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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진흙소 걸음을 따라(상)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2.01.26|조회수114 목록 댓글 1

 

[기획연재]진흙소 걸음을 따라
①공주 동학사 (상)
백척간두에서 생사의 관문 넘은 오도처
설산 최광익이 그린 경허성우 대선사 진영. 덕숭산 금선대 진영각에 봉안되어 있다.

한양을 향하는 경허스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9살에 입산출가한 청계사를 떠나 14세에 동학사로 온지 20년. 대강백 만화 보선 스님에게 배워 23세에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한 이후 수미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백으로 수많은 학인을 가르쳤다.
“옛부터 문필봉이 있는 동학사에서는 ‘문장’을 자랑 말라고 했고, 장군봉이 자리잡은 갑사에서는 ‘힘’을, 중학단이 있고 들이 넓은 신원사에서는 ‘돈’ 을 자랑 말라고 했다”는 일초스님(동학사 승가대학장)의 말처럼 동학사에서 수학한 경허스님은 경학의 깊이와 크기가 큰 파도처럼 힘차 그 누구도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20년만의 한양 외출은 출가은사인 계허스님을 위한 것이었다. 환속한 계허스님이 목수로 일하다 다쳐 누웠다는 소식에 경허스님은 무거운 발걸음을 한양으로 재촉했다. 때는 스님이 34세가 되던 고종 16년(1879) 늦여름이었다.



“인생 덧없음 풀잎의 이슬같아”
경허스님은 한양길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스님의 한양행은 한국불교 근대사 일대 사건의 시작이었다.

사건은 경허스님이 천안 부근에 이르러서 시작됐다. 폭풍우를 만난 스님은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집 처마로 뛰어들었지만 주인의 내침을 당해야 했다. 그 마을 수십 집에서 쫓겨난 스님에게 들리는 소리는 곡성(哭聲) 뿐이었다. 연유를 알게 된 것은 어느 집 주인이 야박하게 쫓아내며 “마을에 돌림병이 돌아 서 있는 사람도 죽어나가니 어찌 손님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한 말 때문이었다. 모골이 송연하고 심신이 아찔했다. 마치 자신이 죽음에 임박한 것처럼 일체 세간의 일이 꿈밖의 청산 같았다. 주검이 산을 이루고, 산 사람과 죽은 이가 분간이 되지 않는 비몽사몽(非夢似夢)이었다.

일대 사건은 돌림병으로 신음하는 중생을 본 것에서 시작됐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문 밖에서 본 죽음을 계기로 출가를 결심했듯, 경허스님의 일대사건은 ‘바람 앞의 촛불’같은 중생들의 목숨을 만난 게 시작이었다. 출가한 후 25년 동안 그가 배우고 의지한 경전의 본래 가르침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경허스님의 일대 사건은 원효스님이 당나라로 유학가는 길에 무덤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겪은 일과 맞닿는다.

경허스님은 이 때의 일을 “인생의 한 세상이 마치 천리마가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으며, 덧없음이 풀 끝에 맺힌 이슬과 같으며, 위태로움이 바람 앞의 등불 같다.”〔《경허집》‘등암화상에게 주다(與藤菴和尙)’〕고 전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입멸 직전 “나는 일찍이 한마디도 말한 바 없다”고 했다. 경·율·논 삼장에 정통하고 유학과 노장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는 대강사였지만, 경허스님은 죽음이라는 백척간두에 서서야 문자와 중생의 알음알이가 아무 소용없음을 사무치게 느끼고 발길을 동학사로 돌렸다.

대발심. 그 시작은 중생에 대한 연민이었다. 돌림병에 죽어 나가는 무간지옥의 세간사는 무상(無常)이었다. 돌림병이 창궐한 세상은 지옥이었지만 그것은 중생의 일이었다. 지옥은 세상의 중심에 있었고, 그 주변엔 여름꽃과 나무가 흐드러지게 푸르렀다. 하룻밤 소나기에 뜰에 핀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대발심해 활연대오한 서산대사처럼 경허스님도‘부처’와 맞닿은 그 길을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중생에의 연민 ‘대발심’ 불러
동학사로 가는 발걸음은 더 급했다. 하지만 머리 속에 맴도는 것은 ‘불타는 집’을 구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20여 년 동안 공부해 온 경학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배워온 학문은 감옥이자 뗏목이었다. 집을 태우고 있는 불을 끄기 위해서는 ‘감옥’을 부수고 강을 건너야 했다. 불타는 집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길, 뗏목을 메고 갈 수는 없었다. 맑은 강 위에 나룻배를 버려 두듯, 무소의 뿔처럼 홀로 걸어야 할 길에 뗏목을 업고 갈 수는 없었다.

