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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진흙소 걸음을 따라 (하)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2.01.26|조회수81 목록 댓글 1

[진흙소 걸음을 따라] ②계룡산 동학사 (하)
해동 선법 불씨 다시 핀 근대선의 고향
경허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동학사 염화실에서 `일 없는 일`을 하며 겨울을 보냈다.

서설이었다. 공주 동학사로 오르는 길은 지난밤 내린 눈이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덮었고, 앙상한 가지에 매달렸을 잎사귀 대신 눈꽃으로 덮혀 있었다. 1월 26일 아침, 교학의 맥을 상속하는 전강식이 열리는 날 찾은 방장실엔 ‘진흙소’는 간 데 없고 ‘잔치’에 찾아온 납자들의 들고남만이 분주했다.

경허스님은 확철대오한 후 이곳 방장실에 누워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처절한 수행 끝에 얻은 깨침도 드러내지 않고 빅뱅의 순간도 잠시, 방장실에 누운 스님은 언제나 졸고 있었다.
만화스님은 자신이 들어와도 일어나지 않는 경허스님에게 “무엇 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만화스님은 경허스님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일이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
확철대오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얻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장부(丈夫)의 모습이 왜 이런 것일까? 이때 경허스님의 경지는 스스로 읊은 선시에 잘 나타나 있다.


“머리를 떨구고 언제나 졸고 있나니 조는 일밖에 별일이 없네. 조는 일밖에 별일이 없으니 머리를 떨구고 언제나 졸고 있네.”


경허스님이 오도했을 당시는 법을 얻을 스승도 없고, 법을 물을 스승도 없었으며, 법을 인가(印可)해 줄 스승도 없는 암흑의 세월이었다. 물론 동학사에 만화 보선스님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교종(敎宗)의 종장(宗匠)이었다.

경허스님의 깨침은 선법의 부흥을 알리는 ‘빅뱅(big bang)’의 순간이었다. 경허스님의 깨침은 석가 세존이 일으킨 선의 불꽃이 되살아남을 뜻했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석가 세존께서 세 곳에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고 말했다.

석가 세존의 마음은 세 차례에 걸쳐 마하 가섭존자에게 전해졌다. 첫 번째가 염화미소(拈華微笑)다. 영산회상에서 설법 중 세존이 들어보인 연꽃 한 송이의 의미를 알아차린 가섭 존자가 빙그레 웃자 마음에서 마음으로(以心傳心) 정법이 전해졌다. 두 번째는 다자탑전 분반자(多子塔前 分半座)다. 세존께서 중인도 북쪽에 있던 다자탑 앞에서 설법하실 때 늦게 도착한 남루한 차림의 가섭에게 제자들이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자 부처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반쯤 내어 주어 같이 앉으신 일을 일컫는다. 세 번째는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다. 세존께서 사라쌍수 밑에서 조용히 열반에 잠겨 법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을 때 가섭이 늦게 도착하여 열반하시는 모습을 뵙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울자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보인 일이다.

석가 세존으로부터 흐른 거대한 마음강물은 제1조 마하가섭, 제2조 아난, 제3조 상나화수(商那和修), 제4조 우바국다(優婆국多), 제5조 제다가(提多迦) 등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제28조 보리달마에 이르러 천축을 떠나 중국으로 이어졌다. 석가의 마음강물은 보리달마를 시작으로 중국 역사를 관통하며 흘렀다. 중국 선불교의 제2조 혜가스님을 거쳐, 제3조 승찬스님, 제4조 도신스님, 제5조 홍인스님, 제6조 혜능스님으로 이어졌고, 다시 마조 도일 스님의 법을 이은 서당 지장스님에게 법을 인가 받은 ‘해동의 달마’도의스님으로 이어져 해동국 신라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서당 지장스님과 형제요, 마조 도일스님의 으뜸제자인 회해 선사는 도의스님과 법거량 한 후 “강서의 선맥(禪脈)이 이제 모두 동국(東國)의 중을 따라 가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서당스님의 법을 이은 것은 도의스님만이 아니었다. 신라 헌덕왕 6년(814)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혜철스님도 지장 서당스님의 심인을 이었다. 신라로 돌아와 양양 진전사에 은거한 도의스님과 곡성 태안사에 자리잡은 혜철스님은 신라에 아홉 개의 선문(禪門) 탄생시켰고 해동 신라는 부처님의 심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석가 세존이 가섭 존자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심법(心法)의 강물이 해동 계룡산 동학사에서 칼을 턱에 괴고 용맹정진한 경허스님에게 닿았다.

