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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德崇禪學 3-3 제3주제 발표:만공선사와 독립운동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5.06.06|조회수56 목록 댓글 0
 

 

德崇禪學 3-3 제3주제 발표:만공선사와 독립운동

 

 

이재헌(강남대)

  Ⅰ. 시작하는 말

  조선 500년 동안의 극심한 탄압에서 벗어난 한국 불교가 맞이하게 된 근대는 새로운 세력으로 급속하게 전파해 오는 기독교에 대한 경쟁 의식과 한국 침략의 선봉장으로서 교묘하게 파고 들어오는 일본 불교에 대한 대응 속에서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해 至難한 몸부림을 했었던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근대 한국 불교는 ‘改革’과 ‘抗日’이라는 두 개의 명제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이 두가지 변수에 의한 함수관계가 오늘날 한국 불교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일제 강점기의 종교 문제를 논의할 때면 늘 불교가 운선 순위가 되어 근대 한국 불교는 곧 親日佛敎라는 등식이 따라 다니곤 한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서는 민족 운동만 했고, 불교계는 친일만 하였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어느 종교건 친일과 반일적인 면이 공존하며, 불교계로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근대불교계에서 항일 민족 운동과 관련된 인사들을 열거해 보라면 몇 분이나 나열할 수 있을까? 한용운, 백용성 등이 고작일 것이다. 이것은 불교계가 그 동안 자신의 지난 역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연구해서 그 의미를 부여한다든지, 밝힐 것은 밝혀 내려는 노력을 등한히 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항일 운동이라고 해서 꼭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가한 것만을 말한다고는 할 수 없다.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다. 불교계로서도 그간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 이외에도 사찰에서의 군자금 모집, 독립지사의 은거지 제공 등 사찰만이 갖는 특수성으로 인해 민족독립 운동과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화들이 많이 발굴되어 충분히 밝혀지고 알려져야 한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오늘에 새롭게 돌출한 것이 아니요, 이미 조선 500년의 기나긴 억불책에서 해방을 맞이한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내려오는 불교계의 현안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어떻게든 한국 불교를 왜곡하여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려 했던 일제에 맞서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켜내고 그 정통성을 회복하려고 했던 움직임들은 또 다른 형태의 항일 민족 운동으로서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 내내 이러한 불교 개혁과 항일의 정신을 변치 않고 끝까지 지켜낸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면 韓龍雲(1879~1944)과 함께 宋滿空(1871~1946)을 꼽을 수 있다고 본다. 그 동안은 대사회적인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한용운을 많이 부각시켜 왔지만, 오히려 그 뿌리의 견실함으로 본다면 만공선사를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즉 한용운은 대사회적 운동을 통해서 투쟁했지만, 만공은 心田의 투쟁을 통해서 좀 더 종교적인 방법으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만공에게 있어서 불교 개혁은 곧 전통불교(선종) 진흥이요 항일 민족 운동이었으니, 불도를 닦는 禪僧으로서 본래 면목을 회복하여 禪風을 진작시켜야만 일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수행의 전통이 굳건히 살아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萬海와 같은 사회 운동도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교정체성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개혁정신과 항일 민족 운동을 고찰해 보고, 鏡虛의 禪風을 大振하면서 抗日佛敎의 法燈을 높이 들었던 만공선사의 항일 민족 정신을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Ⅱ. 일제하의 불교 개혁과 항일 운동

  조선 500여년 동안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던 한국 불교는 일제의 종교 침략 전술에 의해 1895년 승려의 都城出入禁止가 해제되고, 이어 信敎의 自由라는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맞이하여 近代化의 물결 속에서 잃어버린 옛 영화의 복원은 물론, 시대 변천에 적응할 수 있는 자기 개혁의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런데 전시대의 혹독한 탄압으로 인해, 근대화라고 하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대변화를 조용히 관조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만한 겨를을 갖지 못했던 한국 불교로서는 자기 정체성의 확립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그 당시 새로운 사조로 일세를 풍미했던 社會進化論의 適者生存이라는 생존경쟁 원리에 충격을 받은 불교계는 타종교와의 경쟁에서 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舊態한 불교를 새롭게 改革해야 한다는 시대 사조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근대의 한국 불교는 개혁의 패러다임이 지배했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즉 근대 한국 불교에 있어서는 改革이 이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당위적 명제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적어도 한 시대를 관통하는 패러다임으로서 모든 불교인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졸고, 「근대 한국 불교 개혁 패러다임의 성격과 한계」, ꡔ종교연구ꡕ 제18집, 한국종교학회, 1999, 67~90쪽을 참조할 것.

