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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경허, 그는 누구인가?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2.08.16|조회수73 목록 댓글 1

 

경허, 그는 누구인가?

느닷없이 제자와 길을 가다가 아낙에게 입맞춤을 하고 줄행랑을 치고, 술이 좋아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승려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비도(非道)적인 모습이 그의 전부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불결한 피가 흐르는 한 선조의 존재를 감추려는 후손들처럼 쉬쉬하며 경허의 삶과 선(禪)을 묻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경허의 존재는 거대해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아직도 한국불교에 큰 자국을 남기고 있다. 현재 한국선이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에도 정작 경허는 막행막식의 기행을 일삼은 파계승, 선문의 이단자로 외면당하고 있다.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미치광이’ 쯤으로 여기는 이도 있다.

경허는 봉건적 잔재를 깨부수고 오염된 조선불교를 깨끗이 씻어냈다. 경허를 통해 한국불교는 다시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경허의 문하에서 배출된 고승들이 주도한 1954년 이후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현대 한국불교가 그 목소리를 가진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불교는 선구자 경허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허는 잿밥에만 골몰하며 목탁을 두드리던 구한말 불교계에 선의 정신과 선종교단으로서 한국불교가 지녀야 할 전통의 복원을 이룬 인물이다.

만공이 스승 경허에게 물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합니다만, 스님은 왜 그렇게 술을 드시는 겁니까?”

경허는 만공의 말꼬리를 끊으며 말했다.

“허 참, 자네는 아주 도가 높네 그려. 나 같으면 술을 먹고 싶으면 가장 좋은 밀씨를 구해서 잘 키워 술을 빚어서 마시고 또 마시겠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해다가 잘 가꾸어서 파전을 먹고 또 먹겠네.”

실종자 경허,
프로메테우스 경허


경허는 무너져 가는 조선을 걱정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누어도 편치 않구나’라고 노래한 우국(憂國)의 선승이었다. 경허는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이기도 했다. 그리고 경허는 실종자이기도 하다. 경허의 실종과 불귀(不歸)는 망국(亡國)의 조선, 식민지 대한제국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너무도 조선적인 비극이 응축되어 있다.

경허의 생애가 후대에 전해지고 검토되는 기준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전승과 기록으로 전해지는 전기(傳記)가 있다. 기록으로 남겨진 전기는 연대(年代)와 그 인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갖추어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구전된 이야기들은 선사로서의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고 때로는 엉뚱하기조차 하다.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은 현대 한국선의 달마, 경허에 관한 필자의 오랜 그리고 절실한 사랑의 기록이다. 필자는 이 평전을 쓰기 위해서 수년간 인간 경허, 시인 경허, 선승 경허의 체류지를 답사했으며, 경허선(鏡虛禪)의 세계를 축약하여 전하는 1943년판 원본 《경허집(鏡虛集)》을 몇 번이고 숙고하며 읽었다고 한다. 필자는 경허의 길을 추적했으며, 경허 스스로 이단자라는 운명을 감수하고 저 북방고원에서 방랑자로 쓸쓸히 소멸했는지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선의 탐구자들은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경허를 둘러싼 진부한 소문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오직 경허의 선과 인생을 알고자 하는 소수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경허선사 연보

