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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스크랩] 법념처(法念處)의 정의와 수행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5.10.18|조회수82 목록 댓글 2

 

법념처(法念處)의 정의와 수행


법념처는 법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는 말이다. 법을 빨리어로 담마라고 한다.

법은 색법과 심법, 심소법 열반법이 있으며 이 법만 빠라마타 담마(궁극적 진리),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빠라마타 담마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실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이 조건을 벗어난 것은 빠라마타 담마가 아니다.

관념적이며 세간적인 법은 빤냐띠 담마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된다.


1) 담마에는 2가지 담마가 있다. 대문자 Dhamma와 소문자 dhamma이다.


대문자 담마(Dhamma)=>붓다의 말씀, 진리, 불교의 교설(敎說)을 의미한다.

진리로서의 법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모든 대상에서 무상, 고, 무아, 연기를 보는 것이 곧 Dhamma다.


소문자 담마(dhamma) =>"알아차릴 대상”을 법(dhamma)이라한다.

예로서 제법무아(諸法無我)할 때의 法은 dhamma다.

모든 존재의 실재하는 성품인 빠라마타를 의미한다.

알아차릴 대상인 빠라마타 안에는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이 들어있다.

이들 dhamma를 대상으로 무상 고 무아의 보편적 특성을 확인하면 결국 Dhamma가 된다.

그래서 두 담마가 하나로 통한다.


2) 진리란 보편타당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리다.

어느 한 부류에만 받아들여지는 진리는 진정한 진리라 할 수 없다.

위빠사나 수행은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므로 이 수행이야말로 완벽한 진리의 성품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불교도만이 갖는 전유물이라고 해서도 안 되며,

다른 종교인도 위빠사나 수행을 불교의 교리로만 못 박아서도 안 된다.

4념처 위빠사나수행은 이 세상에 번뇌를 가지고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해야하는 보편타당한 수행법이다.


3) 법념처(담마누빠사나)에는 다섯 가지 그룹이 있다.

오개(五蓋),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이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dhamma이며,

이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서 궁극적 진리인 Dhamma를 통찰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 다섯 그룹의 법들에서 제법의 보편적 특성인 생멸을 보고,

나아가서 무상을 보고, 그들의 괴로움을 보고, 그들의 실체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 법념처다.

법념처의 마지막은 사성제이며 모든 번뇌를 소멸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법념처의 완성이며 불교 수행의 완성이다.


법념처의 다섯 그룹


가) 오개(五蓋)


오개는 다섯 가지 장애를 말한다.

1)감각적 욕망, 2)악의, 3)혼침과 게으름, 4)들뜸과 회한, 5)회의적 의심이다.


오개는 수행을 하려면 제일 먼저 나타나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덮개)를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다섯 장애를 싫어하거나 없애려하지 말고

법((dhamma)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려야 한다. 이들도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무상한 법의 성품을 지닌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오온(五蘊)


오온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이다.

우리는 항상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말하고 행위를 한다.

수행자는 이렇게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는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

래서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아님을 통찰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다) 12처


12처는 6근인“안 이 비 설 신 의”와 6경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다.

이들 6가지 감각기관이 6감각 대상과 만나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10가지 족쇄들을 알아차린다.

이 12곳에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12처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즉 근경식의 촉으로 일어나는 번뇌들이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한 순간의 현상임을 있는 그대로 알아 번뇌들에 묶이는 족쇄를 끊어야 한다.

라) 칠각지


칠각지는 깨달음의 요인 7가지를 말한다.

1)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2)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3)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4)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5)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6)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7)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다.


이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인은 수행이 잘 진행되어 의식이 고양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수행자는 칠각지가 생길 때 알아차림을 놓치면 일어난 칠각지를 좋아하고 그것을 집착한다.

그때 알아차림을 더욱 강화하여 7각지를 나의 것으로 집착하지 않고

이들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임을 통찰해야한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로 수행이 진행된다.


마) 사성제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고집멸도)를 말한다.

첫째 괴로움의 진리,

둘째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로 갈애 집착이라는 진리,

셋째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넷째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은 8정도라는 진리다.


삶 속에서 苦가 나타나면 이것을 나의 괴로움이라고 집착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괴로움이 있다” 하고 알아차릴

대상인 dhamma(법)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린다.

이렇게 괴로움을 법으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것이 법념처 수행이다.

이 괴로움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한 순간의 현상일 뿐 나의 것이 아니다.


4) 이와 같이 다섯 그룹의 법(dhamma)들이 일어나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그 법들이 사라지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법이 생멸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법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이지만,

이미 놓쳤다는 것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다.


5) 결론은 모든 경험되어지는 현상을 단지 법(dhamma)이라고 알아차리면,

그들은 일어나고 사라짐의 연속임을 알게 되고, 그 결과 그들 속에 숨어있는

보편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진리 (Dhamma)를 통찰하는 지혜가 생긴다.


이와 같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삼법인을 직관하면 모든 경험되어지는 법들에 대한 집착이 끊어져 열반에 이른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고집멸도 사성제다. 수행자가 괴로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내고,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한 열반을 증득할 것을,

그리고 苦를 소멸하는 방법으로 도성제(팔정도)를 설하셨다.


부처님은 초기 불교 경전에서 수없이 강조하셨다.

수행자는 자신의 오온(4념처)을 대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여 괴로움을 소멸한 열반에 이를 것만이

수행자가 가장 급하게 해야할 일임을 가르쳐 주셨다.

법념처의 첫 번째 그룹 - 다섯 장애. 오개(五蓋).

가).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알아차린다.

1) 수행을 시작하려면 제일 먼저 수행자가 맞이하는 손님은 이 다섯 가지 장애이다.

감각적 욕망, 악의 ,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이라는

정신적 현상들이 수행을 가로막는다.


실제로 수행에서는 주로 망상, 통증, 졸림, 싫증 의심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법으로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에서 법의 성품을 본다.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그냥 장애라고 생각하면 수행을 할 수가 없고,

이들이 알아차릴 법이라고 볼 수 있어야 수행이 된다.

이런 장애들을 반응하지 않고 수용하여 알아차릴 때 수행이 발전한다.

수행의 기초는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림으로 이겨내는 작업에서 다져진다.


2) 오개는 우리의 근본 번뇌인 탐진치와 연결된 마음의 작용들이다.

수행자가 탐진치로 지은 행위의 업력들이 잠재의식 속에 잠복되어 있다가

수행 중에 마음이 좀 고요해지면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음 또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이렇게 수행을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은 수행이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거센 물살로 나타나는 것이다.

수행자는 매순간 올라오는 장애에 대하여 다시 탐진치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법으로 알아차려 다시 장애의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그러므로 수행은 대단한 인내와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인 탐진치의 물살을 역류하여

관용, 자애, 지혜로 노를 저어 그 거센 탐진치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다섯 장애는 자신이 살아온 기본 습성이다.

그래서 계속 친구처럼 자주 반갑게 끊임없이 찾아온다.

수행자는 이것을 법으로 인정하고 알아차린다.

그러면 오개는 그냥 사라지지않고 수행자의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주고 사라진다.


이때의 장애는 수행자에게 좋은 친구 역할을 한 것이다.

수행자가 장애가 나타날 때마다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고

점차 탐진치를 제어하는 힘이 생기고 결국 장애를 뛰어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오개가 일어나는 순간이 수행을 할 수 있는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오개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림을 일으켜 점차 장애에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수행자의 의무를 다 한 것이다.