  그런데 개혁의 모델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한국 불교계가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일본이었고, 일본의 불교였다. 사실 劉大致와 李東仁 등이 일본의 불교 문화와 개화 사조를 소개한 이래로, 불교계에 있어서는 일본이 근대 사상과 학문의 수입 통로로써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고, 더구나 일본 사회에서 불교 승려들이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는 일본 불교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근대화의 충격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思想的, 敎學的인 近代化를 이룩한 일본 불교를 통해서 근대화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일본 불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즉 당시의 일본 불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대로서 자임하며 일제의 한국 침략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하여 한국에 상륙하고 있었던 것인데, 한국 불교로서는 이들의 속성을 간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5년의 入城解禁 이래 한국 불교의 지위를 향상시켜 준다는 미명아래 은밀하게 진행된 제국주의적 불교 동화 정책에 대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호감과 감사의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현실적인 정치 권력으로서 인정하게 되면서 한국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승인과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기에 1911년 한국 불교를 행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찰령이 나왔을 때 이를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반기고 환영하는 분위기가 더 우세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계로서는 불교가 법적으로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된 데서 오히려 적지 않은 안도감을 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실 本末寺 제도라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처음 실시한 것이 아니고, 이미 에도시대에 국가가 불교를 체제순응적으로 관리하려는 목적하에 처음 등장하였던 것이다. 결국 사찰령은 한국 불교에 수많은 폐해를 남겨 놓음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독소를 뿜고 있는 최대의 惡法이었다. 그 대표적 폐해로는 本末寺 관계를 종교적 차원이 아닌 행정적 편의주의로 떨어지게 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관료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과 본산 주지의 권한 집중과 경제적 부로 인해 그들의 持戒觀念을 약화시킴으로써 개혁 의지를 약화시키고 타락의 길로 떨어지게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소한 1910년대 당시 불교계 인사 중에 사찰령의 이러한 본질을 깨닫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여론을 이끌었던 ꡔ朝鮮佛敎月報ꡕ와 같은 불교 잡지의 論調만 보더라도 사찰령에 대한 찬양이 主潮를 이루고 있다. 최소한 1910년대의 한국 불교는 이러한 역사 인식의 부족이라는 공통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특히 1910년대 불교 개혁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제시하였던 權相老, 韓龍雲 같은 개혁승에 있어서도 사찰령에 대한 극복 의지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실 이들의 불교 개혁론은 일본 불교를 모델로 하여 그 영향을 받은 면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예컨대 한용운에 있어서도 그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던 1910년대만큼은 그의 民族意識에 어느 정도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가장 단적인 예로, 1910년 승려의 취처를 허용해달라는 建白書를 寺內正毅 統監에게 제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일제 통감부라는 현실적인 정치 권력에 의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민족 의식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취처의 주장 자체는 이것이 일본 불교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1908년에 일본 시모노세끼, 미와지마, 교토, 도쿄, 닛꼬 등지를 유람하고, 도쿄에서는 曹洞宗大學에서 佛敎와 西洋哲學의 강의를 듣기도 하는데, 여기서 일본 불교의 발전상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913년에 발표된 그의 ꡔ조선불교유신론ꡕ에서 보면 근대 한국 불교 왜곡의 결정적 사건인 1911년의 사찰령 반포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그가 당시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종교 정책과 국가 불교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였음을 반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졸고, 위의 논문, 73~81쪽을 참조할 것.

  결국 적어도 1920년대까지는 불교계에서 일제에 대한 극복 의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불교계에 親日이냐 抗日이냐 하는 대립 개념도 분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사찰령의 폐해와 그 속에 담겨진 일제의 통치 정책을 간파하게 되기까지에는 최소한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교계에서 일제에 대한 극복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19년의 3․1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을 겪으면서 불교교단 내에서는 사찰령에 따른 일제의 불교탄압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고, 이에 따라 사찰령 폐지운동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항일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3․1 운동을 분수령으로 하여 192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민족 독립 운동의 흐름에는 이른바 민족개량주의를 내건 소극적인 민족 운동과 비타협적 저항주의를 내건 적극적 항일투쟁이라는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국내의 항일 민족 운동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현상인데 불교계의 민족 운동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불교계의 독립 운동 가운데는 이 두 개의 흐름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한 운동과 혹은 두 개의 흐름을 포괄하여 동시에 실천코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국사편찬위원회, ꡔ한민족독립 운동사ꡕ 제9권, 1991, 526쪽.

  어쨋든 3․1운동 이후의 불교계는 완전히 자각적인 참여의식에서 민족 운동에 가담을 하게 되는데, 그 유형을 대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직접적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항일 독립 운동을 펴나간 유형이다. 1919년 3․1운동에는 韓龍雲, 白龍城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전국의 지방 사찰에까지 파급을 시켰으며, 奉先寺 승려 金星淑은 중국에서 해방이 되는 날까지 줄기차게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많은 불교계 청년들이 참여하여 불교비밀결사 조직을 이끌며 독립 운동 자금을 대는 등의 활약을 했으며, 1919년 11월에는 상해에서 범어사 주지 吳卍光(惺月)을 비롯한 12인의 불교계 대표들이 大韓僧侶聯合會宣言書를 발표하여 불교인의 적극적이고 과격한 투쟁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불교계에서는 항일 義勇僧軍, 동아불교회 등의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白初月은 비타협적인 항일 민족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승려의 신분으로 일찍이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수 차례 체포 구금되는 등 생애를 항일 민족 운동으로 일관하다가 민족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감옥에서 옥사하게 된다.
  둘째는 불교계 내부의 혁신 운동이었다. 1920년 金尙昊, 都鎭浩 등이 조직한 조선불교청년회, 1921년 韓龍雲을 중심으로 金法麟, 金尙昊 등이 조직한 조선불교유신회, 그리고 1930년대 한용운을 黨首로 하는 비밀결사조직인 卍黨 운동을 들 수 있다. 이들은 政敎分離와 사찰령 폐지를 목적으로 하여 줄기찬 투쟁을 이어 나감으로써, 1927년 일제총독부로 하여금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山中公議 제도를 인정케 하고 본산주지의 전횡을 어느 정도 제한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셋째는 불교학자들의 전통문화 수호 운동이었으니, 李能和, 權相老, 金映遂, 朴漢永 등은 직접적인 반항과 투쟁보다는 한국인의 전통의식을 탐구하고 문화전통을 수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일제 통치의 부당성을 입증하려 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들은 1910년대부터 창간되기 시작한 불교 대중잡지의 논조를 주도하면서 불교의 대중적 홍보와 한국전통 불교의 자료 수집에 주력함으로써 그 동안 잠자고 있던 불교계의 역사 인식을 고취하고, 불교의 우수성을 널리 계몽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넷째는 불교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일본 불교에의 동화와 사찰령 아래에서 점차로 한국 불교 전통이 말살되어 가는 모습에 반기를 들고, 개혁이란 일본이나 서구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불교의 본래 면목을 되살리는 길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禪修行에 정진했던 禪風再興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申慧月, 方漢岩, 宋滿空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鏡虛의 上首 제자로 한국근대 禪脈을 계승했던 滿空禪師에 대해 좀 더 집중적인 조명을 해 보려는 것이다.