1846년 1세, 憲宗 12년 丙午
8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키자 아기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김. 만해 한용운은 자신이 작성한 〈경허약보(鏡虛略譜)〉에는 ‘선사의 속성은 송(宋)씨,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 본관은 여산(礪山)이다’라고 적고 있다. 부친 송두옥은 일찍 작고.
1854년 9세, 哲宗 5년 甲寅
모친 박씨를 따라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淸溪寺)에서 계허(桂虛)대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수지함. 이후 14세까지 항상 나무하고 물을 길어 부처님과 스승 섬기기에 글을 읽을 겨를도 없이 초기 수행을 쌓음. 이때 가형 태허(泰虛)는 이미 공주 마곡사에 출가하여 수행 중이었다.
1859년 14세, 哲宗 10년 己未
절에 와서 한 여름을 지내는 선비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한 번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 대로 문리를 해석할 만큼 큰 진보가 있었음. 마침내 《통감사략(通鑑史略)》을 하루에 대여섯 장씩 암송. 글을 가르치는 선비는 “참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구나. 옛말에 천리마 같은 훌륭한 말도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하여 소금수레나 끌며 고생한다더니 지금 동욱 자네가 바로 그렇구나. 훗날 반드시 큰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의 스승이 되어지이다”라고 찬탄함.
그해 스승 계허대사 환속. 스승이 써 준 추천서를 소지하고 동학사 강사 만화보선(萬化普善)의 문하에서 경학을 수업하기 시작.
1860년 15세, 哲宗 11년 庚申
1868년 (23세, 高宗 5년)까지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전을 수업. 한용운의 〈경허약보〉는 이 시기의 경허를 ‘공부를 하는 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不閑不忙) 해도 남보다 앞섰으며, 내외전(內外典)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고 적고 있다. 불경뿐만 아니라 유명한 학숙(學塾)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유가(儒家)와 노장(老莊)의 전적들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룸.
1862년 17세, 哲宗 13년 壬戌
진주민란 발생. 삼남각지에 민란이 발생함.
1866년 21세, 高宗 3년 丙寅
병인양요(丙寅洋擾) 발발. 외세와 직접적인 충돌이 시작됨.
1868년 23세, 高宗 5년 戊辰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되어 1879년(34세)까지 역임. 한암 중원(漢巖重遠)은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에서 경허의 개강(開講)에 대해 ‘그 교의를 논하심에 파란양양하여 사방의 학자가 모두 귀의하였다(論敎義波瀾洋洋 四方學者多歸之)’고 기록. 주로 《화엄현담(華嚴玄談)》을 강의함.
1876년 31세, 高宗 13년 丙子
강화도 조약 체결.
1879년 34세, 高宗 16년 己卯
6월,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기 위해 여행 중 천안 근처에서 콜레라가 만연하여 수많은 사망자가 나온 마을을 지나다가 선(禪)의 길로 회심(回心). 한암 중원은 당시 경허의 심경을 ‘화상께서 이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죽음이 임박하여 목숨이 한 호흡 사이에 끊어질 것 같았으니, 일체 세간이 모두 꿈속에서 바라보던 경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和尙忽聞其言 毛骨悚然 心神恍惚 恰似箇大限 當頭命在呼吸間 一切世間 都是夢外靑山)’고 기록함.
그해 6월 일본에서 부산으로 전염된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으며 7월 콜레라로 인하여 부산 무역정(貿易停)을 폐쇄함. 경허는 콜레라의 거리에서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此生永爲痴?漢 不爲文字所拘繫 參尋祖道 超出三界)’고 다짐하고 강의를 폐지함.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방문을 닫은 채 꼿꼿이 앉아 참선을 시작.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驪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참구.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睡魔)를 쫓으며 필사적으로 정진.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침.
그해 11월 15일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대오(大悟).
한암 중원은 경허의 대오(大悟)를 다음과 같이 정리함.

‘이처사의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라는 말을 전해 들은 화상의 안목은 정히 움직여(眼目定動), 옛 부처 나기 전의 소식이 몰록 드러나 활연히 현전하였다. 평평한 대지가 꺼지고 물(物)과 아(我)를 함께 잊으며 바로 옛사람의 크게 쉰 곳에 이르르니 백천법문과 무량한 묘의(妙義)가 당장 얼음 녹듯이 풀렸다’

1880년 35세, 高宗 17년 庚辰
지금의 서산시 고북면 천장암에서 오후(悟後) 보림(保任).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행함.

〈오도송(悟道頌)〉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라는 구절로 보아 개당설법이 이루어진 계절이 바로 유월이었음을 알려 준다.
1882년~1898년 37세, 高宗 19년 壬午~53세, 光武 2년 戊戌
주로 충청, 경상 일대의 동학사·천장암·서산 부석사·마곡사·장곡사·보석사·예산 용문사·대전 묘각사·사불산 대승사·문경 봉암사 등지에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진작하고 만공 월면(滿空月面)·수월(水月)·혜월(慧月)·침운(枕雲) 등의 제자들을 지도함. 천장암에서 혜월과 수월에게 보조 지눌의 《수심결(修心訣)》 강의. 승화상인(承華上人)에게 〈계차청심법문(契此淸心法門)〉을 설하고 천장암에서 〈장상사와 김석두에게 보내는 글(上張上舍金石頭書)〉, 〈자암거사에게 보내는 글(上慈庵居士書)〉 등의 서간을 씀.

