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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과 제자들

선사 경허화상 행장-번역수정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3.05.09|조회수87 목록 댓글 0

선사 경허화상 행장¹⁾         

금강경에 이르기를 앞으로 돌아오는 세상 후오백세에 중생이 있어서 이경을 듣고 신심

이 청정하면 곧 실상을 내리니, 마땅히 알거라,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였느니라하였고, 대혜화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 중간에 복잡한 가운데서라도 몇 사람이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얻지 못하였을 것 같으면 불법이 어찌 오늘에까지 이르렀으리오하니, 대개 용맹스런 뜻을 발하여 법의 근원에 사무친 이가 말세의 불법에도 없지 않았으므로 불조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요, 또한 그러한 사람이 너무 드물어서 혜명을 보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같은 말씀이 있는 것이니 누가 능히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자성을 철저히 깨닫고 그 제일 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광명 의지를 저 오백세 후까지 광대하게 유통하리요. 나의 선사(先師) 경허화상이 이런 분이다.

화상의 휘는 성우이니 처음 이름은 동욱이요 경허는 그 호이며 성은 송이니 여산 사람이다. 부친은 두옥이요 모친은 밀양 박씨이다. 철종 8종 정사년 사월 이십사일³에 전주 자동리에서 탄생하셨다. 분만 후 삼일까지 울지 않다가 목욕을 시키자 비로소 아기 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기다. 일찍이 부친의 상을 당하고 아홉 살때에 모친을 따라 상경하여 광주군 청계사에 들어가 계허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깍고 계를 받았다. 속가의 형이 한 분 계셨는데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하고 있었으니 이 모두 그 모친이 삼보(三寶)에 귀심(歸心)하여 염불을 정성 들여 하였으니 두 아들을 출가하게 한 것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뜻은 큰 사람 못지 않았고 비록 고달픈 환경이라도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나무하고 물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스님을 모셨다.

열네 살이 되도록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는데 어느 날 선비 한분이 와서 한 여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선비가 함께 소일꺼리로 곁에 불러 앉히고 천자문을 가르쳐 보니 배우는대로 똑바로 외우는지라 다시 통사(通史) 등의 글을 가르쳐 보니 하루에 대여섯 장씩 외우기에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비상한 재주로다. 옛 사람의 이른바 천리를 달리는 말이 백락(伯樂)⁴⁾을 만나지 못하고 피곤하게 소금짐이나 끄는구나. 뒷날에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제도하리라.하더라.

얼마되지 않아서 은사인 계허스님이 환속하게 되자, 은사가 그 재주에 더 배우지 못하게 됨을 애석하게 여겨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에게 추천하는 글을 써서 소개하여 보내니 화상은 당세의 큰 강사였다. 경허의 영걸스러운 기상을 보고 기뻐하며 붙들어 가르치니, 몇 달이 안 되어 문장을 구상하여 잘짓고 교의(敎義)를 토론하였다. 그 날 일과의 경소(經疏)를 한 번 보고는 다 외워마치고는 하루 종일 잠만 자고 그 이튿날 논문강(論問講)을 할때에는 글뜻을 해석하는 것이 마치 장작을 쪼개듯 촛불을 잡은 듯 명확하였다. 강사가 잠만 자는 것을 꾸짓고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특히 원각경 가운데 소초까지 대 여섯 장 내지 십여 장을 일과로 정하여도 여전히 졸고 여전히 외우는지라 대중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더라. 이로부터 재주와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고 영호(嶺湖)의 강원에 두루 참석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고 널리 들어서 유교와 노장학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천성이 소탈하고 활달하며 밖으로는 꾸밈이 없어서 무더운 여름에 경을 보매 대중들은 모두 옷을 입고 바로 앉아서 땀을 줄줄 흘리는데 혼자서 훌훌 벗어버리고 태연하게 형상과 거동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니, 일우강사가 보고는 문인들에게 이르기를 참으로 대승법기(大乘法器)로다. 너희들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느니라.하였다.

이십 삼세에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하니 교의를 논하매 큰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학인들이 사방에서 몰려 들었다.