  Ⅲ. 만공선사의 선종 진흥과 독립 운동

   1. 修德寺와 만공의 선사상
  滿空月面(1871~1946)선사는 근대 한국 禪宗의 중흥조인 鏡虛惺牛 선사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修行과 實踐으로 꽃피워 낸 大善知識이다. 만공선사는 스승인 경허선사가 甲山으로 떠난 후 수덕사에 주석하게 되는데, 1905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금강산 摩訶衍에서의 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공주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애를 이곳 德崇山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 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 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하게 된다.
  그는 덕숭산 修德寺와 定慧寺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그가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을 이루면서 전국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원으로 개원한 見性庵, 그리고 그의 최초 주석처로 지금은 鏡虛, 滿空, 慧月 선사의 영정이 모셔진 金仙臺와 少林草堂, 轉月舍, 香雲閣 등, 거의 대부분이 만공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선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암자들이 산중에 어우러져 있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봄 定慧寺 밑에 金仙臺라는 초가 암자를 지어 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하였고, 수덕사를 중심으로 민족정기를 바로잡으며 인근 忠義志士들을 은유로 격동시켜 항일구국 전열에 서게 하니, 인근에서 金佐鎭 장군을 비롯하여 尹奉吉 의사 등 많은 독립지사들이 배출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산 안면도의 看月庵을 크게 중창하고 1942년 여름부터 조국 해방을 위한 千日祈禱를 올렸는데, 廻向 3일만에 8․15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스님의 애국충정은 이와 같이 지극했다고 하며,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것이다.滿空門徒會, ꡔ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ꡕ, 서울:묘광, 1983, 325쪽.
그는 말년에는 덕숭산 동편 山頂에 한간 띳집 轉月舍를 짓고 홀로 ‘허공의 둥근 달을 굴리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덕숭산 수덕사와 만공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만공은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조선 불교의 명맥을 지켜내고 민족 정신을 앙양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가 일제 치하에서 전국 31개 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일제하 승려들의 창씨개명 현황에 대해서는 임혜봉, ꡔ친일불교론ꡕ 하, 민족사, 1993, 559~593쪽과 622~636쪽을 참조할 것.
그에게 있어서 한국 불교의 개혁은 곧 한국 불교 본래의 면목을 되찾는 것이었기에,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한 승려였지만, 또한 한국 불교의 전통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정체성 확립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근대 한국 불교사에서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고민하고 치열하게 실천해 나간 분이 바로 만공선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나’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독특한 선사상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그는 법문 가운데,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가 주인이 되고 진아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사람이 나를 잊어 버린 바에야 六畜으로 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메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ꡔ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ꡕ, 244쪽.

  자기를 못 보므로 자기의 부모․형제․처자와 일체 사람을 다 보지 못하고 헛되게 돌아다니는 정신병자들일 뿐이니, 어찌 이 세계를 암흑세계라 아니할 것이냐?같은 책, 294쪽.


라고 하는 등 ‘나’를 찾는다는 점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나를 찾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자기자신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모르면서 학자인양 종교가인양 하여 제법 인생문제를 논하는 것은 생명을 잘라 놓고 생명을 살리려는 어리석음이며,같은 책, 273쪽.
自己業身의 반영인 이 몽환의 세계를 實相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異性으로 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같은 책, 266쪽.
까지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참다운 ‘나’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는 ‘나의 몸’을 세가지로 구별한다. 즉

  누구든지 肉身․業身․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 없는 자리이니라.같은 책, 247쪽.


고 하였다. 여기서 만공이 강조하는 것은 當處의 육신을 떠나서 별도로 법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업신이나 육신의 그 자리에서 법신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고, 生死와 涅槃이 當時當處에서 不二라고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처럼 만공의 선사상이 當處當相의 業身이나 肉身에서 法身을 보고 현상에서 본체를 보는 것이라고 할 때, 그의 선수행 또한 현실의 세계를 떠나 부처의 세계를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당처당상에서 부처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釋之鳴, 「滿空禪師」, ꡔ한국 불교인물사상사ꡕ, 민족사, 1997, 446~451쪽.
그는 參禪이 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은 世世生生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던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常住하는 것이 行住坐臥 語黙動靜에 間斷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ꡔ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ꡕ, 249~250쪽.


