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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12월11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5.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6.12.15|조회수69 목록 댓글 0

 2016.12.11.. 천장사 집웅이 된 하늘, 파랑이 용궁龍宮처럼 쌓여있었다



 

 

 

 

  1211,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5.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일요법회에서 빠알리 경전을 읽어보면 부처님의 가르침 중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대충이나마 파악하게 됩니다. 왕국의 태자로서 화려한 생활을 하다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아 수행자의 삶을 택하신 부처님은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처음에는 선정주의禪定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숭고한 평화의 최상의 경지를 찾으면서 마가다국을 행각하고 있을 때 우루웰라 근처 세나니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곳은 훌륭한 숲이 있고, 쾌적하고 완만한 강둑이 있는 맑은 물이 흘러가는 강이 있고, 가까이에 탁발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바로 네란자라 강가의 인적이 드문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고행을 하고 있는 다섯 수행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단식에 의한 어려운 고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행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6년간의 단식과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지 못하고 회의심만 커져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행주의 수행법을 버리고 두 가지 극단을 피하여 완전한 행복은 다섯 감각기관이 항상 편안할 때 얻어진다. 깊은 삼매는 잘 균형 잡힌 평온한 마음에서 얻어진다. 깊은 삼매로부터 최상의 평화를 얻는다.’ 라고 생각을 한 뒤 음식을 먹기로 결정을 하고 네란자라 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여 몸과 마음을 맑게 하였습니다. 그때 소치는 이의 딸인 난다바라가 공양을 올린 우유죽을 먹고 육신의 힘을 얻어 몸과 마음이 평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고따마 싯닫따는 깨달음의 결심을 굳히고 푸른 나무숲이 울창한 우루웰라 숲속의 보리수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이윽고 평온한 마음과 단호한 결단력으로 고요한 선정에 들어 우주의 실상을 자세하게 관찰하고는 연기의 실상을 깨달아 붓다, 즉 깨달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뒤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 사슴동산에서 예전에 함께 고행을 했던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첫 번째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출가 수행자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여야 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감각적인 쾌락에 몰두하는 것으로 이것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하찮고, 유익함이 없으며, 두 번째는 지나친 고행에 몰두하는 것으로 이것은 고통스럽고, 저열하고, 유익함이 없는 것이다.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치우침 없이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중도中道는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이끈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여래가 깨달은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중도中道는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은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이것이 여래가 깨달은 중도中道로서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이끈다.” 그러고 난 뒤 이어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로 이르는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꼰단냐 비구는 티끌 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습니다. ‘무엇이든 생긴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이렇게 감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꼰단냐는 알아들었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





 

  또 부처님은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 사슴동산에서 두 번째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육신은 무아無我이다. 만일 육신이 영원한 자아가 있다면 몸이 병들지도 않을 것이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육신에게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몸이 무아無我인 것처럼 느낌도 무아이고, 지각도 무아이고, 형성도 무아이고, 의식도 무아이다. 만일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 등이 자아가 있다면, 이런 것들이 병들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 등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이렇게 돼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신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느낌은, 지각, 형성,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통찰력으로 보아야 한다. 육신과 마찬가지로 느낌이 어떤 것이든, 지각이, 형성이, 의식이 어떤 것이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보고 가르침을 잘 습득한 훌륭한 제자들은 몸에도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각에도, 형성에도, 의식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집착을 떠났을 때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하였다.’고 알게 된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알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부처님께서는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버리신 뒤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중도中道의 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중도中道란 곧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요한 선정에 들어 우주의 실상을 관찰하고 연기緣起의 실상을 깨달아 붓다, 깨달은 성인 되신 것입니다. 첫 번째 가르침에서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방법으로 중도中道를 알려주었고, 중도中道란 곧 팔정도八正道라는 것을 설명하시고 나서는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가르침에서는 무상無常, , 무아無我의 삼법인三法印 사상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중도인 팔정도를 통해 연기의 실상을 깨달음으로써 붓다가 되었고, 첫 번째 가르침으로는 중도와 사성제를, 두 번째 가르침으로는 삼법인 사상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결정적으로 연기의 실상을 깨달았는데 첫 번째 가르침이 사성제인 이유는 연기緣起의 도리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팔정도- 연기법- 사성제- 삼법인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불교 진리의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글을 펼치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둔한 글로 설명을 하다 보니 명쾌한 본래 의미가 더 복잡해지지는 않았는지 살짝 걱정이 됩니다. 그렇더라도 여기까지 참고 꿋꿋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읽어주신 분들께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립니다. 어쩌다 이런 글을 쓰게 된 것도 크나큰 복덕福德과 지혜智慧라고 생각을 하니 기쁜 마음 한량이 없습니다. 이상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앵커맨 밸라거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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