하루는 전날 은사 계허스님이 권속으로 아껴 주던 정분이 생각나서 그 집에 가서 한번 찾아 뵈오려고 대중에게 이르고 출발하여 가는 중도에서 홀연히 폭풍우를 만나 급히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니 집주인이 내쫓는지라 다른 집으로 갔으나 역시 똑 같았다. 그 마을 수십 가구를 다 가보아도 다 쫓기를 매우 급히하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이 곳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걸리기만 하면 서 있던 사람도 죽는 판인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죽는 곳에 들어 왔는가!라고 했다. 화상이 그 말을 듣자 모골이 송연하고 심신이 황홀하여 마치 죽음이 당장 도달한 것과 같고 목숨이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어서 일체 세상 일이 도무지 꿈밖의 청산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조도(祖道)를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하고 발원을 마치고 평소의 읽은 바 공안(公案)을 생각해보니 이리 저리 의해(義解)로 배우던 습성이 있어서 지해(知解)로 따져지므로 참구(參究)할 분()이 없으나 오직 영운선사의 들어보인 바驢事未去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는 화두는 해석도 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듯하여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참구하다.

산에 돌아 온귀에 대중들을 흩어 보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따라 잘들 가게나. 나의 지원(志願)은 이에 있지 않다네하고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아 전심(專心)으로 참구(參究)하는데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같이 삼개월을 화두를 순일 무잡하게 들었다. 한 사미승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은 이씨라 그의 부친이 좌선을 여러 해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 곳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이처사라고 부르는데, 사미의 사부가 마침 그 집에 가서 처사와 이야기를 하는데, 처사가 말하기를 중이 필경에는 소가 된다하니 그 스님이 말하기를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된다.고 했다. 처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소위 사문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그 스님이 이르기를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하니 처사가 이르기를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그 스님이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사미가 이르기를 지금 주실(籌室)화상이 선공부를 심히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와같은 이치를 알지라, 사부께서는 가서 물으소서.그 스님이 흔연히 가서 예배를 마치고 앉아서 이 처사의 말을 전하는데 소가 콧구멍이 없다는 말에 이르러 화상의 안목이 정히 움직여 옛부처 나기전 소식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고 대지가 꺼지고 물질과 나를 함께 잊으니 곧 옛 사람의 크게 쉬고 쉬는 경지에 도달한지라, 백천 가지 법문과 헤아일 수 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어름 놋드 기와가 깨어지듯하니 때는 고종 십육 년 기묘 동짓달 보름께였다.

마음밖에 다른 법이 없으니 눈에 가득한 눈과 달빛이요, 높은 뫼 소나무 아래로 물은 흘러가니 긴긴밤 맑은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하랴. 참으로 이른 바 저개(這箇) 도리는 너의 경계가 아니요 도가 같아야 비로소 아는도다.

드디어 방장실(方丈室)에 높이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만화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하니 일이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고 대답하자 강사가 말없이 나가고 말았다. 그 이듬해인 경진년 봄에 연암산 천장암으로 옮겨 주석하니 형님인 태허선사가 모친을 모시고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게송과 노래로써 그 깨달아 증득한 곳을 발휘하니 높고 높기는 천길 낭떠러지요 드넓기는 이름과 말이 함께 끊어졌으니 실로 저 옛 조사의 가풍에 양보하지 않겠다. 게송으로 이르기를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식에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 길에

일 없는 들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노래가 있으니

 

사방을 둘러 봐도 사람이 없네

누구에게 의발을 전하랴

누구에게 의발을 전하랴

사방을 둘러 봐도 사람이 없네

 

이 네 글귀 머리 구절을 끝에 맺어놓은 뜻은 사우(師友)와 연원(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서로 인증(印證)해 줄 곳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

일찍이 대중에 들어 이르기를 무릇 조종(祖宗) 문하의 마음법을 전수하여 줌에 뽄이 있고 증거가 있어서 가히 어지럽히지 못하리라. 예전에 황벽은 백장이 마조의 할을 하던 것을 들어 말함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잇고, 흥화는 대각의 방망이 아래서 임제의 방망이 맞던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지만 임제의 법을 이었고, 우리 동국에는 벽계가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총통에게 얻고 와서 멀리 구곡에게 법을 잇고 진묵은 응화성(應化聖)으로 서산이 멸후(滅後)에 법을 이으니 그 사자(師資)가 서로 계승함의 엄밀함이 이와같은 것은 대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을 치기 때문이로다.