수행자는 알아차린 만큼 장애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수행자가 알아차렸다고 즉시 장애가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시 똑같은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싫어하지 않고 다시 알아차려주어야 한다.

장애가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탐심으로 수행자의 바른 마음가짐이 아니다.

장애가 없어지게 하는 것은 수행자의 몫이 아니고, 알아차리는 힘이 결정한다.


4) 장애는 곧 스승이다. 수행자가 장애를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면

그 자리에서 장애가 지혜가 된다.


얼음에는 물의 성분이 들어있지만 얼음을 마실 수는 없다.

그때 얼음에 열을 가하면 열기가 전달된 만큼 녹아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이 때 얼음을 녹이는 열기는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이다.

지금 번뇌에 물든 몸과 마음에서 알아차림으로 번뇌를 녹이고 지혜를 얻어 갈증에서 벗어난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집착하게 했던 무명과 갈애를 반복해서 알아차리면

점차 무명과 갈애는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몸과 마음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가 들어간다. 결국 장애가 나타나는 순간이 장애를 녹일 기회다.

이것이 장애를 싫어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다.

부처님께서 대념처경에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는 자기에게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있다'고 알며,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없다'고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일어난 감각적 욕망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감각적 욕망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다섯 장애가 이와 똑같은 문구로 반복되어 나온다.


장애가 있을 때 장애를 알아차리면 장애가 좋은 친구와 스승의 역할을 한 것이다.

수행자가 장애에 휩쓸리지 않고 장애를 뛰어넘을 때 통찰력이 생기고 수행이 발전한다.

그래서 장애를 장애로 만들거나, 친구로 만들거나, 스승으로 만들거나 하는 것은 수행자의 몫이다. 장애를 싫어하여 반응을 했는지, 아니면 장애를 법이 왔구나 하고 받아들여 알아차렸는지의 차이다.


그래서 수행은 끊임없는 노력과 알아차림과 대상에 마음을 모으는 집중의 힘으로 발전한다.


법념처의 첫 번째 그룹 - 다섯 장애. 오개(五蓋).


1).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린다.


육근이 육경에 촉할 때 좋은 느낌이 있으면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다.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을 없애려고 대결하면

오히려 그 마음이 자양분이 되어 감각적 욕망은 더 드세 진다.


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히면 여러 가지 물감을 섞어 풀어놓은 물과 같다.

이런 물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없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히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고, 왜곡시켜 받아들인다.

감각적 욕망은 빚을 진 것과 같고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면 빚을 갚고 자유인이 된 것과 같다.


2). 악의(惡意)를 알아차린다.


육근이 육경에 촉할 때 싫은 느낌이 있으면 악의가 일어난다.

또한 바라는 대상이 있는데 그것을 얻지 못할 때 악의가 일어난다.

그때 수행자는 악의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린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의를 더 내도록 조장하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악의도

더 드세게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악의를 내는 것은 펄펄 끓는 물과 같다.

펄펄 끓는 물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비춰볼 수 없다.

그래서 분노하는 사람은 현실을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다.

악의(惡意)는 병든 것과 같고 악의가 사라지면 병이 나아서 건강이 회복된 것과 같다.


3). 혼침(昏沈)과 게으름을 알아차린다.


수행자의 침체된 마음에서 나른함, 권태로움, 선하품, 기지개, 식곤증, 까라짐,

무기력함 등이 나타난다. 이런 장애가 일어날 때 즉시 알아차려야 한다.

졸음과 게으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을 탐익하여 졸음과 게으름에 자신을 던져버린다.


또한 혼침이 있는 것에 싫어하거나 화를 내는 것도 알아차림을 놓친 것이다.

수행자는 잠과 싸우거나 화내지 말고 잠이 오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

이때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려야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알아차리면서 잠을 잘 수도 있다.

다만 이때 잠들기 전까지 얼마나 알아차렸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혼침과 게으름에 빠지면 이끼와 풀로 덮여있는 물과 같다.

이런 물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쳐지지 않는다. 이처럼 혼침과 게으름에 빠지면

알아차리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다. 혼침과 게으름에 빠진 것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면 감옥에서 나와 해방된 것과 같다.


4). 들뜸과 회한을 알아차린다.


들뜸이나 회한이 있을 때 지금 들떠있음을, 후회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마음이 들떠서 불안정할 때, 지난 일들을 후회하거나 자책할 때, 그 마음을 없애려고 하면

들뜸과 회한을 더 드세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그냥 그런 현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때 몸과 마음의 느낌을 지켜보아야 한다. 후회하거나 자책하는 마음은

불선심을 일으킨 것이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선심의 마음이다.


들뜸과 회한에 빠지면 바람이 불어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과 같다.

이런 물에는 자신의 얼굴을 비쳐볼 수가 없다. 들뜨거나 근심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불안정하여 현실을 바르게 파악 할 수가 없다. 들뜸과 회한에 빠지면

노예가 된 것과 같다. 그것이 사라지면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된 것과 같다.


5). 회의적 의심을 알아차린다.


회의적인 의심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이다.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방법이나 수행 스승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붓다의 말씀이 진리인가, 정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인가,

또는 스승이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인가 하고 회의적으로 의심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심이 일어나면 지금 의심하고 있음을 즉시 알아차린다. 의심할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의심을 더욱 조장하고 이미 생겨난 의심을 더욱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의심에 빠지면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수행을 포기한다.


의심에 빠지면 흙탕물을 휘저어 어두운 곳에 놓아둔 물과 같다. 이런 물에는 자신의 얼굴을

전혀 비춰 볼 수 없다. 한 번 의심에 빠지면 귀중품을 들고 길을 가다 길에서 강도를 만난 것과 같다. 의심이 사라지면 강도가 사라진 것과 같다.


결국 다섯 장애는 장애가 아니고 알아차릴 대상으로서 수행의 재료이다.

수행자가 다섯 장애를 법으로 알아차리면 진리를 볼 수 있는 힘이 쌓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 장애가 수행자를 휩쓸어 버린다.


수행을 시작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그런 현상에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려주고,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 가슴의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다가 느낌이 사라지면

다시 수행의 주 대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럴 때 수행자는 장애에서 알아차림의 힘을 키우고 장애를 극복하게 된다.


이 과정은 알아차림을 하려는 수행자에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힘과

참고 견디는 인내력을 키워준다. 이런 노력과 알아차림이

결국 고요한 마음상태(定)를 얻게 하고, 드디어 생멸하는 법의 성품을 보게 해준다.
법념처의 두 번째 그룹 - 다섯 무더기. 오온(五蘊)


나). 오온(五蘊)을 알아차린다.


수행자가 수행을 시작하여 만나는 대상인 오개를 법으로 수용하여 알아차리다보면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고 좀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수행자는 직접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오온의 상호 작용을 볼 수 있게 된다.


오온은 마음(식)과 마음의 작용(수상행), 물질(색)이라는 다섯 무더기로

이들은 궁극적 실재로서 알아차릴 대상이다. 이때 수행자의 오온은 서로 연기되어

매 순간 새롭게 일어나고 또 사라진다.


법념처는 이런 오온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즉 '나'라고 집착하지 않고,

오온을 법으로 객관화해서 있는 그대로 통찰하여,

오온에서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나'등으로]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나'등으로]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는 '이런 것이 물질이다. 이런 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런 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 이런 것이 느낌이다....일어남이다... 사라짐이다...

인식이다... 상카라... 알음알이...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고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이와 같이 비구는 ['나'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라고 말씀하셨다.

