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 요 법 회

12월18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6.12.22|조회수121 목록 댓글 0

  2016.12.18.. 흐리고 따뜻한 날씨




 

 

 

  1218,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 통일 기에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불교가 고려시대로 들어와 어떤 모습으로 발전發展 또는 변모變貌해 가는지 살짝 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곡식이나 베를 꾸어주는 고리대금업이 고려시대에 와서는 귀족, 사원寺院, 지방 호족 등에 의해 한층 더 성행하였습니다. 고리대금업이 성행함에 따라 보가 성행하였습니다. 는 기금을 만들어 그 이식으로 사업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며 후에 고리대금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원과 관련된 보는 경보經寶(불경간행, 정종), 팔관보八關寶(팔관회 경비, 문종), 광학보廣學寶(승려의 장학재단, 정종), 금종보金鐘寶(현화사 범종 주조, 현종) 등이 있습니다. 또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송에서 귀국한 뒤 화폐주조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여 이를 숙종 때 받아들여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고 화폐를 주조하였습니다. 실제로 고려 때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진 곳은 사원寺院이었습니다.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순종, 선종, 숙종의 친동생이며 11세에 출가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에 통달한 승통僧統이자 사원경제를 대표하는 당대 실권자였습니다.






 

  고려불교의 성격은 첫 번째로 호국불교였습니다. 태조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 하였고, 또한 역대 왕들은 사찰의 창건이 국가의 발전을 도울 수 있다고 하여 흥왕사興王寺를 비롯한 많은 비보사찰裨補寺刹을 이룩하고, 연등회燃燈會와 같은 국가적 행사가 행해지고, 외적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는 대장경大藏經의 조판組版과 같은 국가적 불교 사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번째로 구복불교求福佛敎였습니다.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한다는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현세적인 행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개인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현세적인 복락을 추구하는 기복적祈福的인 것으로 이는 삼국시대 이래 현세적인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귀족불교였습니다. 태조의 숭불정책을 계승한 역대의 여러 왕과 귀족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장려하여 불교는 현세적인 왕법불교王法佛敎, 귀족불교貴族佛敎로서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숭불崇佛 정책을 표방했던 불교국가였습니다. 사원은 왕실에서 하사한 사원전寺院田과 왕실과 귀족의 희사喜捨로 인한 승려 개인에게 내주는 별사전別賜田으로 해서 토지와 노비가 증가하였습니다.





 

 

  태조太祖, 훈요십조에서 불교숭앙을 강조하여 법흥사, 왕륜사, 흥국사 등을 창건하고 연등회, 팔관회를 권장하고 나말羅末 수미산문須彌山門의 이엄선사利嚴禪師를 왕의 고문으로 삼았다.

  광종光宗, 승과제도를 마련해 승려에게 법계를 주었다. 그리하여 왕사, 국사제도가 마련되었다.

  현종顯宗, 연등회·팔관회 부활, 대장경 조판, 현화사 창건을 하였다.

  문종文宗, 대각국사 의천을 출가시켰고, 최대 사찰인 흥왕사 창건과 별사전別賜田을 지급하였다.






 

  신라 말부터 시작된 59산의 사상적 대립은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선敎禪의 사상과 교리를 절충한 중국의 천태종을 국초부터 받아들여 연구하였으며, 광종 때 고려 승의통과 체관이 오월吳越에 건너가 오히려 중국의 천태종을 부흥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가 되어 그 교세를 떨치게 하였습니다. 체관은 천태종의 기본교리를 정리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라는 명저를 남겨 천태종 발달에 주요한 공헌을 하여 오늘날까지 불교계의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 말부터 이어온 59五敎九山이 새로운 교파의 발전으로 인해 5교양종五敎兩宗의 성립을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교종敎宗 5교와 천태종天台宗, 조계종曹溪宗의 양종兩宗이 성립되었습니다. 교종 5교는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으로 계속 발전하였습니다. 고려 초기에 천태종 사상은 깊이 연구되었으나 종파로서는 성립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 건너가서 송나라의 불교계를 돌아보고 천태사상을 더 연구하여 해동의 천태종을 창설하였습니다. 고려의 천태종은 고려전기에 국청사國淸寺를 중심으로 교관겸수敎觀兼修와 수행법으로 지관止觀을 중시하며 화엄교종으로 선종을 통합하였습니다. 천태종을 개창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선종 9산은 고려후기 무신의 난 이후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조계종으로 통합되어 이로써 5교와 양종이 성립된 것입니다. 고려의 조계종은 고려후기에 송광사를 중심으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중시하며 조계선문으로 교종을 통합하였습니다. 그중 5교의 화엄종과 천태종이 교세를 가장 떨쳤습니다.





