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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 / 안옥선(순천대교수)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2.01.07|조회수22 목록 댓글 0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




안 옥선(순천대 교수)

I. 머리말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은 그 발생의 역사도 다르고, 내용과 목적도 다르다. 불교윤리는 이천오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인도 전통의 산물이지만, 현대윤리학은 삼사백년 동안 서구에서 발전되어 온 윤리이론들이다. 불교윤리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단일한 윤리체계이다. 그러나 현대윤리학은 다양한 내용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윤리체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불교윤리는 존재실상이 요청하는 행위, 즉 해탈학적 실천(수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현대윤리학은 선의 개념, 기준, 정당화, 의미와 역할 등에 관한 이론적 구명에 주된 관심이 있다. 불교윤리의 내용과 문제는 해탈이라는 단일 목표로 수렴되어 가지만, 현대윤리학은 다양한 입장들의 각축의 장이다.
불교에서 개념적으로 선악을 지칭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윤리(ethic/et-
hics)’라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윤리학(Buddhist ethics)’은 불교내적 고유개념이 아니라 현대 불교학 연구의 한 분야로서 탄생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윤리라는 이름하의 연구 영역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며, 연구역사는 길게 잡아야 칠십 여년 정도로 추정된다.
초기의 불교윤리 연구는 윤리에 해당하는 내용을 경전에서 찾아 그것을 저자의 관점에 따라 서술하는 기술적(descriptive) 연구였다. 그 후 불교윤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응용윤리학적, 메타윤리학적, 해석학적 연구 등 다양한 접근법이 시도되었다. 불교윤리를 이해하는 데 현대윤리학적 관점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도 불교윤리 연구방법의 이러한 다양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 이론들의 만남이 시도된 것이다.
그런데 불교윤리가 모든 현대윤리학 이론들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양자간 유사성을 지적함으로써 불교윤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그 만남의 주된 의도였기 때문에, 양자간 유사성을 토대로 한 만남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양자간 유사성이 관찰되지 않는 이론들과의 만남이 거부된 것은 아니었다. 상이성이나 이질성을 지적함으로써 불교윤리의 특성을 보여주는 방식도 시도되었다. 그래서 만남의 정도 혹은 내적 소통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의무론, 공리주의, 덕윤리, 보살핌의 윤리, 정서주의 등 현대윤리학의 다양한 이론들이 만남의 장소로 불려나왔다. 유사성이 클수록 보다 심층적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만남을 통해 불교윤리에 대한 비교윤리학적 이해와 포괄적인 설명이 시도되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 이론들과의 만남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불교윤리가 현대윤리학이론들에 의해서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불교윤리가 다양한 현대윤리학 이론들을 만나서 어떠한 속성으로 규정되고 재해석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과의 만남은 현대윤리학에 의한 불교윤리에 대한 설명으로서 서양 불교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불교윤리 이해의 한 수단이었다. 그것은 서양 윤리이론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는 불교윤리의 다양한 속성들을 포괄적․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이 방법의 장점은 비교의 방법을 통해서 비교 없이는 잘 파악되지 않는 불교윤리의 특징을 자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필자는 먼저 불교윤리 이해에 포함된 두 가지 어려움을 살펴보고자 한다(II). 불교윤리는 불교내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해에 어려움이 있는데, 특히 그 내용과 속성의 복잡성으로 인하여 포괄적․통일적으로 설명해 내기가 쉽지 않다.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 이론들과의 만남은 불교윤리에 현대윤리이론들을 접맥, 적용, 차용시킴으로써 이 어려움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만남은 불교윤리와 덕윤리와의 만남인데, 불교윤리는 덕윤리에 의해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만남인 불교윤리와 덕윤리와의 만남이 비중 있게 검토될 것이다(III). 그런 후에 이들 만남이 갖는 성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IV).


II. 불교윤리 이해의 어려움

불교윤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다른 윤리전통이나 윤리이론을 이해하는 경우와는 달리,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 첫째는 불교라는 전체 사상 체계 안에서 윤리의 범위, 의미, 역할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다. 그 둘째는 그 내용과 속성이 다양하고 복잡한 불교윤리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다.
불교 전체 사상 체계 안에서 윤리가 관계하는 범위를 포착하고 그 의미와 역할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불교윤리가 불교의 모든 교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교설로부터 윤리를 분리시켜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여타의 교설과 윤리 사이에는 구분의 경계가 없다.
불교윤리는 흔히 계율이나 공동체의 규범 정도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편협한 이해이다. 계율도 다양하고 많지만, 계율 이외에도 십선업, 사무량심, 사섭법, 팔정도, 육바라밀, 10대서원, 삼취정계, 탐진치지멸, 자비, 보살도 등 수많은 실천덕목들이 있다. 이것들은 실천의 관점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자신의 수행과 관계되는 윤리덕목이기도 하고(예컨대 사무량심이나 탐진치지멸), 타인을 위한 실천적 행위에 중심을 둔 윤리덕목이기도 하며(예컨대 사섭법), 또 양자 모두에 관계된 윤리덕목이기도 하다(대부분의 덕목들). 윤리는 단순한 계율이나 규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자기수행이며 외적인 이타행이다. 윤리는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 자기변혁이며 깨달음이며 열반이다. 이처럼 불교윤리의 범위는 자신의 내적 수행에서부터 외적 이타행 혹은 작은 실천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실로 무한하다.
