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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상좌부 청정도론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2.01.13|조회수24 목록 댓글 0

1. 상좌부란?
남방불교는 스스로를 상좌부라 부른다.
상좌부는 말 그대로 부처님의 직계제자를 위시한 장로 즉 큰스님들이 전승해온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상좌부는 스님(출가자)들이 전승해온 스님들을 위한 가르침-“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 이름한다” 장부 주석서-이라 할 수 있다.

스님들은 “법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유훈에 따라 이런 법을 배우고 연구하고 실천하고 체득하고 가르치는 일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이런 그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교학체계를 우리는 아비담마라 부른다.
그래서 상좌부불교는 아비담마불교이다.

아비담마는 사리쁫따 존자를 비롯한 부처님 직계제자들과 그 후에 수많은 스님들이 법을 참구하고 고뇌하면서 발전시킨 어떤 일관된 법체계이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어떤 불교보다도 그들의 법체계가 가장 부처님 원음을 순수하게 지켜오고 있다고 자부하여왔으며 역사와 언어학이 발달한 요즘에는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기 힘들다.
그들의 법에 대한 결백증에 가까운 진지함과 엄격한 승행은 지역민들의 큰 외호를 받아왔다.
출가자가 평생을 바쳐 법을 궁구하고 실천하며 검소하게 살 때 민중은 소승이라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승단을 존중하고 외호하였고 그들을 복밭이라 여겼다.


2.청정도론은?
상좌부 불교의 부동의 준거가 되는 <청정도론>이 있다. 붓다고사가 5세기에 편찬한 이 책은, 상좌부 불교에 관한 한 아무도 <청정도론>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 이상 언설을 필요치 않는다.
<청정도론>에는 빠알리 삼장에서 나타나는 거의 대부분의 단어와 술어들이 집약되어있다. 빠알리 사전들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대략 1만 3천개 정도라면 <청정도론>에 등장하는 대략 1만 1천개 정도이다.

<청정도론>은 기본적으로 주석서이다. 그것도 경장인 1부 니까야에 대한 주석서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이 아무리 아비담마적인 방법론으로 불교의 기본주제인 계. 정. 혜를 설명한다 하더라도
<청정도론>은 아비담마 논서가 아닌 경장의 주석서라는 기본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즉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있다는 말이다.

붓다고사는 방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가르침이나 문장들을 제일 먼저 <청정도론>에서 계. 정. 혜의 주제 하에 일목요연하게 해설하여 초기불교에 대한 밑그림을 완성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경장과 율장과 논장에 대한 주석서를 하나하나 지어나갔다.


3.붓다고사스님은?
붓다고사스님은 인도사람으로 알려져있다. 그를 언급한 여러 문헌들을 비교해보면 그의 생몰연대는 대체적으로 370-450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이 된다.
또한 <청정도론>은 대략 AD425년 전후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아소까 대왕은 불교를 그의 통치이념으로 정하고 다른 나라나 인도의 변방으로 10무리의 전법사들을 파견하였다 한다.
이것은 산치대탑의 유물 가운데서 열 곳의 전법사들의 유해(사리)를 담은 통이 발견됨으로써 의삼할 여지가 없게 된다.
이렇게 전파한 불교는 아소까 대왕 때 이루어진 3차 결집에서 공인된 상좌부불교이다.
그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불법이 정착한 곳이 스리랑카와 간다라 지방이었다.

아소까 대왕의 아들이며 출가해서 스님이 된 마힌다장로가 BC3세기 때 불교를 스리랑카에 전할 때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를 함께 전했다고 한다.
이 주석서는 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싱할리어로 옮겨져서 그 후 계속해서 싱할리어로 전승되어왔다.

스리랑카에서 상좌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대사 大寺 )이 그 주석서를 빠알 리가 아닌 싱할리어로 전승해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울 받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실제 그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른 신흥사상과 섞지 않고 전승할 수 잇다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역사도 예외없이 부파분열의 현상이 일어나는데 무외산사(無畏山寺)가 BC100년 쯤에 설립되면서부터였다.
스리랑카 왕조에서 일어나 모반 사건으로 비롯되어, 大寺에서 분파한 무외산사를 왕이 옹호한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大寺는 그동안 구전으로 전승-구전전승이 삼장전승의 전통적인 방식이다-되어 오던 빠알리 삼장을 문자로 기록했다.
그것도 왕이 모르게 수도를 벗어나서 외딴 곳으로 가서 했다.
왕의 후원이 끊어졌으므로 삼장을 구전으로 전승하기에는 역부족을 느겼을 것이고,
만일 왕이 안다면 왕권으로 인도 신흥사상 등 다른 이설을 넣으려는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서이 컸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문자로 정착된 역사적인 사실을 후대 상좌부 전통에서는 4차 결집으로 부르고있다. 빠알리 삼장의 문자화는 이런 역사적인 진통을 겪으면서 탄생되었다.
당시 비구들은 수행보다는 부처님 가르침의 바른 전승을 더 큰 의무로 생각했다고 한다.

다시 마힌다 장로에 의해 삼장과 함께 스리랑카에 전해져 싱할리어로 전승되어온 주석서의 얘기로 돌아가자.
4세기 중반부터, 대사는 부처님 직계제자들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있다고 자부하는 싱할리주석서들의 빠알리화를 위한 적임자를 찾았을 것이다.
대사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거치면서 그에게 싱할리 주석서들을 가르친 후 넘겨주었고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을 완성하여 드디어 장로들의 인정을 받고 <청정도론>을 근간으로 각각의 주석서들을 큰 체계 하에 완성했다.
정통 상좌부임을 자부하는 대사에서는 이를 정통 견해로 인정하는 도장을 찍어 배포했을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붓다고사는 저술가의 입장에서 <청정도론>을 지은 것이 아니고 편역가 혹은 역출가의 입장에서 <청정도론>을 완성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역할은 여러 전적들을 비교검토하여 대사에서 통용되는 공식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학설들을 취합하고 편집해서 대사의 정통견해로 고착시킨 것이라는 점이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는 그의 개인적인 입장을 극히 자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붓다고사가 해박한 지식이 모자라서기 보다는
<청정도론> 자체가 상좌부의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하겠다.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의 해제 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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