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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11월27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6.11.30|조회수99 목록 댓글 0

  2016.11.27.. 고북의 더러븐 성깔을 보여주는, 안개로 위장한 미세먼지와 부스시시 빗방울




 

 

 

  1127,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절에서 내려와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일단 서산 시내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일요법회 도반님들이 모이는 장소는 부춘산 근방의 서광사 입구 어디라고 했습니다. 서울보살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서산 서광사 입구를 치고 출발을 했습니다. 11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라 날씨가 벌써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보통 절에서는 오후5시에 저녁공양을 하면 오후6시에 저녁예불을 올립니다. 그렇지만 천장암에서는 오후7시에 저녁예불을 올립니다. 아침예불은 말이 아침이지 정확하게 따져보면 새벽예불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새벽4시나 5시면 아침예불을 올리기 때문입니다. 하루 세 번 맞는 아침, 오전, 저녁 불공佛供이지만 이름이 각각 다르고 시간대가 다르니 마음가짐이나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아침불공은 아침예불, 오전불공은 사시마지, 저녁불공은 저녁예불인데, 예불禮佛이란 부처님께 참배參拜를 올린다는 말이고 사시마지巳時摩旨란 사시巳時에 마지摩旨밥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님 당시에는 이른 아침에 대중이 마을에 나가 신도님들이 올린 공양물을 발우에 걸식을 해오면 모든 대중이 한 자리에 모여 사시巳時경에 하루 한 번 공양을 올렸다는 전통에서 나온 의식입니다. 아침예불과 사시마지는 아침공양과 점심공양 전에 불공을 올리고, 저녁예불은 저녁공양을 한 뒤 불공을 올립니다. 아무래도 맑은 정신으로 새벽 일찍 일어나서 공양 전에 하는 아침예불이 몸과 마음이 가볍고 또 새벽이라 공기나 기운도 청정淸淨합니다. 그래서 아침예불과 아침기도를 좋아하는 신도님들이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새벽 공기의 질이 맑고 균일해서 그런지 종송鍾頌이나 목탁소리가 참으로 명징明澄하게 사방으로 울려 퍼집니다. 거기에 스님의 청이 좋으시면 새벽 법당에서 듣는 염불소리는 칠흑너머로 솟아오르는 선홍鮮紅빛 햇살처럼 금상첨화錦上添花입니다. 몸과 마음의 정성을 곧게 세운 하루 세 번의 불공은 신도님들의 영혼을 정화하고 신심을 굳게 단련해주는 뛰어난 정진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산훈련소에만 군법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정 대기소에도 군법당은 있었습니다. 물론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기는 해도 장정 대기소에서도 일요일 오전에는 군법당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요일 오전에 아침식사를 하고 어설프게 어정대다가 사역병으로 차출差出당하는 것보다 열 배쯤은 나을 것 같아서 친하게 지내던 장정 몇 사람과 군법당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군법당에 가보았더니 낡아빠진 구막사에 군법당이 차려져있기는 한데 군법사님도 없고, 군종병도 없고, 불단佛壇위에 부처님과 목탁 하나만 딱 있었습니다. 물론 우유도 빵도 과자도 먹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사역을 피해 교회보다는 군법당을 선택해서 온 아름다운 장정들이 몇십 명은 더 되었습니다. 교회처럼 장정들에게 빵이나 우유를 나누어줄 형편은 안 되었지만 그래도 법회는 열어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행이었습니다. 내가 군에 입대를 한 날짜가 225일이었습니다. 마치 그 시기가 겨울방학 중이라 시골에 있는 절에서 지내다가 군 입대 날짜를 한 달여 앞두고는 주지스님께서 권해주신대로 삼칠일간 사분정근四分精勤으로 기도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염불도 많이 익히고 예불 집전의 순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신 있게 목탁을 집어 들고 다게례와 칠정례부터 시작을 해서 천수경, 관음정근, 축원, 반야심경까지 주루룩~ 드넓은 대청에 하얀 옥양목을 펼쳐놓은 것처럼 맵시 있고 엣지나게 법회를 진행했습니다. 