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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3편 부처님의 가르침-제6장 현실직시의 가르침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2.01.13|조회수26 목록 댓글 0

제 6장 현실직시의 가르침


해탈로 이끄는 물 없는 목욕

쌍윳따 니까야 7 브라흐마나 쌍윳따 2:11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상가라와라는 브라흐민이 사왓티에 살고 있었다. 그는 물에 의한 정화를 믿는 사람으로 ‘물에 의한 청정’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새벽과 해질녘 몸을 물속에 담그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새벽과 해질녘에 몸을 물 속에  담그는 수행에 몰두하였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상가라와를 위하여 자비심으로 그를 방문하시도록 청하였다.

그래서 아침에 부처님은 가사를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상가라와가 사는 곳으로 가셨다. 브라흐민 상가라와는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브라흐민이여, 그대는 물에 의한 정화를 믿는 사람으로 ‘물에 의한 청정’을 수행하고 새벽과 해질녘에 몸을 물 속에 담그는 수행에 몰두 한다는데 이 말이 맞소?”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무슨 이익 때문에 그렇게 하시오, 브라흐민?”

“낮 동안에 지은 모든 악한 행위는 해질녘 목욕함으로써 씻어지고, 밤 동안에 지은 모든 악한 행위는 새벽에 목욕함으로써 씻어집니다.”

이에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담마는 계행의 여울이 있는 호수이며

이 맑은 호수는 훌륭한 이들이 대대로 찬탄한다네.

현자들이 목욕하러 가는 그 곳에 목욕하면

옷을 적시지 않고도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


브라흐민 상가라와는 부처님의 훌륭하심을 찬탄하면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재가신도가 되었다.


여섯 가지 신통의 능력이 있습니까?

쌍윳따 니까야 12  니다나 쌍윳따 70

(위장 출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지극한 영예와 존경과 공경을 받았으며 법복과, 탁발음식, 거처, 필수 의약품을 받으셨다. 비구 승가도 또한 영예와 존경과 공경을 받았으며, 법복과 탁발음식, 거처, 필수 의약품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교단의 방랑 수행자들은 영예도, 존경도, 공경도 받지 못하였고 법복이나, 탁발음식, 거처, 필수 의약품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방랑 수행자 수시마는 많은 방랑 수행자의 무리와 함께 라자가하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수시마에게 말하였다.

“벗이여, 수시마여, 사문 고따마에게 출가하여 그의 가르침을 다 배운 후 돌아와서 우리에게 그의 가르침을 배운대로 가르쳐 주시오, 우리는 그 가르침을 통달하여 재가자에게 설법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들처럼 영예와, 존경과, 공경을 받을 수 있고, 법복과, 탁발음식, 거처, 필수 의약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여.”

수시마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존자 아난다를 찾가가서 말하였다.

“벗 아난다여, 나는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청정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아난다 존자는 그를 부처님께 데리고 가서 출가의 뜻을 말씀드렸다.

그래서 수시마는 부처님께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여섯 가지 신통을 얻었는지를 질문하다.)

어느 날 수시마 존자는 많은 비구들이 부처님께 와서 그들의 깨달음을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태어님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으며, 해야 할 일을 마쳤으며,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수시마 존자는 그 깨달은 비구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그들이 부처님 앞에서 깨달음을 선언한 것이 정말이냐고 물었다. 비구들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자 수시마 존자는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신족통이 있는가?)

“진정으로 그와 같이 알고 그와 같이 보시나. 그러면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다양한 종류의 신비한 힘을 부립니까?

[예를 들면]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고 사라지고, 담이나, 성벽, 산을 장애 없이 마치 빈 공간처럼 통과합니까? 마치 물속에서처럼 땅 속을 헤엄쳐서 들락날락하며, 땅 위에서처럼 물속을 가라앉지 않고 걷습니까? 가부좌하여 앉은 채 새처럼 공간을 다니며,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는 태양과 달을 손으로 만지며, 브라흐마 세계까지 멀리 몸을 미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천이통이 있는가?)

“진정으로 그와 같이 알고 그와 같이 보시나. 그러면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인간을 초웧하는 청정한 하는 귀로 인간의 소리와 신의 소리를 멀거나 까까운 것에 상관없이 다 듣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타심통이 있는가?)

“진정으로 그와 같이 알고 그와 같이 보시니 그러면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다른 존재들과 사람들의 마음을 압니까? [예를 들면] 욕망의 마을을 욕망의 마음으로 알고, 욕망이 없는 마음으로 알고, 증오의 마음을 증오의 마음으로 알고, 증오가 없는 마음을 증오가 없는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은 마음을 어리석은 마음을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압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긴장된 마음과 산란한 마음, 숭고한 마음과 숭고하지 않은 마음. 뛰어난 마음과 뚜어나지 못한 마음, 집중된 마음과 집중되지 못한 마음, 해탈한 마음과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각각 그대로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숙명통이 있는가?)

“진정으로 그와 같이 알고 그와 같이 보시니, 그러면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여러 가지 과거의 삶의 기억합니까? [예를 들면] 한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백 번, 천 번, 만 번, 백만 번 태어나고, 세계 축소의 수많은 겁, 세계 팽창의 수많은 겁, 세계 팽창의 수많은 겁, 세계축소와 팽창의 수많은 겁에 이와 같이 ‘그때 내 이름은 아무개였고, 성씨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었고, 얼마나 오래 살았고, 거기서 죽어서 어디에 태어났고, 이렇게 반복하여 나는 여기에 태어났다.’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의 과거의 삶을 자세히 기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천안통이 있는가?)

“진정으로 그와 같이 알고 그와 같이 보시니, 그러면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인간을 초월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다른 존재들과 사람들을 봅니까? 존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고, 열등한 존재 빼어난 존재, 아름다운 존재 추한 존재, 행운의 존재 불행한 존재, 이와 같이 어떻게 존재들이 그들의 업에 따라서 가는지를 봅니까? 예들 들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을 짓고, 훌륭한 분을 욕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며, 그래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런 사람들은 죽은 후 나쁜 곳에 태어났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선을 행하고, 훌륭한 분을 욕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가지며, 그래서 바른 행동을 하는 이런 사람들은 죽은 후 좋은 곳에 태어났다.’는 이렇게 존들이 그들의 업에 따라서 가는 것을 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누진통이 있는가?)

“진정으로 그와 같이 알고 그와 같이 보시나. 그러면 존자들이여, 그대들은[색계의]형상을 초월하고, 형상이 없는 [무색계를] 성취하여 그것들을 몸으로 감지하면서 평화로운 해탈 속에 머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그런데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선언한 것 [깨달음을 얻었다고 천명한 것]과 지금 이것들[여섯 가지 신통]을 얻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한 사람이 어떤 신통도 얻지 못하였기 때문].

“벗 수시마여, 우리는 지혜로 해탈하였소.”

“존자님들의 간결한 말의 자세한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자세한 뜻을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벗 수시마여, 우리는 지혜로 해탈하였소.”


(오온의 집착을 끊고 해탈함)

그래서 수시마 존자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비구들과의 모든 대화 내용을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은 수시마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수시마, 먼저 담마의 확고부동한 지혜가 오고, 그런 후에 열반의 지혜가 온다

“부처님께서 간단히 말씀하신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있도록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수시마여,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부처님.”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행복한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 ‘이것은 개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습니다.”

“느낌은, 지각은, 형성은,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행복한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시마, 어떤 종류의 물질이든지, 어떤 종류의 느낌이든지, 지각이든지, 형성이든지, 의식이든지, 이것들이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속하든, 안이든, 밖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열등하든 우세하든, 멀든 가깝든, 모든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은 바른 지혜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라고 보아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은 훌륭한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기 때문에 그들은 물질에 애착하지 않고, 느김. 지각. 형성. 의식에 애착하지 않는다. 애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평온하다. 평온을 통하여 그의 마음은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한 줄 아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으며, 해야 할 일을 마쳤으며,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12연기로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음을 보이심)

“수시마여, 태어님이 있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존재가 있기 때문에 태어남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집착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갈애가 있기 때문에 집착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느낌이 있기 때문에 갈애가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접촉이 있기 때문에 느낌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여섯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이름과 형태가 있기 때문에 여섯 감각기관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형태가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업의]형성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업의] 형성이 있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태어남이 없으면 늙고 죽음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집착이 없으면 존재가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느낌이 없으면 갈애가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접촉이 없으면 느낌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여섯 감각기관이 없으면 접촉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이름과 형태가 없으면 여섯 감각기관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의식이 없으면 이름과 형태가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의식이 없으면 이름과 형태가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업의] 형성이 없으면 의식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없으면 [업의] 형성이 없다고 보는가?” “네 부처님.”


(여섯 가지 신통의 허황됨을 가르치심)

“수시마여, 내가 지금 말한 것처럼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면 그대는 여러 가지 정신적인 힘을 부릴 수 있는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초능혁적 신통을 부릴 수 있는가?”

