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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수월스님에 대한 글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1.09.14|조회수160 목록 댓글 1

 

한국에서의 수월스님의 위치는 어떠하며, 연변에서 입적을 하신 수월스님을
어떻게 보면 좋아요?
그리고 연변의 도문에서 사찰을 세운다고 하는데 수월스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가요?
무척궁금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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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209 / 639        [등록일] 1999년 07월 07일 20:12      Page : 1 / 9
[등록자] ZSBUD1          [조  회] 54 건         
[제  목] [운화] 답] 수월 스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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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전에 해공님이 불동에 올린 자료의 갈무리 입니다.


번호:785/843  등록자:K0318  등록일시:97/05/11 03:38  길이:72줄
제 목 : [참선or수도]수월스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

[145] 제목 : [說法] 수월 스님 말씀
올린이 : handan  (이주형  )    97/02/26 21:23    읽음 :  14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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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을 듣는 강물'
                << 수월 스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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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
나 저리 모으나 무얼 혀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
비주(千手大悲呪)'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수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마니반
메훔'을 혀서라도 마음을 모으기를, 워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혀도 생각
을 안 할 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겨.
옛 세상에는 참선을 혀서  깨친 도인네가 많았는디, 요즘에는 참 드물어.  까닭이
무엇이여? 내가 그 까닭을 말할 것인게 잘 들어 봐.
옛날 스님들은 스스로 도를 통하지 못혔으면 누가 와서 화두  참선법(話頭參禪法)
을 물어도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가르켜 주들  않았어. 꼭 도를 통한 스님만이
가르켜 주었는디,  이 도통한 스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신단말여. "저 사람이  지난
생에 참선하던 습관이 있어서  이 생에도 저렇게 참선을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면
저 사람이 전생에 공부하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도를 통했으니께 환히 다 아실 거 아니여. 혀서, "옳다, 이 화두였구나" 하고 바
로 찾아 주시거든. 그러니  이 화두를 받은 사람은 지난 생부터 지가 공부하던  화
두니께 잘 안 하고 배길 수가 있남.
요즘은 다 글렀어. 또  말세고 말이야! 모두가 이름과 위치에 얽매이다 보니, 누
가 와서 화두를 물을  짝이면 아무렇게나 일러 주고 만단 말이지. 안 일러주면  자
신의 이름과 자리 값이  떨어지니께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아홉 번 받았느니, 여
덟 번 받았느니 하는디, 이래 가지고서야 워찌게 도통을 한다고 할 것인겨!
지가 꼭 공부하던 화두를 일러 주니께 틀림없이 공부를 이루고 바로 도를  통하는
겨. 자신 만만하니께 도통하는겨.  옛날 사람들은 화두 공부가 잘 되지  않더라도,
화두를 바꾸지 않고 '나는  열심이 모자라니께 열심히만 정진하면 꼭 성취할  것이
다'는 한 생각으로 마음을  몰아붙여 오로지 한길로만 애쓰다가 도를 통하기도  혔
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게 아니여. 쓰잘데기 없는 몸과 마음에 끄달려,  조금
하다가 안 되면 그만 팽개치고 "소용 없다"고 하거든. 이게 다 아상(我相)이  많아
서 그런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디, 이것이 꼭 밥 먹기와 매
한가지여. 똑같은 밥 반찬이라도  어떤 사람은 배불리 맛있게 먹지만 어떤  사람은
먹기 싫고 또 어거지로 먹으면 배탈이 나는 뱁이거든. 공부도 마찬가지여. 염불을
열심히 혀야 할 사람이 딴 공부를 하니 잘 안 되는겨.
중이 되려면 처자권속을 죄다  버려야 혀. 모두 다 버리고 뛰쳐나와 일가친척 하
나 없는  곳에서 열심으로 닦아야 혀.  아버질 생각한다든지 어머닐  생각한다든지
가족을 생각할 것 같으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가 않거든. 무슨 공부든지  일념
으로 해야 혀. 워찌케든 일념을 이뤄야 되지, 이 일념이 안 되면 이것 저것 다 쓸