오온은 제법의 보편적 특성인 삼특상을 가지고 있다. 수행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이 삼특상을 통찰하고 오온에 대한 취착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1) 무상하다 -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은 반드시 조건에 의해 변화하며,

일어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항상 하는 것이 없다.


2) 苦이다(불만족이다)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 영원하지 못하고,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또 사라지므로 苦(불만족)이다.

아무리 행복한 것도 행복이라고 느끼는 순간 변하고 있다.


3) 무아이다 - 이렇게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을 나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오온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오온은 생멸한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붓다께서는 아들 라훌라에게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오온을 나(我)인 줄 알고 집착하는 것은 오취온(五取蘊)이다.

우리 이런 집착의 바탕 위에서 말과 몸으로 행위를 하고,

그 행위의 업력이 새로운 태어남과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色은 물질로써 이 형상은 한 조각의 거품과 같다.

受는 느낌으로 하나의 물방울 같다.

想은 관념으로 한편의 아지랑이 같다.

行은 마음의 작용으로 파초나무 같으며,

識은 의식인데 마치 요술의 환상과 같다.


이와 같이 오온은 짧은 순간 찰나 생멸하는 법의 성품을 가졌다.

이런 성품을 가진 몸과 마음은 법(法)으로서 알아차릴 대상이지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수행자의 몸과 마음은 수행의 도구로 피안에 도달하는 뗏목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이 있어야 몸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번뇌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대하여 집착은 하지 않지만 상처가 나지 않게 보호할 의무는 있다.


법념처의 두 번째 그룹 - 다섯 무더기. 오온(五蘊)


첫째, 색온(色蘊)을 알아차린다.

물질을 내 몸이라고 집착하면 괴롭다. 있는 그대로 물질의 실재하는 성품인 4대를 알아차린다.

몸은 본래 병과 고통의 먹이이다. 그런데도 육체를 나의 몸이라고 취착하여

자연적인 노화로 육체가 쇠퇴하는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고통을 겪는다.


항상 조건에 의해 생긴 것은 조건에 의해 변화하고 사라진다.

그러므로 육체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곧 괴로움이다.

수행자는 몸이 변하는 것에서 법의 성품을 통찰할 수 있어야 지혜가 생긴다.

물질의 현상을 단순하게 지수화풍 4대의 변화로 받아들이면 괴롭지 않고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지혜가 생긴다.


둘째, 수온(受蘊)을 알아차린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촉해서 일어나는 느낌을 나의 느낌이라고 집착하면 괴롭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느낌은 항상 있는 것이다. 수행자는 어떤 느낌이든지

단지 느낌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느낌이 일어나면 일어난 것을 알고

사라지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은 조건지어진 대로 생멸할 뿐 느낌의 주인은 없다.


느낌은 종류는 세 가지이다. 좋거나 싫거나 덤덤한 느낌이 있다. 어떤 느낌이든지

내 느낌이라고 집착하면, 즐거운 느낌은 탐욕으로, 괴로운 느낌은 성냄으로,

덤덤한 느낌은 무지로 쌓이기 때문에 모두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수행자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현재의 느낌에 휘둘리지 않고,

느낌의 생멸을 보고 거기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지혜가 생긴다.


셋째, 상온(想蘊)을 알아차린다.

과거의 경험으로 저장된 상(想)을 나의 것으로 집착하면 괴롭다.

이미 상으로 저장된 정보는 내가 본다는 유신견의 바탕에서 만들어진 오염된 정보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은 이 순간의 실재가 아니고 허상인 관념이다.

허상인 관념을 실재라고 착각하면 괴롭다. 상이 뜰 때마다 알아차릴 대상으로 맞이한다.

상온(想蘊)은 여러 가지 정보들의 모임이다.

6근이 6경과 촉할 때 이미 과거에 저장해 놓은 정보에 의해

지각 인식 기억 표상작용 표시 몸짓 등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지각작용을 한다.

상(想)은 대상을 받아들여 인식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상 몇 가지가 빠르게 조합되면

귀신이나 산신령 같은 헛것을 보게 하는 역할도 한다.

상(想)은 마음의 작용 중 하나로 대상을 자기만의 색갈로 덧칠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념을 다시 만든다.


상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건지어진 대로 일어나고 사라진다.

수행자가 자신의 상(想)에 집착하면 괴롭다. 이 想은 내 관점으로 본 오염된 정보인데

이것을 바른 것이라고 집착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모든 관념들 때문에 괴롭다.

관념을 떠난 실재를 보아야 진리를 볼 수 있고 통찰지혜가 생긴다.


넷째, 행온(行蘊)을 알아차린다.

행은 마음의 형성력, 정신적 형성력, 의지작용 등으로 다음 순간의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마음의 의지작용이다. 이 행의 무더기(行蘊)는 모두 50가지가 있다. 어떤 행도 내 것이 아니며

그 순간의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 어떤 행도 알아차릴 대상이며 그 행의 주인은 없다.


그러나 마음의 의지작용은 즉시 선업이나 불선업의 행위(行爲)로 연결되고,

이 행위는 반드시 과보를 심으면서 사라진다. 이 행온의 업력이 종자로 전해진다.

그래서 일단 행위가 일어나면 그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


행은 선심의 행과 불선심의 행이 있는데, 탐욕, 분노, 혐오, 후회, 인색 등의 마음의 작용은

불선업을 일으키는 행온이고, 믿음 알아차림 관용 자애 지혜는 선업을 일으키는 행온이다.

어떤 행온도 알아차릴 대상이지만 특히 불선한 마음의 작용은 알아차림에 의해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바뀌고 선과보의 원인이 된다.

다섯째, 식온(識蘊)을 알아차린다.

식온은 마음의 무더기인데 생각, 망상, 기분 등으로 표현된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과 함께 생멸한다. 마음의 특성은 무상하고, 조건에 의해 찰나생 찰나멸하면서

계속 흐른다. 또한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은 오직 대상을 받아들여

아는 기능만 한다. 그런데도 식온을 오온의 작용을 알아보는 주체로서, 이 마음을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 유신견이며, 유신견이 있는 한 깨달음을 얻거나 괴로움을 소멸할 수 없다.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빛이 있어야 하고, 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대상을 알게 되는

안식이 일어난다. 이렇게 네 가지 조건이 모여야 대상을 아는 것이 성립된다.

여기에 어떤 다른 힘이나 절대자가 개입되지 않는다.

오직 눈과 대상과 빛과 보려는 의지작용이라는 조건만 있다.

그리고 조건에 의해 일어난 안식은 조건에 의해 사라진다. 안식은 일어나는 순간 사라지고

다음 순간 새로운 안식이 일어난다. 이렇게 식은 내가 아니고 그 순간의 조건에 의해

대상을 아는 마음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찰나를 보는 안목과 원인과 결과를 통찰하는 지혜가 없어

내가 안다(식), 내가 무엇이다(상), 내가 느낀다(수) 내가 행한다(행),

이 몸이 내 것이다(색) 하고 집착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법념처의 두 번째 그룹 - 다섯 무더기. 오온(五蘊)

지금까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나(我)라고 알고 있던 잘못된 견해를 부수고, 오온이 내가 아니고,

조건에 의해 찰나 생멸하는 것이 실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여기에 통찰 지혜를 닦는 위빠사나 수행의 일차적 대상이

오직 현재의 자신의 몸과 마음뿐인 이유가 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아닌 밖의 대상에서는 즉시 내가 본다는 유신견이 필연적으로 바탕에서

작용하므로 있는 그대로 실재를 바르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있는 그대로 본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 진리를 볼 수 있는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오온)이다.

