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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스크랩] 수월스님 전기 - 조선 사람들이 일군 절 송림산 화엄사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4.08.22|조회수33 목록 댓글 0
    
    
    ▣  수월스님 전기  ▣ 
    
    
    조선 사람들이 일군 절 송림산 화엄사
    
    
     
    
    수월이 나자구 송림산으로 들어간 해는 
    1920년에서 1921년 사이라고 전한다.
    이 기간 동안 간도땅에 살던 조선족들은 큰 수난을 격었다.
    
    수월이 여덟 해 동안 머물다 열반에 든 화엄사는 
    수분하에서 이백팔십리쯤 떨어진 왕청 현 나자구 태평구 
    작은새박골 위쪽에 있다.
    
    이곳은 도문, 연길, 용정 같은 데서 소련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일제가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 여기던 곳이기도 하다.
    1931년에 일제가 만주를 빼앗고 만주국을 세우자 
    많은 항일 유격대들이 소련이 가까운 이곳에서 활동했고
    일제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흩어진 마을을 한 곳으로 옮기고 
    화엄사도 허물어 군사기지로 만들어버렸다.
    
    지금도 그 화엄사 터에는 일제가 쌓아놓은 시멘트 성벽과 
    굴과 참호를 비롯하여 그들이 부순 법당 터
    수월이 쓰던 요사채 터, 산신각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수월이 손수 심었다는 배나무는 지금도 옛 일을 밝혀주려는 듯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고, 배나무 아래에는 가끔 수월이 앉아서 
    대비주삼매에 들었다는 삼매바위가 해지는 서쪽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옛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수월이 이곳을 자신의 열반 터로 잡은 내림은 잘 알 수 없다.
    그곳 사람들의 말로는 그때 나자구에 살던 팔백여 동포들이 
    수월의 본색을 알아낸 뒤 자신들의 신앙심에서
    그리고 늙음을 맞은 수월의 고생을 덜어주려고 이 작은 절을 지었다고 한다.
    
    화엄사는 아주 작은 절이었다. 
    다섯 평 남짓한 법당.. 열 평쯤 되는 요사 
    그리고 아주 작은 산신각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흙과 돌을 버무려 지은 흙돌집이었다.
    절 앞으로는 오백 평쯤 되는 기름진 밭이 언덕을 휘돌아가며 아득히 이어졌다.
    
    화엄사 터에 가려면 
    태평촌에서 수분하로 들어가는 길을 타고 쭉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슬쩍 숨어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여기서 다시 큰새박골과 작은새박골 마을 터를 지나면 
    화엄사 터에 이르는 길이 펼쳐진다.
    대관령보다 훨씬 넓고 긴 들판엔 키를 넘는 수수며 누렇게 익은 조
    그리고 해맑은 햇살을 안고 누워  있는 옥수수밭, 콩밭, 감자밭이 
    옛 길을 더듬는 나그네의 발길을 더없이 행복하게 한다.
    
    대부분의 언덕들은 아랫부분과 중턱을 밭으로 일궈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밭골을 따라 저마다 다른 작물이 자라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은 마치 어린 시절에 누이가 주워온 
    꽃조개 무늬처럼 곱고 아름답기만 하다.
    이런 풍경은 간도의 언덕들이 보여주는 파도의 이미지와 
    신비스럽게 겹쳐지면서 순식간에 용궁으로 들어가는 
    동화 속의 길을 열어 보여준다.
    
    아,수월이 머문 화엄사 가는 길이야말로 
    자비의 길이요 천수의 길이 아닌가!
    보면 볼수록 눈부리가 맑아지고 걸으면 걸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대비주의 길이 아닌가!
    
    화엄사를 지을 때 크게 이바지 했다는 
    어떤 청신사(세속에 살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는
    절을 짓기 전에 아이들을 아홉이나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업이 무거운 까닭에 그렇게 되었다고 느끼고 
    수월이 머물 절을 짓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여섯 아이를 낳아 모두 건강하게 잘 길러냈다.
    
    1994년 3월 어느 날 아버지 제사를 모시려고 
    마을에 들른 그의 딸 오천금 할머니와 그의 아들 오성용 할아버지를 
    화엄사 터 가까이에서 만났다.
    이들은 나이가 각각 당시 일흔여덟과 일흔다섯으로
    수월이 열반에 들 때까지 수월을 자주 찾아가 뵙던
    참으로 만나가 어려운 증인들이었다.
    
    연신 수월을 "수월대사"라고 부르며 
    그들은 화엄사 터를 몸소 함께 돌아다니면서 
    예순 해 전의 옛일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오천금 할머니는 감회에 가득 젖은 얼굴로 옛 절터를 가리키면서 
    아버지 고향인 온성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이게 집터유. 여기, 수월대사께서 계시던 집이구, 
    이 짝에는 한내야, 가루진 집이 산신당이라구.
    또 이 짝에 있구. 야, 저게 절당 터유. 
    이거 보게. 솔낭기가 있다고 안 합데?"
    
    나자구에는 수월을 기억하거나 
    전해들어 알고 있는 노인네들이 제법 있었다.
    서로 다른 말이 섞이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수월의 모습, 생활, 법력에 관한 말은 대부분 들어 맞았다.
    
    곧 수월은 늘 말없이 일했고 누더기를 입었으며 
    자주 탁발을 다녔고 생식을 했으며, 잠을 자지 않았고,
    호랑이를 데리고 다녔으며,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 주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들이다.
    
    아무튼 당시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수월이 화엄사에 머물게 된것은 절을 지어 수월을 맞아들이려고 한 
    나자구 조선 사람들의 마음과 "경신토벌"의 난리로 쑥대밭이 된 
    나자구 사람들을 도우려 한 수월의 뜻이 서로 맞아떨어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때 수월의 나이는 벌써 예순일곱으로 
    얼굴에는 작은 검버섯이 막 돋아나고 있었다.
    
    출처 - 물 속을 걸어가는 달 - 김진태지음 - 학고재 
    
    
    
    
    
    
    
    
아미타불과 함께하는 마음의 고향 무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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