데없는겨.
그래서 옛날 도통한 도인네들은 부모 형제 모두 내버리고 중이 되어 홀로  공부했
던 거여.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위하면 효도라도 되는데,  이런 효도도 못하고 집을 나와서는 도도  깨치지
못하니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거 아녀. 두 집안에 죄짓지 말고 "워쩌튼 죽어라
혀 보자" 해서 부모 형제 모다 버리고 이렇게 산단 말이지.
"한 집안에 천자가  네 명 나는 것보다도  도를 깨친 참 스님  한 명 나는 게 낫
다." 이런 말을  옛날부터 많이 들었지. 만일 중이  되어 도를 통할 것 같으면 이
공덕으로 조상의 모든 영령들과 시방삼세의 중생들이 다 이고득락(以苦得樂)할  것
이니 이 얼마나 좋으냐 말여.
이 세상이라는 게 중이 되면, 머리가 있고 없고 글이 있고 없고가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것이여. 차라리 그런  것들은 없는 게 훨씬 나아. 참으로 사람 되기가 어
렵고, 천상천하에 그 광명이  넘치는 불법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사람 몸 받
아가지고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겨. 사람 몸 받고도 성불 못하면 이보다 더 큰 한이 워디 있을겨.
부처님께서도 "나도 너를 못  건져 준다. 니가 니 몸 건져야 한다" 하셨어.  그러
니 참 그야말로 마음  닦아가지고 니가 니 몸을 건지지 못하고 그냥 죽어봐라,  이
렇게 사람 몸  받고도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어 봐라. 다 쓸데없다. 어느
날에 다시 이 몸을 기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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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 스님은 일생 동안 한번도  법상에 오른 일이 없는 것 같다. 여기 실은 수월
스님 말씀은 스님께서  얼마 동안 머물다 열반에  든, 중국 북간도에 있던 화엄사
(華嚴寺)에서, 몸을 다쳐 며칠  머물게 된 어느 독립군 연설 단원에게 들려 준  법
문이다. 수월스님에게서 큰 감화를 받은 이 독립군 연설단원은 그 뒤 몽고에서  스
님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아주 정정한 모습으로  후학들
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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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814/843  등록자:K0318  등록일시:97/07/25 12:00  길이:97줄
제 목 : [수월스님]만공,경허,청담과의 법거래와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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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수월스님께서 만공스님과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숭늉 그릇을 보
이며 말씀하셨다.
  "여보게, 만공. 이 숭늉  그릇을 숭늉 그릇이라고도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
니라고도 하지 말고 한 마디로 똑바로 일러 보소."
  만공스님이 문득 숭늉 그릇을  들어 문 밖으로 집어 던지고는 말없이 앉아 있자
수월스님이 말씀하셨다.
  "잘혔어, 참 잘혔어"
  수월 스님은 이  법담을 나눈 뒤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뒤 만공스님과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였다.    『달을 듣는 강물』(해냄,1996): 11
  만년에 갑산에서 마을 훈장으로 살던 경허는 열반이 가까와 병이 들어 누워있었
다. 수월은 여기 저기 물어서 마침내 스승 경허가 있는 곳을 찾아왔다.
  서당 문 앞에 이르자 수월이 "스님"하고 불렀다.
  안에 있던 경허가 문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수월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 정색을 하고 물었다.
  "누구요?"
  "수월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 모르오."
  "스님!"
  "나는 그런 사람 아니오." 하면서 경허는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이에 자신의 허물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수월은, 그냥 나올 수는 없어 마을  사람
모습을 하고 병들어 누워 있는 스승를 위해 스승에게서 배운 짚신 삼기 기술을 발
휘하여 정성껏 짚신 몇  켤레를 삼아 댓돌위에 올리고 고마움을 표하며 서당을 나
왔다.
  이후 수월은 더욱 보림에  정진하였고, 특히 70 내외의 늙은 나이로 여섯 해  동
안 수분하에서 젊은 승려  밑에서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해 가며 여섯해동안 말었
이 지냈다. 수월 스님은  우연히 머물게 된 독립군에게 헤어지던 날 6년간의 생활
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열심히 수행혀라. 이 공부하는 데는 다 쓸데 없다. 오직 이 마음 하나 비우면
  그만인겨. 세상에서 마음 비우는 일보담 더 어려운 게 없어. 또 참는 일보담 더
  어려운 일도 없어..... 스님들과 동포들이 내게 이런 말을 가끔 햐. '스님은  그
  고약하고 독한 나쁜 놈 밑에서 워째서 그렇게 여섯 해 동안이나 갖은 욕을 얻어
