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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12월04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6.12.09|조회수135 목록 댓글 1

  2016.12.04.. 비 온다던 밤 서산 시내에, 있으라고 이슬비가 솔솔 내렸다




 

 

 

  1204,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의지하고, 정진하며 신행생활을 하고 있는 불교는 구복불교求福佛敎일까, 기복불교祈福佛敎일까, 아니라면 깨달음의 불교일까? 그것을 쉽고 간단하게 판단할 수 없으니 우리들이 종교적 삶의 스승으로 삼고 있으며 궁극적 귀의처로 존숭尊崇하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수행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붓다짜리따 5장을 보면 자신의 일을 성취하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싯닫타 왕자의 출가결심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 목숨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질병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늙음이 나의 젊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불행이 나의 행복을 앗아가지 않는다면 나는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런 당치도 않은 생각일랑 버려라. 너의 소망은 말도 되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이다.”이렇게 말하며 부왕은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네 가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타는 집을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서로 이별한다는 것은 분명한 법칙이오니 가르침을 위하여 떠나는 것이 다른 헤어짐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니 나의 목표를 이루지 않고는 저에게 만족은 없습니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걱정·번뇌가 없고, 지저분함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을 얻기 위해서였다. <중아함경中阿含經 卷56, 나마경羅摩經>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 14, 346>






 

  이와 같이 싯닫타 왕자는 노병사老病死세 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출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네 가지 괴로움인 생노병사生老病死 중에서 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은 출가 당시에는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싯닫타 왕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옷을 바꾸어 입어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 , 사문沙門 고타마가 되어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가 처음 찾아간 수행자는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박가와였습니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범천梵天과 일월日月과 수화水火를 섬기고 있는 배화주의자拜火主義者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당시 가장 명망이 높은 대표적인 수행자 두 사람을 차례로 찾아가 수행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알라라 깔라마이며 또 한 사람은 웃다까 라마뿟따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선정법禪定法에 의하여 수행하는 수정주의자修定主義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스승인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던 사문 고타마는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사문 고따마는 웃다까 라마뿟따 선인을 떠나 네란자라 강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행을 하고 있는 다섯 수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해탈을 추구하고 있던 그들과 함께 단식에 의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이 몸은 단식과 고행으로 극도로 야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육신은 야위었으나 정신의 힘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의 육신은 비록 뼈와 가죽만 남았으나 그의 거룩한 빛남은 마치 줄어들지 않는 바다 속의 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고행에 대한 회의심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예전에 나는 쟘부나무 아래서 확고한 진리를 보지 않았는가? 극도의 고행과 단식은 해탈에 이르게 하는 바른길이 아니다. 쇠약한 육신으로 해탈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균형을 잃어버린 마음,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지쳐버린 육신, 맑고 선명하지 않은 정신, 이렇게 육신과 마음이 조화롭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해탈을 얻겠는가? 완전한 행복은 다섯 감각기관이 항상 편안할 때 얻어진다. 깊은 삼매는 잘 균형 잡힌 평온한 마음에서 얻어진다. 깊은 삼매로부터 최상의 평화를 얻는다.’ 그는 무고안온無苦安穩의 열반涅槃을 얻고자하는 것이 출가목적이었으므로 고행으로는 도저히 출가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고행을 버릴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문 고따마는 음식을 먹기로 결정하고 네란자라 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여 몸과 마음을 맑게 하였습니다. 그때 소를 치는 이의 딸인 난다바라는 환희심에 가득 차 사문 고따마에게 우유죽을 공양하였습니다. 사문 고따마는 음식을 먹고 육신의 힘을 얻어 몸과 마음이 평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문 고따마는 그와 같이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버렸습니다. 고행주의를 떠남으로써 그는 그 당시에 있었던 종래의 수행방법을 모두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종래의 수행방법이란 선정주의禪定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들 수 있습니다. 선정주의禪定主義 수행자들은 정신의 자유를 얻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육체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정신적 세계에 들어가야 하므로 그들은 선정禪定의 방법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선정禪定에 들어있을 때에는 정신이 통일되어 심신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의 희열상태에 있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자유를 줄곧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정禪定에 들어가야 하니, 이렇게 되면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법으로 택한 선정禪定이 도리어 그 목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하여 정신적 작용이 전연 정지되어 적정寂靜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지도 일단 정신통일의 상태가 끝나버리면 다시 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게 됨으로 수정修定을 끓임 없이 되풀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무고안온無苦安穩의 해탈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문 고따마는 선정법禪定法에 의하여 수행을 하는 수정주의修定主義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종래의 수행방법인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버린 사문 고따마는 욕락欲樂과 고행苦行 양 극단을 버린 중도中道를 취하면서 청정한 혜안으로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관찰하였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끊임없는 윤회에 헤매니 다만 괴로울 뿐이다. 사람의 시야는 욕망의 착각과 어두움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생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의식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을 합니다. 드디어 출가 당시 노병사老病死에 대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행에서 생명 있는 존재들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의 문제에 천착穿鑿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 늙음과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태어남은 어디서 오는가? 업의 결과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존재는 어디서 오는가? 집착에서 온다.