오호라! 성현이 오진지 오래되어 그 도가 이미 퇴폐된지라, 그러나 간혹 본색납자가 일어나 살활(殺活)의 화살을 쏴서 한 개나 반개의 성인을 얻기 때문에 은밀스럽게 정종(正宗)을 부지하니 암흑속에 등불이요 죽음속에 다시 삶과 같도다.

내가 비록 도가 충실하지 못하고 성()을 점검하지 못하였느나 일생동안 향할 바는 기어이 일착자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더니 이제 늙은지라 뒷날 나의 제자는 마땅히 나로써 용암장로에게 법을 이어서 그 도통(道統)의 연원을 정리하고 만화강사로써 나의 수업사(受業師)를 삼음이 옳도다

이제 유교(遺敎)를 좇아 법의 원류(原流)를 거슬러 올라간즉 화상은 용암, 혜언을 잇고, 금허, 별첨을 잇고, 첨은 율봉, 청고를 잇고, 고는 청봉, 거애를 잇고, 애는 호암, 체정을 잇고, 청허는 편양에게 전하고 편양은 풍담에게 전하고, 풍담은 월담에게 전하고, 월담은 환성에게 전하니, 경허화상은 청허에게 십이세손이 되고 환성에게 칠세손이 되나니라. 호서(湖西)에 이십여년을 오래 주석하니 서산의 개심사, 부석사와 홍주의 천장사가 모두 길들여 살면서 도를 연마할 만한 곳이다. 기해년 가을에 영남 가야산 해인사로 이석(移錫)하니 때는 고종 광무 삼년이라, 칙지(勅旨)가 있어서 장경을 인출(印出)하고 또한 수선사(修禪社)를 건립하여 마음 닦는 학자를 살게 하니 대중들이 모두 화상을 종주(宗主)로 추대하였다. 법좌에 올라 거량(擧揚)함에 본분을 바로 보이고 백염(白拈)의 수단을 사용하여 살활의 기틀을 떨치니 가위 금강보검이요 사자의 온전한 위엄이라, 듣는 자가 모두 견해와 집착이 사라져 말끔하기가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듯하였다.

결제 때 법좌에 올라가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번 치고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와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과 노화상들이 모두 따라 오느니라.또 법사을 한획 긋고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와 역대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과 노화상들이 모두 따라 갔느니라 대중은 도리어 알겠는가?대중이 아무 대답이 없자 주장자를 던지고 법좌에서 내려 오다.

어느 스님이 묻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얼굴을 움직이며 옛 길에 드날려 맥없는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 했으니 어떤 것이 옛 길입니까? 답하기를 옛 길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평탄한 길과 하나는 험한 길이다. 어떤 것이 험로인가? 가야산 아래로 천갈래 길이 거마가 때때로 왕래한다. 어떤 것이 평탄한 길인가? 천길 절벽 사람이 올라 갈 수 없는 곳에 오직 원숭이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렸도다.

여름 해제날 법좌에 올라 동산의 시중(示衆)을 들어서 이르기를 초가을 여름 끝에 형제들이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데 곧 모름지기 만리에 풀 한 포기도 없는 곳을 향하여 가거라 함을 들어 말하기를 나는 그렇지 않아서 초가을 여름 끝에 형제들이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데 곧 모름지기 길위에 잡초들을 일일이 밟고 가야 옳도다. 그러니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대중이 대답이 없자 조금 묵묵히 있다가 이르기를 대중이 이미 답이 없으니 내가 스스로 답을 하리라하고는 문득 법좌에서 내려 와 방장으로 돌아가니 그 바로 끊어서 들어보임이 대개 이러한 류였다.

