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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水月선사 추도식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5.08.10|조회수177 목록 댓글 1

水月선사 추도식

熱쉬미 工夫허자~ | 2011.09.19 19:59 목록 크게

 

수월선사추도식

 

전조선을 통하여 현대의 유일한 대선지식이신 전 수월 대선사께서

 지난 7월 16일 (음력)에 열반하신 보도는 前號 本紙에 社告로써 한 바 있거니와

경북 김천군 직지사 선원에서는 12월 15일 (음력)에 추도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글쓴이 미상 >

 

사람은 꼭 자기만큼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자기만큼 기뻐하고 자기만큼 슬퍼하고 자기만큼 보고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어찌 삶뿐이겠는가.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아니. 죽음이야말로 꼭  자기만큼만 죽을 수 있는 실존의 마당이 될 것이다.

 죽음은 흉내냄이나 속임수를 끼워 넣을 틈을 주지 않는다.

다만 봄바람을 맞고 가을 달을 본 만큼 죽을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은 당하는 일이 아니라 이루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표현은 특히 불교에서 늘 두고 쓰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을 삶(태어남)과 한 몸으로 보느냐,

아니면 삶과 맞서는 세계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이 삶을 꾸려가는 태도는 무척 달라질 것이다.

 죽음을 당하는 일이 아닌 이루는 일로 보는 사람의 삶은

삶과 죽음이 늘 서로를 받아들이고 끝없이 서로를 살려내는

어우러짐의 마당으로 흐르고 있다.

 

삶이 죽음을 받아들일때

죽음은 뜨거운 삶의 열기를 식히는 고운 밤을 열어 줄것이며,

죽음이 삶을 받아들일때

 삶은 밑없는 죽음의 밤을 일깨울 아침빛을 뿌려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 삶의 진실이기도 하다.

 

삶은 몸과 의식의 일어남이고 죽음은 몸과 의식의 사라짐이다.

삶과 죽음이란 삶을 이루는 씨줄과 날줄이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살려낼 때 거기에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삶과 죽음이란 홀로 설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이 스스로만을 내세우지 않는 삶을

 불교에서는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열반이란 '모든 맞섬이 사라져 버린 큰 평온'이란 뜻이다.

 영원한 삶은 없다. 영원한 죽음도 없다. 삶만의 삶은없다.

죽음만의 죽음 또한 없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우고 있는것이다.

 

열반이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음이 아니다.

불법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인데 , 깨달음이란 삶과 죽음이 본디 없는 것을 밝게 보는 일이며,

사무치게 맛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을 다른 말로 '니르다사마빳띠(Nirodhasamapatti)'

곧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생각의 일어남(生)과 사라짐(死)뿐만 아니라

호흡의 들숨 날숨도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참으로 멸진정을 이룬 사람은

숨길마다 집착이 없는 숨을 쉬며, 언제든지 들숨과 날숨을 놓아버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만큼 죽을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수행자들에게는 더욱 더 잘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 참으로 나고 죽음이 없는 삶을 산 수행자라면

죽음 또한 옷을 갈아입듯이 , 또는 꽃 한송이를 바라보듯이

흔들림없이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그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죽음을 이룰 수 있는 니로다사마빳띠의 힘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들이 죽음을 맞는 모습이란 참으로 아름답고 놀랍기까지 하다.

그들은 죽은 뒤의 세계를 위해 어떤 기도도  하지 않으며

어떤 신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

다만 나고 죽음이 없는 삶의 진실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불교의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죽음(涅盤)의 전통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조동종을 세운 동산 양개(洞山良价)는 세상을 떠날 때가 되자

머리를 깎고 목욕하고 가사와 장삼을 갖춰 입고 종을 울려 대중을 모았다.

동산은 모인 대중에게 마지막 법문과 작별 인사를 한 뒤

 산 사람처럼 법상위에 단정히 앉아서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

동산이 생각밖으로 빨리 세상을 떠나자 그를 따르던 많은 대중들은 커다란 슬픔에 빠졌다.

동산이 열반에 든지 몇 시간이 지나자 온 산중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열반에 든 동산이 다시 눈을 뜨더니 대중들에게 손을들어

울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대중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재를 크게 올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스승곁에 더 있고 싶은 대중들은 재를 결코 서둘러 치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를 준비하는 기간이 이레동안으로 길어진 것이다.

재를 마치자 동산은 대중들이 정성껏 만든 음식을 함께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법문을 끝낸뒤에야 다시 열반에 들었다.