“부릴 수 없습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면 그대는 인간을 초월하는 하늘 귀로 아깝다거나 멀거나 상관없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면 그대는 과거생에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다. 어떤 일을 겪고, 어디서 죽어, 다시 태어난 전생을 기억 할 수 있는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면 그대는 인간을 초월하는 하늘눈으로 사람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고 선업과 악업을 지음과 그 과보를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다면 그대는 [색계의]형상을 초월하고 형상이 없는 [무색계를] 성취하여 그것들을 몸으로 감지하면서 평화로운 해탈 속에 머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수시마, 그렇다면 그대가 말한 내용과 지금 그대의 대답에서 그런 신통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모순된 말이다.]”

그때 수시마 존자는 부처님 발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부처님, 저는 너무나 어리석고 너무나 바보스럽게도 잘못을 범했습니다. 저는 이처럼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에 가르침의 도둑으로 출가했습니다. 부처님, 제가 앞으로 저 사신을 절제할 수 있도록 저의 잘못에 대한 참회를 받아주십시오.”

“시시마, 참으로 그대는 바보스럽게도 어리석게도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이처럼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에 가르침의 도둑으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그대는 잘못을 잘못으로 보았고 가르침에 따라서 잘못을 참회하였기에 그대의 참회를 받아들인다. 잘못을 잘못으로 보고 가르침에 따라서 참회를 하고 그리고 앞으로 절제를 실천할 때, 그대를 위하여 이것은 거룩한 분의 가르침과 계율에서 하나의 성장의 길이다.”


큰 돌이 물위로 떠오르겠는가?

쌍윳따 니까야 42 가마니 쌍윳따 6

 어느 때 부처님은 날란다의 빠와리까의 망고 숲에서 계셨다. 그때 촌장 아시반다까뿟따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 서쪽 지방의 브라흐민들은 물병을 가지고 물풀로 화환을 만들어 걸고 몸을 물 속에 담그어 청정하게 하고 불을 섬깁니다. 이들 브라흐민들은 죽은 사람을 직접 들어 올려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고 인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 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들이 죽은 후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촌자이여, 내가 질뭉르 할 테니 대답해 보시오, 여기 어떤 사람이 살이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품치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인간질을 하고, 악담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욕심과 악의와 잘못된 견해로 가득 차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와서 기도하고 찬가를 외우고 합장하고 돌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죽은 후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며, 촌장이여, 이런 많은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아니면 찬가 때문에 아니면 합장하고 그를 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은 후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촌장이여, 어떤 사람이 커다란 돌을 깊은 못의 물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못의 주변에 모여와서 기도하고 찬가를 외우고 합장하고 돌면서 말하기를, ‘착한 큰 돌맹이야 떠올라라, 착한 큰 돌멩이야 물가고 나오려무나,’라고 기도한다면 이런 많은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아니면 찬가 때문에, 아니면 합장하고 멋을 돌았기 때문에 그 큰 돌이 못 위로 솟아올라 물가로 나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이와 마찬가지로 촌장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살이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것을 훔치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악담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욕심과, 악의와 잘못된 견해로 가득 차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와서 기도하고 찬가를 외우고 합장하고 돌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죽은 후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한다 하더라고 그는 죽은 후 나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촌장이여, 반대로 어떤 사람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악담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리지 않고,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와서 기도하고 찬가를 외우고, 합장하고 돌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죽은 후 비참한 곳, 나쁜 곳인 지옥에 태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촌장이여, 이런 많은 사람들의 기도 때문에, 아니면 찬가 때문에. 아니면 합장하고 그를 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은 후 나쁜 곳 지옥에 태어나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촌장이여, 어떤 사람이 한 단지의 기름을 깊은 못의 물 속에 넣은 후 그 단지를 깨뜨렸다고 합시다. 깨진 단지 조각들은 가라앉을 것이고 기름은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와서 기도하고 찬가를 외우고 합장하고 돌면서 말하기를, ‘착한 기름아 가라앉아라. 착한 기름아 아래로 내려가거라.’ 라고 기도한다면, 촌장이여, 이런 많은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아니면 찬가 때문에. 아니면 합장하고 못을 돌았기 때문에, 그 기름이 아래로 가라앉든지 아래로 내려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촌장이여, 어떤 사람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이간질 하지 않고, 악담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리지 않고,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와서 기도하고 찬가를 외우고 합장하고 돌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죽은 후 비참한 곳, 나쁜 곳인 지옥에 다시 태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는 좋은 곳인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말씀하였을 때 촌장 아시반다까뿟따는 부처님의 훌륭한 말씀을 찬탄하면서 부처님 귀의하여 재가신도가 되었다.


장로니 케마가 왕에게 설법하다.

쌍윳따 니까야 44 아뱌까따쌍윳따1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비구니 케마는 꼬살라국을 유행하다가 사왓티와 사께따 사이의 또라나왓투에 거처를 잡았다.

그때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은 사께따에서 사왓티로 가는 도중에 또 라나왓투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왕은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가서 내가 오늘 친견할 수 있는 사문이나 브라흐민이 또라나왓투에 있는가 알아보아라.”

신하는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사문이나 브라흐민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구니 케마가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왕에게 보고하여 말하였다.

“대왕님, 또라나왓투에는 대왕님이 친견할 사문이나 브라흐민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이고, 아라한이고, 온전히 깨달은 케마라고 하는 비구나가 있습니다. 이 존경스러운 비구니에 대한 훌륭한 평판이 이와 같이 두루 퍼져 있습니다. ‘케마 비구니는 지혜롭고, 실력이 있고, 박식하고, 뛰어난 언변이 있고, 총명하다.’고 합니다. 대왕님. 그 비구니를 친견하심이 좋은 듯합니다.”

그래서 빠세나디왕은 케마 비구니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한 쪽에 앉아서 이렇게 말하였다.

“전경스런 자매여, 자매님은 어떻게 말하십니까. 여래는 사후에 존재합니까?”

“그러면 자매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대왕님, 부처님은 또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매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까?”

“대왕님, 부처님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고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자매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자매님은 각의 경우에 말하기를, ‘부처님은 그것을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원인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면 대왕님, 제가 이것과 같은 것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대왕님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을 이와 같이 셀 수 있는 경리나. 회계사, 도는 수학자가 있습니까. ‘갠지스 강에는 굉장히 많은 모래알이 있다.’또는 ‘그곳에는 굉장히 많은 수백의 모래알이 있다.’ 또는 ‘그곳에는 굉장히 많은 수백천의 모래알이 있다.’고 셀 수 있습니까?”

“자매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왕님은 큰 바다의 물을 이와 같이 측량할 수 있는 경리나, 회계사, 또는 수학자가 있습니까. ‘큰 바다에는 굉장히 많은 양동이의 물이 있다.’ 또는 ‘그곳에는 굉장히 많은 수백 양동이의 물이 있다.’ 또는 ‘그곳에는 굉장히 많은 수백천 양동이의 물이 있다.’ 고 헤아릴 수 있습니까?”

“자매여,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왜냐하면 큰 바다는 깊고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재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왕님,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를 육체적 형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여래의 육체적 형상은 이미 버려졌고, 뿌리째 잘려졌고, 야자수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되었고, 미래에 장차생기지 않도록 되었습니다. 여래는 형상으로 간주되는 것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그분은 큰 바다와 같아서 깊고 헤아릴 수 없고 그 깊이를 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들은 그분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를 느낌으로, 또는 지각으로, 또는 형상으로, 또는 의식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여래의 느낌은, 지각은, 형상은, 또는 의식은 이미 버려졌고, 뿌리째 잘려졌고, 야자수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되었고. 미래에 장차 생기지 않도록 되었습니다.

여래는 느낌으로, 또는 지각으로, 또는 형상으로, 또는 의식으로 간주되는 것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그분은 큰 바다와 같아서 깊고 헤아릴 수 없고, 그 깊이를 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또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들은 그분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은 비구니 케마의 이와 같은 말에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 비구니의 오른쪽으로 돌아 떠나갔다.


이 사라 나무도 ‘진리의 흐름’에 들었다.

쌍윳따 니까야 55  소따빳띠 쌍윳따 24

어느 때 부처님은 까삘라왓투의니그로다 승원에 계셨다. 그때 사꺄족의 사라까니가 죽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라까니는 진리의 흐름에 든 사람으로서 더 이상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확정되어 깨달음으로 향하여 나아간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많은 사꺄족들이 모여서 투덜거리고 불평하고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정말로 놀랄 일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누구나 진리의 흐름에 든 이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얼마 전에 죽은 사라까니는 진리의 흐름에 든 사람으로서 더 이상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깨달음으로 향하여 나아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행도 하지 않았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래서 사꺄족의 마하나마는 부처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않아 이 모든 내용을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하나마여, 재가신도가 오랜 세월 동안 부처님과, 가르침과, 숭가에 귀의하였다면 어떻게 그가 나쁜 곳으로 가겠는가? 만일 누구든지‘[오랜 세월 동안]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한 재가의 제자’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로 사꺄족의 사라까니를 바르게 말한 것이다. 사꺄족의 사라까니는 그렇게 행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나쁜 곳으로 가겠는가?