라고 하였으니, 그의 선 수행이 현실의 삶을 떠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요,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다.”한 것이요, “나의 현재 생활이 一切 세계라. 현재 생활에서 自足을 못 얻으면 다시 얻을 도리가 없나니라.”라고 하여 현재의 삶에 큰 중요성을 두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그의 선사상을 통해서 볼 때, 鏡虛의 정통 법맥을 이은 선수행자로서 누구보다도 철저한 참선과 수행으로 일관했던 그의 삶에 있어서, 자신의 본래 면목을 찾지 못하고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허둥대는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나, 한국 불교의 전통을 말살하며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질곡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일제에 대해 항거하는 일은 결코 다른 일이 아니며, 그 자체가 곧 선 수행의 한 측면이었음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그가 한국 선의 본질 회복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경주해 나갔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2. 선학원 창립과 만공의 항일 의식
  선학원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한 뒤에 사찰령을 공포, 한국 불교를 총독부 장악하에 마음대로 掌理하고 있을 때에, 佛祖의 正脈을 계승한다는 취지 아래 1921년 11월 선종의 중앙기관으로 설립된 사찰이다. 선학원이 창건된 것은 3․1운동 이후 불교계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자각적인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일제의 사찰 정책에 대항하려는 발로에 의하여 창설된 것이다. 그리고 그 운영에 있어서는 韓龍雲, 白龍城, 宋滿空 등의 항일 지사들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만연되어 가고 있었던 이른바 ‘帶妻食肉’에 대항하면서 한국전통불교를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위에서 지적한 네 가지 민족 운동 유형 중에서 제4의 禪風再興 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선학원의 氣風은 처음부터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찰이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寺나 ○○庵이라는 일반명칭 대신 막연하게 그냥 禪學院이라는 위장 칭호를 씀으로써 은연중 일제의 사찰령에 예속되지 않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鄭珖鎬, 「近代 韓日佛敎 關係史 硏究」, 경희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9, 90쪽.

  선학원 주도 인물들의 성향을 분석해 보면, 白龍城, 金石頭, 吳惺月의 경우처럼 항일의식의 소유자와 白龍城, 金南泉, 康道峯, 韓雪濟 등 불교천양의식이 강렬한 포교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金光植, ꡔ韓國近代佛敎史 硏究ꡕ, 民族社, 1996, 104쪽.
이중 특히 오성월은 범어사 주지로서 1911년경 친일 승려 李晦光이 조선의 圓宗을 일본 曹洞宗에 연합하려한 소위 賣宗行爲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한국전통불교의 고수를 주창한 臨濟宗 설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며,姜裕文, 「最近百年間朝鮮佛敎槪觀」, ꡔ佛敎ꡕ 100호, 1932. 10, ꡔ韓國佛敎雜誌叢書ꡕ第13卷, 769~782쪽.
1919년 불교계가 상해에서 大韓僧侶聯合會의 이름으로 살포한 獨立宣言書의 서명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비록 합방 이후의 초대 주지요, 또 일본 시찰까지 갔다온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에 가서 肉味五辛菜의 요리를 대접받았을 때, “청정 비구들에게 무슨 대접을 이 따위로 하느냐”고 호통을 침으로써, 일인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었다는 일화를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정광호, 위의 논문, 98쪽.

  그리고 김석두는 金尙昊, 金尙憲 등과 密議,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항일 민족 운동을 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3.1운동에서 8.15까지」, ꡔ大韓佛敎ꡕ (1964. 9. 20)의 김상호의 회고.
또한 강도봉, 김석두 등은 1920년 일제의 사찰정책에 강력 도전하면서 창설되었던 朝鮮佛敎靑年會의 주도 인물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것은 자연 선학원의 주도 인물들의 성향과 선학원의 창설 의의도 조선불교청년회가 지향하였던 방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선학원 창설 그 자체가 이미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는 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김광식, 위의 책, 105쪽.

  그렇다면 선학원을 창설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이었던가? 여기에는 대개 두 가지 문제가 있지 않았던가 한다. 하나는 곧 전국에 흩어져 있는 首座들을 위한 연락기관을 설치코자 함이요, 또 하나는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던 당대의 禪風에 한번 참신한 기풍을 넣어 보자는 것이었다. 합방 직후부터 공포 시행되고 있던 사찰령에 따라 한국 불교는 조선총독을 정점으로 일단 중앙집권적 통제와 함께 그 재조직을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식민지적 행정체계로서의 세속적 통일이요 결코 교단 자체내의 통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전국 禪房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피차 연락을 위한 중앙기관 정도는 있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의 동기는 당대 禪界에 어떤 새바람을 넣어 보자는 것이었다. 즉 일제 총독의 관할 밑에 도무지 萎靡不振하던 당대 禪界에 진실로 佛祖정맥을 계승할만한 禪理參究院을 하나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학원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滿空禪師였다. 우선 京城府 安國洞 40번지의  禪學院 터를 직접 卜地한 사람이 다름 아닌 만공이라고 한다.정광호, 위의 논문, 99쪽.
또한 그는 선학원의 佛像을 손수 직접 조성해서 봉안했는데, 이 불상은 禮山郡 德山面 사천리에서 거기말로 전단토라고 하는 백목가루보다  더 고운 흙을 파다가 흰 솜과 혼합, 3개월만에 완성을 한 것이었다고 한다.이것은 前修德寺 주지였던 馬碧超의 직접 증언이라고 한다. (1968. 8. 수덕사에서), 정광호, 같은 논문, 103쪽.
또한 그는 솔선해서 定慧寺 토지 6천여 평을 헌납함으로써 다른 사찰에서도 토지가 들어오게 하는 등, 선학원 창설과 발전을 위해서 많은 힘을 쏟았던 것이다.禪學院 所藏, 禪友共濟會會議錄, 1922.

  또한 만공은 1921년 5월 15일 선학원 창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련된 보살계 계단을 주관하였다. 그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 조선불교는 완전히 식민지 총독 관할 밑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총독의 허가가 없이는 사찰의 이전, 폐합으로부터 절깐에 있는 온갖 재산, 기물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손을 댈 수가 없게 돼 있는 것입니다.

라고 서두를 꺼낸 다음에, 무엇 때문에 선학원을 세워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런 판국이라 지금 조선 중들은 자꾸만 일본 중처럼 돼가고 있단 말씀입니다. 진실로 불조 정맥을 계승해 볼려는 衲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런 말이죠.… 우린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선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회의를 부치게 된거올시다.정광호, 위의 논문, 97쪽.