 

청담이 화엄사를 떠난 다음해 여름에 수월은 여름 결제 내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지게로 져다가 화엄사 들목에 있는 밭에 정성들여 쌓았다.

 

그 해가 무진년 여름. 서기로는 1928년, 수월의 나이 일흔넷이 되던 해였다.

수월의 모습은 제 나이보다도 훨씬 더 들어보였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못 먹고 못 입고, 누구보다도 잠을 적게 자고,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한 수월이요,

일생을 쉴 틈이 없이 일만 한 몸이니 마땅히 그랬을 것이다.

 

뼈와 가죽만 남은 수월,

그는 따가운 대륙의 여름 햇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채나는 두 눈을 번쩍이며 말없이 나무만 하였다.

그 때도 대중은 대여섯이 모여 살았는데 수월이 나무를 해 모으는 속뜻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밤이 되면 배나무 곁에 있는 삼매바위에 앉아 날이 밝도록 깊은 삼매에 들었다.

호랑이들만이 무엇인가를 짐작하였는지 밤이 다 가도록 수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수월은 무진년 여름 안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

나이 들고 기력이 다하니 이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몇해전부터인가,

그  윤기나고 야무지게 삼던 짚신도 모양 내지 않고 대충 삼았고

나무하고 밭을 일구는 틈틈이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수월이 열반에 든 그해는 나라안에서나 밖에서 나라를 되찾아

 백성들을 해방시키려고 일제와 맞서 싸우던 많은 지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큰 수난을 당한 해이기도 하다.

중국 북벌군은 제남에서 일제와 싸움을 벌였고 ,

일제는 만주를 집어먹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무진년 여름 결제(結制)는 양력으로 6월2일 부터 8월 29일사이였다.

수월은 결제를 며칠 앞두고 나무하기를 끝마쳤다.

해제 다음날 점심공양을 끝내고 대중들과 함께 차 한잔을 마신 그는

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나깠다고 한다.

 

"나 , 개울에 가서 몸 좀 씻을 텨."

 

화엄사 왼쪽으로 흐르는 개울물은 맑고 수량도 많아 화엄사 대중들이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위쪽 개울물은 먹는 물로, 아래쪽 개울물은 빨래나 목욕을 하는 물로 썼다.

일제가 전쟁기지를 만드느라고 산에 나무를 없애는 바람에 요즘은 물 양이 별로 많지 않지만 ,

그 때는 물도 많고 목욕할 대 몸을 가려줄 나무도 충분했을 것이다.

 

수월이 방을 나선뒤에 대중들은 모처럼 맞은 해제 풍김새에 젖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는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며칠 뒤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한참동안  이렇게 시간을 보낸 대중들은 저마다 볼일을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나서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개울가로 빨래하러 간 스님이 부리나케 달려와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대중스님을 불러 모았다.

수월이 개울가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대중들은 우르르 개울가로 몰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차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수월의 모습 앞에서 몸과 마음이 굳어졌다.

 

목욕을 마친 수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개울가 바위위에 단정히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 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자연스런 결과부좌, 쭉 편 허리와 가사. 바로 세운 머리.

깊이 감은 눈과 야물게 다문 두 입술.

그리고 배꼽 아래 신비스런 선을 타고 내려와 함께 포개져 있는 두 손과

불꽃 튀기듯 맞닿아 있는 두 엄지 손가락,

그것은 누가 보아도 죽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개울물에 몸을 씻은, 번뇌없는 늙은 스님이 잠시 바위에 앉아

늦여름의 매매소리를 즐기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도대체 덧없는 몸과 마음뿐인 사람이 이런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한지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이것은 나고 죽음이 사라져 버린 경지처럼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다.

 

이렇게 죽음을 맞은 이는 다만 수월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참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수많은 옛 스님들이 죽음을 맞이하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도 중국 남화선사(南華禪寺)에 가면 육조 혜능스님의 열반상을 볼 수 있다.

그 열반상은 나중에 만든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돌아가실 때의 몸을 그대로 모셔놓은 것이라고 한다.

 

설명을 듣지 않은 이는 누구도 그 열반상을 보고 그 상이 천삼백년전에 열반에 든 혜능의 ,

그때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혜능의 열반상 옆에는 명나라 때의 스님인 감산과 단전의 열반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믿기 힘든것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빈틈이 없는 혜능의 열반상, 파안대소하는 감산의 열반상,

그리고 졸음을 즐기고 있는 나한처럼 머리를 떨구고 있는 단전의 열반상.