만일 이 커다란 사라 나무가 잘 설해진것과 잘못 설해진 것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이 나무에게라도 ‘이 나무는 진리의 흐름에 들어 더 이상 나쁜 곳에 떨러지지 않고 확정되어 깨달음으로 향하여 나아간다.’고 선언할 것이다. 하물며 사까족의 사라까니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꺄족의 사라까니는 그가 죽을 때 수행을 성취하였다.”


바후까 강으로 왜 갑니까?

맛지마 니까야.7   왓투빠마 경 19-22

이오아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브라흐민 순다리까 바라드와자는 부처님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고따마 존자님은 바후까 강으로 목욕하러 가십니까?”

“브라흐민이여, 바후까 강으로 왜 갑니까? 바후까 강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고따마 존자님. 많은 사람들은 바후까 강이 그들을 깨끗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바후까 강에서 그들이 지은 악한 행위를 씻어냅니다.”

이에 부처님은 브라흐민 순다리까 바라드와자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바후까 강에서, 아디깍까. 가야, 그리고 순다리까 강과

사랏사띠 강과, 빠야가, 그리고 바후마띠 강에

어리석은 자 영원토록 목욕한다 해도

그의 검은 행위를 깨끗이 할 수 없네.

순다리까 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빠dirk, 바후까 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잔인하고 잔혹한 짓을 한 사람들,

강들은 이런 악인을 씻어 깨끗이 할 수 없네.


마음이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

매일 매일이 정화의 날 이고 포살날이네

행동이 바르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자신의 계행을 온전히 하네.


브라흐민이여, 이 가르침에 목욕하라

그래서 모든 존재를 안온하게 하라.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으며.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으며.

믿음을 가지고 인색하지 않으며.

가야 강으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어떤 우물도 가야이므로.


부처님의 이왕 같은 말씀을 듣고 브라흐민 순다리까 바라드와자는 부처님께 출가하여 비구가 되어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초인간이 아닌 수행자 고따마

맛지마 니까야. 12 마하시하나다 경 1-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웨살리 근교의 서쪽에 있는 숲에 계셨다.

그때 릿차위족의 아들 수낙캇따는 최근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웨살리에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수행자 고따마는 어떤 초능력적인 면모도 없고, 훌륭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나 통찰력의 특별함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추론에 의하여 담마를 가르칩니다. 그는 누구에게든지 담마를 가르칠 때는 이렇게 말합니다.‘이 가르침을 수행하면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그때 아침에 존자 사리뿟따가 웨살리에 탁발하러 나갔다가 수낙캇따의 부처님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수낙캇따가 비난하고 다니는 이야기를 그대로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은 사리뿟따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어리석은 수낙캇따는 [마음속에 불만이 있고] 그래서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그는 여래를 비난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는 여래를 칭찬하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사문 고따마는 누구에게든지 담마를 가르칠 때는 이 담마를 수행하는 사람을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낙캇따가 말하는 것은 여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하는 것이다.”


희론에 물들지 않는 분

맛지마 니까야 18 마두삔디까 경 1-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꺄족들이 사는 곳에 계셨는데 까빌라왓투의 니그로다 승원에 계셨다. 부처님은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을 마치고 낮 동안의 명상을 위해 마하와나로 갔다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갔다. 그는 부처님께 인사를 하고 지팡이에 기대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교만한 투로] 사문의 견해는 무엇이오? 무엇을 가르칩니까?”

“벗이여, 나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습니다. 감각적 쾌락에서 떠나고, 의혹을 떠나고, 걱정을 끊어버리고, 존재의 어떤 영역에 대한 갈애도 없이 머무는 사람은 더러움에 물든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고 나의 견해입니다.”

부처님의 이런 대답에 단다빠니는 머리를 흔들고, 혀를 내두르고, 이마를 찡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그 자리를 떠났다.

부처님은 저녁나절 명상을 끝내고 다시 니그로다 승원으로 돌아오셔서 비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다빠니와의 대화 내용을 모두 이야기 하셨다. 그때 어떤 비구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부처님, 이 세상 어느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더 이상 그런 더러움에 물든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까?”

“비구들이여, 인간을 괴롭히는 희론 에 물든 인식과 개념이 있는데, 만일 그것에서 기뻐할 것도 없고, 환영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은 잠재적 집착의 끝이며, 증오의 끝이며, 잘못된 견해의 끝이며, 의심, 자만심, 존재에 대한 욕망, 무지의 끝이다. 그것은 몽둥이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의 끝이며, 다툼, 싸움, 논쟁, 비난, 악의, 거짓말의 끝이며, 여기에서 악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어두운 행위에는 어두운 결과가 따른다.

맛지마 니까야 57 꾹꾸라와띠까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꼴리야국의 할릿다와 사나라는 꼴리야 마을에 계셨다.

그때 소의 행동을 하며 수행하는 고행자 뿐나와 개의 행동을 하며 수행하는 나체 고행자 세니야가 부처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소의 행동을 닦는 뿐나는 한쪽에 앉고 개의 행동을 닦는 세니야는 개처럼 한쪽에 웅크리고 앉았다. 뿐나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님, 세니야는 나체로 남이 하기 어려운 개의 행동을 하며 고행합니다. 그는 음식이 땅위에 던져졌을 때 먹고 오랫동안 개의 행동을 하며 고행을 해 왔습니다. 그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미래에 그는 어디로 갑니까?”

“뿐나여. 그만두시오, 그런 것을 나에게 묻지 마십시오.”

뿐나는 두 번, 세 번 부처님께 똑같은 질문을 하며 부처님의 대답을 듣기 원하였다.

“뿐나여,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 말라고 하면서 그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할 수 없이] 그대에게 말하겠소, 뿐나여, 여기 어떤 사람이 철저하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개의 행동과 개의 습관, 개의 마음을 닦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는 개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가 설령 생각하기를 ‘이런 계행과 고행과 수행으로 나는 신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뿐나여,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 말고 그만두라고 그대에게 말했지만 나는 그대를 설득할 수 없었소.”

이에 세니야는 말하였다.

“존자님.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오랫동안 개의 행동을 닦으며 고행하였기 때문에 [그 과보를 생각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존자여, 여기 뿐나는 소의 행동을 하는 고행자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소의 행동을 하며 고행을 해 왔습니다. 그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미래에 그는 어디로 갑니까?”

“세니야, 그만두십시오,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세이야는 두 번,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세나야여,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할 수 없이]그대에게 말하겠소. 여기 어떤 사람이 철저하게 소의 행동과 소의 습관과 소의 마음을 닦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는 소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가 설령 생각하기를‘이런 수행과 고행의 공덕으로 나는 신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뿐나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내어 울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세나야여,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 말고 그만두라고 그대에게 말했지만 나는 그대를 설득할 수 없었소.”

이에 뿐나는 말하였다.

“존자님.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오랫동안 소의 행동을 닦으며 고행하였기 때문에 [그 과보를 생각하고] 우는 것입니다.

존자님. 저는 부처님께 대한 이런 신뢰심이 있습니다.“부처님은 나에게 소의 행동을 버릴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실 수 있다 그리고 여기 개의 행동을 닦는 나체 고행자도 개의 행동을 버릴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실 수 있다.’고요.”

“뿐나여, 여기 내가 최상의 지혜로 깨달은[진지린]네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네가 행위란 무엇입니까?

① 어두운 행위는 어두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② 밝은 행위는 밝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③ 어둡고 밝은 행위는 어둡고 밝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④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행위는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부처님은 각 행위를 더 설명하셨다. 이에 소의 행동을 닦는 고행자뿐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면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재가신도가 되었다. 개의 행동을 닦는 고행자 세니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면서 부처님께 출가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세니야여, 전에 다른 교단의 사람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 출가하기를 원한다면 넉 달 동안 시험삼아 살아보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넉 달의 마지막 날에 만일 모든 비구 대중들이 그에게 만족하면 비구들은 그를 받아들여 비구의 자격을 줍니다. 그러나 출가를 원하는 사람에 따라서 개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후 세니야는 넉 달간의 시럼 기간을 거쳐 정식 비구가 되어 열심히 정진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열 가지 형이 상학적 질문

맛지마 니까야 63 쫄라말룽꺄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말룽꺄뿟따 존자는 홀로 명상을 하고 있는 동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추론적인 견해들은 말씀하시지 않고 제쳐 두고 배척하셨다.

① 세상은 영원한가?

②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③ 세상은 유한한가?