즉 심법과 심소법과 색법만이 궁극적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수행자가 오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보이는 현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을

나의 것으로 집착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며 괴로움을 생산한다. 이와 같이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고.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순간부터 오온에 대한 탐욕이 일어나고,

탐욕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 행위를 하고 계속 탐욕의 성향을 쌓아간다.

이처럼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는 유신견이 남아있는 한, 나(我)의 이익을 위해서 계율을 소홀이하고, 불선업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여 쉽게 행한다. 오온이 곧 '나'라는 생각에 묶인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오온을 바르게 관찰하면서 매순간 오온의 생멸을 보고,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알면, 실재하지 않는 '나'에 묶이지 않고, 오취온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무아(無我)라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계속 먹고 자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며

매 순간 잘 살아간다. 다만 잘못 생각한 '나'가 없어지는 것으로, ‘나’라는 집착만 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지혜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면 '무아'라고 해서 섭섭할 것도 없고,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어떤 것에도 번뇌로 묶이지 않는 자유를 얻는다.

오온은 내가 아니고 오직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이며, 그 안에 변하지 않는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것도 아니다. 오온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한 순간의

현상들의 모임으로, 제법의 특상인 무상 , 고, 무아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도구이다.


수행자는 오직 몸과 마음을 수행 도구로 생각하여 오온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수행을 하면 오온에 대한 실상을 보고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 열반을 얻어 생사윤회의 고리를 끊게된다.

법념처의 세 번째 그룹 -12처의 족쇄.


법념처의 세 번째 그룹은 십이처(十二處)입니다. 십이처(十二處)는

육내처(六內處.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와

육외처(六外處. 여섯 가지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육경(六境))를 합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 12처를 알아차릴 대상(법)으로 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법념처에서 십이처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감각기관인 6근과 감각 대상인 6경이 촉할 때

마음이 대상에 휘둘려서 탐진치를 일으키면 그것을 알아차려, 12처를 집착하지 않고

12처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만일 6근이나 6경에 알아차림이 없으면 6식을 할 때 일어나는 느낌에 의해 집착이 일어나고,

이 집착은 존재들을 욕계 색계 무색계에 묶어주는 족쇄가 됩니다. 이렇게 12처에서

알아차림이 없어 족쇄를 계속 만들면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없고 생노병사의

로움과 함께 하는 생을 계속 이어가야합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근경식의 촉으로 일어나는 족쇄를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립니다.

또 이미 일어난 족쇄는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를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버린 족쇄가 앞으로 어떻게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지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법념처에서 말하는 12처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족쇄란 현재의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번뇌로 모두 열 가지입니다.

열 가지 족쇄는 오상분결 5가지와 오하분결 5가지입니다.

오하분결은 중생을 욕계에 태어나게 하는 족쇄입니다.


1.유신견(有身見) - 자아가 있다는 견해. 오온이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삿된 견해.

2. 계금취견 - 형식적 계율과 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삿된 견해.

3. 의심 - 불법승 삼보나 계율, 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

4. 감각적 욕망 - 감각적으로 즐길만한 대상을 추구하는 욕망.

5. 악의(惡意) -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등의 성내는 마음. 악한 의도.


오상분결은 중생을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게 하는 족쇄입니다.

6. 색계욕 - 감각적 욕망을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 물질의 세계와

그 느낌에 대한 집착으로 색계 천상에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


7. 무색계욕 - 모든 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 정신세계나

그런 산냐(인식)에 대한 집착으로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


8. 아만(我慢) - 내가 남보다 낫다, 못하다, 동등하다 하고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마음.


9. 들뜸 - 들뜨고 불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현재의 대상에 두지 못하고 과거 미래로 헤매는 마음.


10. 어리석음(無明) - 모든 해로움과 괴로움의 근본 뿌리입니다. 사성제를 모르고,

연기와 삼법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처를 알아차리는 것은 곧 12처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이 족쇄마저 한순간의 현상일뿐, 생멸하는 법으로 보아 족쇄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즉 12처를 있는 그대로 법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구나!'

'악의가 있구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었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회의적 의심을 하고 있네!'

'기도 가피를 바라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그 순간만은 번뇌에서 벗어납니다.


그런 다음 즉시 마음을 몸에 붙여서 알아차림을 이어가면

일시적으로 이런 번뇌는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번뇌(족쇄)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라한의 정신적 수준에서 가능합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의 시작으로 번뇌의 순간적 소멸을, 그리고 알아차림을 이어감으로

번뇌의 일시적 소멸을 하면서 꾸준히 정진하는 사람들입니다.

완전한 번뇌의 소멸은 이런 끊임없는 정진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번 알아차리고 다시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다시 탐욕의 번뇌(감각적 욕망의 족쇄)가 일어난 것입니다.


법념처의 세 번째 그룹 - 십이처의 성인(聖人) 4과

수행자가 4념처 위빠사나 수행으로 8정도를 닦아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고

모든 번뇌가 소멸한 열반을 체험하면 성인의 흐름에 듭니다.


그러나 열반을 체험한 성인이라 하더라도 소멸해버린 족쇄의 종류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들의 각 단계마다 소멸되는 족쇄가 다릅니다.


* 수다원에서는 오하분결 중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의 족쇄는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리고 아주 거친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없어지지만 중간 정도의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남아있어 아직 일곱 가지 족쇄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면 거친 탐심과 성냄이 없으므로 저절로 계율을 지키게 되어

4악도에 떨어질 만한 행위는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행위의 결과로 결코 4악도로

윤회하는 일은 없고 인간계나 욕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인의 흐름에 들었다고 해서 예류과라고 합니다.


* 사다함은 유신견 , 계금취견, 의심의 족쇄는 이미 소멸되었고, 거칠거나 중간단계의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많이 소멸되었지만 아직 미세한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오상분결도 남아있어 아직 일곱 가지 족쇄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더 욕계에 윤회하여 나머지 일곱 가지 족쇄를 끊어

그 생애에서 아라한이 됩니다. 그래서 한번 욕계에 태어난다고 해서 일래과라고도 합니다.


* 아나함은 욕계로 윤회하는 오하분결인 다섯 가지 족쇄는 완전히 사라졌고,

오상 분결 중 아만, 들뜸, 어리석음이 약화됩니다. 그러나 색계욕과 무색계욕은

그대로 남아있어 아나함은 아직 오상분결의 족쇄가 남아있어 정거천이라는

천상으로 윤회하여 거기에서 수행하여 아라한이 됩니다.

그러므로 욕계에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불환과라고도 합니다.

* 아라한은 다섯 가지 오상분결마저도 완전히 소멸되어 존재의 원인이 되는

열 가지 족쇄가 다 소멸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태어남이 없습니다.

즉 윤회가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세간의 조건지어진 세계를 벗어나 조건이 소멸된

출세간인 열반의 세계에 들어 생사가 없는 불사(不死)의 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모든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만한 분으로, 최고의 수승한 복 밭이 되므로,

마땅히 공양 받을만한 분 응공(應供)이라 합니다. 붓다께서 가르침을 펴신 목적이나

수행자들의 수행목적은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괴로움과 함께하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12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족쇄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의 깨어있음은

수행자가 행해야하는 실천 수행법입니다. 이론으로 족쇄를 알고 이해했다고

족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족쇄도 무상한 성품을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족쇄에 다시 걸려 새로운 족쇄를 만드는가, 또는 족쇄가 있음을 알아차려

족쇄에서 벗어나는가 하는 것은 수행자의 몫이며 선택사항입니다.