또 불교윤리의 실천 덕목들의 대부분은 인식에 관한 교설들인 연기/공/무아, 업 등 불교의 핵심교설 등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러한 교설들의 필연적․실천적 귀결이다. 올바른 이해는 올바른 실천의 전제이고 올바른 실천은 올바른 이해의 완성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인식에 관한 교설과 윤리 간 경계가 없다. 불교에서 윤리는 모든 교설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는 교설자체가 직․간접으로 윤리를 의미한다. 교설들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실천을 내포한다. 모든 교설이 윤리를 전제하며 윤리를 통해서 완성된다. 또한 불교윤리는 명상실천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것은 계율(戒)과 인식(慧)뿐만 아니라 명상수행(定)까지 아우른다.
불교윤리는 열반을 지향한다. 불교윤리는 열반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열반은 윤리적 실천을 통한 심신의 올바른 훈육을 통해 얻어진다. 윤리의 최고점인 열반에 이르기까지 윤리의 실천덕목들은 몸(身), 말(口), 생각/마음(意)을 통해 습득되고 체화된다. 윤리는 특히 생각/마음(의)의 각성을 전제한 여러 실천덕목들의 체화이다. 신구의 중에서도 의가 갖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윤리는 본질적으로 ‘의’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의’로부터 ‘신’과 ‘구’가 비롯되며 ‘신’과 ‘구’의 토대가 ‘의’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윤리도, 열반도 ‘의’/마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윤리는 다수의 덕목군들로 표현되는 자기수행이자 이타행이면서, 모든 교설들과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서 교설들의 체득을 의미하며, 신구의를 통해 덕목군들을 체화하는 열반을 지향한다. 불교윤리의 이러한 광범위성은 불교윤리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도 어렵게 한다. 불교윤리의 의미를 규정할 때 불교윤리의 이러한 광범위함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덕목군들을 포괄해야 할 것이며, 자리이타, 교설이 지향하는 열반, 신구의를 통한 체화 등의 특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불교윤리의 광범위함을 고려한 불교윤리의 한 가지 규정방식은 다음과 같다. 즉 불교윤리는 ‘탐진치의 마음을 지멸시킴으로써 열반상태의/자비의 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보다 간략히 말하면 불교윤리는 ‘탐진치 지멸의 자비의 성품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탐진치 지멸은 모든 덕목군들이나 교설의 실천을 전제하며, 열반을 의미하며, 신구의에 있어서 자비의 ‘성품’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때의 ‘자비의 성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윤리의 완성 혹은 열반 지점에서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며 욕구들 사이의 충돌을 겪지 않고도, 윤리적인 성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의도적인 노력이 없이도 항상 자리이타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성품이 획득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윤리는 특정의 기질, 성향, 성격, 혹은 성품을 배양해 가는 것이다.
이제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불교윤리의 역할이다. 윤리는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며, 중생이 열반에 이른 후에는 그로 하여금 열반의 상태를 지속하게 한다. 윤리는 열반 이전에도 그리고 열반 이후에도 필수적이다. 열반 이후의 윤리행에 있어서는 의도적 노력이나 내적 갈등이 수반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반복적으로 팔정도를 닦아 열반에 이른다고도 말하고, 탐진치를 지멸시킴으로써 열반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는 열반과 관련한 윤리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언급된 것처럼 윤리는 열반 이후에도 지속되는 것이다. 열반은 윤리적 상태 혹은 탐진치 지멸의 상태인 것이다. 윤리의 역할은 시종일관 중요하다. 윤리를 제외한 불교는 가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윤리는 불교의 정수이며 불교는 그 본질에 있어서 윤리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는 극복되거나 초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 부화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 때는 불교윤리의 역할이 무시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는 윤리는 열반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열반과 무관한 것으로, 더 나아가서는 열반은 선악을 초월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오해는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 오해의 예가 킹(King)과 럽(Rupp)의 경우이다. 킹은 불교를 업불교와 열반불교로 이분하여 이해하면서, 열반이 선악을 초월해 있다고 본다. 그는 선의 문제는 열반과 다른 범주의 문제라고 본다. 럽은 무분별을 요구하는 대승의 열반 개념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윤리의 영역을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고 본다. 킹의 주장은 오늘날 경전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났지만, 열반이 선악(분별)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는 럽식의 이해는 오늘날까지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이해는 불교에서 보는 선악관 - 선악공성(善惡空性) - 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불교윤리 이해에 있어서 두 번째 어려움을 생각해 보자. 내용과 속성이 복잡한 불교윤리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내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불교윤리의 다양한 내용들을 총괄하는 개념을 포착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배치되는 것으로까지 보이는 윤리의 속성을 일관된 하나의 논리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단일 개념, 단일 논리, 혹은 단일 기준으로 불교윤리 전체를 포괄하여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환언하면 다양하고 복잡한 내용을 포괄하는 이론 틀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불교윤리 자체가 다양한 속성을 가지므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까지 한다.