1884년 39세, 高宗 21년 甲申
10월 초순 어느 날, 동학사에서 제자 도암(道岩, 훗날의 滿空)을 처음 만남. 당시 도암의 나이 14세. 도암을 천장암으로 보내 그해 12월 8일 태허화상을 은사로, 경허 자신이 계사(戒師)가 되어 월면(月面)이라는 법명과 사미계를 줌.
1898년 53세, 光武 2년 戊戌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 주석. 그해 봄 동래 범어사의 초청으로 제자 월면·침운 등과 함께 범어사에 도착. 범어사의 등암 찬훈(藤庵璨勛)·회현 석전(晦玄錫詮)·혼해(混海)·성월 일전(惺月一全)·담해(湛海)·화월(華月) 등이 경허를 초청함. 〈범어사 선원을 시설하는 계의서(梵魚寺設禪社契誼序)〉를 작성.
범어사의 등암화상에게 선(禪)의 요체를 강의. 본 강의를 〈등암화상에게 준다(與藤庵和尙)〉는 문건으로 정리.
그해 겨울 청암사 수도암 방문. 시 〈청암사 수도암에 오르며 (上靑巖寺修道庵)〉를 쓰고 《금강경》 강의. 청암사 수도암에서 제자 한암 중원(漢巖重遠, 1876~1951)을 만남.
1899년 54세, 大韓 光武 3년 己亥
가야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김. 당시 해인사에는 고종(高宗)의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불사의 법주(法主)로 추대되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상당법어(上堂法語)를 행함.
4월 〈해인사수선사방함인(海印寺修禪社芳啣引)〉 작성,
9월 하순 〈합천군가야산해인사수선사창건기(陜川郡伽倻山海印寺修禪社創建記)〉 작성, 본 창건기에서 ‘결연히 기해년(己亥年) 가을 찾아와서 경을 열람하고 집을 둘러보고 홍류동 속에 신선의 신령스런 발자취를 더듬어 서성거리니 몸까지 잊을 정도였다’고 씀.
11월 1일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社文)〉, 〈상포계서(喪布?序)〉 작성.
12월 20일 〈귀취자기(歸就自己)〉 작성.
1900년 55세, 大韓 光武 4년 庚子
4월 상순 〈범어사총섭방함록서(梵魚寺總攝芳啣錄序)〉 작성.
송광사·태안사·화엄사·지리산천은사·영원사·실상사를 방문.
〈남원실상사백장암중수문(南原實相寺百丈庵重修文)〉 작성.
11월 하순 〈남원천은사불량계서(南原泉隱寺佛糧契序)〉 작성.
12월 상순 〈화엄사상원암복설선실정완규문(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 작성.
12월 상순 〈동리산 태안사 만일회에서 범종을 사서 헌답한 신도방명기(桐裏山泰安寺萬日會梵鐘檀那芳啣記)〉작성.
12월 하순 송광사 차안당(遮眼堂)에서 〈취은화상행장(取隱和尙行狀)〉 작성. 취은 민욱(取隱旻旭, 1816~1900). 이 해 화엄사에서 진진응(陳震應)을 만나고 〈진응강백답송(震應講伯答頌)〉을 씀. 겨울 경상남도 화전(花田, 지금의 남해군) 용문사 방문. 용문사의 호은장로(虎隱長老)로부터 〈서룡화상(瑞龍和尙) 행장(行狀)〉을 집필해 줄 것을 의뢰받음.

