddham* sareyyaatha, lokajet*t*ham* naraasabham*/

atha dhammam* sareyyaatha, niyyaanikam* sudesitam*//

세상의 으뜸이요 인간들 가운데 황소인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할 없으면

벗어남으로 인도하고 설해진 법을

그대들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하노라. {869}

 

``no ce dhammam* sareyyaatha, niyyaanikam* sudesitam*/

atha san#gham* sareyyaatha, pun$n$akkhettam* anuttaram*//

벗어남으로 인도하고 설해진 법을 만일

계속해서 그대들이 생각할 없으면

무상복전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하라. {870}

 

``evam* buddham* sarantaanam*, dhammam* san#ghan$ca bhikkhavo/

bhayam* vaa chambhitattam* vaa, lomaham*so na hessatii''ti//

이와 같이 비구들이 부처와 법과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어느 어느 때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871}

 

첨부파일 7.승가와_승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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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본원( 本 願) | 작성시간 15.05.22 재가에서 출가나고
    출가에서 승가나네
    거룩한 승가에서
    해탈 열반 성불이루니
    그 공덕은 어디로 회향할까?^^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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