불교윤리 자체가 내용상으로 다양하다는 것은 앞에서 예시한 것처럼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대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대로 다양한 실천덕목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불교에서, 다양한 실천덕목들이 설해진다. 대표적인 실천덕목으로서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 혹은 초기와 대승이 공통적으로 자비를 손꼽더라도, 그 밖의 실천 덕목 모두가 팔정도, 육바라밀, 혹은 자비에 포괄되는 것은 아니다. 계율과 실천덕목들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서로 중첩적이기도 하다. 이들 사이의 체계적 관계가 관찰되지 않는다. 요컨대 불교윤리의 내용은 중첩적이며 복잡하다.
불교윤리가 속성상 다양하다는 것은 도덕판단이나 선악판단에 있어서 통일되고 일관된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표면상 여러 가지 기준이 채택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선악의 기준으로서 행위의 ‘탐진치 삼독심의 유무’, 행위 쾌고 수반여부, 행위의 열반에의 기여여부 등이 제시된다. 탐진치가 없는 신구의가 선이며, 탐진치가 있는 신구의가 악이며, 중생의 쾌・행복을 증가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신구의는 선이며 이 반대는 악이며, 윤회를 벗어나 열반이라는 최고선을 얻는 데 기여하는 행위는 선이고 이 반대가 악이다. 이들 세 기준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본질적으로는 동일내용을 지향하겠지만, 상충될 가능성도 있다. 즉 동일상황에서 세 기준에 의해 추론되는 선은 일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첫 번째 기준에 의한 동기론적 선과 두․세 번째 기준에 의한 결과론적 선은 합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도덕판단이나 선추론 방법이 일관된 것만은 아니며 서로 상충될 여지까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불교윤리의 이해 두 가지 어려움, 즉 불교전체 체계 안에서 불교윤리의 범위ㆍ의미ㆍ역할을 분명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그 내용과 속성이 다양하고 복잡하여 불교윤리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의 지점에서도 똑같이 내재하는 문제이다. 이 두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두 윤리가 만나는 핵심 접점을 포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교윤리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이론틀도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과의 만남은 현재 지속․심화되고 있으며 그 성과 또한 과소평가할 수 없다. 대표적이고 성공적인 만남의 일례가 다음에서 살펴 볼 불교윤리와 덕윤리와의 만남이다.


Ⅲ.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 불교윤리에 대한 포괄적 이해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이 만나는 초기에 불교윤리에 대한 통일적․포괄적 이해를 겨냥하는 물음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예컨대 1970년 자야틸레케(Jayatilleke)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 즉 불교윤리는 상대주의적인가 절대주의적인가,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의무론적인가 목적론적인가, 자연주의적인가 비자연주의적인가가 제시되었다. 그 이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질문이 지속되었다. 즉 불교윤리는 직관주의적이냐, 칸트적이냐, 공리주의적이냐, 덕윤리적이냐, 정서주의적이냐, 이타주의적이냐 등의 물음이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이들 물음들에 대한 답변은 대체로 피상적이었다. 불교윤리에 대한 체계적 검토를 전제로 한 답변이라기보다는 단편적 성찰을 통한 직관적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불교윤리에 대한 체계적이고 면밀한 검토에 근거하여 불교윤리의 포괄적 속성을 밝히고자 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2년 키온(Keown)의 연구이다. 그의 저서 『불교윤리의 속성』(The Nature of Buddhist Ethics)은 불교 윤리연구에 있어서 ‘창조적인 패러다임 시프트’를 제공했다고 평가받을 만큼 불교윤리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불교윤리 전반에 대한 검토를 통한 불교윤리의 통일적․포괄적 속성을 구명하려는 비교윤리학적 연구였기 때문이다. 키온의 연구 이후 최근 케아(Cea)에 의해서 비판적이고 보완적 해석이 시도되었으며, 화이트힐(Whitehill)과 죤스(Jonse) 등에 의해서도 불교윤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덧붙여졌다.
키온, 케아, 화이트힐, 죤스는 모든 점에 있어서 입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윤리를 가장 포괄적이고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윤리 틀을 덕윤리 모형이라는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합치한다. 그러나 불교윤리가 어떠한 형태의 덕윤리 모델이냐 혹은 불교윤리에 공리주의적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입장차이가 있다. 특히 키온과 케아 간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다. 키온은 반공리주의적인 덕윤리 모델을 제안하지만, 케아는 공리주의적 특징을 가진 덕윤리 모델을 주장한다.