법념처의 네 번째 그룹 -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인


깨달음의 요소를 빨리어로는 보장가(Bojjhanga)라고 한다. 법념처의 네 번째 그룹으로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 七覺支)가 있다. 칠각지(七覺支)라고도 한다.


1)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사띠보장가

2)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담마위짜야보장가

3)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위리야보장가

4)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삐띠보장가

5)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빠삿띠보장가

6)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사마디보장가

7)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우?카보장가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며, 깨달음이란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를

자기 체험으로 통찰하여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오는 일곱 가지의 요소는 일차적으로 알아차림이 성숙되면서 이루어진다.

7각지는 수행자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적 현상이다.

이러한 좋은 현상은 수행의 발전이지만, 이 좋은 현상에도 알아차림이 없으면

집착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행의 장애가 된다.


그래서 매 단계의 현상은 오직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라고 알고 다시 수행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지만 좋다고 집착하면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다.


첫째,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알아차림을 빨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한다. 7각지의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는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강력하여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이 확고할 때 염각지라고 할 수 있다.

수행 초기단계의 알아차림보다 훨씬 순도가 높은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부족하면 수행이 결코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이다.


붓다께서는 대념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수행자는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2)또는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3)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4)그리고 이미 생겨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면

그것을 올바로 알아차린다."

알아차림은 오온 중에 마음의 작용인 행(行. 상카라)에 속한다.

알아차림은 마음의 작용중에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분류가 된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선업이어서 번뇌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래서 저절로 계율을 지키게 되며 그 다음 청정한 마음집중이 생기고

이런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인 생멸을 보고,

무상과 고와 무아를 통찰하게 되고, 결국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 마침표를 찍으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이다.

알아차리고 어떤 결론을 내면 알아차림이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최종상황을 또 다시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야 한다.

이런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는 7각지의 시작이다.

법념처의 네 번째 그룹 - 일곱 가지 깨달음의요인


둘째,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법에 대한 고찰을 빨리어로는 담마 위짜야(Dhamma vicaya)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깔라마경에서 붓다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믿지 마라.

이것은 맹신이다. 붓다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법에 대한 탐구를 해라.

그 결과로 법을 체험해서 이해될 때 법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이 가르침은 수행을 통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확인하라는 말씀이다.

생각이나 이론적인 이해로 붓다의 가르침을 확인 할 수 없음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수행자가 우선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확립되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법으로 볼 수 있다. 선법과 불선법을 가려서 볼 수 있고,

지금 만나는 대상이 실재(빠라마타)하는 법인지, 법이 아닌 관념(빤냐띠)인지 가려 볼 수 있고,

오온(색, 심, 심소)의 고유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조건적 특성을 볼 수 있고,

결국 보편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법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즉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가 확립되면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택법각지가 생긴다.

그래서 택법각지는 법을 가려보는 정견에 속한다.


"수행자는 내적으로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나에게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셋째,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정진을 빨리어로 위리야(Viriya)라고 한다. 또는 노력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알아차림과 함께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노력이다.

노력은 알아차림을 하는 일에서 물러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이런 인내가 모여서 열반으로 이끈다. 수행자는 스승과 선각자가 간 길에 대한

확신을 갖고 노력을 한다.


노력은 정신적인 노력이 있고 신체적인 노력이 있다.

정신적인 노력은 알아차림을 강화하기 위해서 계속 마음을 새로 내서

현재를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노력은 알맞게 경행을 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집중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노력도 알맞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노력이 지나치면 산란해진다.

지나치게 잘 하려고 하면 긴장이 되고 몸과 마음이 경직된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균형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노력이 지나치다 싶으면 법의 고찰과 정진력과 기쁨을 키우지 말고

평안함과 집중력과 평등심을 키워야한다.

넷째,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기쁨을 빨리어로 삐띠(Piti)라고 한다. 삐띠는 기쁨, 희열, 좋아하고 만족함을 말한다.

삐띠는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생긴 마음의 기쁨이 육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삐띠는 몸과 마음을 기운차게 한다.


삐띠의 종류는 다섯 가지가 있다.


조그만 기쁨, 순간적인 기쁨, 진동하는 기쁨, 도취의 기쁨, 널리 퍼지는 기쁨이 있다.

처음에 이런 삐띠가 몸에 나타나면 놀라거나 좋아하게 된다.

이때도 그 현상을 다시 그대로 알아차린다.


이때도 희각지가 있으면 지금 희각지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또한 없으면 없다고 알아차리고,

다시 생겨나면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완성되면 완성되었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희각지도 좋아하거나 집착하면 수행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

이 순간에 알아차릴 대상인 법일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법념처의 네 번째 그룹 -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인


* 다섯째,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평안을 빨리어로 빠사디(Passaddhi) 라고 한다.

또는 평온, 평안함, 가벼움, 휴식, 안정의 뜻도 있다. 기쁨이 생긴 수행자가

기쁨을 알아차리면 그 다음으로 몸과 마음이 평온해 지고 경쾌한 느낌이 생긴다.


이때가 되면 자기나 남이나 모두 업만이 각자의 재산이 됨을 생각하게 되며 경안각지가 확립된다. 이때에도 평온하고 가볍고 안정된 이 느낌을 집착하면 더 이상 수행이 나가지 못한다.

"수행자는 내적으로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나에게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경안각지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다시 현재의 주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한다.


* 여섯째,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집중을 빨리어로 사마디(Samadhi)라고 한다. 집중을 삼매라고도 하는데 집중의 정확한 뜻은

'청정한 마음의 집중'이다. 또는 '고요한 마음의 집중'이라고 한다.

그냥 집중이 아니고 청정함이 선행되어 생긴 집중을 말한다.

청정은 12처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평안해진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고요한 집중으로

사마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는 대상에 마음이 가볍게 놓여있는 상태이다.

사마디는 대상을 옮겨 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알아차릴 때 생긴다.

산란하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 정각지(定覺支)가 생기지 않는다.

청정한 마음 집중으로 고요한 상태가 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드러난다.

사마디는 행복에 가까운 기분을 준다. 마치 바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타고 있는 등불처럼 마음이 고요하다.


"수행자는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마음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나에게 마음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린다.

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마음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정각지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일곱째,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평등을 빨리어로 우?카(Upekkha)라고 한다, 우?카는 통일된 마음으로 대상을

평등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적당하게 고르게 알아차리기 때문에 평등이라고 한다.

평등의 상태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에 기울지 않고,

고요한 집중의 상태에서 기쁨도 없기 때문에 평등심의 상태로 본다.

이것은 시비 분별을 버림으로 얻어진 평등이다. 그래서 사각지(捨覺支)라고 한다.


"수행자는 내적으로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나에게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이 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평등각지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사성제(四聖諦) -고성제(苦聖諦)


사성제는 빨리어로 아리야사짜(Ariyasacca)라고 한다.

빨리어 아리야(Ariya)는 성자(聖者)라는 뜻이다. 사짜(Sacca)는 진리, 진실, 제(諦)라는 뜻인데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아리아 사짜는 성스러운 진리를 말한다.


1)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는 성스럽다는 뜻으로 사성제이다.


2)고집멸도 사성제는 성자(聖者)에 의해 발견된 진리라는 뜻이다.


3)또한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어야만 사성제를 바르게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자들만이 알 수 있는 진리이며 수행자는 관념적으로 사성제를 이해한다.


수행자가 열반을 얻기전 까지 사성제를 아는 것은 관념적 이해로 아는 것이다.

