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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펌] 불만족 (둑카)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1.07.21|조회수26 목록 댓글 0

11. 불만족(둑카)


 

[수행자]

며칠 전 사야도께서는 둑카(불만족)는 제거하기 어려운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번에 영원한 제거입니까, 아니면 일시적인 제거입니까?


[사야도]

 일시적이든 영원한 제거든 둑카를 제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도사(성냄)와 로바(탐욕) 중 어느 것이 제거하기가 더 어렵겠습니까?


[수행자]

제가 보기에는 막상막하인 것 같습니다.


 

[사야도]

 

로바가 더 어렵고, 더 미세합니다. 모하(어리석음)는 가장 어렵습니다.

며칠 전[에 했던] 내 말의 핵심은 둑카를 이야기할 때

고통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둑카의 진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은 이해합니다.

보통 그들이 이해하는 유일한 고통은 ‘둑카-웨다나(고통스런 느낌, 苦受)’이며,

고통을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분노가 따라옵니다.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많은 수행자들은 현상들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들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무상의 징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수행이 빨리 진전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물론 그들은 자신이 입수한 모든 정보를 기억할 것이고,

나아가서 오고 가는 무엇을 보든지 고통이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이것을 수행이 진전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고통에 기대기 시작할 것이고,

그래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수동적 성냄입니다.

수행자들은 때때로 너무 겁에 질려서 엉엉 울기도 합니다.

  

둑카의 뜻은 단순히 육체적이거나 정신적 고통을 체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습니다.

아주 뚜렷한 통증이나 슬픔으로부터 아주 미세한 개념인

불평, 불확실, 불만족, 불신, 예측할 수 없음, 애매함, 불안 등까지,

모든 종류의 고통은 모두 둑카의 가장 거친 수준에 속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수준을 둑카-둑카(고고성)라고 합니다.

태어남, 병듦, 늙음과 죽음의 고통뿐만 아니라

분노, 두려움, 절망, 낙담, 불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싫어하는 사람과의 만남,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나 원하지 않는 것을 얻음과 같은 모든 감정적 슬픔,

이 모든 것은 전통적으로 둑카의 첫 번째 수준에 속합니다.

 

두 번째 수준은 위빠리나마 둑카(괴고성)라고 합니다.

이것은 더 미세하고, 더 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종류의 감각적 쾌락이나 정신적 기쁨, 즉 행복이란 것은

아무리 미세하고 오래 지속될지라도 언젠가는 끝나게 됩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이 범주의 둑카에 속합니다.

수행할 때마다 많은 사마디삐띠(환희,기쁨,희열)와 빳삿디(편안함)를 체험하기도 하겠지만

이것들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를 체험하는 것도 둑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모든 행복이 둑카임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세 번째 마지막 수준의 둑카상카라-둑카(행고성)라고 하는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둑카라는 것입니다. 나마루빠(정신과 물질)가 둑카입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 자체가 둑카입니다.

  

둑카를 체험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은

아무리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어떤 형태의 분노로부터 자동적으로 생깁니다.

둑카-웨다나 혹은 도마낫사(정신적 괴로움)는 항상 도사(성냄)와 함께 일어납니다.

그런 체험은 모두 불선한 마음상태로 이끌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게 됩니다.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정신적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선한 마음의 특성이며,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인생을 바꾸는 체험입니다.

둑카를 아주 조금만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을 내려놓게 하고,

따라서 좀 더 자유로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마음을 보다 선한 상태로 이끌고

마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둑카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바른 정보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이 끝없는 윤회의 덫에 걸리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둑카를 보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둑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보다 나은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계속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둑카와 싸우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들의 세계를 조정하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둑카에 저항하는 것은 스스로를 지치게 할 뿐 아니라 더 많은 둑카를 만들어냅니다.

바른 생각이란 둑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둑카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현상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며,

그러한 마음상태는 많은 힘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여 수행에 쓸 수 있게 합니다.

  

둑카를 인지하는 데 능숙하게 되면 될수록,

자신이 새로운 둑카를 ‘만들어낼’ 때마다 더 자주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스승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남의 괴로움(자띠-둑카)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진정으로 열반을 향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존재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이 둑카이며, 그것이 지나가고 있는 것도 또한 둑카입니다.

어떤 것을 얻기를 원하거나 어떤 것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자띠-둑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둑카를 이해하는 마음은 행복을 원하지도 않고, 무엇을 체험하고 있든 저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과 완전히 평화롭게 공존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둑카를 체험하지만 둑카를 인지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둑카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둑카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내적인 자유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둑카를 보는 자는 둑카의 끝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둑카를 진정으로 이해했을 경우에만, 열반을 향해 분투할 것입니다.

 

 - 알아차림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中 -

 

 

둑카와 행복(10.4.25)


수행자 :

저는 사야도께서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집중수행에 참가 했었습니다.

그 후로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게 보여지는 세상은 먼지처럼 다 부셔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괴롭고 떠나고 싶고 울고 싶고……. 

빨리 제가 이 수행의 최고목표를 달성하기 전에는

이런 것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야도 :

그렇다면 도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고’라는 것에 대해서 지혜로서 ‘고’를 안 것이 아니고

도사로서 ‘고’를 안 것입니다. ‘고’에 대해서 잘못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의 뜻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고’에 대해서 이해한 사람은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수행자 : 매일 흘린 것은 아니고…….


 

사야도 :

 

한번을 흘리더라고

그것은 ‘고’에 대해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둑카라고 이해한 사람들은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자유로워집니다.

 

사람들이 수행을 왜하냐고 물으면 편안하기 위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욕망으로서 행복한 것을 말합니다.

 

선정을 얻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도와 과를 얻어서 행복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닙빠나를 얻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욕망으로서 편안한 것 그것만 압니다.

 

사람들이 편안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로바로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둑카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뜻이 잘못되었습니다. 뜻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하면

거기에는 도사가 들어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 고통은

눈물 나는 고통을 압니다.

고통스러우니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지혜로서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괴롭다. 괴롭다’ 생각을 하면서 점점 더 마음이 괴로워 져서

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서

도사의 극단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살도 하고 그럽니다.

 

지혜인 것처럼 하고서 도사 쪽으로 갑니다.

자기 자신은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도사입니다.


정말로 지혜가 나본 사람이라야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지혜가 났을 때에 얼마나 좋은 줄을 나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으로서 만들어 내어 버립니다.

이것은 ‘무상이다. 이것은 무아다. 이것은 고다’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차분하게 낄레사가 없이 볼 줄 알도록만 하십시오.

낄레사가 없이 볼 줄 알게 되면 지혜가 스스로 그것을 판단합니다.

보는 마음이 청정해야만 지혜가 나게 됩니다.

 

지혜가 날 때는 내가 과거에 생각했든 것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반대라는 것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경지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위빠사나 지혜를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아주 새로운 것, 특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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