불교윤리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설명 틀로서 키온이 제시하는 모델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윤리(virtue ethics)이다. 그는 불교윤리와 유사이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가 불교윤리를 잘 설명해 준다고 믿는다. 그는 덕에 관한 정의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맥킨타이어(MacIntyre)의 한 설명을 원용한다. 즉 덕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번영(eudaimonia)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게 하고, 그것을 결여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목적을 향한 운동을 좌절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덕은 단순히 행복이라는 목적에 대한 도구적 수단이 아니라, 목적에 참여하고 목적을 구성하며, 목적을 점진적으로 실현하면서 인성/성품(personality)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덕과 목적 간 이러한 내적관계로 인하여 불교윤리와 덕윤리의 도식은 결과론적이기보다는 목적론적이다.
키온은 불교윤리가 서양의 어떤 윤리이론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와 유사하다고 보며, 특히 양자간 접점이 그 목적과 심리학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그는 불교윤리의 토대와 개념적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세 가지 구조적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열반과 행복이라는 목적은 경험적으로 동일하다거나 동일한 형이상학적 혹은 해탈론적 결과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기능적․개념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2) 행복과 열반이라는 목적은 인간본성론과 인간선이라는 두 측면에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본성은 그 목표인 인간 선에 접근하기 위해서 덕들을 매개로 하여 변형되어야 한다.
3) 선악과 관련하여 도덕적 선택 능력―아리스토텔레스의 ‘prohairesis’와 불교의 ‘cetanā’―이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양자가 완전히 합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표, 목표를 향한 출발점, 목표에 이르는 방법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다.
키온은 좀 더 구체적으로 붓다의 인간완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완성의 이념이 많은 점에서 형식적으로 대응한다고 말한다. 양자는 인간본성을 지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불교의 지혜와 자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의 복합체로 보고, 이 두 차원에서의 잠재력을 온전하게 발전시키는 데 인간의 궁극목적이 있다고 본다. 또 궁극적으로 도달되는 인간완성의 상태인 ‘nirvāna(열반)’와 ‘eudaimonia(행복/번영)’의 특징은 행복에 있으며, 이 두 상태는 점진적․축적적 노력의 과정을 통해 달성된다고 본 점에서 두 윤리는 유사하다.
키온은 불교윤리를 덕윤리 모델로 설명하면서, 불교윤리가 또한 반결과주의/반공리주의라고 본다. 불교의 선악개념은 행위의 결과‘만’을 고려하는 공리주의적 선악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선한/악한 결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행위가 선/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는 본래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는 것이다. 행위의 선악은 오직 동기나 마음의 상태, 즉 탐진치 마음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키온은 불교윤리가 공리주의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이유는 불교는 공리주의와 달리 옳음(the right)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선(the good)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열반이 곧 선이며, 옳음이란 열반이라는 선에 참여하는 행위와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열반적 속성을 나타내지 못하는 행위는 옳다고 볼 수 없다. 둘째 이유는 윤리적 동기에 관한 것이다. 불교윤리는 옳음을 결정하는 행위에 선행(先行)하는 동기가 있다고 본다. 행위는 덕이 있을 때만 혹은 무탐진치에 근거해서 수행될 때만 옳다. 행위의 도덕성을 결정하는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에 선행하는 동기(cetanā)인 것이다. 공리주의에서처럼 나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나쁜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벤담(Bentham)과 밀(Mill)의 고전적 공리주의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공리주의도 거부한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최대 다수의 행복원리에 근거한 윤리가 아닌 것이다.
키온은 그 이후의 연구에서에서도 불교윤리가 반결과주의 윤리임을 일관되게 주장한다. 그는 불교윤리를 공리주의라고 보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이유를 1) 불교는 선을 헤도니스트적으로 세속적 웰빙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2) 불교는 사람들이 내생에서의 자신의 복리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행위한다고 보기 때문에―개인적 행복에 대한 욕망이 행위의 동기가 된다고 보기 때문에―, 3) 불교는 옳은 행위의 준거를 행복증진에로의 귀결여부에서 찾기 때문에로 요약한다. 그런데 키온은 이러한 이유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에는 사람들이 쾌결과를 획득하려는 공리주의적 동기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고, 행위의 결과로서 미래에 초개인적 인과의 연쇄(transpersonal causal chain)를 갖는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러한 이해가 ‘업이 행위자의 성향이나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결과주의 윤리학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온은 불교에 의하면 결과주의적 동기가 아니라 탐진치 마음상태의 유무에 따라 행위가 본래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며, 행위가 행위자의 성향/성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적한다.