불타는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려면 소리쳐야 했지만 경허스님은 목청을 높이기보다 행동했다. 경허스님은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 학인들을 모두 흩어 보내며 비장한 목소리로 “그대들은 인연을 따라 잘 가게나. 나의 뜻과 원력은 이에 있지 않다네”라 말하고 방문을 걸어 잠궜다. 아홉 살 나이에 동진 출가해 20대에 ‘대강백’이 되어 사자후를 토하던 경허 스님이 ‘제2의 출가를 감행한 것’이다.

생명의 실상을 꿰뚫기 위한 경허스님의 오도과정은 생사를 넘나드는 처정함 자체였다. 경허스님의 오도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동학사 염화실이 아닌 현재 승가대학 화엄반이 사용하는 실상선원에 있던 토굴이다.

칼로 턱을 괴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경허스님이 불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참선’이었다. 참선은 공안을 통해 조사의 관문을 깨드려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진리당체를 찾는 일이었다. 서산대사는 “활구를 깨치면 불조의 스승이 될 것이고, 사구에서 깨치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선가귀감》)고 했다. 경허스님도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마음길이 끊어져야 한다. … 생사윤회를 면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선정(禪定)의 힘을 익혀야 한다”(《경허집》‘13세 동자 경석에게 보이다(示慶奭十三歲童子)’)고 가르쳤다.
참선에 들어가면서 닫은 토굴의 문은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터였다. 방 한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과 하루 한 끼 공양이 들어올 작은 창문 하나만 내었다. 결가부좌한 스님이 택한 공안은 일반적으로 택하는 조주스님의 무(無)자 화두가 아니라, ‘ 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즉,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는 영운(靈雲) 선사의 화두였다. 경허스님의 수행은 칼 끝의 목숨이었다. 칼로 턱을 괴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바위처럼 앉아 있는 스님의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절했다. 강사가 되기 전 만화 보선 스님에게 수학하던 시절 잠이 많다고 꾸중 듣던 경허스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
3개월 여의 사투, ‘여사미거 마사도래’를 참구하던 스님은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코구멍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홀연히 깨쳤다. 고종 16년(1879) 겨울 11월 어느 날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약보》에서 이 순간을 “하루는 어떤 스님이 묻기를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표현했다. 이 말 아래 경허는 대지가 둘러 빠지고 물아(物我)를 함께 잊으며 백천 가지 법문과 무량한 묘한 이치가 당장 얼음 녹듯 하였다.”고 했다.

한중광은 경허 스님의 위대한 깨침을 ‘근대선의 빅뱅(bigbang)’이라 말했다. 경허스님의 확철대오는 한국선불교 중흥의 시작이었으며, 부처님의 혜명을 다시 이어 어두운 세상을 진리의 태양으로 밝히는 여명이었다.
경허스님은 한중광의 말처럼 동학사 토굴에서 ‘한국 근대불교의 새벽별’이 되었고, 동학사는 경허스님의 오도처가 되었다.

오도처에는 '풋 중'들이 화엄학 공부
현재 동학사에는 경허스님이 강백으로 이름을 드날리던 때처럼 130여 명의 학인들이 경학을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들어서 있다. 당시는 이보다 많은 학인들이 경허스님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전한다.
경허스님의 행장을 다룬 대부분의 책에서는 경허스님이 참선에 들어간 건물을 현재 동학사 염화실, 즉 조사실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일초스님은 “염화실은 경허스님이 강사로 활동하며 지내던 곳이고, 실제 참선수행한 곳은 현재 승가대학 4학년들이 사용하는 실상선원 자리에 있던 토굴”이라고 알려줬다.

허름한 토담집이던 경허스님의 오도처는 도를 닦던 한 가족 4명이 살았는데, 1950년대 말 절에서 돈을 주고 내보내고 그 집을 헐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실상선원이 지어져 강원 4학년인 화엄반 ‘풋중’들이 살고 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진리를 좇던 경허스님의 깨침의 자리에 100년이 지난 오늘, 부처님이, 원효성사가, 경허스님이 걸어간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동학사를 찾은 날은 눈이 내린 다음날이었다. 일초스님의 명으로 기자를 경허스님의 오도현장인 실상선원과 염화실로 안내했던 유진스님과 합장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뒤로 문필봉이 환했고, 개울의 얼음은 칼처럼 벼려 있었다.
서현욱 기자

 

발행일 : 2005-01-22
작성일 : 2005-01-20 오후 8:03:47
작성자 : 서현욱 / mytrea70@manbulshinm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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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토정비결 | 작성시간 12.08.22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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