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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鏡虛禪師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3.03.30|조회수81 목록 댓글 0

鏡虛禪師







무이당(無二堂)

경허스님께서 장곡사 보광암 비구니스님에게 '無二堂'을 써 주며 하신 말씀입니다.

혹 차별의 헤아림이 다하지 못하였거나, 차별의 헤아림이 다하였어도, 이것이 둘없음이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四五百條花柳巷 사오백 군데 꽃 만발한 언덕이요
二三千處管弦樓 이삼천 곳 풍악 흐르는 누각이로다.

또 일러봐라. 이것이 둘 없는 소식인가.
안다면 어리석고도 완악하며, 몰라야 문득 서로 허락하리라.
비록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다시 모름지기 삼생(三生) 육십겁(六十劫)을 참구해야 하리라. <경허>




경허선사 성우(鏡虛禪師 惺牛) (1849∼1912)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 는 경허(鏡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 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의 밑에서 물긷 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그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 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 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 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 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 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 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 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 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 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 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 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 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 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 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 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 (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 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 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 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 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 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큰스님> (법보신문사. 1992).


적어도 조선말기에 선풍(禪風)을 일으킨 고승으로 경허(鏡虛) 선사를 꼽지 않을 사람은 몇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신 스님이시기에 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다고 하겠는데, 주로 일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까 내용이 과연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이고 어디까지가 조작에 해당하는지는 아무도 확인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미리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이러한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생각 해보시는 것이 좋겠다.


1. 살아가신 과정 (行狀)


경허집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행상이 보이는데, 대략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다.


속성은 광산김씨이고 이름은 상민(詳玟)이며 호는 서룡(瑞龍)이다. 증조부는 춘택공이고 사계(沙溪) 선생의 팔대 손이다. 인종(仁宗) 가경(嘉慶) 19년 갑술년에 서울에서 탄생했다. 어려서부터 청수하고 총명하였으며 17세에 종로에서 놀다가 벼슬아치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서는 문득 세상의 명리(名利)란 모두 화근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안성 청룡사에 들어가 영월(影月) 장로에게 귀의하여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19세에 지리산에 들어가니 그때 용악(용岳)장로가 안국사에서 강의를 크게 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그 수하에서 경을 배우고 학업이 진취되자 용암(龍巖)화상을 찾아가 지견이 맑아졌다.

27세에 기양 성전(騎羊聖典)장로에게 입실하니 그때부터 도가 높아졌다. 그의 부탁으로 벽송암에 주석하여 퇴락한 암자를 중수하고 중흥시켰다. 또한 자기의 일(깨달음)을 밝히지 못함을 염려하여 칠불암에 올라가서 몇 해 동안 면벽참선을 하였다.

광서(光緖) 16년 경인년 12월 27일 작은 병을 얻어 29일에 열반에 들고자 하니 대중이 해해를 맞이해서 불공을 해야 하는데 지금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자, "내가 중이 된지 60년에 몸을 버리면서 어찌 삼보전에 방해롭게 하겠는가 걱정을 말거라 내가 내년 1월 2일로 연기를 하련다." 하니까 대중이 또 대중은 또 그때는 칠성계를 하는 날과 겹친다고 염려를 하자 다시 4일을 더 연기하여 巳時-오전 10시경- 가 되자 대중에게 묻기를 "오늘 가면 아무런 장애가 없겠는가?" 하니 대중이 "그렇습니다." 하자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는 대중에게 경을 외우고 염불을 하게 하고는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이때의 세상 나이로는 78세요, 법랍, 즉 출가한 나이로는 60년이니 그의 열반은 온 총림이 슬퍼하는 일이 되었다.


이상이 요약으로 정리를 한 경허스님의 일대기였는데, 약간의 참고가 되셨기 바란다.


2. 일화 들


경허 스님과 연결해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은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하는데, 그리 오래지 않은 년대를 살아가신 스님이어서기도 할 것이지만 그의 행적이 동서남북으로 막힘이 없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1) 주모와의 수작(酬酌)


제자를 데리고 만행을 다니는 도중에 목이 마른 대사는 주막에 들러서 식사를 하고 내친 김에 탁배기도 한 사발 벌컥벌컥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져서는 수다를 떠는 주모와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젖도 슬슬 만져보고 하셨던 모양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는 도무지 스승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배배 꼬여서 심술이 가득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하늘같은 스승님께 달려들어서 뭐라고는 못하고 심사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놀다가는 대사가 제자를 보고 그만 가자고 독촉을 하여 자리를 털고 일이나서 휘적거리면서 길을 계속 가는 중이었다. 제자가 침묵으로 따랑오는데 스승이 보니 영 기분이 그게 아니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넌 어째 상판이 영 일그러져 있냐? 뭔 속상한 일이라도 있냐?"

"그야 스님 때문이지 왜 그렇겠습니까?"

"아니 내가 왜? 너보고 마음이 나쁘라고 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까 주막에서 그게 뭡니까. 체통좀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체통이라니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냐?"