특히 키온은 결과주의/공리주의 윤리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그에 의하면 결과주의는 ‘무엇이 행위를 옳게 하는가’에 대한 독특한 이론으로서, 옳은 행위에 대한 준거로서 ‘바람직한 사태를 유발시키는 데 있어서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윤리이다. 즉 오직 유용성만을 고려하여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윤리가 결과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윤리를 결과주의 윤리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미래행복을 바라는 동기에 의해서 선한 행동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선행과 악행 구별의 유일한 기준이 미래의 유용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동기는 도덕 판단에서 어떤 역할도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는 결코 공리주의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윤리는 ‘가장 잘’ 그리고 ‘오직’ 덕윤리 모델로 이해될 수 있으며, 결코 결과주의적 윤리일 수 없다는 이상과 같은 키온의 주장을 케아는 반박한다. 케아는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선의 준거에 대한 연구에서 불교의 선의 개념이 키온이 정의하고 있는 덕윤리의 유형에 꼭 합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윤리가 결과주의적이면서도 도덕 실재론(moral realism)의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불교윤리가 덕윤리 모델에 의해서 잘 이해될 수 있지만, 그 모델은 키온이 제시한 모델과 달리 공리주의와 도덕실재론의 특징을 가진 모델이라고 한다.
케아는 우선 불교윤리에서 도구적 행위 - 열반적 덕을 기르는 데 있어서 보다 좋은 조건을 가져오는 행위 - 와 목적론적 행위 - 열반적 덕이나 아라한의 덕 특징을 실제로 나타내는 행위 - 의 구분을 제안한다. 그리고 도구적 행위나 선행의 산물인 근사목적(proximate goal) - 큰 운, 좋은 평판, 편안한 죽음, 생천과 같은 - 도 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한다. 예컨대 지계와 같은 도구적 행위는 열반의 덕(nirvānic virtue)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을지라도, 열반이라는 최고선 획득에 도구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선에 관여한다고 한다. 근사목적이 선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이것이 열반의 덕을 배양하는 데 좋은 조건을 유도하는 행위, 즉 선행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설령 근사목적이 그러한 선행의 산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열반의 덕을 배양․표현하기 위한 좋은 조건이기 때문에 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케아는 키온이 도구적 덕이나 근사목적이 갖는 이러한 선의 의미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케아는 도구적 행위와 목적론적 행위를 구분하기는 하지만, 이 양자가 단절적이거나 이분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양자는 통합적이고 연속적이며, 동일한 해탈학적 목적에 봉사하여 사람을 열반의 덕과 고통의 지멸로 인도한다. 그리고 양자는 하나의 동일한 목적으로 수렴한다. 케아는 키온이 선(the good)과 열반의 덕을 동일시한 것은 불교윤리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 모델과도 합치하지 않는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eudaimonia’를 인간 번영의 최고의 선과 동일시하지만, 그것을 도덕의 영역(moral domain)과 동일시하지는 않으며, 본래적인 선 - 최고선을 구성하는 것으로 도덕적 덕과 지적인 덕 - 과 도구적 선 - 명예, 감각적 쾌, 운등 - 을 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케아는 불교 또한 선을 열반이라는 최고선과 결코 동일시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키온이 도구적 선 - 비열반적 도덕행위와 근사목적 - 을 도덕영역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불교는 물론 덕윤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키온이 이해하는 선의 기준은 도구적 선과 목적론적 선을 모두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도 맞지 않으며, 불교윤리에서도 또한 도구적 선을 갖지 못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케아의 주장이다.
케아는 불교에서 수단적 의미의 선이 인정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윤리가 공리주의적 선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전거로써 다음과 같은 두 경전을 제시한다. 그 중 대표적인 한 경전(Ambalaṭṭhikārāhulovāda Sutta)은 우리에게도 유명한 경전으로 붓다가 자신의 아들이었다가 출가한 라훌라(Rahula)에게 준 가르침이다. 붓다는 이 경에서 신구의 행위에 앞서서, 신구의 행위를 하는 동안에, 신구의 행위를 한 후에, 그것이 수반하는 결과에 대해 성찰하라고 한다. 마치 거울에 되비추어 보듯이 행위가 자신, 타인, 그리고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고통을 가져올 것인지 행복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성찰한 후에 행위하라고 한다.

라훌라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거울의 용도가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세존이시여, 그것은 되비추어 보는 데 용도가 있습니다. 라훌라야, 마찬가지로 몸 행동(身)도 되비추어 본 후에 행해야하며, 말(口)도 되비추어 본 후에 해야 하며, 생각(意)도 되비추어 본 후에 해야 한다. 라훌라야, 네가 행위 하고자 할 때, 너는 행동에 대해 이렇게 되비추어 보아야 한다. 즉 ‘내가 몸으로 하고자 하는 이 행동은 내 자신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들을 해치거나, 양자 모두를 해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악한 몸 행동이어서 그 결과도 고통이고 그 과보도 고통이 아닐까?’ 되비추어보아서 만일 ‘내가 몸으로 하고자 하는 이 행동은 내 자신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양자 모두를 해칠 것이며, 그것은 악한 몸 행동이어서 그 결과도 고통이고 그 과보도 고통일 것이다’라고 안다면, 너는 그러한 몸 행동은 분명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네가 되비추어보아서 만일 ‘내가 몸으로 하고자 하는 이 행동은 내 자신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선한 몸 행동이어서 그 결과도 쾌/행복이고 그 과보도 쾌/행복일 것이다’라고 안다면 너는 그러한 몸 행동을 해도 된다”(이와 같이 몸 행동을 ‘하기 전’ 뿐만 아니라 ‘하는 동안’과 ‘마친 후’에도 이와 같이 성찰해야 하고, 말과 생각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케아는 이 경이 두 가지 선악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첫 번째 선악 기준은 공리주의의 기준이다. 그녀는 행위하기 전에 자신, 타인, 혹은 양자 모두에게 고통을 가져올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 즉 행위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기준은 분명히 공리주의의 기준이라고 한다. 그녀는 이 기준이 최대 다수를 위한 고통의 최소화의 기준으로 이해된다고 본다.