  먹음시러 살었냐'고. 내가 수분하에서 지낸 얘기를 워디서 들은 모양이여.  동네
  사방에서 그렇게 얘기를 들었내비여.
    그 때 나는 내 도를 다  이루기 위해 여섯 해 동안 어떤 젊은 스님 밑에 있었
  던 겨. 그 젊은  스님이 내게 무신 행패를 부리고 무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나
  는 한순간도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았어. 나는 그런 내 보림 생활이 참으로  기
  쁘고 즐거웠던겨. 그러니 그 젊은 스님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스승이었단 말여.
  나는 그 사람 때문에 내 보림을 이룬 셈이여.
    자네는 뒷날 꼭  중이 되고 말겨. 중이 되더라도  딴 생각 말고 아는 척 하지
  말고 어리석게 열심히 공부만 혀라. 공부는 보림이 중요한 뱁이여."
  그 때 수월은  수분하에서 조선 사람들이 백여 호  모여 사는 어느 마을에 있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절은 본대 박씨 성을 가진 한약방 주인이 약국 안쪽에 자신의 수행처로 지어
놓고 썼는데, 어느  날 한 젊은 스님이 찾아  와서 사정하는지라 절로 내 준 것이
다. 젊은 스님은 이 집에 관음사라는 간판을 내걸었으되 날마다 수행은 하지  않고
멋대로 살았다. 수월은 바로  이 젊은 승려에게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해 가며  여
섯 해 동안 말없이 지냈다는 것이다.
  여섯 해가 되던 해, 남만주의 봉천에 사는 아편 장수 두 사람이 찾아와서 이  젊
은 스님을 꾀어 간 지 한 달 뒤에 수월도 이 곳을 떠나 나자구 송림산으로 갔다고
한다.
  수분하에서 수월이 산 모습도  희막동 생활과 비슷했을 것이다. 곧 낮에는  품팔
이를 하고, 밤에는 한잠도 자지 않고 짚신 삼고 정진했을 것이 뻔한 일이다. 수월
은 주먹밥과 밤새워 삼은  짚신 더미를 들고 나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드나드
는 흰 옷 입은 조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터이다. 날마다 술, 담배나 즐기며
그렁저렁 살아 가던 젊은  승려는 수월이 하는 이런 일들이 무척 마음에 거슬렸음
이 분명하다.
  물론 수월이 집안의 잡일을 도맡아 하고 먹을 거리도 다 장만했겠지만, 젊은  승
려는 수월이 거리에 버리는 주먹밥과 짚세기까지 거두어 더 잘 먹고 더 편한 생활
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노인네, 도무지 말을 들
어 먹지 않는 고집불통의 늙은이에게 욕설하고 행패를 부린 것인지도 모른다.
  행패란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밤새 만든 짚신을 태워버리거나 땀흘려  벌
어 온 식량으로 정성들여 만든 주먹밥을 창 밖에 내던져 버리는 일 따위였을 터이
다.
  그리고 수월은 만주 송림산  화엄사에서 짚신을 머리 위에 이고 앉아 열반에 들
었다. 경허의 마지막 가르침을 수월은 평생 참구한 듯 하다.
  『달을 듣는 강물』(해냄,1996): 158, 162-3, 166, 168-9, 219-222을 종합함
  청담이 주먹밥과 짚신을  받아들고 수월에게 마지막 절을 올리자 수월은  갑자기
청담에게 곳간에  가서 괭이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괭이를 가져오자 수월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마당에 박혀 있는 돌멩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물었다.
  "저게 무엇인가?"
  "돌멩이입니다."
  청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월은 괭이를 빼앗아 들더니 돌멩이를 홱 쳐내
버리고 그 길로 들판으로 나갔다고 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청담은 수월에게서 받은 이  가르침을 일생 동안 화두로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월이 청담에게  준 가르침이기에 앞서, 수월이 세상에 보인  그의
마지막 가르침일 성 싶다. 그로부터 한 해가 못 되어 수월은 열반에 들었다.263-4
음관 [音觀] (1855∼1928) 한국 말기 승려. 호는 水月. 속성은 田.철종6년 6월  충
청남도 홍성군 구항명 신동에서 출생, 29세에 서산군 天藏寺에서 太虛性圓에게  승
려가 되다. 부목으로 있다가  33세 때 한 해 겨울 동안 千手呪를 외워서  不忘念智
를 얻다. 태허의  법을 잇고, 평창군 월정사  상원암에서 漢岩과 함께 정진. 순종
초년에 서울을 거쳐  영변군 묘향산 비로암에서 3년  동안 있었고, 강계군 천마산
자북사를 거쳐, 만주 지방으로  건너가 백두산 밑 어떤 농가에서 3년 동안 지내면
서 소를 먹여  주었다. 1921 년 江淸縣에 화엄사를  짓고 8년 동안 있다가 1928년
입적하다.
  『불교학 대사전』(홍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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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210 / 639        [등록일] 1999년 07월 07일 21:18      Page : 1 / 17
[등록자] ZSBUD1          [조  회] 48 건         
[제  목] [운화] 수월스님 자료 보충..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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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1/5                입력일 : 96/06/05 10:14:07      자료량 :149줄

