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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항일 선사 만공 스님을 독립유공자로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5.08.05|조회수66 목록 댓글 0

 

항일 선사 만공 스님을 독립유공자로

간디보다 앞선 비폭력 독립운동가…투옥 기록 없어 안 된다고?
2015년 08월 04일 (화) 17:34:08조현성 기자 cetana@gmail.com
  

“총독부는 조선불교를 간섭치 말라. 우리 조선 승려에게 전부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일본 강점기 서슬 시퍼런 조선총독에게 수덕사 주지였던 만공 스님(1871~1946ㆍ사진)이 내린 불호령이다. 내선일치와 창씨개명을 추진하던 일제에 비폭력 항일 투쟁을 했던 스님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추진 중이다.

경허‧만공선양회(회장 옹산 스님)가 지난 5월부터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에 만공의 포상신청과 독립운동 인명사전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옹산 스님은 “만공의 정교분립 선언은 윤봉길‧안중근 의사의 폭탄‧총알과 견줘 못할 것이 없는 위력을 가졌다. 스님의 사자후는 다른 항일항쟁 못지않게 조선인의 자존심을 드높인 사건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동안 만공의 공적이 묻혔던 것은 개신교 장로였던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불교인에 대한 갑질이 조직적으로 사회전반에서 진행돼 온 탓”이라고 했다.

日 총독 발언 맞받아쳐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가 31개 본사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 진흥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간판만 ‘조선불교 진흥’이었지 내용은 우리 불교를 처를 두고 고기 먹는 일본 불교처럼 만들겠다는 흉계였다.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 불교가 과거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나 현재 부패했다. 이를 혁신하려 했던 것은 전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공이 크다. 승려들의 도성 출입도 다 전 통독의 사찰령 선포에 따른 은혜이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는 합해야 한다”고 했다.

만공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라고 일갈했다.

만공은 “전 총독은 조선 승려에게 음주육식을 마음대로 하게 유도해 조선불교를 망쳐놓은 장본인이다. 조선 승려 모두를 파계시킨 전 총독은 지금쯤 지옥고를 받고 있을텐데 무슨 대단한 업적이 있다고 은공에 보답한단 말이냐”고 했다.

총독은 부들부들 떨며 “만공 주지는 내뱉은 망언을 당장 취소하라”고 했다.

일제 맞선 선학원 고승대회 주도

만공은 주장자를 높이 들어 3번 내리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한 말을 절대 취소할 수 없다. 교언영색으로 전 총독을 칭찬한 조선 승려들은 들으라. 데라우치의 은혜를 갚으려거든 부지런히 수행해 성불해 그를 지옥에서 건져내기부터 해야할 것이다. 조선불교는 1500년 역사를 갖고 그 수행‧교화 방편이 여법한데 어찌 일본불교와 합하는 것으로 진로를 모색하겠는가. 정부가 불교를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총독은 불교계에서 존경 받는 만공을 투옥시키면 조선인들의 반발이 클 것으로 예상했다. 체포 대신 일본 유람을 회유책으로 내놨다.

만공은 “나라 잃은 백성은 송장이나 다름없다. 송장을 데리고 일본 천지를 돌아다니도록 해 ‘조선불교계 송장’이라며 구경시키자는 것인데, 내가 어찌 그런 망신을 당하러 일본에 간다는 말인가”라고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세계불교계의 10대 뉴스로 기록될 정도로 파문이 컸다.

만공은 1941년 일제의 식민불교 정책에 맞서 선학원 고승대회를 주도했다. 이는 한국불교 고수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만공은 이때 “망에 망이 없으면 망이 곧 진이오, 진에 진이 있다면 진이 곧 망이로다”라는 게송을 남겼다.

만공은 1943년 간월암에서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입재했다. 천일기도를 회향한지 3일째 되던 날 해방이 찾아왔다.

옹산 스님은 “만공의 기도가 독립에 아무 도움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참자들의 의지와 결속을 도모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불보살의 가피를 불러오도록 했을 것”이라고 했다.

투옥‧복역이 기준? 서훈 원칙 정비해야

옹산 스님은 지난 5월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서훈 신청서를 제출 하면서 국회의장, 국회정무의장, 보훈처장, 독립기념관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만공의 업적 자체를 모르는 이가 많아 놀랐다“고 했다.

스님은 “무장 투쟁뿐 아니라 간디보다 앞서 비폭력 투쟁을 실천했던 만공의 독립운동도 인정받아야 한다. 투옥‧복역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서훈을 거부하는 국가보훈처의 태도는 잘못됐다”고 했다.

스님은 “박근혜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1만6000명을 새로 정립하겠다고 했다. 국가보훈처가 투옥된 기록이 없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원칙만 되풀이 한다면 대통령 말은 무엇이냐”고 했다.

한편, 만당비밀결사대를 조직ㆍ운영하는 등 음으로 독립운동을 도운 우봉 스님(1898~1953?)의 국가유공자 서훈도 투옥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반려 당하고 있다. (관련기사: 독립운동 주역 우봉 스님을 아시나요?)

봉암사 결사로 이어진 만공의 가르침

만공은 근현대 한국불교 중흥조 경허 스님의 상좌이다. 만공은 북쪽 하늘을 비춘 상현달 같던 수월과 남쪽을 비춘 하현달 같은 혜월과 함께 중원을 비추던 보름달이었다. 보월 석영 연등 고봉 금봉 벽초 초부 용음 혜암 용담 등을 불교계 대들보로 길러낸 선지식이었다.

만공의 가르침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청담 스님을 통해 이어졌다.

1941년 가을, 열혈청년이던 성철과 청담은 “한국불교가 살 길은 선불교를 중심으로 한 수행가풍을 세우는 것”이라는데 뜻을 같이 했다. 둘은 수덕사에서 봉암사 결사와 절집에서 일제 잔재를 걷어낸 정풍운동의 불씨를 피웠다.

만공을 수발하던 동자승 진성이 지난 2008년 열반한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이었다. 옹산 스님은 만공의 여제자였던 김일엽의 ‘나를 찾는 공부’라는 말에 수덕사를 찾아 원담 스님에게 출가했다. 만공과 옹산 스님은 사손관계이다.

옹산 스님은 “만공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돼도 생기는 이득은 없다. 만공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면 일본대사관 앞에 그들을 꾸짖던 만공 선사의 동상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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