영축산 통도사와 금정산의 범어사와 호남의 화엄사, 송광사는 모두 화상께서 유력(遊歷)하던 곳이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선원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 또한 감격스럽게도 구름 일 듯하니 이 기간처럼 부처님 광명이 다시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함이 이와같이 성함이 없었다.

임인년 가을 화상이 범어사 금강암에 주석할 때 읍내 동쪽에 있는 마하사에 나한 개분불사가 있어서 화상을 청하여 증명법사로 모시는데 밤이 저물어서 절 입구에 다다르니 길이 어두워서 걷기가 어려운데 마침 그 절 주지스님이 앉아 조는데 어떤 노스님이 말하기를 큰 스님이 오시니 급히 나가 영접하여 드려라.주지스님이 꿈을 깨자 횃불을 들고 동구아래로 내려가 보니 과연 화상이 오는지라 비로서 나한의 현몽인줄 알고 대중에게 말하니 다들 놀라며 전날 훼방하고 화상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참회하였다.

계묘년 가을 범어사로부터 해인사로 가던 도중에서 한 구절 읊으니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졌고

세상은 험한데 어느 곳에 이몸 숨길까 알 수가 없네

어촌과 술집은 어디엔들 없으랴마는

이름은 숨길수록 더 드러나는구나.

대개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라 가히 그 뜻이 당신의 자취를 감추는 데 있는 것이나 오직 명리를 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다음해인 갑진년 봄에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가 금강산으로 해서 안변군 석왕사에 도착하니 때마침 오백 나한 개분불사를 하면서 제방의 석덕(碩德)들이 법회에 와서 증명법사로 참석하였는데 화상이 증명단에 올라가 독특하고도 능란한 변재로 법을 설하니 대중들이 합장하고 희유하다고 감탄하였다. 불사를 회향한 뒤 자취를 감추니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로부터 십년이 지난뒤 수월화상으로부터 예산군 정혜선원으로 서신이 왔는데 그 내용인즉 화상께서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 갑산 강계 등지로 내왕하며 혹은 시골 서당에서 훈장도 하며 혹은 시장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임자년 봄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하여 혜월과 만공 두 사형이 곧 그 곳에 가서 난덕산으로 운구(運柩)하여 다비(茶毘)를 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곧 입멸(入滅)하신 그 이듬해인 계축년 칠월 이십오일이었다.

그 동네 노인들에게 들으니 화상이 하루는 울밑에 앉아서 학동들이 풀 뽑는 것을 구경하다가 홀연히 눕더니 일어나지 못하며 말하기를 내가 매우 피곤하구나하거늘 사람들이 부축하여 방안으로 모셨으나 먹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신음도 하지 않고 다리를 펴고 누웠다가 그 이틑날 해뜰 무렵 홀연히 일어나 앉아 붓을 잡아 게송을 썼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쓰고 끝에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붓을 던지고 나서 오른쪽으로 누워서 암연히 천화(遷化)하니 때는 임자년 사월 이십오일이라 우리들이 예를 갖추어 어느 산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려움이러늘 비록 잠시 친견을 하였으나 우리들 무리는 오래 모시고 참선을 배우지 못하고 귀적(歸寂)하시던 날도 또한 후사를 참결(參決)하지 못하였다. 고도인(古道人)의 입멸시처럼 한을 남겼다.

화상은 정사년에 나서 임자년에 입적하셨고 아홉 살에 출가하였으니, 세수는 오십육이요 법랍은 사십팔이다. 법을 받은 제자는 네 사람이니 침운 현주(枕雲玄住)는 영남 표충사에서 도법을 휘날리다가 임종 무렵에 범어사에서 설법을 하고 임종게를 쓰고 입적하였으며, 혜월 혜명(慧月慧明)과 만공 월면(滿空月面) 두 선백(禪伯)은 어릴 때부터 참배하여 모시고 깊이 화상의 종지를 얻어서 각각 한 곳의 사표가 되어 오는 이들을 제접하여 교화를 크게 떨치고 있고, 나는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일찍부터 친견하고 현지(玄旨)를 들었으나 다만 선사(先師)를 존중하는 것은 나를 위하여 설파(說破)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법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으니 이렇게 해서 넷이 된다.