실제로 수행을 통해서 멸성제인 열반을 체험해야 사성제를 관념적 이해가 아닌

완전한 이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통찰지로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관념적인 이해가 선행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수행을 해야

제대로 사성제에 대한 앎을 얻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 사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수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여 머무는가?

여기 비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라고

* 첫째, 고성제(苦聖諦)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나는 둑카의 실제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한다 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담마에 대한 眼目이 생겼고, 知가 생겼고, 慧가 생겼고,

明이 생겼고, 光이 생겼다.”라고

다시 말하면 매 순간 일어나는 괴로움은 알아차릴 대상이며,

수행자는 괴로움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그 괴로움 안에 제법의 삼특상인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이 들어있다.


괴로움을 빨리어로 둑카(Dukkha)라고 한다. 이 둑카는 의미하는 뜻이 매우 다양해서 한마디로 표현을 하기에 적합한 우리말이 없다. 그냥 "둑카" 라고 하거나 괴로움, 고통, 고뇌, 불편, 불행, 고(苦) 등으로 부르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래도 둑카에 대한 가장 적당한 우리말은 ‘불만족’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둑카이며,

우리가 가진 갈애는 만족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어 계속 불만족(苦. 둑카)일 수밖에 없다.


빨리어 둑카의 두(Du)는 '하찮은'이란 뜻이며 카(Kha)는 '비어있음'이란 뜻이다.

이것의 합성어로 둑카(Dukkha)라고 한다. 사실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괴로움을 나의 것으로 집착하여 불안하고 두려워서 괴로운 것이다. 무

슨 일이나 실제로 부딪쳐 보면 하찮고 비어있는 것으로 별것도 아닌데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행자가 괴로운 현재를 법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리면, 그것은 하찮고 비어있는 것으로,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무상한 성품을 지녔고, 조건에 의해서

생멸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무아의 성품을 보게된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현재의 둑카를 있는 그대로 보아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고성제의 의미는 살아있는 한 괴로움이 현실적으로 상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고 알아차림이 없이 갈애를 일으키면 둑카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괴로움은 실재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없애려 하기보다

괴로움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한다면 오히려 지혜가 나서 현재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생노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의 8가지 괴로움이

항상 상존하고 있다. 또 다른 말로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으로 고의 성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바다에서 살 수밖에 없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괴로움을 법으로 수용하여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괴로움은 항상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원래 그럴 수밖에 없도록 조건지어진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반응하지 않고,

괴로움을 나의 것으로 붙잡지 않고, 객관적으로 어떻게 변해 가는지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수행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을 법으로 받아들여 괴로움을 극복할 때, 수행자는 의식이 고양되며,

괴로움이 지혜가 되며, 수행자에게 성스런 진리가 되는 것이다.


사성제(四聖諦) -집성제


* 둘째, 집성제(集聖諦)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집성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나는 둑카를 일으키는 실제진리는 당연히 끊어야한다 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담마에 대한 眼目이 생겼고, 知가 생겼고, 慧가 생겼고,

明이 생겼고, 光이 생겼다.”

괴로움이 생긴 근본 원인은 모두 갈애(渴愛)가 쌓여 생긴 집착 때문이다.

갈애는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다니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으려고

애타게 찾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갈애의 바탕에는 무명(유신견)이 상존하고 있어

매순간 갈애가 일어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무명(몸과 마음이 '나'라고 알고 있는 삿된 견해. 유신견)과 갈애와 집착이 번뇌다.

번뇌로부터 괴로움이 일어나고 또한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래서 갈애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에게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없다. 갈애에서 벗어난 자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그에게는 집착이 없기 때문에 번뇌로부터 해탈에 의한 자유를 맛본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수행자는 갈애가 느낌으로부터 오지만 그 안에는 오온을 나로 착각하는 무명이 갈애를 일으킨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느낌에 의해 갈애가 생기고, 이 갈애는 집착을 일으킨다.

이 집착은 그것을 얻으려는 말과 행위를 한다. (受==> 愛-> 取-> 有==>生->老死)


갈애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영원히 살고 싶다는 갈애와,

살고 싶지 않다는 갈애가 있다. 여기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6근이 6경에 촉할 때 즐겁고

재미있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대상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갈애는

존재에 대한 욕망으로 상견이며 생에 대한 탐심이며, 살고 싶지 않다는 갈애는

비존재에 대한 욕망으로 단견이며 생에 대한 성냄이다.


기본적인 다섯 가지 욕망(五慾)은 재물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다.

이 갈애는 다음 생을 만드는 원인이 되는 업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범부는 갈애의 노예이다.

범부는 그 주인인 갈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수행자는 갈애조차도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있는 그대로 보아 갈애가 시키는 대로 행위를 하지 않고 그 순간을 알아차림으로 채우려고

력하고 실제로 한 순간이라도 갈애에 의한 행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다.

법념처의 사성제 - 멸성제

셋째, 멸성제(滅聖諦)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멸성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나는 둑카를 소멸 시키는 실제진리는 당연히 증득해야한다 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담마에 대한 眼目이 생겼고, 知가 생겼고, 慧가 생겼고,

明이 생겼고, 光이 생겼다.”

멸성제는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되는 열반에 대한 진리이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완전히 소멸하면 당연히 괴로움도완전히 소멸된다.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것을 닙바나(열반)라고 한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서 삼법인의

진리를 통찰하고, 그 결과로 모든 집착이 소멸될 때 생멸이 없는 열반을 체험한다.


수행자가 열반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는 7청정과 위빠사나의 16단계의 지혜가 있다.

이 7청정과 16단계 지혜는 수행자의 의식이 고양되는 과정에서 함께 맞물리면서 올라간다.


4념처 수행으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고 탐진치가 소멸되어 집착이 사라질 때

14단계 도의 지혜와 15단계 과의 지혜의 단계에 들어가서 열반을 체험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탐진치가 완전 소멸 되었을 때 우리를 존재 계에 묶어두는 10가지 족쇄가 끊어지면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에서 벗어난다.


붓다께서는 삶은 괴로움이다. 그런데 그 괴로움을 완전 소멸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소멸할 수 있는 그 길이 사성제의 도성제로서 8정도이며, 8정도의 실천 수행법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 것을 초기 불교 경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신수심법 사념처를 위빠사나(분리하여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 길로 가면 반드시 괴로움의 완전소멸을 경험하고 드디어 윤회를 끊는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대념처경에서 보증 하셨다.