1901년 56세 大韓 光武 5년 辛丑
해인사에서 몇 편의 영찬(影贊)을 작성.
3월 〈금우화상영찬(錦雨和尙影贊)〉 작성. 해인사에 소장된 진영에 의하면 이 영찬의 제재(題材)는 ‘扶宗樹敎龍巖直傳錦雨堂弼基大禪師眞影’이며 신축(辛丑, 1901)년 3월 호서귀(湖西歸) 문제(門弟) 성우(惺牛) 근찬(謹讚)이라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음.
〈인봉화상영찬(茵峯和尙影贊)〉 작성. 해인사에 소장된 진영에 의하면 이 진영의 제재(題材)는 ‘傳佛心印扶宗樹敎茵峯堂大禪師之眞’이며 문질(門姪) 성우(惺牛) 분향근찬(焚香謹讚)이라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음.
〈대연화상영찬(大淵和尙影贊)〉 작성. 해인사에 소장된 진영에 의하면 이 진영의 제재(題材)는 ‘扶宗樹敎華嚴講主大淵堂正添大禪師眞影’이라는기록이 첨부되어 있음.
〈용은당대화상진영(龍隱堂大和尙眞影)〉 작성.
1902년 57세, 大韓 光武 6년 壬寅
가을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나한개분불사의 증명. 나한이 현몽하는 이적(異蹟)을 보임.
10월결제날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 작성.
1903년 58세, 大韓 光武 7년 癸卯
늦은 봄, 〈범어사계명암창설선사기(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 〈범어사금강암칠성각창건기(梵魚寺金剛庵七星閣創建記)〉 작성.
《선문촬요(禪門撮要)》의 원형이 되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편찬하고 〈정법안장서(正法眼藏序)〉를 작성.
〈서룡화상행장(瑞龍和尙行狀)〉 완성.
그해 가을 범어사를 떠나 해인사에 들러 천장암으로 돌아옴. 이때의 심경을 읊은 시 한 수가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에서 부른 노래(自梵魚寺向海印寺途中口號)〉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음.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서 세상의 액난을 만나니
어느 곳에 몸을 숨길지 알 수 없구나
어촌과 술집엔들 숨을 곳이 없으랴마는
다만 헛된 이름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두렵도다
1904년 59세, 光武 8년 甲辰
7월 15일 천장암에 들러 제자 월면을 인가하고 전법게를 수여함. 수덕사의 만공문도회가 펴낸 《만공어록》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갑진년(甲辰年, 1904) 7월 15일 경허화상이 함경도(咸鏡道)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사를 들르게 되었다. 스님은 경허화상을 뵙고 몇 해 동안 공부를 짓고 보림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경허화상은 기꺼이 허락하며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여기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한 조각 방편기틀이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이어 만공이라고 사호(賜號)하고 다시 이르되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자네에게 이어 가도록 부촉(付囑)하노니 불망신지(不忘信之)하라고 주장자를 떨치며 길을 떠났다.
1905년 60세, 光武 9년 乙巳
11월 을사늑약 체결.
가을 광릉 봉선사에 나타나 월초거연(月初巨淵)을 만남.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며 3개월간《화엄경》 강의. 이후 금강산을 관람하고 〈금강산유산가(金剛山遊山歌)〉를 작성.
1906년 61세, 光武 10년 丙午
봄 안변 석왕사(釋王寺) 나한개분불사의 증명. 시 〈석왕사영월루에 부쳐(題釋王寺映月樓)〉를 씀.
이후 장발유복(長髮儒服)으로 함경도, 평안도로 잠적. 주로 평안북도 강계(江界)·위원(渭原)·함경남도 삼수(三水)·갑산(甲山)·희천(熙川) 등지로 자취를 감춘 뒤, 스스로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라고 지었으며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갓을 쓰고 변신한 뒤, 서당의 훈장을 하며 김탁(金鐸)·김수장(金水長) 등의 친지들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시를 지으며 소일하며 세간의 풍진(風塵) 속에 자신을 묻어버림.
1910년 65세, 隆熙 4년 庚戌
8월 29일 국권피탈.
1912년 67세, 壬子
4월 25일 함경남도 갑산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
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
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
이는 다시 무엇인가
1913년 癸丑
7월 25일. 경허의 입적 소식을 전해 들은 만공과 혜월은 갑산 난덕산으로 가서 시신을 운구하여 다비에 붙임.
1942년 壬午
6월 오성월·송만공·장석상(張石霜)·강도봉(康道峰)·김경산(金擎山)·설석우(薛石友)·김구하(金九河)·방한암·김경봉(金鏡峰)·이효봉(李曉峰) 등 당시 한국선문을 대표하는 41인의 선사들이 《경허집》을 발간하기로 결정. 각 선원은 5원, 개인은 50전 이상의 연조금(捐助金)을 모아 그해 9월 출간. 경허선사의 입적 30년 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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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경허의 신화와 진실