대개 행장이란 사실대로 기록하며 사실이 아님은 기록하지 않는다. 화상의 오도와 교화인원은 실로 위에 말한 바와 같으나 만약 그 행리(行履)를 논할 것 같으면 장신거구에 사자 같은 위의요, 지기(志氣)가 과단성 있고 강하며 종이 울리는 듯한 음성으로 무애변을 갖추었고, 팔중(八風)을 대하여도 움직이지 않음이 산과 같아서 행할 때엔 행하고 그칠 때는 그쳐서 남에게 흔들이지 않으며 음식을 자유로이 하고 성색에 구애 받지 않아 호호탕탕하게 유희하니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초래하였다. 이는 광대한 마음으로 불이문(不二門)을 증득하여 초탈방광함이 스스로 그래서 저 이통현장자의 종도자(宗道者)류인가, 억압 당하고 불우하고 강개하여 몸을 하열(下劣)한 곳에 감추어서 낮추어 길들이며 도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은 것이 아닌가?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국의 뜻을 알기 어렵나니 크게 깨달은 경지가 아니면 어찌 능히 소절(小節)에 구애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화상의 시에

 

술이 방광하고 여자가 또한 그러해

탐진 번뇌 보낼 기약이 없네

부처니 중생이니 내 알 바 아니니

평생을 그저 취한 듯 미친 듯 보내려네

 

이 구절에 일생의 행리를 사출(寫出)한 것이다.

그러나 편안히 지냄에 밥은 겨우 기운 차릴 수 있을 정도로 먹고 하루종일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하고 말이 적으며 사람 만나기를 좋아 하지 않으며 누가 큰 도시로 나아가서 교호하기를 권하면 이르기를 나에게 서원(誓願)이 있는데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니 그 탁월하고 특출함이 대개 이러하였다.

천장암에 주석할때에 누더기 한 벌로 추울때나 더울때나 바꾸어 입지 않으니 모기가 물고 이가 옷에 득시글 득시글하여 밤낮으로 물려서 피부가 헐어도 적연히 움직이지 않음이 산악과 같으며, 하루는 뱀이 들어와서 어깨와 등에 서리고 있음을 곁에 사람이 알려 주어도 태연무심이라 조금 있으니 뱀이 스스로 나가니 도가 엉키어 뭉친 경지가 아니면 누가 이와 같겠는가.

한번 앉음에 여러 해를 지냈지만 찰라를 지나는 것과 같음이로다. 어느날 아침에 일절(一絶)을 읊었는데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봄이 오니 성터에 꽃이 만발하였네

나의 일 무어냐고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 가운데에 겁외(劫外)의 노래라네

 

드디어 주장자를 꺽어 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훌훌 털고 산을 나서서 지방을 따라 교화를 베푸는데 상투적인 데서 벗어나고 격식을 두지 않았다. 혹은 시중에서 어슬렁거리며 속인들과도 섞여지내며 혹은 한가로이 송정(松亭)에 누워 한가롭게 풍월을 읊조리니 그 초탈한 취향은 사람들이 능히 헤아릴 수 없었다.

어느때에 법문을 들어 보이는데 지극히 부드러우며 매우 세밀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오묘한 의지를 연설하니 이른바 철저하게 착하며 철저하게 악하니 닦아서 절제하는 그런 수단(修斷)의 경지가 아니였다. 문장과 필법도 모두 특출하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위인이였다.

슬프다! 출가한 사람들이 모두 화상과 같이 용맹스럽게 활보로 정진하여 큰 일을 판단하여 밝히고 등불과 등불을 상속한다면 구산 선문의 융성한 교화와 십육 국사의 법통 계승이 어찌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랴! 비단 특별히 융성한 교화와 법통계승뿐이리요, 일체 중생의 근본 광명 종자로 하여금 영원히 저 오탁계(五濁界)를 단절함도 또한 억제된 것같다. 어찌 이것이 깊은 신심으로 티끌 속까지 받드니 이름하여 부처님 은혜를 보답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래서 향을 사루고 깊이 비는 바이로다.