④ 세상은 무한한가?

⑤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⑥ 영혼과 육체는 다른가?

⑦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가?

⑩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런 견해에 대해 부처님이 내게 말씀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하고 흡족하지 않다. 그러니 부처님께 가서 그 뜻을 여쭈어 보아야겠다. 만일 부처님이 이런 질문에 대답하시면 나는 수행생활을 계속할 것이고, 만일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 나는 수행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저녁나절 말룽꺄뿟따 존자는 명상을 끝내고 부처님께 가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말씀드렸다. 그리고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두 가지 다 모르시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솔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은 유하다’라고  생각하시면 ‘세상은 유한하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유한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세상은 무한하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두가지 다 모르시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솔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영혼과 육체는 같다’고 생각하시면......, ‘영혼과 육체는 같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면.....,‘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고 생각하시면.....,‘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면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두 가지 다 모르시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솔직할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말롱까뿟따. 내가 그대에게 ‘나를 따라 청정한 수행생활을 하면 그대에게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또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를 말해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부처님.”

“그대가 나에게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은 영원하가, 영원하지 않은가, 또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를 말해 주신다면 나는 부처님께 출가하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부처님.”

“알롱꺄뿟따, 나도 그대에게 ‘나를 따라 출가하면 세상은 영원한가, 등을 말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대도 나에게 세상은 영원하다 등을 말해 주면 출가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아, 누구에게 무엇을 버리겠다는 것이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부처님께서 세상은 영원하가. 영원하지 않은가, 또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를 성명해 줄 때까지, 나는 부처님 아래 출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것들은 결코 여래에 의하여 그에게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그러는 동안 이 사람은 아마 죽을 것이다.


(독 묻은 화살의 비유)

말롱꺄뿟따, 어떤 사람이 독이 잔뜩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래서 그의 친구와 동료와 친척들이 그를 치료하기 위해 외과의사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독화살 맞은 사람이 말하기를‘나를 쏜 사람이

- 계급이 왕족인지, 브라흐민인지, 상인인지, 노예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종족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 피부색깔이 검은지, 갈색인지, 금색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  활이 긴 활인지, 격발식 활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 화살을 뽑지 않겠다.

-  활 줄이 섬유인지, 갈대인지, 힘줄인지, 대마인지, 나무껍질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겟다.

-  화살대가 거친지, 또는 잘 다듬어졌는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  화살의 깃털이 톡수리 깃털인지, 까마귀, 매, 공작새, 황새 깃털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  화살대를 묶은 힘줄이 황소 힘둘인지, 들소, 사자, 원숭이 힘줄인지 알지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  화살이 뽀족한지, 굽었는지, 가시가 있는지, 송아지 이빨 같은지, 협죽도 잎 모양인지 알기 전에는 이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이것들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며 그러는 동안에 그는 죽고 말 것이다.


(세상이 영원해도 영원하지 않아도 생로병사는 여전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륭꺄뿟따, ‘부처님이 세상은 영원하가, 영원하지 않은가. 또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를 성명해 주실 때까지. 나는 부처님이 아래 출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래는 그에게 결코 설명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러는 동안 그는 죽고 말 것이다.

말롱꺄뿟따, 청정한 삶이란 ‘세상은 영원한가 또는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견해에 따라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영원하다.’ 또는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이것과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는 여전히]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있으며, 슬픔, 한탄, 괴로움, 절망이 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것들의 부수어버림을 가르친다.


(단언하여 말하지 않은 것)

그러므로 말룽꺄뿟따, 내가 단언하여 말한 것은 단언하여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단언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단언하여 말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여라.

어떤 것을 내가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은 영원하다.’고 나는 단언하지않았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않다’고도 나는 단언하지 않았다. ‘영혼과 육체는 같다’고 나는 단언하지 않았다. ‘영혼과 육체는 같지 않다’고도 단언하지 않았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고 나는 단언하지 않았다.‘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단언하지 않았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고 나는 단언하지 않았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도 단언하지 않았다.

나는 왜 그것들을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이것들은 목표와 이어져 있지 않으며, 청정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지 않으며, 깨어 있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욕망의 버림, 갈애의 소멸, 평화로움, 최상의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단언하여 말한 것)

그러면 나는 무엇을 단언하여 말하였는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단언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의 근원이다.’라고 나는 단언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단언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단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왜 그것들을 단언하여 말하였는가? 왜냐하면 이것들은 목표와 이어져 있으며, 청정한 삶의 근본이며, 깨어있음으로 이끌며, 욕망의 소멸, 갈애의 소멸, 평화로움, 최상의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롱꺄뿟따, 그대는 내가 단언하여 말한 것은 단언하여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단언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단언하여 말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여라, 이것이 붓다의 말이다.”

말롱꺄뿟따 존자는 부처님 말씀에 만족하고 기뻐하였다.


출가 수행 생황의 눈에 보이는 결실

다가 나까야:2 사만나 필라 경 12.14.34-36

아자따삿뚜왕은 부처님께서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제게 질문할 기회를 주신다면 뭐좀 여쭙고 싶습니다.”

“대왕님, 무엇이든지 다 말씀하십시오.”

“부처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기술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코끼리 다루는 사람. 말을 다루는 사람, 전차 투사, 궁술사, 전략가, 황실 고위 관리, 요리사, 이발사, 빵 굽는 사람, 화환 만드는 사람, 천짜는 사람, 염색공, 비구니 만드는 사람, 단지 굽는 사람, 회계사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많은 기술들이 있습니다. 어떤 기술을 기지고 있든 이들은 지금현재 모두 그들 기술의 눈에 보이는 결과로 살아갑니다. 그들 자신이 기쁨과 행복을 얻고 부모와 아내, 자녀, 친구, 동료들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그들은 사문이나 브라흐민에게 꾸준히 보시를 합니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축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고 천상에 태어난다고 확신합니다. 부처님 지금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이와 비슷한 사문의 결실을 지적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대왕님,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몇 가지 질문을 하겠으니 합당한 대답을 하도록 사십시오, 대왕님께 하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하인은 그대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잡니다. 그대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합니다 항상 그대를 기쁘게 하도록 행동하고 공손하게 말합니다. 항상 그대의 얼굴빛을 살핍니다.

그런데 그 하인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시다. ‘공덕의 행위의 결실과 그 종국의 행선지는 정말 훌륭하고 놀랍지 않은가! 마가다의 아자따삿뚜왕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그러나 왕은 마치 신처럼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산다. 반면에 나는 하인이다. 왕보다 나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잔다. 왕이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한다. 항상 왕을 기쁘게 하도록 행동하고 공손하게 말한다. 항상 황의 얼굴빛을 살핀다. 그러니 나 또한 공덕의 행위를 닦아야겠다.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가사를 입고 출가하면 어떨까?’

하인은 그 후 출가하여 행동과 말과 생각을 절제하고, 최소의 음식과 의복에 만족하고 떨어져 사는 것을 기뻐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왕의 수행원이 그대에게 보고하기를, ‘대왕님의 노예였던 자가 삭발하고 출가하여 훌륭하게 수행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며 S이런 보고를 듣고 왕께서, ‘그 노예가 내게로 다시 돌아와서 내 시중을 들도록 하라. 그를 다시 노예로 만들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합당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부처님, 우리는 오히려 그에게 절을 하고 그에 대한 존경시믕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며 자리를 권하여 앉도록 할 것입니다. 가사와, 음식, 거처, 그리고 질병에 사용될 의약품을 받도록 청할 것이며 법에 따라 그에 대한 안전과 보호를 제공할 것입니다.”

“대왕님 그렇다면 이것이 지금 현재 눈에 보이는 사문의 결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현재 눈에 보이는 사문의 결실입니다.”

“대왕님, 그렇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지적하는 지금 현재 눈에 보이는 사문의 결실입니다.”


여섯 이교 사상가의 견해

다가 니까야 2 사만냐팔라 16-33

아자따삿뚜왕은 부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 저는 여섯 명의 사상가를 방문하여 출가 수행생활의 결실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뿌라나 깟사빠는 대답하기를,

살이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고, 문을 부수고 도독질하고, 강탈하고, 노상 강도짓을 하고, 간통하고, 거짓말하는 등의 나쁜 짓을 해도 그것은 악을 지은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날카로운 날을 기진 원반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갈아 한 무더기로 만든다 해도 악을 지은 것이 아니며, 이 결과 때문에 악이 더 덧붙지도 않는다. 갠지스 강의 남쪽 강변으로 가서 살해하고 살해하게 하더라고 악을 지은 것이 아니며, 이 결과 때문에 악이 더 덧붙지도 않는다. 갠지스 강의 북쪽으로 가서 보시를 하고 보시를 하게 하더라도,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게 하더라도, 공던을 지은 것이 아니며 이 결과로 공덕이 더 덧붙지도 않는다. 보시하고 자신을 절제하고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진실을 말한다 해도, 공덕이 되지 않으며 공덕이 더 덧붙지도 않는다.