당시 조선의 불교는 나라의 핍박과 중생들의 외면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선종도 교종도 구별되지 않았고, 승려는 산속에 묻혀 기복을 구하는 중생들에 얹혀 살았다. 승려들은 도성에도 들어갈 수 없는 천민으로 대접받았고, 도적에 비유돼 적승(賊僧)이라 불리는 치욕을 겪고 있었다.

구산선문의 선맥은 청허휴정(淸虛休靜) 이후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 오고 있었다. 정관 일선(靜觀 一禪), 중관 해안(中觀 海眼), 제월 경헌(霽月 敬軒), 사명 유정(四溟 惟政), 편양 언기(鞭羊 彦機) 스님 등이 이은 석가 세존의 심법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경허스님의 오도는 눈 밝은 선지식의 출현을 갈구하는 중생들의 염원이 낳은 인연은 아니었을까?

석가 세존의 마음은 등등상속(燈燈相續) 되었고, 세존의 마음을 좇는 선승들은 일대사인연을 만나 부처의 마음을 보았다.
이조(二祖) 혜가스님은 달마선사의 ‘마음을 가져오라’는 말에 깨쳤다. 육조 혜능스님은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구절에서 깨쳤고, 영운 지근스님은 ‘복숭아 꽃’을 보고 깨쳤으며, 대혜 종고스님은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이 서늘해진다’는 구절에 깨쳤다. 이뿐이랴, 보조 지눌스님은 《육조단경》과 《대혜어록》을 읽다가 깨쳤고, 청허 휴정은 ‘닭 우는 소리’에 깨쳤다. 그리고 경허스님은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즉,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는 영운(靈雲) 선사의 화두를 참구해 깨쳤다.

세존의 심법을 이은 경허스님은 1879년 겨울을 동학사에서 보냈다. 경허스님은 ‘무소의 뿔’이었다. 스님에게는 스승도 자신의 법을 인가해 줄 눈 밝은 선지식도, 제자도 없었다. 경허스님은 언 땅을 뚫고 냉이가 나올 즈음에야 ‘할 일 없는 일’을 마치고, 헐거워진 땅을 비집고 나오는 보리를 밟는 농부의 발길처럼 움직였다. 오후 보임을 위해 서산 연암산 천장암으로.

경허스님이 할 일 없이 누웠던 방장실을 보고 나올 즈음 동학사승가대학장 일초스님이 그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상속하는 전강식은 막바지였다. 석가 세존의 마음이 등등상속해 이곳 동학사에 닿았고, 이곳의 경허스님은 ‘마음’을 찾았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이곳에 ‘마음’은 어디 있을까? 계룡을 등진 발걸음은 얼어붙은 눈을 피해 황토를 밟으려 깡총댔다. 언 땅이 헐거워지기엔 이른 날이었고, 삽도 들어가기 힘든 땅은 ‘풀싹’들이 비집고 나오기엔 버거웠다.

동학사=서현욱 기자

발행일 : 2005-02-19
작성일 : 2005-02-25 오전 11:50:25
작성자 : 서현욱 / mytrea70@manbulshinmun.com

http://www.manbulshinmun.com/upload_html/200502/200502250004.asp?gb=0108&no=20050225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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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토정비결 | 작성시간 12.08.22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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