"주모의 가슴도 주무르고 음담패설도 하고 그러셨잖아요. 그게 다 음계와 구업을 지으시는 것이라는 정도는 충분히 아실 스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결국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지금 스님의 곁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엉? .... 아하, 네 놈이 내가 혼자 노니까 열이 좀 받혔던 모양이구나. 허허허~"

"그게 아니지요.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시는군요. 비겁합니다. 그러시면...."

"아, 이놈아 음계는 네가 범하고 있구나."

"무슨 억지 말씀입니까요?"

"야 이놈아, 난 그 주막을 떠나면서 여인은 이미 잊어버렸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더냐. 바보 같은 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놈아 세상 삼라만상은 그 마음에 흔적이 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너는 어째서 이미 흔적도 없는 허상에 대해서 집착을 하느냔 말이다. 내가 그 여인과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에서 한 일이고 지금 이렇게 길을 가는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인데 너는 늘상 흔들리는 마음으로 여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느니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느니 하는 분별을 하고 있으니 결국 그 분별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


이 대화의 내용에서 생각을 해보면 집착이 없으셨던 모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제자는 만공선사였을 가능성이 많겠는데, 원래가 만공은 경허스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제자 만공스님도 또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겠는데, 우선은 경허스님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보도록 하는 것이 이 항목에서 해야 할 일이겠다.

그의 행동은 부처님의 계율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살아가는 행동을 보였는데, 이로 인해서 후에 경허가 불법의 행을 망쳤다고 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으니 여하튼 행동을 보고 내리는 결정이라고 하다면 그런 말을 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후세에 사람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그의 마음은 늘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처럼 그렇게 살아갔던 것으로 미뤄서 짐작만 해본다.


(2) 단청 불사


"만공아 단청불사를 해야 하겠다. 시주 받으러 가자."

"예, 스님."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시주를 받으러 가서 마을 집을 방문하면서 얼마간의 시주금을 받게 되었는데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날은 덥고 목은 말랐던 것은 미뤄서 능히 짐작이 되거니와, 길가의 주막거리에서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는 무슨 향기보다도 멋지게 풍겼을 것이다. 그래서 목이나 축이고 가자고 제자를 앞장세워서는 주막으로 간 다음에는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기분이 한참 좋았다. 그런데 제자 만공스님은 도무지 속이 꼬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뒤를 따라 가면서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님,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가 말이냐?"

"스님은 시주 돈을 받아서 술을 드셨으니 지옥에 떨어지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무슨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이냐?"

"그러고 말고요. 단청하라고 시주를 한 것은 법당에 칠을 하라고 준 것이지 스님이 술드시라고 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습니까?"

"녀석 참 뭘 모르네. 내 얼굴을 봐라 이놈아."

"술취한 모습이 참 가관입니다요."

"어허 녀석 단청불사를 볼 줄 모르네. 불그레족족~ 한 것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이놈아."

"그럼 스님 술드시려고 시주를 받았단 말입니까?"

"그랬다 이놈아. 목은 마르고 컬컬해서 한잔 생각이 났지 그런데 부처님이 영험하니까 이렇게 목도 축이고 기분좋게 길을 갈 수가 있지 않느냐. 그 부처님 참 영험하시기도 하지. 허허허~"

"그렇게 말씀하시면 남들은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말합니다요."

"그렇겠냐?"

"그렇고 말고요."

"그렇다면 내가 왜 궤변을 늘어 놓았는지 지적을 해봐라."

"첫째로 스님의 몸과 법당은 다르단 말입니다."

"왜 달라?"

"스님은 인간이지만 법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잖아요."

"아따 고놈 눈도 참 나쁘네."

"뭐가 말입니까?'

"이 놈아 내 속에 부처가 있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그야 말씀이고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

"고놈 참 인자 생각이 조금 트이는갑네."

다시 설명을 해주시지요. 스님."

"그래 잘 듣거라. 이 몸은 법당이요 이 마음은 부처이니라. 법당의 부처는 죽어있는 돌덩어리이고 법당은 돌덩어리를 지키는 집이라고 하느니라. 나는 내 법당에 단청을 하려고 했는데, 너는 죽은 부처의 법당에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니라."

"스님 말씀을 듣고 보면 그럴싸 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잘못되었는지 말을 해보라고 하지 않느냐."

"부처님은 술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스님은 술을 드셨으니 이것이 또 문제란 말입니다."

"문제 되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보통의 화상들은 술을 먹으면 본성이 취해서 함께 흔들리지만 내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도 어디 한번 비틀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이 놈아. 술을 먹었다. 계를 범했다. 하고 맨날 고시랑거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부처가 기특하다고 수기를 줄 것도 아니고, 니 스스로 그 속박에 매일 뿐이란 말이다. 오로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지. 너 마음 쓰는 것을 보니 큰 중은 되겠지만 큰 자유인은 되기 어려울 상 싶다. 노력 많이 하거라.