막칼리고 고살라는 대답하기를,

사람을 타락시키는 어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사람을 정화시키는 어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타락되기도 하고 정화되기도 한다. 나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고, 남의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고,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도 없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들 자신에게는 힘이나 에너지가 없으며, 다만 그들의 운명에 따라서 그들이 속한 여섯종류의 윤회의 조건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는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팔백사십만 대겁을 윤회한 후 괴로움이 끝난다. ‘계행에 의하여, 의무의 수행, 고행, 청정한 수행생활을 함으로써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한다든지, 또는 이미 익은 업을 점차적으로 없애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즐거움과 괴로움과 괴로움을 윤회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줄인 수도 없고 늘일 수도 없다. 마치 실타래를 던지면 감겨있는 실의 길이만큼 멀리 굴러가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윤회할 만큼 윤회한 후에 괴로움이 끝난다.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대답하기를,

보시나 제사 제물에 대한 공덕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저절로 생긴 것도 없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최상의 지혜로 깨달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말하는 바르게 수행하는 사문도 없고 브라흐민도 없다. 인간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가 죽으면 땅의 요소는 땅의 본체로 돌아가고, 물의 요소는 물의 본체로 불의 요소는 불의 본체로, 바람의 요소는 바람의 본체로 돌아가고, 감각기능들은 허공에 흩어진다.  관을 다섯 번째로 하여 네 사람이 시체를 메고 간다. 송경은 오직 화장터까지만 들린다. 뼈는 회색으로 변한다. 제식은 재로 끝날 뿐이다. 보시는 바보들의 생각이다. 죽은 후의 존재를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이며 빈말이다. 어리석은 자도 지혜로운 자도 죽은 후에는 몸은 파괴되고 없어져 버린다.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빠꾸다 깟짜야나는 대답하기를.

다음의 일곱 가지는 말들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며, 창조된 것도 아니고 창조자도 없다 그러므로 이 일곱 가지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일곱 가지는 산의 정상처럼 확고하고 변하지 않으며, 서로 방해하지 않으며, 서로 즐거움이나 괴로움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 일곱 가지는 땅의 본체, 물의 본체, 불의 본체, 바람의 본체, 쾌락, 고통, 영혼이다. 이 일곱 가지에는 죽이는 자도 없고 죽임을 당하는 자도 없다. 듣는 자도 없고 말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없다. 날카로운 칼로 목을 베어도 누구의 목숨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칼날이 이 일곱 가지 본체 사이의 공간을 지났을 뿐이기 때문이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대답하기를,

이 세상에서 니간타는 네 가지의 자아 절제로 자신을 절제한다. 그는 모든 물의 사용을 절제하여 찬물을 취하지 않는다. 악을 삼간다. 악을 삼감으로써 악을 완전히 버린다. 완전한 절제를 성취한다. 이것이 네 가지 자아 절제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자아 절제로 자신을 절제하는 니간타를 일러 ‘자아를 성취한 사라,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 자아가 확고부동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산자야 벨랏타뿟따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대가 나에게 ‘저 세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만일 내 생각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되면 ‘다른 세상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저렇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저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 세상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우연히 생기는 존재가 있는냐’고 묻는다면, 또는 ‘선행과 악업의 과보가 있는냐’고 묻는다면, 또는 W'죽음 후에 삶이 있는냐‘고 묻느다면, 나는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저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저렇지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 이 여섯 사문이나 브라흐민의 주장을 듣고 나는 그들의 말에 찬사도 거부도 나타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더 큰 결실과 이익이 있는 제사

다가 니까야 5  꾸따단따 경 26-28

꾸따단따 브라흐민은 부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다.

“고따마 존자님. 이 제사보다 덜 어렵고 덜 번거롭고 그러나 더 큰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다른 제사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브라흐민이여,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청정한 마음으로 계행을 지키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금하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덜 어렵고 덜 번거롭고 그러나 더 큰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님. 이 다섯 가지 계(오계)보다 더 큰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다른 제사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브라흐민이여, 그것은 붓다는 온전히 깨달은 분이며 처음도 훌륭한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바른 뜻과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합니다. 그리고 완전하고도 청정한 수행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계행을 닦습니다.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그 결과 네 가지 선정을 통하여 번뇌를 맑힙니다.

그리고 결과 네 가지 선정을 통하여 번뇌를 맑힙니다.

그리고 열반을 성취하고 윤회의 사슬을 끊습니다.

이런 수행이 바로 그 어떤 제사보다 더 단순하고 덜 어렵고 덜 번거롭고 더 많은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제사입니다. 이것보다 더 거대하고 더 완전한 제사는 없소,“

이와 같이 부처님이 말씀하시자 꾸따단따 브라흐민은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고따마 존자님. 저를 재가신도로 받아 주십시오, 저는 각각 700마리의 황소와, 수송아지와, 암송아지와, 염소와, 숫양을 모두 풀어주겠습니다. 저는 그들을 살려주고 푸른 풀을 먹게 하겠습니다.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하고, 시원한 바람이 그들 주위에 감돌게 하겠습니다.”


초 능력과 기적을 금하심

다가 니까야 11 께왓다 경 1-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날란다의 빠와리끼의 망고 숲에 계셨다. 그때 젊은 장자 께왓다가 부처님께 와서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 이 날란다는 부유하고, 번영하고, 인구가 많고, 부처님께 신심이 돈독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어떤 비구에게 보통사람을 초월하는 힘으로 기적을 행하도록 말씀하신다면 이 날란다는 더욱더 부처님께 신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께왓다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께왓다, 나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가서 흰옷을 입은 재가자들을 위해 보통사람을 초월하는 힘으로 기적을 행하라.”

그러나 젊은 장자 께왓다는 부처님께서 똑같은 요청을 두 번, 세 번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초능력이나 기적의 위험을 그에게 설명하시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께왓다, 나는 기적의 위험을 보기 때문에 기적을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브라흐마 신은 있는가?

다가 니까야 13 떼윗자 경 1-15-19-2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500명의 많은 비구와 함게 꼬살라를 우행하여 브라흐민 마을인 마나사까따로 가셨다. 그리고 마나사까따의 북쪽 아찌라와띠 강변의 망고 숲에 머무셨다. 그때 매우 유명하고 부유한 브라흐민들이 마나사까따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짱끼, 따룩카, 뽁카라사띠, 지눗소니, 또데야, 그리고 다른 유명하고 부유한 브라흐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 와셋타와 바르드와자는 이리 저리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참된 길과 그릇된 길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젊은 브라흐민 와셋타는 말하였다.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길이며 바른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 이것은 뽁카라사띠 브라흐민의 가르침이다.”

이에 젊은 브라흐민 바라드와자가 말하였다.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길이며 바른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 이것은 따룩카 브라흐민의 가르침이다.”

이 주장은 서로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때 와셋타가 바르드와자에게 말하였다.

“사까족 출신의 사문 고따마께서 지금 아찌라와띠 강변 망고 숲에 계십니다. 그분은 깨달으신 분, 붓다라고 합니다. 그분에 대한 좋은 평판이 자자합니다. 그러니 우리 합께 사문 고따마께 가서 이 문제를 여쭈어 봅시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새기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이 계신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와셋타가 바라드와자와의이야기를 모두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셨다.

“어떤 점에서 그대들 사이에 논쟁과 다춤과 의견의 다름이 있었는가?”

“고따마 존자님, 참된 길과 그릇된 길에 대해서입니다. 다양한 브라흐민들은 각기 다양한 길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앗다리야, 띳띠리야, 찬도까, 찬다와, 브라흐마짜리야 브라흐민입니다. 이들 모두의 가르침이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브라흐마 신과 하나 됨으로 이끕니까? 마치 마을이나 도시의 근처에 많고 다양한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모두 함께 마을에서 만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들 브라흐민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길이 있지만 그 다양한 길을 따르는 사람을 모두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끕니까?”

“와셋타, 그대는 그들 모두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님.”

부처님은 재차 물었다.

“그대는 그들 모두가 브라흐마 신과 하나 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나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 중 어느 하사람이라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스승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스승의 스승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브라흐마 신을 직넙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런데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고대 브라흐민 선인들은 베다 시구의 저자이고 베다 시구를 읊은 사람들이고 베다 시구를 쓴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 날의 브라흐민들은 그것들을 수집하여 반복해서 암송하고 또 반복한다. 어조나 암송은 정확하게 예전의 어조로 말하고 암송한다. 그들은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는 브라흐마 신이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나타나고 어디에 나타나는지 알고 본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 중에 어느 누구도, 또한 그들의 스승들 중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들 중 7대를 거슬러 올라가 어느 누구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 베다 시구의 저자이며 암송자들인 고대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들은 전승된 그대로 정확하게 그대로의 어조로 암송한다. 전승을 그대로 암송하는 이들조차도 ‘브라흐마 신이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나타나고 어디에 나타나는지 알고 본다.’고 말한적이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우리들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 못한 브라흐마 신과의 하나되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 길이며, 바른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이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음을 드러나지 않았는가?”