제목 : 김호성의 책이야기-《달을 듣는 강물》-김진태 지음

  ◇지은이의 말

  스물 해쯤 전, 시대의 어둠에 밀려 남도땅 지리산 자락을 가랑잎처럼  떠
돌 무렵, 어느 산사에서 수월스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흔이라는 고령의
스님이었음에도  이승을 떠나는 그순간까지 평생 동안 일을 하여 중생을 부
양했고, 마흔 해 가까이 조실의 자리에 앉아 한마디의 설법도, 한 줄의  글
도  남기지 아니했지만, 언제나 주위에는 선열이 넘치고 법음이  가득 차서
스님이든 속인이든 심지어 동물들까지 환희와 행복에 겨워했다는 그런 얘기
였습니다.

  스님이 가진 것은 오직 산과 물과 바람밖에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
마저 거두어 가버려, 겨우 반 세기 전에 떠난 사람인데도 성마저 제대로 모
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찰나도 포기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면서도 그 삶 그대로를 모
두 남에게 주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삼독에 힘겨워했던 저에게는 천둥이었고
, 벼락이었습니다.

  고단한 세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망각의 피안 속에 그 얘기를 묻고 지내
던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이를 기억해 내곤 스님이 거닐던 옛길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행적에 관련된 것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았습
니다. 심지어 물결을 싣고 가는 달에게 그때의 자취를 물었고, 강을 건너는
바람소리에게도 스님의 행적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른 노릇과 어른 대접 받기를  무
엇보다도  싫어한 스님이어서 산중에 안거하기 보다는  고난받는 여염 속에
머물다  그들의 삶 속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스님의  행적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분의 삶의 편린이나마 보고 들은 이들도 이제는  거의
옛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님과 인연이 있던 땅은 남김없이 기웃거렸습니다. 남녘의 지리산에서부
터 만주땅 이곳저곳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북녘에 있는 절에도 사람을 통해
스님의 빛깔을 묻혀오게 했지만 성과는 바라던 것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
러나 건져올린 몇 조각 되지 않는 스님의 행적은 우리에게 눈부신 삶의  길
을 만나는 벅찬 기쁨을 안겨 줍니다.

  스님은 이름 그대로 물 속의 달처럼 살다간 어른이었습니다. 자비와 지혜
를 삶과 한 덩어리로 이루어낸 성자입니다. 일하는 수행자, 수행하는  일꾼
으로 살다 간 스님의 감동어린 삶을 이웃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바
람에 앞뒤 가리지 않고 이 책을 썼습니다. 물론 스님이 이룬 깨달음의 세계
며, 가없는 삼매와  자비의 세계는 세속의 업연이 한량없는 저에겐  여전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득히 먼 길로 남아 있습니다.

  ◇수월음관(1855-1928)은 전설로만 남은 스님이었다. 적어도 《달을 듣는
강물》(해냄, 1996) 이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이제 수월스님은 전설속에
서 역사 속으로 깨어났다. 고맙고, 반가운 소식이다!
물은 달빛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해인삼매라고 한다. 또 `달과
물의 비유'는 관세음보살과 중생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저 하늘의  달
과 같이,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의 원에 응하심을 `수월장엄'이라 말한다.