라고 하였던 바, 여기서도 만공의 현실 인식, 즉 일제의 사찰령에 대한 대항의식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한편 선학원 낙성 후 4개월이 지난 1922년 3월 禪風 진작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서 禪友共濟會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에 滿空은 梵語寺의 吳惺月, 內藏寺의 白鶴鳴 등과 함께 참여하여 그 결성을 주도하게 된다. 선우공제회의 결성 취지는 위에서 인용한 회의록에 있는 취지서를 통해서 보면,

  去聖이 彌遠에 大法이 沈淪하여 敎徒가 曉星 如한 中에 學者는 실로 麟角과 如한지라. 如來의 慧命이 殘縷를 보존키 難하도다. 多少의 학자가 有하다 할지라도 진정한 發心衲子가 小할 뿐 아니라, 進贋이 相難하여 禪侶를 等視하는 고로, 禪侶 도처에 窘迫이 相隨하여 一衣一鉢의 雲水生涯를 支持키 難함은 실로 금일의 현상이라…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대개 두 가지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첫째는 당대의 선풍이 너무도 萎靡한 까닭에 이것을 좀더 진작시킬 목적으로 共濟會를 발기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전국 首座들이 가는 곳마다 푸대접을 받으므로써 雲水 생애조차 지탱키가 어렵게 된 까닭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또한 공제회를 발족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볼 때, 일부 帶妻를 한 승려들을 포함, 이른바 事判僧이라 불리워지는 사무승들이 宗權 내지는 寺務를 장악케 됨으로써, 청정 납자들의 수도 생활을 너무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때 취지서에 일제의 종교정책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마도 표면적으로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이 이로울 것 같지 않아서 그랬던 것인 듯 하다.정광호, 같은 글, 100쪽.

  위의 창립총회에서는 제반 조직과 임원선거를 통한 집행부 구성도 하게 된다. 즉 본부는 경성 선학원에 두고 지방 또한 梵魚, 直指, 長安, 釋王 등 20개 사찰에 지부를 두게 되어 있었고, 본부에는 사무 집행을 위해 理事 3인과 書記 1인을 두고, 지방 지부에는 幹事 2인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본부 임원으로는 庶務部 金寂音, 財務部 金石頭, 修道部 宋滿空 등이 각각 이사로 선출되었던 것이다.선우공제회회의록, 1922.

  이상에서 보면 선학원은 분명 일제의 사찰 정책에 항거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滿空禪師는 시종일관 그 결성과 운영을 주도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분명한 항일 의식을 가지고 禪風再興 운동을 전개해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3. 선학원 재건과 財團法人 禪理參究院 설립
  일제 사찰령에 대항하면서 선풍을 진작시켜 보자는 분명한 목적 아래 태동을 보았던 선학원과 선우공제회는 1924년부터는 자금 문제로 운영난에 직면하게 된다. 일제의 관권에 의탁하면서 종단과 사찰의 운영권을 갖고 있던 주지들은 대부분 帶妻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자연 禪學院 및 禪友共濟會에 관여하는 수좌들을 배척할 수 있는 소지를 다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본산주지들과 중앙교무원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선학원은 점차로 재정 문제로 인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공제회 사무소를 1924년 4월경에는 잠시 김천 直指寺로 옮기게 되고, 1926년 5월부터는 아예 그 이전부터 연고권을 갖고 있었던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선학원 관련 인사는 자연 각기 인연에 따라 흩어지고 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선학원을 재건하게 된 것은 金寂音 선사가 1931년 1월 선학원을 인수하면서부터 이다. 원래 寂音은 滿空의 법제자였는데, 침술과 한약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의술은 자못 신묘한 바가 있어서 글자 그대로 一人 兩役의 명의였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술에는 法師였던 滿空 또한 감탄을 했었는데, “그놈 참 신기한 일이로다. 내가 별호 하나 지어주지.”하며, 그에게 ‘草夫’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풀을 가지고 중생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친구라는 뜻이었다고 한다.정광호, 위의 논문, 105쪽.

  적음이 선학원을 인수한 즉시 李炭翁 和尙의 立繩으로 衲子 및 신도 20여명이 참가한 참선을 시작하였고, 여기에 滿空은 韓龍雲, 白龍城, 柳葉 등과 함께 일반 대중을 위한 설법, 講和 등의 행사를 거행하면서 점차 선학원을 대중적 운영의 방향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전의 선의 중심기관 역할을 회복하면서 1931년 3월 全鮮首座大會를 개최하게 된다. 여기서는 불교계 대표 기관인 敎務院 宗會에 中央禪院 설치 건의안을 제출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부결되었다고 한다.「日記抄要」, ꡔ禪苑ꡕ 1․2호.