- 그러면 집착은 어디서 오는가? 갈애에서 온다.

- 그러면 갈애는 어디서 오는가? 느낌에서 온다.

- 그러면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접촉에서 온다.

- 그러면 접촉은 어디서 오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온다.

- 그러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디서 오는가? 이름과 모양에서 온다.

- 그러면 이름과 모양은 어디서 오는가? 의식작용에서 온다.

- 그러면 의식작용은 어디서 오는가? 형성에서 온다.

- 그러면 형성은 어디서 오는가? 어리석음에서 온다.

- 어리석음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


 

 

  이어서 이런 진리를 거꾸로 관찰하였습니다.


 

 

- 어리석음에서 형성이 생긴다.

- 형성에서 의식이 생기며

- 의식에서 이름과 모양이 생기며

- 이름과 모양에서 여섯 감각기관이 생기며

- 여섯 감각기관에서 접촉이 생기며

- 접촉에서 느낌이 생기며

- 느낌에서 갈애가 생기며

- 갈애에서 집착이 생기며

- 집착에서 존재가 생기며

- 존재에서 태어남이 생기며

- 태어남에서 늙고 죽음이 생긴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것이 소멸하는가를 관찰하였습니다.


 

 

-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과 죽음이 없다.

-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이 없다.

- 집착이 없으면 존재가 없다.

-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다.

- 느낌이 없으면 갈애가 없다.

- 접촉이 없으면 느낌이 없다.

- 여섯 감각기관이 없으면 접촉이 없다.

- 이름과 모양이 없으면 여섯 감각기관이 없다.

- 의식작용이 없으면 이름과 모양이 없다.

- 형성이 없으면 의식작용이 없다.

- 어리석음이 없으면 형성이 없다.

- 어리석음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현실적인 부자유不自由와 노병사老病死의 모든 괴로움이 이렇게 어리석음(無明)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그 어리석음을 제거함으로써 해탈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노······老病死憂悲苦惱의 모든 괴로움은 생이 있기 때문에 결과된 것이며, 생은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있게 된 것인데 그 최초의 원인이 어리석음(無明)이라면, 그것을 밑뿌리부터 제거할 때 그것에 의하여 일어난 모든 결과인 현실의 고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따마 싯닫타는 깊은 사유思惟와 성찰省察에 잠겨 모든 것이 연기緣起하는 도리를 관찰하였습니다. 연기緣起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그것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因緣)에 의하여 이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즉 일체만유一切萬有는 모두가 조건에 의하여 생성生成되어진다는 것인데, 이 절대적인 진리가 연기緣起의 법칙法則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고따마 싯닫타처럼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시작하여 노병사老病死가 있게 한 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그 최초의 원인인 어리석음(無明)을 제거해내려는 수행과 정진을 깨달음의 불교라고 한다면, 단지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과 행복을 해결하려고 하는 수행과 정진을 구복불교求福佛敎 혹은 기복불교祈福佛敎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말로 본의 아니게 이야기가 어려워져버렸습니다만 구복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불교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고, 깨달음의 불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기법緣起法, 즉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복불교나 기복불교를 설명할 수 있는 더 쉽고 더 재미있는 다른 방법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과 수행에 나타난 교리적인 방법을 근거로 설명을 해보았으니 다음번에는 호감도 높은 행복한 방식으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일요법회 도반님들과 불자님, 그리고 카페회원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한 줄 한 줄 잘 읽으셔서 부디 지혜의 눈을 밝혀 무명을 제거하시고 깨달음의 불교를 닦아 이생에 부처님이 되시기를 기원해드립니다. 까빠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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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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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심 | 작성시간 16.12.09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108배를 시작한지 3년이 되어 가는데 그 동안 운동만 열심히 했나 봅니다.
    어깨 넘어 본 불법의 뼈대만 남겨 보니 외계 생물체의 형상을 하고 있네요. 어디가 머리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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