수행자가 멸성제에 도달하는데 7청정과 16가지 단계의 통찰지혜(위빠사나 지혜)가 있는데, 이들은 서로 관계성을 가지고 단계별로 차곡차곡 향상되는 순서를 밟는다. 그러나 이 과정은 부처님께서 임의로 만들어낸 과정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경험하여 밟으신 과정으로, 부처님께서도 이 과정을 순서대로 겪으면서 열반에 이르셨으며, 먼저 이 길을 경험한 선배로서 수행자들에게 그 길을 따라오라고 밝혀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수행을 하면 16단계 지혜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 과정을 벗어난 다른 경로로 열반에 이르는 경우는 없다. 부처님도 우리들처럼 이런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이 주는 메시지는 붓다는 신처럼 어떤 초월자로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아닌, 우리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그 길을 자세하게 밝혀놓으신 붓다의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완전한 진리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


1. 지계의 청정(Sīla Visuddhi) - 계 청정(戒 淸淨)

2. 마음의 청정(Citta Visuddhi) - 심 청정(心 淸淨)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 Rūpa Pariccheda Ñāṇa)

3.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 - 견청정(見 淸淨)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aha Ñāṇa)

4.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Kaṅkhāvitaraṇa Visuddhi)

- 도의 청정(度疑 淸淨)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asana Ñāṇa)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ṇa)

5. 바른 길을 아는 청정(Maggāmaggañãṇadassana Visuddhi)

- 도비도지견 청정(道非道智見 淸淨)

6.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Paṭipadāñāṇadassana Visuddhi)

-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 淸淨)


(5) 소멸의 지혜(Bhanga Ñāṇa, Bhaṅga Ñāṇa)

(6) 두려움에 대한 지혜(Bhaya Ñāṇa)

(7) 고난의 지혜(Ādīnava Ñāṇa)

(8) 혐오감에 대한 지혜(Nibbidā Ñāṇa)

(9) 해탈을 원하는 지혜(Muñcitukamayatā Ñāṇa)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Paṭisankha Ñāṇa, Paṭisaṅkha Ñāṇa)

(11)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nkhārupekkhā Ñāṇa)
(12) 적응의 지혜(Anuloma Ñāṇa)

(13) 성숙의 지혜(Gotrabhū Ñāṇa)

(14) 도의 지혜(Magga Ñāṇa)

(15) 과의 지혜(Phala Ñāṇa)

7. 지혜통찰의 청정(Ñāṇadassana Visuddhi) -지견청정(智見 淸淨)

(16)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지혜(Paccavekkhana Ñāṇa)


청정도론에서는 순수 위빠사나의 10가지 번뇌[十觀隨染]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10가지를 수행자들이 수행 중에 경험할 때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으로 수행자에게는 번뇌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7청정 중 다섯 번째 청정인 바른 길을 아는 청정이 있어야 10가지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①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한다.[光明. ochaasa]

②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 된다.[知. ~naa.na]

③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긴다.[喜. piiti]

④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 진다.[輕安. passaddhi]

⑤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樂. sukha]

⑥ 강한 신심이 생긴다.[勝解. adhimokkha]

⑦ 더욱 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한다.[努力. paggaho]

⑧ 흔들림이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다.[現起. upa.t.taana]

⑨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상태가 된다.[捨. upekkhaa]

⑩ 이러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欲求. nikanti]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지혜가 성숙되고 그것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현상이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단지 열 가지 번뇌에 해당한다. 왜냐 하면 지혜가 성숙되는 현상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나의 지혜라고 좋아하면 그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행으로 얻은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알아차릴 대상에 속한다. 즉 열반(닙바나)까지도 회광반조에 의해 다시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다. 수행자가 경험한 열반을 내가 얻은 열반이라고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법의 성품이다. 만일 열반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가 얻은 열반은 유사열반이지 모든 번뇌를 소멸한 진실한 열반이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어느 것도 붙잡지 않고 그냥 다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특성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이런 알아차림만이 통찰 지혜를 만들고 집착을 소멸하고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된다.

법념처의 사성제 - 8정도(정견, 정사유)


넷째, 도성제(道聖諦) = 팔정도(八正道) :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도성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이것이 진실로 둑카의 소멸로 이끄는 실제진리는 당연히 수행해야한다 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담마에 대한 眼目이 생겼고, 知가 생겼고, 慧가 생겼고, 明이 생겼고, 光이 생겼다.”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는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통해서 만이 깨달음(열반)에 이른다. 팔정도는 戒(정어 정업 정명), 定(정정진 정념 정정), 慧(정견 정사유) 삼학(三學)을 다 포함하고 있다. 오직 여덟 가지 바른 길로 수행을 할 때 위빠사나 지혜가 증진되어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열반에 도달한다.


팔정도는 양 극단(쾌락과 고행)을 버리는 중도(中道) 수행이다. 8정도의 중도수행은 그 결과로 열반에 이르는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이다. 8정도의 시작은 알아차림 정념(正念)이다. 알아차림이 있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 8정도이며, 위빠사나 수행이다.


1. 정견(正見. Samma ditthi. 慧)


1) 세간의 바른 견해


* 선과 불선에 대한 앎 - 우리 모두는 "1) 업의 소유자. 2) 업의 상속자. 3) 업을 모태로 하는 자. 업을 친지로 하는 자. 업을 의지 처로 하는 자"라는 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세간적인 정견이다. 그 결과로 항상 10선행을 하며, 보시와 지계와 수행으로 자신을 정화하고 그 결과로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2) 출세간의 바른 견해


* 사성제에 대한 앎 - 사성제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괴로움이 있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괴로움의 발생의 원인을 당연히 끊어야 하고, 괴로움의 소멸은 반드시 증득해야하며,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당연히 닦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삼법인에 대한 앎 -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다.


* 연기에 대한 앎 - 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다. 모든 법(현상)은 원인에 따른 결과로 이어짐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 이와 같이 연기를 이해하고 실 수행으로 삼법인을 체험하여 세간에 대한 탐진치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오온을 나라고 아는 유신견, 상견, 단견 등의 삿된 견해를 벗어나는 것이 출세간의 정견이다.

2. 바른 사유(正思惟. Samma sankappa. 慧)
정사유는 지혜와 함께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출리사유(出離思惟) - 감각적 욕망으로 일어나는 탐심을 극복하는 사유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마음가짐이다.


무에사유(無恚思惟) - 분노를 극복하고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유를 한다. 다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자비의 마음가짐이다.


무해사유(無害思惟) -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유를 한다. 고통 받는 사람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길 바라는 연민의 마음가짐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려하는 마음이 바로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사유를 한다.

바른 사유란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에 바탕을 둔 자비심의 함양이다.


정견과 정사유는 혜(慧)에 속한다. 정견은 어리석음(치심)을 해결하는 것이고 정사유는 탐심과 성냄을 해결하는 것으로 둘 다 지혜의 항목이다. 곧 지혜로 자신을 보호하고 자비로 남을 보호한다.


법념처의 사성제 - 8정도 (정어, 정업, 정명)


3. 바른 말(正語. Samma vaca. 戒)


말을 할 때 알아차림으로 말을 한다. 만일 탐진치가 일어나도 알아차림만 있으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 선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미리 막을 수 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과 남을 찍는 도끼도 된다. 그래서 말을 잘하고 살기가 어려운 만큼 알아차림으로 바른 말을 하면 이익도 그만큼 크다.


보통 술을 먹으면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조절이 안 되어 여러 가지 실수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술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도 탐진치에 취해서 말과 행동이 적절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불러온다.


바른 말에는 4가지가 있다.


1) 거짓말(망어)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진실만을 말한다. 자기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 이간질(양설)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화해시키고 화합하는 말을 한다. 생각 없이 스트레스 해소차원에서 남의 이야기를 나쁘게 하는 것은 정어가 아니다.


3) 거친 말(악구)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부드러운 말, 귀에 거슬리지 않는 포근한 말, 우정과 용기를 주는 말,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한다.


거친 말은 분노에서 나온다.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를 삭일 수 있는 지혜와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있어야 분노를 극복할 수 있다. "나를 정말 해롭게 하는 것은 내 마음 속의 분노다"라는 지혜가 있으면, 분노를 밖으로 표현하기 전에 먼저 인내하고, 알아차림으로 마음이 평온해졌을 때 말을 한다.


