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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스크랩] 제4편 빠알리 대장경의 결집과 집대성-제4장 4차결집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2.01.13|조회수31 목록 댓글 0

제4장 4차 결집 빠알리 대장경의 집대성


스리랑카에서 삼장을 집대성하다: 내란, 전쟁, 기근, 승가의 분열로 삼장을 잡대성하다.

마하왕사 33: 38-41-60.61.78-83.95-102 디빠왕사 20:14-21

아바야 왓따가마니왕이 왕위에 오은 지 5개월 만에 브라흐민 띳사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일곱 따밀이 군대를 이끌고 [남인도로부터]마하띳타에 상륙하여 처들어왔다. 왕은 따밀에게 패하여 피신하였다. 이렇게 하여 다섯 명의 따밀이 14년 7개월 동안 통치하였다. 왕은 숲은로 피신하였는데 마하땃사 장로는 왕을 보고 음식을 주고 보호하여 주었다. 드디어 왕은 따밀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였다.

왕은 열성적인 충성심으로 가득 차 ‘아바야기리 위하라’ 승원을 건립하여 마하땃사 장로에게 봉헌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공급하였다.

그때 마하띳사 장로가 속인의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래서 마하위하라 승원에서 그를 승가에서 추방하였다. 이에 마하띳사 장로의 제자 중 한 명이 화가 나서 많은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아바야기리 승원으로 가서 승가를 분열되었다. 이들은 상좌부에서 탈퇴하여 완전히 갈라졌다.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과 주석서가 전에는 지혜로운 비구들에 의하여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근으로]줄어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비구들은 함께 모여서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가게 하기 위하여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과 주석서를 책으로 쓰게 되었다.

이와 같이 왓따가마니 아바야왕은 12년 5개월 통치하였다.

 

12년간의 혹독한 기근

사랏탑까시니 (쌍윳따 니까야 주석서) 11-111

브라흐민 띳사의 바란과 따밀족의 침입으로 황페화된 것에 덧붙여서 자연은 또한 나라의 적이 되었다. 섬의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혹독한 기근이 12년 동안 계속 되었다.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승원들은 버려지고 비구들은 인도로 가든지 아니면 언덕 지방으로 갔다.


기근으로 수많은 장로들이 이사하다.

삼모하위노다니 314-318,445-450

이런 전쟁[브라흐민 띳사의 반란과 따밀의 침입]의 대혼란의 때에 살상가상으로 온 나라는 일찍이 없었던 12년간의, 일반적으로 브라흐민 띳사 기근으로 알려진, 격심한 기근으로 말미암아 황폐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었고, 많은 승원은 텅텅 비었다. 마하위하라 승원도 완전히 버려졌다. 승원은 풀과 이끼로 뒤덮였다. 많은 비구들은 섬을 떠나 인도로 갔다. 나라는 혼돈에 빠졌다.

12,000명의 아라한이 먹을 것이 없어 다른 승원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가는 도중에 다른 승원의 비구들을 만났고 그것도 마찬가지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다시 본래의 승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소용없다는 생각으로 숲으로 들어가 굶어 죽게 되었다.

[기근으로 인하여] 온 사방에서 비구들이 인도로 건너가기 위해 나가디빠의 잠부꼴라 밧따나에 모였다. 쌍윳따바나까(쌍윳따 암송자)쭐라사와, 이시닷따, 마하세나는 그곳에 모인 비구들의 수장이었다. 마하세나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훗날 부처님의 가르침의 보호를 위하여 다른 두 장로는 마하세나에게 인도로 갔다가 재난이 지나면 돌아오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그냥 남기로 결정하였다.

그 당신 마하위하라 승원은 텅텅 비었고 풀들이 탑 주위를 무성하게 자랐다. 온 사방은 덤불로 덮였고 탑들은 이끼로 덮였다. 그래서 그는 작가라 강 근처로 가서 좋은 때가 올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시닷따와 마하세나는 피난가는 도중 알라 지역에 갔는데 한 곳에서 사람들이 마두 열매의 씨를 먹고 그 껍질을 버렸는데 장로는 그것을 주워 먹었다. 그것이 전체 일주일 동안에 그들이 먹은 유일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물 백합의 줄기를 먹었고 그 후 바나나 나무껍질로 연명하였다.

왓따바까 니그로다와 그의 연로한 스승은 거의 없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여기저기 피난을 다녔다. 이때까지 기근이 계속되어 너무 극심한 기근으로 사람들은 [아사한]인간의 고기를 먹었다. 연로한 장로는 굶주림으로 정신이 뒤집힌 그런 사람들의 먹이가 되었다. 니그로다는 다행이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그 후 기근이 끝났을 때 그는 삼장을 배워서 유명한 장로 비구가 되었다.


경장, 율장, 논장이 모두 체계적으로 쓰임

니까야상가하 9-11

대장로 비구들과 싱할라족의 자도자들은 불교의 미래가 위험에 빠졌음을 보았다. 붉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 [따밀족의 통치로] 불교를 지원해 줄 상할라왕도 없었다.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지금까지 구정으로 전승되어 온 삼장의 구전 전통이 이와 같은 [극심한 기근의]불리한 상황 아래에서는 불가능하게 보였다. 이러한 비극의 기간 동안 승단의 중요한 관심사는 모든 것 중에 가장 값진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멀리 본 대장로 비구들은 500명의 장로 비구들이 지방장관의 후원 아래 마딸레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상원인 알루위하라 승원에 모여서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가게 하기 위하여 전체 삼장[경장, 율장, 논장]과 주석서를 [체계적으로]쓰게 되었다. 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4차 결집은 삼장을 체계적으로 배열한 것

세일론의 빠알리 문헌

부처님 가르침이 쓰인 것이 이때 (알루 우하라 결집)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믿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위크리마싱게는 말하기를 세일론에 존재했던 쓰인 문헌은 알루 위하라 결집보다 적어도 일세기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쓰는 것’이왓따가마니왕 때 훨씬 이전에 이미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마하왕사로부터 일어난 많은 일들을 인용하고 있다. 책들이 가마니 통치 때인 기원전 150년 만큼 일찍이 언급되어 있다. 마하왕사 소주석[주석의 주석]에 자주 언급된 마하왕사의 싱할라어 [고대 스리랑카어] 주석은 쓰여진 문헌이었음에 틀림없다.


다른 곳에서 그는 중장하기를, 웻사기리 각문(그는 161-137B.C로 정함)에 관하여 그때 싱할라어는 심지어는 싼스끄리어로 쓰였기에도 충분한 형태로 브라흐민 알파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왓따가마니 아바야왕 때까지는 전체 불교경전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말은 과장이다.


왓따가마니앙 때에는 아마도 그때까지도 경전들이 잘 배열되지도 못했고, 드물고, 완전치 못하고, 모두 정확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위하라에서 경전들은 합송되었고 주석서들은 수정되고 분배되어졌다.

‘쓰는 것’은 부처님의 재세시에도 이미 알려진 것이다. 그렇지만 ‘쓰는 것’은 오랫동안 대중적이지 못했고 폭넓게 알려지거나 연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당한쓰는 재료의 부족으로 그 사용이 무척 제한적이었다는 것은 타당한 이야기이다. 또한진리의 가르치에 대한 드높은 ‘존엄성’대한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승의 입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알루 위하라 결집에서 500명의 장로들이 한 것은[빠알리] 대장경과 주석서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그때까지는 소주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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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보살로 가는 길--황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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