  수월 스님이 달이라면 저자는 그 달빛을 받는 물이었다. 지리산의  한 산
사에서 처음으로 달빛을 받은 뒤, 스무 해 동안 스스로의 가슴 속에 달빛을
비추고 있었다. 수월스님이 수행했던 인연 도량은 물론, 세속의 고양  마을
에서부터 간도까지 수월스님의 옛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심지어 북녘에
있는  절에도 사람을 통해 스님의 빛깔을 묻혀오게"(<글 머리에〉)했다. 이
책은 수월스님의 삶을 목격한 사람을 탐문하고, 증언을 청취한 기록이다. [
책도 생명력이 있는데, 이렇게 쓰여진 책이 장수하리라는 점은 당연하리라.
]스무 해가  지난 이제 저자는 다시 달이 되어, 이름없는 수많은  독자들의
물에 달빛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수월스님의 수월장엄은  상속되고
있으며, 또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달과 물 사이에는 계급이  없다. 굳이 분별한다면, 독자가  저자 보다 더
높다고 생각된다. 저자의 이름을 쓰는 것도 더 높은 독자에 대한  인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영업전략은 은근히 저자의 `높음'을
드러낸다. `해냄출판사' 역시 이 책의 표지를 감아 두른 띠지는 이 책을 쓴
사람이 현직 검사임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김진태 검사, 그는 왜 이
책을 써야 했는가?" 검사의 책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김진태 검사 지음'이 될 수 없다. 그저  `김진태
지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진태 검사가 쓴 책이다'라는 식의  세속적
차원에서 이 책을 언급하는 일은 저자의 공덕에 경의를 표하는 일이 아니니
라. [수월스님에 대한 책으로는 다시 나오기 힘든 책인데, 굳이 그렇게  해
야 하겠는가?] 또한 그가 좋아한 수월스님이 어떻게 살았던지를 생각해  보
라.

  사람은 그가 영위하는 삶의  모습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 사
람의  삶에서 나오는 기풍을 가풍이라 한다. 저자는 수월의 삶을  한마디로
문수가풍이라 말하고 있다. "누구나 쉽게 만날볼 수 있었지만 누구도  제대
로 알아볼 수 없었던 수월, 그는 어쩌면 자장이 내친 문수의 다른 모습일지
도 모를 일이다. 참으로 수월의 삶 속에는 숨김없는 문수가풍이 짙게  녹아
흐리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억측이라고 나무랄 것인지." (122
쪽) 이같은  저자의 평가는 탁견으로 생각된다. 이제, 문제는 어떠한  삶의
모습을  문수가풍이라 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자장이
내친 문수'이야기에 암시되어 있다. 그 전거는 《삼국유사》이다.

  자장은 석남원(현 정암사)를 짓고 문수보살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 성스러운 문수보살은 오지 아니하고 한 늙은 거사가 다 해진 누더기를 입
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메고 자장을  찾았다. 그러나
시자의 전갈을 받은 자장은 "미친 사람일 것이다"면서 만나기를  거절한다.
그렇게 비천하게 보이는 사람이 문수보살일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 자장은 성스러움과 비속함이 둘이었던 것이다. 그때 거사는  말
했다고 한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나를 비우지 못한 사람아, 어찌 이
문수를 보겠느냐"(116~117쪽)

  이 이야기에 나오는 문수보살은 스스로 비속한 존재로 자신을 낮추는  삶
을 산다. 간도의 궁핍한 동포들과 함께 한 수월스님의 삶 자체는  문수가풍
의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서 좋을 것이다. 과연, 수월스님의 경우 그같
은  문수행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출가 이전  머슴살이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그 체질적 자율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더하여, 스승
경허가  보여준 삶의 모습에서 전해받은 것은 아닐까 싶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문수행은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 다시 저자거리에 들어가서 중생과  함
께 하는 화광동진의 선불교적 전통에 잇대어 있는 것이다.