이런 정어 수행은 단지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자신을 이롭게 하고 안정되게 하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


4) 쓸모없는 말(기어)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한다. 적절한 때에 사실에 근거해서 유용한 말을 한다. 가르침(법)과 계율에 근거한 바른 말을 말한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으로 말을 할 때는 항상 적절하고 조리 있는 말을 하게 된다. 알아차림이 없이 심심하고 무료해서, 또는 조용한 것을 못 참아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은 알아차림을 놓친 것으로 다시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때는 침묵하는 것만 못하게 된다.


4. 바른 행동(正業. Samma kammanta. 戒)


몸으로 행위를 할 때 반드시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를 해야 한다. 바른 행동은 身業을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알아차림과 함께 행위를 하는 것이다.

1) 살생을 하지 않는다.(불살생) -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살생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들은 함께 공존할 권리가 있다. 나에게 해충이라고 해서 살생할 권리는 나에게 없다.


축생의 세계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세계다. 인간은 이런 생존의 위험에서는 어느 정도 안전하다. 그런데도 인간이 먼저 축생들에게 가해를 한다. 단지 모기는 식사하러 온 것뿐인데 죽이지 말고 모기 쫓는 약을 바르는 것이 합당하다.


2)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는다.(불투도) -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나의 것이 아니다. 덤으로 생기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3) 삿된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불사음) - 미성년자, 결혼한 사람, 범죄자, 다른 사람의 약혼자 등등의 상대와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을 지키는 것이 바른 행위(정업)이다. 성자라면 살생 투도

사음을 할 수가 없다.


5. 바른 생계(正命. Samma ajiva. 戒)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잘못된 생계란 출가자의 경우 사기행위, 배신, 점, 예언, 속임수, 고리대금업에 의한 생계를 말한다. 재가자의 경우는 무기거래. 살아있는 동물거래, 고기나 술 독극물의 상거래, 직업 군인, 어부, 사냥꾼등도 잘못된 생계이다.


바른 생계는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업을 맑혀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어차피 재가자는 생계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의 직업이 나와 남에게 이익이 있는 것인가, 탐진치를 키우는 것인가, 또한 열반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가, 업을 맑히는가, 오히려 불선업을 짓게 하는가, 직업 자체가 계율에 어긋나는가를 살펴야 한다. 직업 때문에 계속 불선업을 짓는다면 그는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통찰지혜도 생길 수 없다.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에 속한다.


법념처의 사성제 - 8정도(정정진, 정념)

6. 바른 노력(正精進. Samma Vayama. 定)

바른 노력에는 네 가지 사정근(四精勤)이 있다.

1) 막으려는 노력-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한 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정견과 정념으로 노력한다. 6근과 6경이 촉할 때 보이는 현상에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는지 단단히 지켜본다. 즉 6문에서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게 감각기관을 보호하는 것이 막으려는 노력이다.


2) 끊어내려는 노력-이미 생긴 불선법(오개)들에 낙담하지 말고, 습관화된 것들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끊어내려는 노력으로 부지런히 제거한다. 즉 이미 생긴 감각적 욕망, 악의, 분노, 성냄을 더 이상 키우지 않고, 버리고 없애며 끊어내려는 노력을 한다. 그 실천법이 알아차림이다.


3) 계발하려는 노력-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들(7각지)을 생겨나도록 노력하고 정진을 가하고 마음을 쏟으며 힘쓴다.


4) 유지하려는 노력-이미 생겨난 온전한 법(7각지)을 지속시키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마음을 쏟으며 힘쓴다. 이것을 4정근(四精勤)이라고 한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의 보리수 금강보좌에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갈 때 세운 마음가짐이다. “비록 피부와 뼈가 말라 비틀어져도, 살과 피가 다 말라 없어져도 불굴의 인내와 정진의 힘과 끈기에 의해서 내가 얻어야 할 것을 얻기 전에는 나는 노력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인내와 노력이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끌어준다.


7.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a sati. 定)


신수심법 4념처를 대상으로 알아차림이란 마음의 작용을 일으켜, 대상을 객관적으로, 비 작용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을 통찰한다. 대념처경에는 다음과 같이 알아차릴 대상이 나온다.


1. 몸에 대한 알아차림-신념처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행주좌와에 대한 알아차림, 일상생활에서 세세한 동작에 대한 분명한 앎, 몸의 32가지에 대한 알아차림, 몸의 4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을 한다.


2)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수념처


6근과 6경이 촉할 때 일어나는 3가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을 한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느낌이든지 느낌에서 갈애로 진행되지 않게 알아차린다.

3)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심념처


8쌍 16가지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한다. 탐심, 관용의 마음, 성냄의 마음, 자애심, 어리석음의 마음, 지혜의 마음, 침체된 마음, 산란한 마음, 커진 마음, 위축된 마음, 향상된 마음, 향상이 안 된 마음, 집중된 마음, 집중이 안 된 마음, 일시적으로 해탈한 마음, 일시적으로 해탈이 안 된 마음 등이 일어날 때 알아차린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주로 탐심, 관용, 성냄, 자애, 어리석음, 지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4) 법에 대한 알아차림-법념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들을 법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림을 한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도 아니며 나에 속하는 것도 아님을 아는 것, 즉 생멸하는 법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다.


dhamma인 다섯 장애, 오온의 집착된 무더기, 6근과 6경이 촉할 때 일어나는 족쇄,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성제를 법으로 맞이하여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법의 성품인 Dhamma를 통찰한다.


바르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신수심법의 네 가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수행은 먼저 바른 견해와 알아차리려는 노력이 바탕이 되어, 바른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다. 8정도의 어느 항목이든 정정진과 정견과 정념의 3가지가 함께 있어야 수행을 바르게 이끌어 간다.


법념처의 사성제 - 8정도(정정)


8. 바른 집중(正定. Samma samadhi. 定)


8정도의 정정은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마음이 고요해져 대상에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른 집중이다.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노력(正精進)이 있을 때 그 결과로 바른 집중(正定)에 이르게 된다.


집중(사마디)에는 세 종류의 사마디가 있다. 깊은 집중과 근접 집중과 찰나 집중이 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수행 주제에 대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는 깊은 집중 상태를 유지하여

마음에 번뇌가 없는 고요함이 유지된다. 사마타 수행의 선정에는 색계 사선정이 있고

무색계 사선정이 있다.

사마타의 선정상태에서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지혜는 일어날 수 없다.


위빠싸나 수행에서는 하나의 수행 주제에 깊은 집중을 하지 않고, 현재 일어나는 모든 대상에

찰나 집중을 해서 대상의 성품을 통찰하는 지혜를 성숙시킨다. 이렇게 찰나 집중된 마음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가 일어난다.


집중에는 바른 집중과 바르지 못한 삿된 집중도 있다. 도둑질이나 불건전한 도박도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집중이 아니다. 바른 집중은 수행자가

탐진치의 번뇌로부터 번뇌의 소멸인 열반으로 향하기 위한 수행 주제에 대한 집중이어야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실 때 부처님을 잃고 의지할 곳을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자등명 법등명과 함께 수행해야 함을 유훈으로

남기신 말씀을 빨리어로 옮깁니다. (유교경, 대반열반경)

vayadhamma sankhara (와야담마 상카라)

appamadena sampadetha (아빠마데나 삼빠데타)


모든 구성된 것들은 변하게 되어있다.

잊지 말고 완전하게 알아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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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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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월광화 | 작성시간 15.10.18 _()_감사합니다_()_
  • 작성자햇살 | 작성시간 15.10.18 8정도 : 戒 : 正 語, 正 業, 正 命. 3

    定 : 正 念, 正 定. 正 精進. 3

    慧 : 正 見, 正 思惟.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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