01. 고해 속의 물고기, 소년 동욱
02. 이름을 떨치는 강백이 되다
03. 죽음의 처마 아래에 서서
04.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05. 나귀의 일과 말의 일
06. 간화선의 시작
07. 굶주리며 헤매다
08. 콧구멍 없는 소가 되다
09. 깨달음의 경계마저 허물다
10. 첫 번째 설법
11. 주장자를 꺾어 내던지다
12. 천생의 스승, 경허
13. 주정뱅이 선승
14. 그까짓 금덩이는 아무 데나 걸어 두어라
15. 대중은 아는가?
16. 주장자로 때리면 과자 살 돈을 주마
17. 누더기 한 벌, 지팡이 하나
18. 머리를 기르고 훈장이 되다
19. 발자국의 메아리
20. 삶도, 죽음도, 사랑도, 미움도 없다

부록_ 경허선사 연보
참고문헌
경허 문파도

 

 

책속으로

경허는 천안(天安)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폭풍우를 만났다. 경허는 민가의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려 했으나 집주인은 경허에게 한사코 거부의 손짓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리 가시오.”
쫓겨난 경허는 그 동네의 여러 집을 찾아갔지만 모두 내쫓아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퍼붓는 폭풍우를 피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야박한 심성을 이상하게 여긴 경허가 쫓아내는 이유를 묻자 분노와 공포에 질린 한 마을 사람이 경허를 질타하듯 말했다.
“이보시오.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이 마을은 전염병이 치열하여 걸리기만 하면 서 있던 사람도 죽으니 어찌 손님을 들일 정신이 있겠소?”
경허는 낙숫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에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주검들이 거적에 덮여 있는 것을 보고 목이 조여들고 숨이 막혀왔다.

화상께서 이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죽음이 임박하여 목숨이 한 호흡 사이에 끊어질 것 같았으니, 일체 세간이 모두 꿈 속에서 바라보던 경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和尙忽聞其言 毛骨悚然 心神恍惚 恰似箇大限當頭 命在呼吸間 一切世間 都是夢外靑山
- 44-45쪽

허공의 별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유정과 무정을 다 집어삼키고
다시 집어삼킬 물건이 없어서
사방으로 굶주리며 헤매니
이 무슨 도리인가?
虛空星眠了 喫呑了有情無情
更無可喫物 飢走四處 此理如何

예절과는 전혀 상관 없는 굶주림이며 허기이다. 그러나 경허의 허기는 밥이나 국그릇을 쉴새없이 비움으로써 채울 수 있는 단순한 허기나 그리움이 아니었다. 그의 허기는 진실한 삶에 대한 허기였으며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홀로 나서서 선악과 애증, 깨달음과 미망이 뒤섞인 혼돈의 양극에서 투쟁하며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래서 허위에 대한 경허의 거부는 야성의 맹수만큼이나 단호하며, 경허는 그 단호함의 무게에 비례하는 깊은 고독과 우수(憂愁)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구한말의 경허는 이미 현대인의 불안을 넘어서고 있었다.
- 95-96쪽

폭풍우 속에서 보낸 아승지겁의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왔다. 경허는 이제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없는 콧구멍 없는 소가 된 것이다. 콧구멍 없는 소는 콧구멍을 꾄 고삐가 없으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는 소이다. 바로 자유와 해탈을 상징한다. 그래서 경허는 자신의 새로운 법명을 성우(惺牛), 즉 깨달은 소라고 이름지었다.