  문수가풍은 또한 보현가풍이기도 하다.[130쪽]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
으며,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수월의 삶이야말로
널리 중생들을 공양하기를 원하는 보현형이 아니겠는가. 문수가풍과 보현가
풍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점에서, 그것은 화엄의  이치이다. 수월스님이
간도에 지은 그의 절 이름을 화엄사라고 했던 것도 그 자신의 화엄적  가풍
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달을 듣는 강물》을 읽기 전 나의 수월체험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도천
(태고사)노스님을 통해서였다. 그분은 바로 수월스님의  손상좌인데, "쉬지
않고 일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천수경》의 `신묘장
구대다라니'(=천수대비주)를  통해서이다. "근세의  선지식인 수월스님이나
용성스님이 선사이면서도 모두 천수다라니를 지송하여 견처를 얻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선밀일치의 가풍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선과 밀교, 화두
와 다라니는 둘이 아니다."(졸저, 《천수경이야기》, 106쪽)

  화두와  다라니가 그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것은 둘 다 번뇌를  깨뜨리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나의 관점을 뒷받침해주는 새로운 자료를 《달을
듣는 강물》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독립군 연설원으로 활동하다 몸을  다
쳐 수월스님께  치료를 받은 뒤, 몽고에서 출가한  스님이 있다. 혜양(대전
대흥사)스님이 바로 그분이다. 혜양스님은  당시 들은  <수월스님 말씀〉을
외우고 있다가 저자에게 구술하였던 것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혀서
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
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달
통한 사람이여."(12쪽) 천수대비주나 화두가 모두 궁극적으로는 `마음을 모
으는 것'으로서 동일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모으는 것, 그것은
번뇌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는 <수월스님 말씀〉을  통해
서 종래 내가 가졌던 소견에 더욱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끝으로 두가지만 덧보태고 싶다. 첫째, 종래 수월스님의 법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는 수월스님을 경허스님의 장자로서  부각하고자
한다. 그런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조사될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예컨데, 한암스님이 쓴 《선사경허화상행장》에  왜
수월스님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갓 깨닫지 못한  주력
승'으로  인식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한암스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혹시 다른 이유는 없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남의 나
라 땅에 버려진 조선사람들과 한몸을 이룬 수월의 모습'(194쪽)에 대해  국
가적 차원의 보훈은 불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문도들과 저자, 그리고  관계
자들이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 수월스님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
이겠지만, 그래도 후손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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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2/5                입력일 : 96/03/26 16:00:48      자료량 :52줄
제목 : 달을 듣는 강=김진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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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보다도 못 먹고 못 입고, 누구보다도 잠을 적게 자고, 누구보다도 많
은 일을 한 스님. 뼈와 가죽만 남은 몸으로 열반에 들만큼 자신의 모든  것
을 중생에게 `깡그리' 보시한 채 "나, 개울에 가서 몸 좀 씻을 텨"라는  한
마디를  아무렇지도 않게 남겨두고 개울가에서 편안히 않아 이생의  인연을
마감한 스님. 자취를 남기지 않은 채 바람같은 전설만 남기고 갔던  선지식
수월스님의 감동적 일대기가 한 현직 검사의 노력으로 세상에 밝혀져, 탐진
치 삼독심에 찌들려 사는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사건을 수사했던 대검찰청  김진태(44)검사가
최근 출간한 《달을 듣는 강물》(해냄 펴냄)은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만주일
대에서 그림자도 남기지 않을 만큼 묵묵히 수행했던 수월스님의 수행여정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수월스님은 근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
어지는 경허스님의 제자로 만공, 혜월과 함께 `경허의 세 달'로 알려지기도
한 고승이다. 29세에 출가해 33세에 깨달음을 성취한 뒤 일흔넷 열반에  이
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남을 위해  살아온
수월스님의 삶의 궤적 자체가 그대로 수행이고 법문임을 저자를 특유의  담
백하고 진솔한 필치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20년전 지리산의 한 산사
에서 수월스님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전해듣고 수월스님의 삶을 추적하기 시
작했다는 저자는 특히 얼마 남아있지 않은 수월스님의 흔적을 찾고 그 자취
를 맡고자 직접 중국 도문시를 방문 답사하는 등 그림자 없는 성자의  옛길
을 더듬어 밝히는데 적지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히고 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
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혀서 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하늘 천  따
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탈통한 사람이여. 꼭 천수대비주가 아니더
라도 `옴마니반메훔'을 해서라도 마음을 모으기를 워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할려고 혀도 생각을 안할 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겨."