“정마 터무니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와셋타, 그것은 마치 장님 세 사람이 끈을 서로 붙잡고 길을 기지만 맨 앞의 사람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중간 사람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맨 끝의 사람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이 말하는 것이 우스광스러울 뿐이며 단지 비고 공허한 말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서 사랑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묻기를.

‘그녀가 무슨 계습에 속하는지 압니까?’

‘모릅니다.’

‘그러면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여인을 찾고 사랑한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와셋타. 이 사람의 말이 어리석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정말 그의 말은 어리석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럿은 마치 아찌라와띠 강을 건너 저쪽 강둑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냥 이쪽 강둑에 서서 소리지르기를, ‘저쪽 강둑아 이쪽으로 오너라!’ 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 와셋타, 이 사람이 부른다고 해서, 빌고, 간원하고, 구슬린다고 해서 저쪽 강둑이 이쪽으로 오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므로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그 말들은 터무니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정말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이야기는 터무니없음이 드러났습니다.”


붓다를 떠난 이유

다가 니까야 24 빠띠까 경 1.1-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말라족의 도시인 아누삐야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이른 아침 탁발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시고 방랑수행자 박가와곳따의 수행처를 방문하셨다. 박가와곳따는 말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세존께서 오랜만에 여기에 오실 기회를 만드셨군요, 환영합니다.”

그는 부처님을 환대하여 자리에 모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님, 얼마 전에 릿치위족의 수낙카따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박가와, 나는 세존을 떠났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가르침 아래 있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오, 박가와, 얼마 전에 수낙카따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저는 부처님을 떠나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보통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어떤 신통 기적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세상의 기원도보여 주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소, 그래서 말하기를

‘수낙카따, 내가 그대에게 <오너라, 수낙카따, 나의 가르침 아래로 오너라, 그러면 내가 보통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신통 기적을 보여주겠다. 또한 내가 세상의 기원을 말해주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부처님.’

‘아니면 그대가 나에게 <부처님께서 보통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신통 기적을 보여 주시면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 출가하겠습니다. 또는 부처님께서 세상의 기원을 가르쳐 주시면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 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 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부처님.’

‘수낙카따, 신통기적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세상의 기원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나의 가르침인 담마의 목적은 이 가르침을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그러므로 수낙카따, 신통기적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세상의 기원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나의 가르침인 담마의 목적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닌가? 그리므로 신통 기적을 행한다든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박가와, 이와 같이 수낙카따는 나의 가르침을 떠나갔습니다.“


육방에 예배하는 바른 방법

다가 나까야 31 시갈로와 다경 1-1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셨다.

그때 장자의 아들인 젊은 시갈라는 아침 일찍 일어나 라자가하를 벗어나 [물에서 나와] 옷과 머리가 젖은 채로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동.서.남. 북.위. 아래의 방향을 향하여 예배하였다.

부처님은 이른 아침 탁발을 하려고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다가 시갈라 여러 방향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장자의 아들이여, 그대는 왜 이렇게 옷과 머리가 젖은 채 여러 다른 방향에 예배하는가?”

“존자님. 저의 아버지가 임종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여러 방위에 예배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존경과 공경 심으로 여러 방향 즉, 동. 서. 남. 북. 아래. 위의 방향을 향하여 예배합니다.”

“장자의 아들이여, 그러나 거룩한 가르침에서는 육방은 그런 식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존자님. 거룩한 가르침에서는 어떻게 육방에 예배를 합니까? 거룩한 가르침에서 육방을 어떻게 예배하는지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귀를 기울여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 그대를 위하여 설하리라.

훌륭한 제자들은

네 가지 업을 짓게 하는 더러움을 버린다.

네가지 요인으로부터 악업을 짓지 않는다.

재물을 탕진하는 여섯 가지 길에 빠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열네 가지 악한 것들을 멀리함으로써 그는 육방을 다 아우르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성취한다. 그리고 죽으면 좋은 곳에 태어난다.

[네 가지 더러움]: 무엇이 버려야 할 업을 짓는 네 가지 더러움인가? 살생하는 것, 주지 않은 것을 갖는 것, 삿된 음행을 하는 것, 거짓말 하는 것, 이것들이 버려야 할 업을 짓는 네 가지 더러움이다.

[악업을 짓지 않는 네 가지 요인]: 무엇이 삼가야 할 업을 짓는 네 가지 악의 요인인가? 집착, 성냄, 어리석음,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악업을 짓는다. 그러나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런 집착, 성냄, 어리석음, 그리고 두려움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에 악업을 짓지 않는다.

[재물을 탕진하는 여섯 가지 길]: 무엇이 따라서는 안 될 재물을 탕진하는 여섯 가지 길인가? 나태함의 원인이 되며 취하게 하는 술에 빠지는 것은 재물을 탕진하는 길이다. 부적절한 시간에 길거리를 자주 배회하는 것,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쏘다는 것, 놀음에 빠저드는것, 나쁜 친구와 사귀는 것, 게으른 습성, 이 여섯 가지는 재물의 탕진으로 이끈다.

[재물을 탕진하는 여섯 가지의 자세한 설명]: 나태함의 원인이 되며 취하게 하는 술에 빠지는 것에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재물을 잃고, 싸움에 횝쓸려 들어가지 쉽고, 병에 걸리기 쉽고, 좋은 명성을 잃고, 사나운 꼴이 드러나고, 지혜가 줄어든다.

부적절한 시간에 길거리를 자주 배회하는 것에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자신을 방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며, 재산을 지키지 못하며, 범죄자로 의심받고, 거짓 소문의 표적이 되며, 많은 문젯거리들과 마주치게 된다.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 것에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항상 생각하기를 ] 어디서 춤을 추나? 어디서 노래를 하나? 어디서 음악연주가 있나? 어디서 낭송이 있나? 어디서 심벌을 치는가? 어디서 북을 치는가? 하면서 이리저리 다닌다.[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한다.]

놀음에 빠져버리는 것에 어섯 가지 위험이 있다. 이긴 사람은 원가 생기며, 진 사람은 잃은 것을 비통해 하며, 재산을 탕진하고, 법정에 말에 신용이 없으며, 친구나 도어료로부터 멸시를 받으며, 노름꾼은 아내를 부양할 수 없으므로 결혼의 요청이 없다.

나쁜 친구와 사귀는 것에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노름꾼, 방탕자. 술 중독자. 사기꾼, 협잡꾼, 불량배들이 그의 친구이고 동료이다.

게으른 습성에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그는 생각하기를, ‘너무 춥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 ‘너무덥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 ‘너무 이른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너무 늦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너무 배고프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 ‘너무 배부르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안하는 동안 새 재산은 못 벌고 벌어 놓은 재산은 줄어들어 없어지고 만다.“

부처님은 이어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어떤 친구는 술친구이다.

어떤 친구는 앞에서만

‘사랑하는 친구여, 사랑하는 친구여!’ 라고 말한다.

그대가 필요한 때의 친구

그만이 오직 참다운 친구이다.


해가 뜰 때까지 참을 자고, 간통하고, 원수를 만들고,

남을 해치고, 악한 사람과 사귀고, 극도로 인색한 것,

이 여섯 가지는 사람을 망친다.


노름과 여자, 술, 춤과 노래,

낮에 잠자고 밤에 어슬렁거림.

사악한 친구와의 사귐. 인색한 사람

이 여섯 가지는 사람을 망친다.


목마르다고 술집을 자주 들락거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술고래는

물에 던진 돌이 가라낮듯이

빛더미에 가라앉아

친척이 내치고 의절하게 된다.


습관적으로 낮에 잠자는 사람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

항상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은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너무 춥다! 너무 덥다! 너무 늦다! 고 소리치며

모든 할 일을 옆으로 제쳐놓는 젊은이에게

좋은 기회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춥든지, 덥든지

지푸라기보다 더 하찮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 하는 사람은

그의 행복은 결코 줄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와 거짓 친구

디가 니까야:31 시갈로와다 경 15-26

계속하여 부처님은 장자의 아들 시갈라에게 말씀하셨다.

“장자의 아들이여, 참된 친구인 척하지만 거짓 친구라고 알아야 할 네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라도 가져가기만 하고 줄줄 모르는 친구, 행함 없이 말만 많은 친구, 아첨하는 친구, 불량배 친구’이다.

‘가져가기만 하고 남에게는 전혀 줄줄 모르는 친구’는 참된 친구인 척하지만,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거짓 친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가져 기기만 하지 전혀 남에게 줄줄 모른다. 남에게 조금 주면서 많은 것을 요구한다. 두려움 때문에 그의 의무를 행한다.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 이런 사람이 가져가기만 하고 남에게는 줄줄 모르는 친구이다.