케아에 의하면 두 번째 선악의 기준은 이 경에서의 선과 불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도덕적 실재론과 덕윤리가 된다. 이 경에서의 선과 불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케아는 선과 불선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 경전(Sammādiṭṭhi Sutta)의 정의를 적용한다. 즉 악은 십불선업이며 악의 뿌리는 탐진치이고, 선은 이 반대의 십선업이며 선의 뿌리는 무탐진치라는 정의를 적용한다. 불선이 십불선업 중에서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등의 외적 행위라면 선의 기준이 도덕 실재론임을 의미하고, 불선이 시기, 악의, 악견과 같은 내적 마음의 행위나 마음의 상태라면 선의 기준은 덕윤리임을 의미한다. 즉 선과 불선이 신구 외적행위인 경우는 도덕 실재론으로 이해되며, 내적 행위인 경우는 덕윤리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케아는 십선업(무탐진치)과 십불선업(탐진치)이라는 두 번째의 선악기준 또한 선악이 각각 쾌결과와 고결과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행위의 선악과 관련된 결과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공리주의의 징표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초점은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결과를 고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행위가 특정의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케아는 이 두 번째 기준은 공리주의적 징표는 아니지만, 그것은 첫 번째의 공리주의적 기준을 반박하지 않으며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고려로써 오히려 보완적 기준이 된다고 본다. 외적 신․구 행위(도덕실재론)와 내적 행위(덕윤리)에 대한 선악고려가 자타 행복을 위한 행위의 결과(공리주의)에 대한 고려를 보완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케아는 거울 비유경의 공리주의적 선의 기준이 도덕실재론과 덕윤리를 보완적으로 채택하므로 초기불교의 선의 기준은 단일기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초기불교의 선의 기준을 행위의 기초가 되는 의도나 마음상태만을 고려하는 덕윤리의 한 유형에 환원시킬 때, 초기불교의 선 기준의 복잡성(complexity)과 풍부함(richness)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의 이러한 선의 기준을 공리주의로 환원시키는 것도 똑같이 환원주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만이 중요한 유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페레트(R. Perret)를 따라서 서구 윤리학 이론에서 나타나는 동기주의와 결과주의의 대립은 불교윤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본다. 행위의 선은 의도 혹은 결과의 선함, 이 어느 하나에 배타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에서 덕윤리는 분명히 나타난다. 게다가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행위의 기초가 되는 내적 마음상태나 동기가 행위의 전반적 선함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아마도 가장 중요할 것이다―는 것은 명증적이다. 그러나 행위의 선함(goodness)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외적 신․구 행위의 본래적 선함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자의 행복이나 고통으로서의 이러한 행위의 결과 또한 매우 중요하며 필수적이다.

따라서 케아는 선악의 기준이 단지 행위자의 동기에만 의존한다고 보는 키온의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위의 동기 이외에도, 행위의 본래적 선악이 고려되고 있고 행위의 결과가 자신과 타자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가 고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케아에 의하면 초기불교의 선의 기준은 공리주의나 덕윤리 어느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한 입장만을 택하는 배타적 해석은 허용되지 않고 보완적 관점이 요청된다. 따라서 불교윤리는 키온이 제안하는 배타적 덕윤리 모형보다는 공리주의와 도덕실재론의 특징을 갖는 덕윤리 체계에 더 합당하다는 것이 케아의 결론이다.
케아의 이상과 같은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일보진전한 것이라 여겨진다. 불교윤리의 큰 틀로서 덕윤리를 수용하면서도 공리주의적 특징과 도덕실재론적 특징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열반에 이른다는 말에서도 관찰할 수 있듯이 케아의 수단적 행위와 목적론적 행위의 구분도 허용될 뿐만 아니라 이 구분은 불교윤리 이해를 위해서도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양자가 통합적․연속적이며 결국 해탈이라는 수렴점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말이다. 열반지점에서는 수단적 행위와 목적론적 행위, 혹은 수단적 선과 목적론적 선이 합치하지만,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위는 또한 수단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교윤리는 결코 공리주의적일 수 없다’는 키온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며 불교윤리는 공리주의적이라는 케아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키온의 주장이 오히려 더 옳기 때문이다.