 

  불교사상의 발달로 인한 다양한 수행법과 함께 한국불교의 한 정점頂點을 찍은 고려후기의 불교는 빛과 그림자처럼 영욕榮辱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했습니다. 왕실과 귀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던 불교사원은 무신의 난 후에는 문신들의 피난처가 되는 한편, 무신 정권과는 여러 차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불교교단에서는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신의 난 이후 조계종이 교리 상 발전을 보게 되자 최 씨 무신정권은 문신세력 억압의 한 정책으로서 조계종을 후원하였습니다. 조계종은 명종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선종 9산을 개편, 종합한 것으로 정혜사(定慧寺=松廣寺)에서 천태종과는 달리 선교조화禪敎調和 정혜겸수定慧兼修를 내세웠는데, 구체적 내용인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란 인간의 마음이 곧 불심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란 이를 위해 꾸준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좌선坐禪을 주로 하되 염불念佛이나 독경讀經도 가하다는 것이다.)를 종지宗旨로 하였습니다. 조계종曹溪宗의 발달은 내적 발전을 뜻하는 것으로 교종에 대한 도전이며, 왕실과 귀족과 결탁한 세속적 불교의 부인이며, 현실 도피적 경향을 띠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밝은 빛과 어두운 그림자사이에서 고려 말의 선종 계는 많은 명승을 배출하였습니다.




 

 

  태고화상太古和尙 보우普愚, 여말의 고승으로 원에 가서 청공淸珙의 법을 수학하고 귀국한 후 우리나라 임제종臨濟宗의 종주가 되었다.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으며 특히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을 발전시켜 조선 선종의 주류를 이룩하였다.

  나옹화상懶翁和尙 혜근惠勤, 여말의 고승으로 원에 유학한 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으며 인도의 지공법사指空法師에게 법을 배워 조계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의 비와 부도가 지금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남아 있다.

  지공법사指空法師, 인도의 고승으로 원에서 불교를 연구하였고 충숙왕 때 고려에 들어와 조계종을 크게 발전시켰다. 양주 회암사에 부도가 있다.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招, 나옹화상의 제자로서 원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였고, 뒤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서 활약하였다.





 

 

  자, 이제부터는 고려후기불교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마치 작금의 한국불교와 난형난제難兄難弟를 비교해보는 일은 불자님들 개개인의 몫으로 차별화된 안목과 냉정한 가치판단에 근거해야할 것입니다. 사원이 대지주로 농장을 경영하면서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고 기진寄進, 투탁投托, 겸병兼倂으로 부를 축적하고 장생고長生庫로 영리사업을 하니 국가재정에 적자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역의무를 피하는 소굴이 되기도 했습니다.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부터는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불교喇嘛佛敎가 들어와서 그 폐해가 많았습니다. 호국적인 고려불교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한다는 이유에서 연등회·팔관회의 행사로 재정 지출이 심하고, 사원·사탑의 남조濫造로 더욱 더 국가재정은 고갈되어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승려가 국사國師·왕사王師 등으로 국가 정치에 참여하게 되자 점차 종교의 순수성을 상실하여 불교의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승려의 경제활동과 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병을 양성하고 세력을 확충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민심이 불교로부터 돌아서고 불교 배척론이 일어났습니다. 그 폐해만 시정하고 불교자체는 그냥 두자는 온건론자(이제현, 이색)가 있고, 불교교리 자체가 인륜을 해치는 사교라고 주장하는 강경파(신진사대부 계층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자학자朱子學子로 주자 가례에 의한 유교의식을 주장하였고, 가묘家廟를 세웠습니다. 특히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과 심기리편心氣理篇에서 철저한 불교배척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민중들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까? 하루아침에 불교는 조선 5백 년 동안 깊고 거대한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양반과 천민이 존재하였습니다. 천민에는 법제적法制的 천민賤民과 사회적 천민社會的 賤民이 있는데 법제적法制的 천민賤民으로는 노비가 있습니다. 그 밖의 천민은 사회적 천민으로 조선사회라는 환경 속에서 신분이 천민으로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조선朝鮮의 팔천八賤이란 조선시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멸시를 받던 여덟 부류의 천민賤民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비, 기생, 백정, 광대, 공장, 무당, 승려, 상여꾼 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歷史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라고 E.H.카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또박또박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