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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스크랩] 임승택의 초기불교순례 - 3. 붓다의 생애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1.12.01|조회수7 목록 댓글 0
3. 붓다의 생애
무아〈無我〉의 진리를 삶으로 가르치다
2011.01.25 15:40 입력 발행호수 : 1082 호 / 발행일 : 2011년 1월 26일

붓다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는가. 우리는 붓다의 행적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한 거기에서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붓다의 초상은 보는 이의 눈높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그려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불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교주로 부른다. 다른 일부에서는 해박하고 냉철한 사상가 혹은 철학자 정도로 이해한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초능력자 혹은 신(神)적 존재로까지 묘사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상담가·명상가·심리치료가 등의 여러 수식어들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다채로운 그의 행적은 어느 특정한 명칭만으로 그의 삶전체를 드러내는 데에 부족함을 느끼게 만든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붓다는 샤캬족 출신으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오늘날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서 왕족 계급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보냈으며, 장래의 통치자에게 요구되었던 제반 학문 분야와 전투술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열여섯에 결혼하여 라훌라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려는 열망으로 스물아홉의 나이에 출가를 단행하였다. 이후 육년에 이르는 치열한 구도 끝에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얻었고, 45년의 세월 동안 교화에 전념하다가 여든의 나이로 입멸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적 사실로서 불교라는 종교단체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이다. 따라서 그를 일컬어 불교를 창시한 교주로 칭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교주로서의 그의 모습은 여느 종교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사뭇 다르다.


그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현실을 살아갈 것을 권하였다. 또한 어떠한 권위와 전통에도 굴복하지 말라고 일렀고, 심지어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이끌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고, 또한 그것과 더불어 삶의 버팀목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붓다의 모습은 교주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상가 혹은 철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초기경전에 묘사된 그의 가르침은 고도로 발달된 형이상학적 사색들을 포함한다. 거기에는 세계의 기원이라든가 본질 혹은 궁극의 목적이라든가 사후 세계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사변적 견해들이 우리 스스로를 경직시키고 부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사고의 해체를 통해 현실 삶을 회복하려는 매우 독특한 철학적 입장을 취하였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250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는 최첨단의 비판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그는 결코 메마른 이지적 지혜의 추구에 매몰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를 여느 철학자들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 오랜 교화활동에서 나타난 붓다의 행적은 때로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상한 상담가로, 때로는 불가사의한 초능력자로, 때로는 부당한 사회적 관습에 맞서는 개혁가로 묘사된다. 한편 오늘날 서구의 심리치료계에서는 그가 가르친 명상의 치료적 효능에 주목하여 심리치료자로의 붓다를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과 타인의 정신적 진보를 위해 임종의 순간까지 방일하지 않았던 수행자로서의 면모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묻게 된다. 우리는 붓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또한 그를 어떠한 인물로 간주해야 할까? 그의 삶은 그 자체로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엄숙하고 진지한 삶을 일관했지만 스스로를 특정한 모습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러웠다고 할 수 있다.


▲임승택 교수
그의 행적은 ‘나’ 혹은 ‘나의 것’에 붙잡혀 끝없는 갈등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범부들과 대조를 이룬다. 만약 그가 어떠한 위치나 명예에 안주했더라면 우리는 그를 여느 위인들과 다르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존귀한 분(世尊), 공양 받을 만한 분(阿羅漢), 그와 같이 오신 분(如來)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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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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