  이렇듯 선학원이 적극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禪院의 중앙기관이라는 자부와 재정자립에 있어서도 큰 발전이 된 여건 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 가면서 이제 근원적인 재정확립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게 되니, 곧 財團法人의 설립이다. 1934년 초 財團法人 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이 설립되는데, 여기서 滿空은 理事長으로 선출되게 된다.여기서 方漢岩은 부이사장, 그리고 吳惺月, 金南泉, 金寂音 3인이 상무이사였다고 한다. 「彙報」, ‘財團法人 禪理參究院認可’, ꡔ佛敎時報ꡕ 1호, 1935. 8. 3.
재단법인 설립 후 재정 상황이 두드러지게 호전되기 시작했는데, 송만공이 9,000원 상당의 田畓을 기부한 것을 필두로 많은 승려 및 일반인이 참여하여 140,000원 상당의 부동산을 확보하게 된다.선리참구원에 대한 재산 기부 현황에 대해서는 ꡔ禪苑ꡕ 제4호, 1935. 10, 44~45쪽과, 김광식, 위의 책, 127~128쪽을 참조할 것.
목적했던 바 재정자립이라는 문제에 대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재정적 자립을 바탕으로 선학원은 조직 정비와 위상 강화를 위한 많은 활동을 전개해 나가게 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34년 12월 30일에 제정하여 1935년 1월 5일에 공포한 ‘朝鮮佛敎禪宗 宗憲’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선학원 계열 수좌들의 현실인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종헌 소멸, 그리고 일제의 사찰령 지속이라는 현실에서 그것을 배척하고 한국 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일단의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사찰령에 의해서 ‘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는 명칭에 반하여 새로운 종명, 즉 ‘朝鮮佛敎禪宗’을 내세운 것은 일제의 사찰정책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데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이 종헌의 冒頭에 나오고 있는 선서문의 말미에는 이 종헌의 주체로서 ‘全國首座大會 朝鮮正統修道僧一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1931년부터 열리기 시작한 全鮮首座大會(2차 1934, 3차 1935)에서 이 종헌 제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헌 선서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大聖께서 示滅하신지가 때가 오래오며 邪魔는 강력하고 正法은 미약하와 非運에 헤매는 少福少智한 저의 정통수도승도들은 교단의 전통을 붓잡으며 末世正을 살리기 위하여…「조선불교선종종헌 선서문」, ꡔ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ꡕ 65, 1996.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사마는 강력하고 정법은 미약하다고 지적한 것은 당시 식민지하의 불교계의 정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다음 구절 즉

  그러나 近者에 新文明國 暴風에 쓰러져가는 多數 僧徒들이 肉食飮酒하며 私淫娶妻를 恣行하면서 중도 사람이다라는 口號를 앞세우고 莫行莫食하며 破戒難行으로 大乘佛敎의 修道相이며 傳法行인 양으로 宣傳함으로써 우리 교단의 嚴正淸淨하든 傳統은 드디어 무너지기 始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還俗한 徒輩들이 僧侶인양 自處하매 神聖不可侵의 修道場인 寺院은 家庭化 料亭化함으로 말미암아 寺刹淨財는 날로 還俗者들의 生活에만 浪費되고 各處의 修道機關은 廢止되어 가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표현에 가서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점차 그 명맥을 잃어가는 전통 불교의 모습에 대한 비탄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다.
  결국 본 종헌은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으로 피폐된 한국 불교의 전통사수와 교단부흥을 기하기 위한 선학원 계열 수좌들의 결연한 의지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면으로는 현실과 조화를 기하기 위해 선학원을 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도, 은연중에 전통사수와 부패의 정화를 통한 식민지불교와의 치열한 대결을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종헌 내용에 있어서 석가모니불의 기원을 檀紀 1307년으로 起算하였고, 선서문에 있어서도 불기와 단기를 병용하고 있는 점은 당시 수좌들의 민족의식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金光植, 「朝鮮佛敎禪宗 宗憲과 首座의 現實認識」, ꡔ韓國 近代佛敎의 現實認識ꡕ, 民族社, 1998, 230~232쪽.

  종헌의 내용을 분석해 보았을 때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한국 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고 그를 종헌의 중심이념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예컨대 각 사찰의 운영의 구도로 활용하려는 山中總會의 복원이라든가, 태고보우국사의 계승의식을 분명히 한 점, 그리고 승려의 자격에서 대처식육하는 승려를 완전 차단시킨 것 등이 그것이다. 결국 이것은 일제의 사찰령으로 대변되는 식민지 불교정책에 반대하는 뜻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찰령의 핵심내용인 불교계의 재산권과 인사권 전체를 종정의 권한으로 이관시킨 측면, 당시 한국내의 모든 사찰을 선종에 귀속시킨다고 천명한 점, 등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종헌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선불교선종종헌」, ꡔ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ꡕ 65, 1996, 500~514쪽을 참조할 것.

  한편 종헌을 제정, 공포하면서 종정과 종무원의 간부도 선정하였는데, 여기서 宋滿空은 首席宗正으로 거명되고 있다. 또한 宗正에는 水月, 慧月, 漢岩이며, 宗務院長 鄭雲峯, 總務部長 金寂音, 敎務部長 河東山, 財務部長 金南泉 등이다. 그런데 1935년 3월에 열린 제3차 朝鮮佛敎首座大會에서는 財團法人 禪理參究院의 운영기구로서 宗務院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고 임원 선거를 하게 되는데, 종헌에서 거명되던 것과는 약간 다르게 변동이 되는데, 여기서 宋滿空은 申慧月, 方漢岩과 함께 종정으로 선출되게 된다. 어쨌든 이 당시 宋滿空이 선학원 계열 수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높은 존경을 받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이 때의 수좌대회에서는 선학원을 中央禪院이란 명칭으로 개칭하면서 전국선원의 대표성을 갖는 위상으로 그 성격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이러한 위상하에서 당시 불교계 통일 기관인 敎務院 宗會에 ‘首座들 전용의 청정 사찰을 할애해 달라.’고 건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東亞日報, 1935. 3. 13 記事., 정광호, 위의 논문, 108쪽.
물론 이 건의는 수용되지 못하였다. 당시 대처승이 일반화 되어가는 상황에서 본산 주지들이 구성원으로 되어 있는 종회에서 이를 수용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선리참구원 계통 수좌들의 전통불교 수호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며, 전국선원과 그 수좌들의 기반하에서 태동된 財團法人 禪理參究院의 위상 하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전통불교 수호의식이 해방 후의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학원 수좌들의 전통불교 수호의식이 또 한번 크게 드러난 것은 1941년 遺敎法會라고 불리워지는, 전국의 청정비구 34명을 초청했던 고승법회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 법회는 일제의 불교정책과 일본 불교의 침투로 인하여 한국의 청정승풍의 전통이 희미해지는 것을 방지하여 전통 佛脈을 구현해 보자는 목적하에 개최된 것이다. 그 취지를 살펴보면