대기소에서 오래 묵은 장정들이 몇 주 전 군종병이 법회를 진행했을 때보다 훨씬 실전을 방불케 했다면서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때 내 옆에 앉아 나를 이모저모 도와주었던 장정의 이름은 잊었지만 얼굴은 지금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기소 장정들 나이가 보통 22세 전후였는데 비해 그 장정은 우리보다 한 대여섯 살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이 차이는 좀 났으나 이런저런 대화나 말이 서로 통하고 마음 씀씀이가 형 같은 대목이 있어서 장성 대기소 보름동안 꼭 붙어 다니면서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 장정이 나에게는 공부를 하다 보니 군 입대가 늦어졌다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서울법대 대학원을 다니다가 군에 입대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입대를 할 때 고향에서부터 함께 출발했던 고등학교 동기들도 두세 명 가량 있었고, 장정 대기소에서 만난 고등학교 선배들도 동기들 소개로 두어 분 알게 되었습니다. 군번을 받은 날에도 그 장정과 줄을 앞뒤로 서 있다가 그 장정이 **** 5958, 그리고 내가 **** 5959를 받아서 군번이 한 끗 차이가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무반에서 사역병 차출을 놓고 노래경연대회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다른 소대 대표로 나와 노래를 잘 불렀던 나이 든 장정이 고등학교 선배라고 다른 선배에게 또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 잘 부른 선배와 종종 어울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선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 요새 네가 날마다 어울려 다니는 그 나이든 사람 있잖니. 우연히 어제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좀 하게 되었는데, 자신은 서울법대 대학원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노라고 하면서 교수이름이랑 재학생 이름을 몇 사람 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구나. 그런데 너만 알고 있어라. 그 사람 서울법대 대학원생도 아니고 서울법대 출신도 아니니 피해보는 일 없도록 해라. 그 사람이 말하는 기수가 바로 내 기수이잖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라만 그래도 세상이 하도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려준다.” 실은 그 선배가 서울법대 대학원 재학 중에 군입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보다 군번이 일번 빠른 그 나이든 장정이 서울법대든 소울법대든 나랑은 별로 관계가 없었습니다. 장정 대기소의 보름 동안 심심하지 않고 서로 의지가 되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평소 남의 말 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과묵한 선배도 심정의 불편함을 무릅쓰면서까지 나에게 귀엣말을 해준 마음씀씀이도 대단히 고마웠습니다. 그러고 난 뒤 장정 대기소를 떠나 거의 비슷한 시기에 논산 훈련소로 들어간 뒤로는 나이든 장정이든, 고등학교 동기든, 고등학교 선배든, 어느 누구도 만나보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몇 년이 흐르고 흘러서 군 제대 후 고등학교 동기들은 만나보았습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만 409개월 전의 이야기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장정 대기소에서 논산 훈련소까지 대오를 정렬해서 걸어가면 한 사오십 분 가량 걸렸던 듯합니다. 그런데 줄 맞추어 논산 훈련소에 들어서자마자 고등학교 동기인 영식이를 만났습니다. 영식이는 모자와 견장에 번쩍거리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엉겁결에 영식아! 하고 부르고는 대오隊伍에서 빠져나와 악수를 하고 반갑다고 서로 등을 투닥이고는 돌아서서 다시 대오로 들어가 두 팔을 높이 흔들면서 배정된 23연대 연병장으로 행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연병장에 도착하자마자 대오이탈자隊伍離脫者로 불려나가 드넓은 연병장을 구보로 몇 바퀴 돌아야 했습니다. 구보가 끝난 뒤에는 먼지 풀풀 날리던 연병장에 원산폭격으로 머리통을 꼴아 박은 채 진동하는 흙냄새 맡으면서 판개 장정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맴 울려 퍼졌습니다. “, 씨발 친구들은... 나만 씨발 쓰레기장에서 좃뺑이 치고 있단 말이여.” 거칠고 호기롭고 씀박하고, 하지만 여리고 푸르른 잎처럼 풋풋하고 팽팽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이상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앵커맨 밸라거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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