‘행함 없이 말만 많은 친구’는 참된 친구인 척하지만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거짓 친구임을 알 수 있다. 친구를 위하여 ‘과거에 이렇게 하려 했었는데’ 라고 말하고, ‘앞으로 이렇게 할 것’ 이라고 말하고, 빈말로 호의를 사려하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런 사람이 행함 없이 말만 많은 친구이다.

‘아첨하는 치구’ 참된 친구인 척하지만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거짓 친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찬성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반대하고,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욕을 한다. 이런 사람이 아첨하는 친구이다.

‘불량배 친구’는 참된 친구인 척하지만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거짓 친구임을 알 수 있다. 술에 빠졌을 때의 술친구, 부적절한 시간에 거리를 배회할 때의 친구,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쏘다닐 때의 친구, 놀음에 빠졌을 때의 친구, 이런 친구가 볼량배 친구이다.”

이어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오직 가져가기만 하는 친구

행동은 없고 말만 많은 친구

아첨하는 친구

불량배 친구

이 네 친구는 거짓 친구이다.

현자는 이것을 알고서

두려움과 위험의 길인

이런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참된 친구]

“장자의 아들이여, 참된 친구라고 생각해야 할 네 사람이 있다. 돠와 주는 친구,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한결같은 친구, 바른 조언을 주는 친구, 동정심이 있는 친구, 이런 친구가 참된 마음을 가진 친구이다.

‘도와주는 친구’는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참된 친구임을 알 수 있다.

술이 취하였을 때 지켜 주며, 술이 취하였을 때 재물을 지켜 주며, 곤경에 처하였을 때 의지쳐가 되며,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요청한 도움의 두 두배로 도와주는 친구, 이런 친구가 도와주는 친구이다.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한결같은 친구’는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참된 친구임을 알 수 있다. 비밀을 털어 놓고, 털어놓은 비밀을 지켜 주며, 친구가 곤경에 처했을 때 떠나지 않으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라도 버리는 친구, 이런 친구가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한결같은 친구이다.

‘바른 조언을 주는 친구’는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참된 친구임을 알수 있다. 친구가 악행을 하지 않도록 하며, 선행을 하도록 북돋우며, 알지 못한 것들을 알려주며, 천상에의 길을 가르쳐 준다. 이런 친구가 바른 조언을 주는 친구이다.

‘동정심이 있는 친구’는 네 가지 이유로 볼 때 참된 친구임을 알 수 있다. 친구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으며, 친구의 행운을 기뻐하며, 친구에 대항하는 자를 못하게 하며, 친구를 칭찬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친구, 이런 친구가 동정심이 있는 친구이다.“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도와주는 친구,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한결같은 친구

훌륭한 조언을 주는 친구

동정심으로 가득한 친구

지혜로운 이는 이 네 친구가

참된 친구임을 알아야 한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헌신하듯

그렇게 친구에게 헌신해야 한다.


붓다는 허 무주의 자인가?

앙굿따라 니까야 10부 94

어느 때 부처님은 짬빠 근처의 각가라 호숫가에 계셨다.

어느 날 왓지야마히따 장자는 부처님을 뵙기 위하여 이른 시간에 짬빠를 떠났다. 그는 생각하기를, ‘홀로 정진하고 계실 부처님을 뵙기에 정당한 때가 아니다. 또한 홀로 정진하고 있는 비구들을 방문하기에도 적합한 때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방랑 수행자들을 방문해야겠다.’

왓지야마히따가 숲에 도착하였을 때 방랑 고행자들은 함께 모여 앉아 여러 가지의 저열한 이야기들을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가, 왓지야마히따가 저 멀리 오는 것을 보고는 서로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조용히들 하세요, 저기 장자 왓지야마히따가 오고 있어요. 그는 고따마 사문의 제자입니다. 그들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조용한 것을 찬탄해요. 우리가 조용하면 그는 이리로 올 것입니다.”

인사가 끝난 후 방랑 고행자들은 왓지야마히따에게 이렇게 물었다.

“장자여, 고따마 사문이 모든 고행을 비난하고 거칠고 엄격한 삶을 사는 모든 고행자들을 전적으로 비난하고 헐뜯는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모든 고행을 비난하지도 않고 거칠고 엄격한 삶을 사는 모든 고행자들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은 비난받을 만한 것은 비난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은 칭찬합니다. 그분은 분별력 있게 가르치지 한 면만 보고 치우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말에 어떤 방랑 고행자가 왓지야마히따에게 이렇게 물었다.

“잠까만 장자여, 그대가 그렇게 찬탄하는 수행자 고따마는 ‘허무주의자.’입니다. 그는 분명한 언급을 회피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에게 합당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은 선한 것이다. 이것은 악한 것이다.’라고 분명히 옳고 그른 것을 단언하여 말씀하시는 분이 십니다. 그분은 허무주의자가 아미며, 분명한 언급을 회피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방랑 k과행자들은 한 마디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진정한 정화의식

앙굿따라 니까야 10부 176

어느 때 부처님은 빠와의 대장장이 아들 쭌다의 망고 숲에 계셨다.

부처님은 쭌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쭌다여, 그대는 누구의 정화예식이 마음에 드는가?”

“부처님, 서쪽지방의 브라흐민들은 물병을 가지고 다니고, 물풀로 만든 화환을 걸고, 불을 예배하고, 물로 정화합니다. 이런 그들이 선언하는 정화의식ㅇ이 저는 마음에 듭니다.”

“쭌다여, 그 부르흐민들은 어떤 정화의식을 하라고 선언하는가?”

“부처님, 그 브라흐민들은 추종자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적당한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땅을 만지시오, 만일 땅을 만지지 않으면 젖은 소똥을 만지시오, 만일 젖은 소똥을 만지지 않으면 파란 풀을 만지시오, 만일 파란 풀을 만지지 않으면 불을 예배드리시오, 만일 불을 예배드리지 않으며 두손을 합장하고 태양에 예배드리시오, 만일 태양에 예배 드리지 않으면 저녁나절 세 번 물에 잠기는 예식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브라흐민들이 선언하는 정화의식은 거룩한 계율에서 정화의식과 아주 다르다.“

“부처님, 어떤 것이 거룩한 계율에서 정화입니까? 거룩한 계율에서 어떻게 정화가 있는지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쭌다여,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더러움이 있다 말로 짓는 네 가지 더러움이 있다.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더러움이 있다.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더러움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람은 몰두하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비가 없다.

어떤 사람은 주지 않는 것을 가져간다. 밀림이나 마을에서 자기에게 주지않는 다는 사람의 재물을 도둑의 마음으로 가져간다.

어떤 사람은 성적인 욕망으로 잘못된 행위를 한다. 부모와 가족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소녀들, 남편이 있는 여자, 심지어 약혼의 화환을 쓴 여인과도 성행위를 한다.

말로 짓는 네 가지 더러움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의회나, 협회 친척들, 조합, 왕실귀족 앞에 소환되어 증인으로서 책임을 지도록 요청을 받았을 때 ‘당신이 아는 것을 말하시오.’ 이런 질문을 받고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도 ‘나는 압니다.’ 또는 알면서도 ‘알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였음에도 ‘보았습니다.’ 보았음에도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 자신의 이득 또는 어떤 누구의 이득을 위하여 또는 물질적 욕망을 위하여 또는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이간질을 한다. 여기서 들은 말을 저기에 가서 말하고, 저기서 들은 말을 여기서 말하여 서로를 갈라놓는다. 그는 화목을 깨뜨리고 불목하는 사람 사이에서 싸움을 부추기며 남의 불화가 그의 즐거움이다. 불화를 열정적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며 불화를 만드는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악담을 한다. 거친 말, 통렬한 말, 모진 말, 모욕하는 말, 성나게 하는 말, 사란하게 하는 말을 한다.

어떤 사람은 잡담을 한다. 부적절한 때에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이익이 없는 말을 한다. 가르침과 계율에 일치하지 않는 말, 마음에 새길만한 가치가 없는 말, 타당성이 없는 말, 분별없는 말을 한다.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더러움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람은 탐욕스럽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보고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의 것이 내 것이었으면!’ 하면서 남의 것을 탐낸다.

어떤 사람은 증오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살해되기를, 이 것들이 다시는 존재할 수 없도록 파괴되기를’ 이라고 타락한 생각을 품는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보시도 없고, 봉헌도 없고, 제사도 없고, 선업을 지어도 악업을 지어도 결과도 없고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부모도 없다 이 세상가 저 세상을 스스로 깨달아 천명하는 바르게 수행하는 사문이나 브라흐민도 없다.’라고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쭌다여, 이와 같이 잘못된 업의 길에 열 가지가 있다. 이런 열 가지 잘못된 없의 길에 있는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땅을 만져도 그는 여전히 깨끗하지 못하다. 설령 소똥을 만진다 해도, 소똥을 만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똑같이 깨끗하지 않다. 파란 풀을 만지든 만지지 않든, 불을 예배드리든 예배드리지 않든, 두 손을 잡고 태양에 예배드리든 예배드리지 않든, 그렇지 않으면 저녁나절 세 번 물에 잠기든 잠기지 않든[이 모든 정화예식에 상관없이 ] 그는 여전히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잘못된 업의 열 가지 길에 의하여 나쁜 곳에 태어난다.