  "수월대사님께선  범을 타고 다니셨지 뭐. 그래글래 우리두 다 봤지.  그
때 저기 절당 솔낭기 앞에서야, 큽데, 정말 큽데…"

  저자는 홍성이며 지리산이며 오대산이며 중국 도문시며… 어디든  수월의
내음이 남아있는 곳이면, 또 누구든 수월의 자국을 아는 이가 있으면  언제
어디라도  따라나섰다. "스님의 행적에 관한 것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았다. 심지어 물결을 싣고 가는 달에게 그 때의 자취를 물었고 강을 건너
는 바람소리에게도 스님의 행적을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일하는  수행
자, 수행하는 일꾼으로 살다 간 스님의 감동어린 삶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
게 알리고 싶어서 였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스님도 불교학자도 아닌 한 불심깊은 현직 검사에 의해 마치  구름사이에
서 달 드러나듯 우리 곁으로 다가온 수월스님. 조국을 떠난 만주 땅에서 살
아가야 하는 우리 백성들을 위해 주먹밥을 나눠주고 짚신을 삼아주던  보현
.관음보살 같은, 아니 그대로 보살이었던 수월스님. 그분의 삶을  언제까지
외면하지말고  보다 더 정확히 그리고 더 자세하게  밝혀내는 일은 더 이상
한 개인의 일이 아닌 교단과  불교학계가 함께 나서야할 공동의 몫임을  이
책은 웅변으로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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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213 / 639        [등록일] 1999년 07월 07일 23:27      Page : 1 / 3
[등록자] SUHIE            [조  회] 57 건         
[제  목] [수월스님] 아래 내용과 비슷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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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월음관(水月音觀, 1855∼1928)스님에 대한 내용이 다음 책에도 있군요. 경허스
  님을 중심으로 다룬 책이라서  수월스님에 대한 내용은  잠깐 언급될 뿐입니다.
  아래에 올린 글을 요약한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참고가 되셨으면 하고 올
  립니다.
  -한중광 지음, 『경허-길위의 큰스님』(한길사 1999) 206쪽∼208쪽
 
  ***
  경허의 제자와 수법제자 가운데 침운과 혜봉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
  으며, 수월·혜월·만공·한암이 잘 알려져 있다.
  수월·혜월·만공을 흔히 세달(三月)이라  일컫는데, 수월은 주로  만주지방에서
  20여년을 머물면서 북녘하늘에 뜬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주로 영남지방에서 머
  물면서 남녘하늘에 뜬 하현달이 되고, 만공은 주로 호서지방에서 머물면서 보름
  달이 되어 일제의 탄압과 수탈로 신음하는 한반도와  만주산하에 지혜의 달빛을
  비추고 자비의 손을 드리웠다.
 
  경허의 맏제자였으며 근대의 뛰어난  고승이었던 수월은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자비행을 몸소 실천하며 바람처럼 살았기 때문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수월은 18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이 또한 확실치 않다.
  1883년 29세에 연암산 천장암으로 찾아가 땔감을 하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부목
  (負木)으로 있다가 경허의 형인 태허를 은사로 수계득도(受戒得度)했다.
  이때 수월은 정진하는 틈틈이 경허로부터 짚신 삼는 기술도 물려받아서 훗날 북
  간도에서 수많은 나그네에게 짚신을 삼아주었다. (중략)
  수월은 언제 어디서나 <천수경>을 지송했는데,  마침내 1887년 33세 때에 천수
  대비주삼매(千手大悲呪三昧)를 얻는다.
  그 후 수월은 천장암을 떠나  바람처럼 떠돌며 납자들의 눈을  열어주다가 오대
  산, 금강산, 묘향산을 거쳐 북간도로  가서 북녘하늘의 상현달로 떠오르게 된다.
  20여 년 동안을 춥고 배고픈 땅 북간도에 머물면서 나라를 잃고 떠돌던 조선 민
  초들에게 묵묵히 짚신과 주먹밥을 만들어주며 살아가다가 1928년 북간도 왕청현
  화엄사에서 열반했다.
  짚신 선사 수월은 경허의 맏제자이면서도 경허와의 일화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
  이 거의 없다.
 
  ***
  경허스님의 열반을 다룬 위 책의 후반부에 수월스님이  경허스님이 은둔하고 있
  던 도하동 서당을 찾아간 일화가 약간  더 나옵니다. 경허스님이 열반하기 전이
  죠. 아래 글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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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토정비결 | 작성시간 12.08.22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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