이것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영원한 피안이 되어,

우리 가슴속에 일어나는 묵은 생각의 먼지를 순식간에 날려 버린다.

보면 볼수록 그들의 삶과 죽음에는 티끌만큼의 틈이 없었음을 사무쳐 느끼게 된다. 참으로 그렇다.

그들은 새삼스레 열반에 든 것이 아니었다.

열반은 그들의 삶. 바로 그것이었다.

 

수월이 열반에 든 뒤에야 대중들은

수월이 여름 내내 그렇게 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나무를 해 모았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덧없는 몸뚱이를 태워 없애 버리기 위한 땔감이었던 것이다.

한 평생 남을 위해서 숨을 쉰 수월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비록 숨이 끊어진 몸일 망정

그 몸을 태우기 위한 땔감을 마련해야 하는 다른 사람의 수고를 차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자비는 그의 마지막 숨 끝까지 이어졌다.

 

수월의 이런 점은 경허의 큰 제자이면서도

경허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배경이기도 하다.

수월은 참선에 달통한 선사이면서도 일생을 빈틈없는 율사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율은 어거지로 지킨 빈 형식이 아니라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었다.

 

수월은 생명을 다치게 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

싸우거나 ,훔치거나, 술마시고 고기 먹거나, 여자를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자비스러운 보살이었다.

 

수월이 열반한 뒤에 밤마다 호랑이들이 떼를 지어 울었고,

까치는 하늘을 가리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수월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북간도의 동포들에게 더없는 슬픔이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고향을 잃었으며 또 다른 어머니를 여읜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간도의 파도 같은 길을 타고 하얗게 몰려왔다.

그래서 수월의 다비식은 이틀 더 늦추어 닷새 만에 치러야 했다.

 

'다비'란 인도말로 태워 없앤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화욕(火浴),' 곧 '불 목욕'이라고 한다.

 수월이 여름내 쌓아둔 나무는 수월을 태우고 또 태웠다.

물이 물에 씻기는 모든 때를 다 씻어내듯이

불은 불에 태워지는 온갖 때를 남김없이 태워 버린다.

 

맑은 불길은 수월의 몸을 씻고 또 씻어 영롱하고 빛나는 사리를 수도 없이 건져 냈다.

수월이 열반에 든 날로부터 다비식을 마친 이틀 뒤까지 송림산에는 밤마다 큰 빛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빛기둥은 하룻밤에도 몇번씩이나 일어나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간도땅 사람들의 가슴속을 대낮처럼 밝혀 주었다.

그들은 그 빛기둥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속까지 벅차 오르는 환희심을 느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들 한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천상천하에 홀로 우뚝 선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그 꺼지지 않는 빛살을 향해 간도 땅 백성들은 소리높여 외쳤다.

 

 

나무 수월보살 마하살 南無 水月菩薩 摩訶薩

 

 나무 수월보살 마하살 南無 水月菩薩 摩訶薩

 

수월 관음, 그는 중생의 일꾼으로 태어나 중생의 일꾼으로 죽은 , 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는 삼매의 열매였고 자비의 빛이었으며,보현의 메아리였고 문수의 꽃이었다.

 

수월이야말로 참으로 죽음을 온전하게 이룬 성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두고 바로

 '달이 되신 달'

이라고 끝없이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기에 앞서

벌거벗은 수월이 짚신을 머리에 이고 서쪽(열반)으로 간 뜻을 먼저 물어야 옳으리라.

 

그 때 불교(佛敎)라는 잡지는 이런 사고(社告)를 실었다.

 

대 선지식 수월 대선사께서 무진(1928)년 7월 16일 (음력)미시에

중화민국 다전자 나재구간 화엄사에서 열반하셨습니다.

전수월 대선사께서는 수년전 기유(111911)년 9월 17일(음력)부터

중화민국 청구간 관음사에 주석하시다가

경신(1922)년 7월 16일(음력)에 다시 삼백여리를 돌아와

前記 주소에서 청풍납자를 모아 수선 안거하다가

前記 일자에 하안거를 해제하고

오후 미시에 안연히 열반에 들어

선중은 슬픔을 극하여 오일 뒤에 다비식을 봉행함에

칠일동안 대방광하였다는 보도가

함경북도 경원군 월명사 주지 김취담 선사로부터 본사에 도착하였기에 널리 알려 드립니다.

                                                                       1929년 1월 1일 <불교>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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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백화 | 작성시간 15.08.10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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