 

그러난 뒤에 배우는 이들이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움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를 배우면 안되니 사람들이 믿되 이해하지 못한다. 또 법을 의지하는자는 그 진의와 바르고 묘한 법을 의지한다 는 것이요,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자라고 하는 것은 그 율의(律儀)와 불율의(不律儀)를 보고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의지하는 자라는  것은 스승으로 모시고 본받는 것이요, 의지하지 않는 자는 득실시비를 보지 않는 것이,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필경에는 법도 능히 버리거늘 하물며 저 득실시비리요.

 

그래서 원각경에 이르기를 말세 중생들이 마음을 일으키어 수행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일체 바른 지견(知見)을 가진 사람을 구할지니, 마음을 형상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로(塵勞)의 모습을 나타내나 마음이 항상 청정하며 온갖 허물이 있는 듯 보이나 범행(梵行)을 찬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그릇된 율의(律儀)에 들지 않게 하여야 하나니라. 이런 사람을 구하면 곧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성취하리라.

그 선지식이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항상 청정한 행을 나타내거나 내지 갖가지 실수를 드러내더라도 교만한 생각이 없어야 되면 나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약 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며, 보조국사가 이르되 무릇 참학자(參學者)는 처음에 먼저 바른 인연을 심어야 하나니 오계(五戒)와 십선(十善)과 십이인연(十二因緣)과 육도(六度) 등 법은 모두가 바른 인연이 아니니 자기의 마음이 이 부처인줄 믿어서 일념무생(一念無生)에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공()하나니 이렇게 믿는 것이 바른 인연이니라하였다. 그런즉 계(), (), (), () 등 법도 오히려 바른 인연이 아니거늘 하물며 그른 율의리요. 그래서 다만 정지견인(正知見人)을 구하여 자기의 청정한 도의 눈을 택할지언정 망령되이 삿된 신심을 구하여 큰 일을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다만 눈이 바름을 귀하게 여기고 행리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나의 법문은 선정과 해탈, 지범과 수증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 지견의 통달을 말한다하였으니 이는 먼저 정안이 열리고 난 뒤에 행리를 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움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를 배움은 옳지 못하다 하노라. 이는 다만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행리의 걸림없는 것만 본 받는 자를 꾸짖음이며, 또한 유위상견(有爲相見)에 집착하여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치지 못하는 자를 꾸짖음이로다. 만약 법을 간택할 수 있는 바른 눈을 갖추어서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친 즉 행리가 자연히 참되어서 행주좌와에 항상 청정하리니 어찌 겉 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사랑하며 네다 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겠는가.

경오년 겨울에 만공사형이 금강산 유점사선원 조실로 있으면서 글을 오대산중으로 보내어 선사의 행장을 나에게 쓰라고 부탁하는데 나는 본래 문사에 익숙하지 못하나 선사행장에 감히 말할 수가 없는 고로 그 사실을 적어서 뒷 사람들에게 보이나니, 하나는 말법가운데 진선지식의 출세와 법을 널리 편 생각하기 힘든 공덕을 찬탄하고, 하나는 우리 무리가 망령되이 집착하여 밖으로 치달으며 헛되이 시일을 보내서 부처님 교화를 손상하는 허물을 경책함이라. 또한 선사의 읊은 시와 기문(記文) 약간 편으로써 동행 모든 선화(禪和)에게 부쳐 초해서 인쇄하여 세상에 펴노라.

 

불기 2958년(1931년) 신미 315

 

문인 한암 중원은 근찬하노라

1) 행장 : 한암노사의 친필본 경허집가운데 있는 행장을 옮겼음.

2)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는 말은 정신집중하여 정력(定力)의 힘을 얻는다는 말.

3) 철종 8년 정사년 사월 이십사일 : 선학원판 경허집(1942년 간행)과 인물연구소에서 간행한 경허법어(1981년 간행)에는 경허화상의 탄생을 1849년 기유 824일로 되어 있는데 불교95(19325월 간행)와 한암노사의 친필본 경허집(1931315)에는 철종 8년 정사년 424일에 경허화상이 탄생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4) 백락(伯樂) : 말을 주관하는 별이름. 말을 잘 주관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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