  일본과의 합방이란 것이 이루어진 뒤로 한국의 청정한 승풍은 자꾸 시들어 가고 있지마는, 그래도 이 가운데 애써 한국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고승들이 있으니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보자.조계종 총무원 소장, ꡔ遺敎法會會議錄ꡕ, 1941.


라는 것이었다.
  총무원측의 방해공작으로 高僧法會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자.’라는 막연한 뜻에서 遺敎法會로 바꾸어 실시하게 된다.이 고승법회에는 일제 당국의 입김이 또한 동시에 작용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니, 이것은 곧 일제의 學務局에서 이 법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비용까지 전담하겠다면서 이 법회를 주선하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한국의 전통적인 승단인 비구승단의 영향력을 그들의 목적 수행상 한번 이용해 볼까 하는 저의가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당대의 修道僧 가운데 宋滿空, 朴漢永, 鞠黙潭 등의 碩德을 필두로 34명의 청정비구들이 집결되니, 이것은 가위 선학원 창설 이래의 가장 큰 장엄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서 宋滿空은 朴漢永과 함께 法師로 초대되어 梵網經, 遺敎經 내지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를 설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 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는 설법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법회를 여는 동안에 신도들의 공양이 답지해서 일대 성황을 이뤘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普照長衫을 입기 시작했던 것이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정광호, 위의 논문, 114쪽.
요컨대 이 유교법회는 일제시대에 있었던 마지막 법회로, 물론 그 발단에는 일제의 저의가 숨어 있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선학원 수좌들의 전통불교 수호의지를 재확인시켜 준 법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조선 총독에게 一喝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재단법인 설립 이후 전국 선원의 대표기관이라는 자부심과 재정자립의 자신감 위에서 선학원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937년 滿空이 일제 총독 南次郞 앞에서 일대 사자후를 토했던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와 같은 선학원의 배경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ꡔ보려는 자가 누구냐ꡕ, 84~88쪽과 悳山, 「滿空禪師의 無碍行」, ꡔ月刊中央ꡕ 67호, 1973. 10, 111~112쪽을 참고하였음을 밝혀 둔다.

  만공이 잠깐 충남 공주의 麻谷寺 주지를 하고 있던 1937년 3월 10일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는 일본 총독 南次郞의 주재하에 31 본산 주지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조선 13도 도지사와 31 본산 주지가 모여 조선불교의 진흥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때 南次郞 총독은

  조선 불교는 과거엔 아무리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 하더라도 현재로는 부패한 불교이므로 전날의 총독이었던 寺內正毅씨의 공이 막대하거니와 장차는 마땅히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를 합하여야 잘 된다.

라고 하면서 일본 침략 정책에 의하여 한국 불교 전통을 말살하고, 민족 주체사상을 괴멸시키려는 야심으로 강력한 설득작업을 하였다.
  31본산의 주지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혹은 감동어린 눈빛으로 전총독 寺內正毅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을 뿐, 누구하나 감히 입을 벌리는 자가 없었다. 이때 만공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크게 호령하여 이르되, “淸淨이 本然커늘 어찌하여 山河大地가 나왔는가?”라고 一喝하고는, 웅성거리는 회의장을 가다듬으며 南次郞이 주장하는 佛敎倂合論의 不可함을 역설하였다.

  전 총독 寺內正毅야 말로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오. 한일합방 이전에 우리 조선의 사찰에서는 淫行을 저지르거나 술을 먹는 등 승려가 계율을 어기면 반드시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그 승려를 징계하고 내쫓는 관습이 있었소. 그러나 총독부에 의한 새로운 사찰령이 내려진 후 그런 승풍이 무너지고 말았소. 조선 중들이 왜놈들 중을 닮아 취첩을 하고 육식을 하는 파계승이 되었다는 것이오. 따라서 조선 중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역대 총독들은 모두 無間阿鼻地獄에 떨어져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그런 자들을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주지 자신부터가 계를 지키고 힘써 수행을 하는 것이 바로 조선 불교를 진흥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오. 우리 조선불교는 1천 5백년 역사를 가지고 그 修行 正法과 교화의 방편이 如法하거늘 일본 불교와 합하여 잘될 리가 없는 것이오. 만일 당국에서 조선 불교를 직접 간섭함으로써 일본 불교 이상으로 발전시킬 자신이 있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못하겠거든 정부에서 간섭하지 말고 차라리 우리에게 일임해 주시오. 불교 진흥책은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오.