키온이 말하는 공리주의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공리주의로서 ‘오직 행위의 유용성만’을 선악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리주의는 보통 ‘오직 (행위의) 유용성에 의해서만(solely by utility)’ 선악을 판단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유용성’에 대한 입장은 벤담에게서는 물론 밀에게서도 관찰된다. 키온이 지적한 것처럼 공리주의에서는 유용성을 선악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유용성 이외의 어떠한 기준도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유용성 이외의 다른 기준을 배제하는 ‘그러한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리주의는 아니다. 불교가 가장 보편적 선악의 기준으로서 탐진치의 유무, 혹은 동기의 선성과 악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리고 케아가 자신의 주장의 논거로 예시하고 있는 행위 이전, 도중, 후에, 자신, 타자, 혹은 자타 모두에게 고통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기준은 유용성 이외의 다른 기준을 배제하는 그러한 본래적 의미의 공리주의는 아니다. 예시된 기준을 케아가 말한 것처럼 ‘최대다수를 위한 고통최소화 기준’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선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유용성만을 고려하라는 ‘그러한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리주의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키온이 불교윤리는 ‘그러한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리주의일 수 없다고 본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즉 키온은 ‘유용성’ 이외의 여타의 기준을 허용하지 않는 공리주의를 말하고 있고, 케아는 다른 기준들을 허용하는 공리주의를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엄밀한 공리주의의 정의에 따른다면 우리는 케아의 입장이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슨한(?) 의미의 공리주의를 인정한다면 케아의 주장 또한 반드시 부정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키온과 케아는 서로 다른 의미의 ‘공리주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시비를 가리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국내의 관련연구를 생각해보자. 박경준 또한 불교윤리가 결과론적 측면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그는 불교는 동기론만이 아니라 결과론이기도 하다고 보고, 여러 이유를 제시한다. 제시된 이유들 중에 필자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 것은, 붓다가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미연에 ‘注意義務’를 잘 이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설한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이유 또한 느슨한 의미의 결과론이라고 생각된다.
키온과 케아의 논의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양자의 논점의 핵심이 같다는 것이다. 즉 두 사람 모두 불교윤리를 포괄적으로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윤리이론으로서 덕윤리 모델을 수용한다. 차이는 케아가 덕윤리 모델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여기에 공리주의와 도덕실재론의 특성을 고려한 보다 확장된 의미의 덕윤리 모델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케아는 이 덕윤리 모델이 서구에서 알려진 덕윤리와는 다른 유형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윤리가 덕윤리라는 모델에 의해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화이트힐(Whitehill), 죤스(Jones), 하비(Harvey) 등도 덕윤리적 해석을 옹호한다. 이들은 키온이나 케아에게서 주목되지 않거나 간과된 불교 덕윤리의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적한다.
화이트힐은 덕윤리적 관점에서 불교윤리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덕윤리를 ‘원칙이나 행위 중심적이라기보다는 성품에 근거한(character-based), 실천 지향적(praxis-oriented), 목적론적(teleological), 공동체에 특수한(community-specific) 윤리’라고 규정하면서, 불교도덕을 ‘깨침의 덕(awakened virtue)’―보다 구체적으로는 ‘깨침의 자비의 덕 배양(awakened, compassionate virtue-cultivation)’―으로 규정한다. 그는 육바라밀을 핵심적인 덕으로 보고 성품(character)과 공동체(community) 개념을 함께 강조하며, 불교윤리의 핵심이 도덕적 성품을 각성시켜 개발하는 데 있다고 본다. 특정 공동체 안에서의 성품배양이 불교윤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훼테힐은 또한 불교 덕윤리는 서구의 덕윤리와는 반대로 생명중심적이고 생태학적이라는 점,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에서처럼 실체적이고 분리적이며 구별이 분명한 자아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 도덕공동체도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유정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
죤스는 불교도덕이 선택과 행위의 도덕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인성(personality)’을 배양하는 도덕이라고 본다. 그의 이 표현은 지금까지의 어떤 해석이나 표현보다도 불교윤리의 정수를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필자 또한 불교윤리의 핵심이 탐진치 지멸의 ‘자비로울 수밖에 없는 성품형성’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비는 불교윤리를 덕윤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불교윤리가 칸트의 의무론적 요소와 공리주의적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불교윤리가 선한 동기와 의지를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는 점에서 칸트적이고, 성품의 배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덕윤리적이며, 자신과 타자의 고통감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불교윤리를 어느 하나의 모델에만 귀속시킨다면 그것은 불교윤리를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비의 이러한 해석은 불교윤리가 덕윤리적 큰 틀을 갖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불교윤리는 칸트적 의미의 의무론적 혹은 도덕법칙 준수적 동기만을 강조하는 그런 윤리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불교윤리를 공리주의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펴본 대로 느슨한(?) 의미에서의 공리주의적 요소를 가질 뿐이다.