이처사의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라는 말을 전해 들은 화상의 안목은 정히 움직여(眼目定動), 옛 부처 나기 전의 소식이 몰록 드러나 활연히 현전하였다. 평평한 대지가 꺼지고 물(物)과 아(我)를 함께 잊으며 바로 옛사람의 크게 쉰 곳에 이르니 백천법문과 무량한 묘의(妙義)가 당장 얼음 녹듯이 풀렸다.
傳李處士之言到牛無鼻孔處 和尙眼目定動 撞發古佛未生前消息 豁爾現前 大地平沈 物我俱忘 直到古人大休歇之地 百千法門無量妙義 當下氷消瓦解
- 105-106쪽

경허는 마정령에서 땔감을 준비하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노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얘들아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아이들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모릅니다.”
“그러면 나를 보느냐?”
“예. 봅니다.”
“나를 모르면서 어떻게 본다고 하느냐?”
경허는 아이들에게 주장자를 내밀며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이 주장자로 나를 치면 과자 살 돈을 주겠다.”
아이들은 의아스런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로요?”
“그렇고말고. 어서 나를 쳐라.”
그러나 아이들은 감히 육척 장신의 큰스님에게 주장자를 휘두를 수 없었다. 경허의 채근을 받은 아이들 가운데 담이 있는 초동이 나서서 경허를 쳤다. 주장자를 맞은 경허는 말했다.
“어서 나를 쳐라. 왜 치지 않느냐? 만일 나를 친다면 부처도 치고 조사도 치고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와 천하의 노화상을 한 방망이로 치게 되리라.”
초동이 말했다.
“내가 쳤는데 치지 않았다고 하시니 스님이 우리를 속이고 과자값을 주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거지요?”
경허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면서 독백했다.
“온 세상이 혼탁함이여. 나만 홀로 깨어 있구나. 숲 속에 숨어서 남은 세월을 보내리라(擧世渾然我獨醒 不如林下度殘年).”
철부지 초동들의 손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는 경허의 고독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 259-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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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스님: 1957년에 태어나, 1974년에 출가하여 1980년 해인사 강원(제21회)을 졸업하고 1982년 해인율원을 수료한 뒤 계속 경학과 선학에 정진해 왔으며 그간 문경 봉암사, 망월사, 오대산 상원사 등지의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했다. 1988년 논문《現代中共의 佛敎認識》으로 제1회 해인학술상(1988)을 수상했으며, 사단법인 법사원 불교대학 교수, 도서출판 민족사 주간으로 일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유의 박람강기와 직관적인 문체로 불교적 삶과 현대사회에 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 온 그는 불교인문주의라는 독특한 영역을 심화시켜 많은 불교 관련 저서를 쓰고 경전과 선어록들을 번역했다. 1997년부터는 불교경학연구소를 설립,《유마경》,《법화경》,《화엄경》 등을 강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다 2002년 46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했다.

 

저서로는 《달마에서 임제까지》(불일출판사, 1991), 《붓다·해석·실천》(불일출판사, 1991),《중관불교와 유식불교》(세계사, 1992), 《떠도는 돈황―불교문학과 선으로 본 오늘의 불교인문주의》(해인사출판부, 1993), 《禪學辭典(共編)》(불지사, 1995),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문학동네, 1994), 《멀어져도 큰산으로 남는 스님》(우리출판사, 1996), 《禪이야기》(1996, 운주사), 《佛名辭典》(우리출판사, 1997), 《선불교강좌 백문백답》(上下, 대원정사, 1997), 《불교교리(共著)》(조계종출판사, 1998), 《똑똑똑 불교를 두드려보자(共著)》(시공사, 1998) 등이 있고, 역서로는 《임제록》(고려원, 1988), 《까르마의 열쇠》(불일출판사, 1990), 《禪을 찾는 늑대》(고려원, 1991), 《중국문학과 禪》(민족사, 1992), 《傳心法要》(세계사, 1993), 《범망경·지장경》(민족사, 1994), 《관음경·부모은중경》(민족사, 1994), 《통윤의 유마경 풀이》(서광사,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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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토정비결 | 작성시간 12.08.24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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