그러나 열 가지 바른 행동의 길에 있는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땅을 만지든 땅을 만지지 않든 그는 깨끗하다. 설령 소똥을 만진다 해도, 소또을 만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똑같이 깨끗하다. 파란 풀을 만지든 만지지 않든, 불을 예배드리든 예배드리지 않든, 두 손을 잡고 태양에 예배드리든 예배드리지 않든. 그렇지 않으면 저녁나절 세 번 AQNF에 잠기든 잠기기 않든 그는 여전히 깨끗하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바른 열 가지 길이 깨끗하기 때문이다.더욱이 이런 바른 없의 열 가지 길에 의하여 그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


해봉과 점치는 일을 삼가라

숫따빠따 4편 14:927

“태양의 후예이신 지혜로운 성자 붓다께 여쭙니다. 바른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나의 제자들은 아타르바베다 주문을 삼가야 하며, 해몽을 하거나. 징조를 점치거나, 별을 점치거나. 새소리나 동물의 소리를 점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또 불임증을 낫게 한다거나 병을 고치다고 해서는 안된다.”


데와닷따의 극단적 질문과 부처님의 중도의 견해

율장:쫄라왁가 7편 3:14-17

데와닷따 비구는 고깔리까 비구와 그를 추종하는 비구들에게 가서 말하였다.

“ 자 존자들이여, 이제 우리는 사문 고따마 교단에서 일치를 깨버리는 분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고깔리까 비구가 물었다.

“그렇지만 존자여, 사문 고따마는 탁월한 힘과 위대한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문 고따마 고단에서 일치를 깨는 분열을 일으킵니까?”

“존자들이여, 우리는 사문 고따마에게 가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조항을 질문할 것입니다.

‘부처님, 부처님은 여러 면에서 욕심이 적은 젓을 칭찬하십니다. 만족하는 것을 칭찬하시고, 악을 소멸하는 것, 정확한 것, 예절바른 것, 장애가 줄어드는 것, 정진하는 것을 칭찬하십니다. 다음의 다섯 가지 조항은 여러 면으로 욕심이 적은 것에 좋고, 만족하는 것에 좋고, 악을 소멸하는 것, 정확한 것, 예절바른 것 장애가 줄어드는 것 정진하는 것에 좋습니다.’

(다섯 가지 조항)

① 비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숲에 사는 자라면 좋겠습니다. 마을의 이웃으로 가는 사람은 누구나 죄가 그를 더럽힐 것입니다.

②비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탁발음식으로만 살도록 합시다.

초대를 받아들이는 T사람은 누구나 죄가 그를 더럽힐 것입니다.

③ 비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더기 법의만 입도록 합시다. 장자들이 보시하는 법의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죄가 그를 더럽힐 것입니다.

④ 비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나무 아래서만 살도록 합시다. 지붕이 있는 곳으로 가는 사람은 누구나 죄가 그를 더럽힐 것입니다.

⑤ 비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기를 먹지 않도록 합시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누구나 죄가 그를 더럽힐 것입니다.“

이어서 데와닷따는 말하였다.

“그런데 사문 고따마는 이 조항들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조항에 의하여 승리하는 것이오.”

“존자여, 이 다섯 가지 조항으로 사문 고따마 교단의 일치를 깨버리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엄격한 것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와닷따 비구와 그의 동료들은 부처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앉아 그들잉 모의한 내용인 부처님이 칭찬하는 일곱 가지의 덕성을 말하고 이 덕성에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조항을 말하였다.

부처님은 데와닷따의 다섯 가지 조항의 말을 다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됐다 데와닷따,

① 누구든 숲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숲에 살도록 하여라, 누구든 마을의 이웃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을의 이웃에 머물게 하여라.

②누구든 탁발음식음식으로만 살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누구든 초청을 받아들이기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③ 누구든 누더기 법의만 입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누구든 장자가 보시한 법의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④ 그러나 오직 8개월 동안만, 데와닷따, 나무 아래서 거처하는 것이 허락된다. [우기철은 비가 많이 오므로 우기철4개월 동안은 나무 아래서 사는 것을 금하심]

⑤ 고기는 세 가지 관점에서 깨끗하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그를 위한 목적으로 잡았다는 의심이 없을 때는 깨끗하다.”

데와닷따는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이 다섯 가지 조항을 승인하지 않으신다.’ 그는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물러나왔다.


데와닷따는 동료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가서 사람들에게 이 다섯 깆 조항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말하였다.

“[부처님에게 말한 내용을 그대로 신도들에게 말함] 사무 고따마는 이 다섯 가지 조항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조항을 지키며 삽니다.”

그래서 신심도 없고 믿음도 없고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들은 데와닷따를 찬탄하고 사문 고따마는 풍요로움을 주구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신심이 있고 믿음이 있고 지혜롭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데와닷따는 화합을 깨고 승단을 분열한다고 비난하였다.

부처님은 이런 내용을 듣고 데와닷따에게 말씀하셨다. “데와닷따. 그대가 승단의 일치를 깨고 분열을 일으켰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부처님.”

“데와닷따, 교단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단의 분열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데와닷따, 누구든지 일치된 교단을 분열하는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는 악덕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분열된 교단을 일치하게 하는 사람은 훌륭한 공덕을 짓는 사람이다. 데와닷따, 교단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단의 분열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때 아난다 존자는 라자가하로 탁발을 나갔다. 그런데 그때 데와닷따 존자는 아난다 존자를 보고 다가와서 말하였다.

“오늘부터 앞으로 나는 부처님이나 비구 승단과는 다르게 포살을 할 것이며, 승단의 길마를 시행할 것이오.”

아난다 존자는 데와닷따가 한 말을 모두 부처님께 말씀드리면서

“부처님, 오늘 데와닷따는 교단을 분열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몸을 물에 담그면 악이 제거됩니까?

테라가타:뿐니까 비구나 236-251

[뿐니까 비구니는 물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물긷는 [하여]였습니다. 나는 주인 마님의 성난 말과 벌이 무서워서 추운 날에도 항상 물에 들어가 무을 길었습니다. 그런데 브라흐민이여, 당신은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까? 당신은 혹독한 추위로 사지를 떨고 있군요.”

“뿐니까여, 그대는 내가 악업을 막기 위해 선업을 쌓고 있는 줄 잘 알면서도 묻고 있군요. 누구든지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람이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물 속에서 목욕을 하면 악업에서 벗어납니다.”

“뿐니까여, 그대는 내가 악업을 막기 위해 선업을 쌓고 있는 줄 잘 알면서도 묻고 있군요, 누구든지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람이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물 속에서 목욕을 하면 악업에서 벗어납니다.”

“브라흐민이여, 어느 누가 당신에게 ‘목욕함으로써 악업에서 벗어난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인도하는군요, 그렇다면 모든 거북이와 개구리, 물뱀, 악어, 그리고 물속에 사는 온갖 생물들은 바로 천상으로 가겠군요, 그렇다면 살생하는 자. 도적, 살인자, 그리고 다른 악업을 짓는 사람들도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요.

만약에 이 개울이 그대의 말대로 묵은 악업을 모두 씻어가 버린다면, 그대의 선업까지도 또한 씻어가 버리겠지요? 그러면 그대에게는 악업도 없고 선업도없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겠지요! 브라흐민이여, 두려움 속에 물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만두십시오. 지금 멈추십시오. 당신의 피부를 냉기로부터 보호하여야 합니다.”

“존귀한 여인이여. 나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엇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를 바른길로 이끄셨습니다. 이 목욕 예복을 드리고 십습니다.”

“브라흐민이여, 그 예복은 당신이 간직하십시오. 나는 그것이 필요없습니다. 괴로움이 두렵다면, 그리고 괴로움이 불쾌하다면, 공공연하게든 비밀스럽게든 악업을 짓지 마십시오. 만일 그대가 악업을 짓는다면 그대가 날아올라 도망치려 해도 그대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괴로움이 두렵고 그것이 불쾨하다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십시오. 계행을 지키십시오. 그것은 그대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이에 브라흐민은 말하였다.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그것은 네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한때 나는 오직 브라흐마 신의 친척이었고

세 가지 지혜를 갖추고 진정한 베다 전승자였습니다.

지금 나는 진정한 브라흐민이 되었습니다.

안으로 영적으로 목욕을 하여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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