불교윤리에 대한 덕윤리적 해석에 있어서 주목되는 한 가지는 덕윤리로서 불교윤리가 서구의 대안적 윤리로 제안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힐은 불교의 덕윤리가 서구의 미래를 이끄는 한 지침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서구에서 바라밀과 삼매를 실천하는 미래세대가 증가할 것이며, 미래는 가족, 직장, 공동체에서 깨침의 덕을 실천하는 소수의 선남선녀에 의존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불교가 서구에서 점증적으로 해방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건설적인 불교의 미래가 사람들의 ‘성품’을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서구의 유대교적․기독교적, 목적론적, 제국주의적 혹은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전환 윤리로서 불교의 덕윤리를 제안한다.


Ⅳ. 맺음말 :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의 성과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은 살펴본 것처럼 불교윤리에 대한 현대윤리학적 해석이다. 그것은 현대윤리학적 관점에서 불교윤리를 포괄적이면서도 일관되게 해석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서 불교윤리는 하나의 독특한 덕윤리 모델이라는 합의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즉 내용과 전제 등에 있어서 모두 합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에 있어서 불교윤리는 덕윤리라는 일관된 윤리체계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윤리학과의 이러한 만남을 통한 불교윤리의 포괄적 성격에 대한 구명은 불교 이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식, 즉 ‘불교에는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서양적) 윤리용어가 없다’는 인식을 불식시킨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구명은 ‘불교윤리는 어떤 윤리이론에 의해서도 포괄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인식도 거부한다. 그리하여 불교윤리에 대한 포괄적 설명가능성 여부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할리세이(Hallisey)와 쉴브락(Schilbrack)의 논쟁에 대한 종결을 의미한다.
할리세이는 불교윤리의 속성 자체가 다양한 목소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윤리는 어떠한 윤리이론에 의해서도 포괄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초기불교윤리는 텍스트에 따라 상이한 윤리적 사고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윤리이론에 의해서도 포괄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포괄적인 윤리이론의 틀을 찾는 연구는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쉴브락은 불교윤리가 다양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윤리의 일반적인 특징이나 형식상의 특징에 대하여 탐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는 불교 안의 전통들을 별개로 다루어 그 성격들을 구명하려는 시도뿐만 아니라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론 틀을 찾는 연구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의 과정에서 불교윤리가 덕윤리로 이해된 것은 불교윤리의 포괄적 성격을 예시한 것이므로 쉴브락의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한 것이다.
불교윤리의 내용과 속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윤리 틀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의미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오늘날 요구되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연구가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비교개념적으로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드러냄으로써 불교윤리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구가 요구되고 있는 까닭은 오늘날 다양한 윤리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연구의 결과가 불교윤리적 해법이 무엇인가를 보다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선악에 대한 일관되고 포괄적 기준을 다양한 윤리적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불교윤리적 해법을 보다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밝혀진 불교의 가장 포괄적 도덕판단 기준은 덕윤리적 기준이다. 여기에서 ‘포괄적’이라고 함은 도덕판단 기준으로서 느슨한 의미의―도덕법칙 절대주의를 탈피한― 의무론적 기준이나 느슨한 의미의 공리주의적 기준 등이 그 하위개념으로 포함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분명한 것은 칸트적 의미에서 의무론이나 벤담이나 밀의 고전적 공리주의는 불교윤리에서 수용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윤리는 법칙절대주의 윤리도 아니며,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윤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제어
불교윤리 Buddhist Ethics, 현대윤리학 Contemporary Ethics, 덕 윤리 Virtue Ethics, 의무론 deontology, 공리주의 utilitarianism, 선악의 기준 criterion of good and evil
Understanding Buddhist Ethics in Terms of Contemporary Ethics



An, Aok-Sun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ee how Buddhist ethics has been understood in the west. First this paper points out two difficulties in understanding Buddhist ethics. One difficulty is that the scope, meaning, and role of Buddhist ethics cannot be easily defined. The other difficulty is that Buddhist ethics cannot be easily explained in a comprehensive manner due to its diversity and complexity in its content and nature. These same difficulties also appear when we understand Buddhist ethics in terms of contemporary ethical theories. Consequently, it is not easy to point out some similarities between Buddhist ethics and comtemporary ethical theories. In addition, it is not easy to find a theoretical framework to explain Buddhist ethics in a comprehensive manner.
A most favored theoretical framework explaining Buddhist ethics is virtue ethics. Most western scholars consider Buddhist ethics as virtue ethics. But there are some disagreements among them with regard to what type of virtue ethics fits to Buddhism. The author also thinks that virtue ethics is a best theoretical framework explaining Buddhist ethics in a most comprehensive way. According to the author, Buddhist ethics rejects both Kantian deontological ethics taking a moral law as absolute and classical utilitarianism taking utility as the sole criterion of good.

 

- 불교학 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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