대략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낭월이가 약간 각색을 해봤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는 승복을 벗고 속인으로 돌아가서 글방 훈장을 하셨다는 말도 함께 전해지고 있는데, 오로지 경허 스님의 관심사는 자유로운 마음에 있었던가 싶고 불교인이라고 하는 큰 비중을 두지 않으셨던가 싶은 생각을 해 봤다.


일화를 보시면서 혹 경허 스님은 맨날 술만 마시고 살았던 화상인가 싶은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실로 많은 절을 복원하고 정진을 하신 흔적도 많으므로 그냥 흥미로운 일화 정도로 생각을 하시면 되겠다. 경허 스님의 말씀 중에서 잘 알려진 것으로 참선곡이라는 노랙 있는데 함께 살펴보셔도 좋겠다.




(3) 참선곡(參禪曲) - 한자는 생략함.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의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몸이 풀 끝에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삼계대사 부처님이 정령이 이르사대 마음깨쳐 성불하야

생사윤회 영단하고 불생불멸 저국토에 상랑아정 무위도를

사람마다 다할줄로 팔만장교유전하니

사람되어 못닦으면 다시공부 어려우니 나도어서 닦아보세


닦는길을 말하랴면 허다히 만건만은 대강추려적어보세

앉고서고 보고듯고 착의긱반대인접화 일처처일체시에

소소령령지각하는 이것이 어떤건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하고

천진면목 나의부처 보고듣고 앉고눕고

잠도자고 일도하고 눈한번 깜짝할새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 분명한 나의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잡듯이

주린사람 밥찾듯이 목마른이 물찾듯이

육칠십 늙은과부 외자식을 잃은후에 자식생각간절틋이

생각생각 잊지말고 깊이궁구 하여가되 일념만년 되게하야

폐침망찬 할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생긴 나의부처

천진면목 절묘하다. 아무타불이아니며 석가여래 이아닌가

젊도않고 늙도않고 크도않고 적도않고

본래생긴 지가영광 개천개지 이러하고 열반진락 가이없다.

지옥천당 본공하고 생사윤회 본래없다.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히 인가맞어 다시의심 없앤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수연방광 지내가되 빈배같이 떠돌면서

유연중생 구제하면 보불은덕 이아닌가 일체계행 지켜가면

천당인간 수복하고 대원력을 발하여서 항수불학 생각하고

동체대비 마음먹어 빈병걸인 괄세말고 오온색신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을하고 바깥으로 역순경계 몽중으로 생각하야

희노심을 내지말고 허령한 나의마음 허공가 같은줄로

진실이 생각하야 팔풍오욕 일체경계 부동한 이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세 허튼소리 우스게로 이날저날 헛보내고

늙는줄을 망각하니 무슨공부 하여볼까

죽을제 병고중에 후회한들 무엇하리 사지백절 오려내고

머리골을 쪽이난 듯 오장육부 찢는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참혹 내노릇이 이럴줄을 뉘가알꼬

저지옥과 저축생에 나의신세 참혹하다.

백천만겁차타하야 다시인신 망연하다.


참선잘한 저도인은 서서죽고 앉아죽고

앓도않고 선탈하며 오래살고 곧죽기를 재맘대로 자재하며

항하사수 신통묘용 임의쾌락 자재하니 아모조록 이세상에

눈코를 쥐여뜯고 부지런히 하여보세 오늘내일 가는 것이

죽을날이 당도하니 부주간에 가는소가 자욱자국 사지로세

이전사람 참선할제 마디그늘 아꼈거늘 나는어이 방일하며

이전사람 참선할제 잠오는것 성화하여 소곳으로 찔렀거든

나는어이 방일하며 이전사람 찬선할제 하루해가 가게되면

다리뻗고 울었거늘 나는어이 방일한고

무명업식 독한술에 혼혼불각 지내가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듣고 꾸짖어도 조심않고

심상히 지내가니 희미한 이마음을 어이하야 인도할꼬


쓸데없는 탐심진심 공연히 일으키고

슬데없는 허다분별 날마나 분요하니 우습도다 나의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지각없는 저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저죽을줄 모르도다 내 마음을 못닦으면

여간계행 소분복덕 도모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글을 자세보아

하루도 열두시며 밤으로도 조금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이노래를 깊이믿어 책상우에 펴여놓고 시시때때 경책하소


할 말을 다하려면 해묵사이 부진이라 이만적고 끝이오니

부디부디 깊이아소 다시할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이나면 그때에 말하리라


3. 마무리


이 외에도 많은 시와 글과 산문들을 모아서 경허집이라는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더욱 관심이 있으시다면 살펴보시는 것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오도송의 한 구절을 적음으로 마무리에 대신한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저리도록 쓸쓸한 가을 바람 밤 깊어도 잠은 안와 저 벌레는 어이 그리 슬피 울어 나의 베갯머리를 적시게 하나”

http://164.125.233.139/spboard/board.cgi?id=mosunja&action=simple_view&gul=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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