라고 사자후를 떨치면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政敎分立의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조선에 사찰령이 시작된 지 26년만에 조선 승려로서, 일본총독이 보는 앞에서 이 정도로 정면으로 사찰령을 비판했던 예가 일찍이 없었다. 이것은 1920년대부터 줄기차게 사찰령 폐지를 주장하였던 조선불교청년회(유신회, 만당) 운동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1930년대 초 선학원 재건과 함께 높아진 선종 수좌들의 위상과 자신감 아래에서만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만해 선사를 오랫동안 시봉하여 만해, 만공 두 선사의 교유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관호(1906~?)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등으로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을 획책하던 南次郞 일본 총독을 제거해야 하겠다고 만공선사는 한동안 비수를 품고 다니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의 항일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공의 獅子吼를 전해들은 도반 한용운이 그날 밤 만공을 찾아왔다. 그는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를 머금고서 말하기를 “잘했도다 獅子吼여. 한번 喝을 함에 그들의 간담이 써늘하게 하였구나. 그러나 비록 一喝도 좋았지만, 통쾌한 방망이를 휘둘러 때려 주고 나올 것이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만공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차나 한잔 드세 이 좀스런 사람아!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마는 영리한 사자는 一喝을 쓴다네.”라고 받아 넘겼다고 한다.
  사실 만공과 만해는 일제하의 항일불교를 이끈 두 기둥이었다. 두 스님은 항일 운동의 동지요 수행 道伴이었던 것이다.만해는 다음과 같은 悟道頌을 지어 만공에게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男兒到處是故鄕(남아가 이르는 곳 마다 내 고향인데), 幾人長在客愁中(몇사람이나 객의 수심 가운데 지냈던고?), 一聲喝破三千界(한소리 큰 할에 삼천대천 세계를 타파하니), 雪裏桃花片片飛(눈 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날으네)” 이에 대해 만공이 한용운에게 이르기를 “날으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고(飛者 落在什麽處)”라 하고, 다시 만해가 “거북 털과 토끼뿔(龜毛兎角)이로다.”라고 대답하면서 서로 法擧揚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ꡔ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ꡕ, 316쪽.
만공은 민족의 각성, 근대문화의 수용, 일제의 국권 침탈, 그리고 당시 현실정토를 실현하려는 하나의 종교운동으로서의 동학운동을 보면서, 현실정토의 구현과 외세척결의 정신은 동학운동과 함께 하되 그 방법은 달리하였다. 만해가 동학운동이 요구하는 현실정토 실현을 향한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행동을 보인 반면에, 만공은 그 현실정토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정토를 參禪을 통해 지도하려고 하였다. 만공에게 있어서 역사 속의 현실 정토는 마음정토에서 얻은 모형이 없이는 걷잡을 수가 없으며, 어떠한 객관적 현실의 정토도 마음정토가 없으면 이미 정토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학운동이 형상적인 무기를 들고 현실정토를 위해 싸운 반면에, 만공은 정신세계의 불퇴전의 참선 자세로 마음지옥을 극복하여 마음극락을 이루고 그것이 현실극락으로 전환되도록 시도하였던 것이다.석지명, 위의 논문, 444쪽.

  만공이 주석하던 덕숭산이나 만해가 살던 서울 성북동 尋牛莊을 두 스님은 서로 번갈아 찾아 밤새는 줄도 모르고 談笑도 하고 痛飮하면서 亡國의 한을 달래며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기도 했다. 만공이 禪法師 鏡虛 和尙의 어록을 만해 스님에게 編修를 의뢰하여 1942년에 ꡔ鏡虛集ꡕ을 출간하게 된 것은 그들의 교유가 참으로 깊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비록 방법은 조금 달랐지만, 일제에 항거해서 한국 불교의 본면목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식만큼은 결코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선학원 중심의 ꡔ경허집ꡕ 발간 노력은 선학원이 창건 이후부터 일관되게 추진한 한국전통불교의 계승 및 禪 대중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 당시 ꡔ경허집ꡕ의 발간은 ‘우리 공로자의 表彰은 우리 손으로’라는 표어 아래 전국선원 수좌들의 힘으로 진행되었는데, 간행의 발기인으로는 韓龍雲, 宋滿空, 方漢岩, 吳惺月, 張石霜, 金擎山, 金九河, 金鏡峰, 李曉峰 등 40여명의 불교계 중진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Ⅳ. 끝맺는 말

  이상에서 만공선사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는 갑자기 근대화의 격랑 속에 내맡겨진 한국불교에 있어서 전통 禪脈의 본질 회복이라는 사명을 통해서 改革과 抗日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온몸으로 풀어가려 했던 종교 운동가요, 선각자였다. 우리는 그의 유니크한 삶이 일제 초기의 臨濟宗 운동과 1920년대 초의 불교청년회 및 유신회 운동, 그리고 20년대~30년대의 선학원 운동 등 불교 개혁의 사조와 늘 같이 하고 있으며, 더욱이 해방 이후로까지 이어져 정화불사의 정신적 바탕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그는 일제하 사찰령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 최대의 법난 아래에서 그것이 한국 불교의 본래 전통을 말살하는 악법이었음을 높은 悟道의 경지로 일찌감치 간파하고, 그 나름의 방법으로 이에 철저히 항거한 항일 운동가였다. 더욱이 처음에 개혁과 항일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개혁승들이 모두 변절해 가는 일제 강점의 질곡 속에서도, 내내 한번도 그 뜻을 꺽지 않고 强骨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존경해마지 않는 것이다.
  그는 본래 종교인이요 수행승으로서 무슨 특별한 독립 운동이 있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한국 불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나 일제에 항거하는 것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요, 그의 不二的 선수행의 한 측면이었기에, 산 속에 앉아 참선만 하는 좀스런 禪客이 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禪風再興 운동에 앞장섬으로써 나름대로의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정치적 독립 운동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간접적인 종교적 독립 운동의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가장 큰 話頭가 되고 있는 것은 한국 불교의 正體性 확립과 自主化의 문제이다. 이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풀리지 않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한국 불교 改革論과 親日․抗日論의 함수관계에서 풀어가야 할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滿空禪師의 지조 있는 일생을 통해서 많은 교훈과 시사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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