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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3월11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7.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7.03.11|조회수95 목록 댓글 0

 

 

 2017.03.11.. 맑고 봄봄

 

 

 

 

 

  0311,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7.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경사 가파른 동대東大 후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장충단공원, 동대입구역과 장충체육관, 신라호텔에서 광희문光熙門에 이르는 지역이 장충동이고, 장충체육관을 지나 한 블록너머 약수역과 청구역, 신당동 떡볶이지역이 신당동입니다. 장충동은 장충동 족발집이 유명하고, 신당동은 신당동 떡볶이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장충동 족발집이나 신당동 떡볶이집이나 몇 집 되지 않았습니다. 낡고 퇴락한 건물에 그저 가족들이 운영했던 정감 있고 풍경 있는 자그마한 식당들이었지 요즘처럼 기업형 음식점이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을 물주로 모시고 가는 회식에는 주로 장충동 족발 집으로 갔고, 학생들끼리 푼돈을 모아 갈 적에는 거의 신당동 떡볶이 집으로 향했습니다. 회식에 가면 10만 원짜리 수표를 휙휙 잘 내시는 교수님은 늘 인기가 좋고 호탕하게 보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후학들에게는 돈을 잘 써주시는 교수님이나 선배들이 인기가 좋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학자의 길을 정도正道로 걷는다는 교수님들 중에서는 분위기 호탕하고 인품 서글서글한 분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호탕하고 아쌀하게 후학들과 놀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재능과 미래가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에게는 학문적 성취 못지않게 인격人格 도야와 야망野望의 학습이 중요한데 우리나라 교육정책 자체가 학생들에게 지식과 상식은 가르치는데 반해 인격 도야陶冶와 젊은이를 위한 야망의 단련鍛鍊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수님도 드물게 있었습니다. 철학과 교수님인 별명이 돼지감자 교수님은 항상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고, 강의시간에 출석부를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고, 조는 학생들에게 짜증을 내신 적도 없고, 후학들에게 돈을 써본 적도 없고, 과제물을 내줘본 일도 없고, 그렇다고 시험문제를 어렵게 내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해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 원전강독을 하는 4월이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야 십여 명도 채 안 되는데다 점심 후 따스한 봄날 햇살에 창밖의 흔들리는 아지랑이처럼 졸음이 슬슬 밀려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 인자하시지, 배는 부르지, 날씨는 온몸이 노곤하도록 따스하지, 교재는 온통 줄한문이라 예습은 꿈도 못 꾸지, 딱 교수님 강의가 자장가로 들려와서 잠잘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아늑한 강의실이었습니다. 솔솔솔~ 졸음이 밀려오는구나.. 밀려오는구나.. 까지는 의식이 남아있는데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는 끊어질 듯 말 듯한 생기生氣와 침잠沈潛사이 경계선에서 거의 위태로운 평형을 유지하며 꿈과 의식사이를 순간순간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기이하게 교수님의 말씀은 똑똑히 귀에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교수님 말씀이 먼 산 메아리처럼 울림을 간직한 채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면서 마치 음향효과처럼 들려왔습니다. “그래, 이런 날씨, 이런 봄날에 강의실에 앉아있는데 졸리는 게 정상이야. 졸리면 자는 게 또 마땅한 이치이기도 하고 말이야. 듣는다고 바로 떼돈 버는데 써먹는 기술도 아니고 알 듯 말 듯한 고상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데 잠이 안 오겠나. 사실 나도 말이지 교단에 서서 이 넥타이만 매고 있지 않다면 이런 날에는 창밖 잔디밭에 나가 벌렁 드러누워서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잠이나 한숨 붙이고 싶지만 그래도 나는 선생이지 않나. 그래서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해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덧붙여주고 있는데 그게 말이야 도무지 내 능력이 여기까지 밖에 안 되는가 보지. 자자~ 그렇게 꾸벅꾸벅 졸고 있어도 신기하게 내 말은 다 들릴 터이니 고개는 흔들려도 마음은 흔들리지 말고 계속 듣도록 하지. , 그러면 고대 중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는 말이지~ ...” 생기生氣와 침잠沈潛사이의 평형 단계가 순간 무너지면서 수면으로 쏠리려는 찰라 교수님의 말을 듣고 있던 내 귀안으로 돌연 어디선가 푸른 종소리가 울려왔습니다. 데엥뎅~ 데엥뎅~ 그 푸른 종소리는 내 의식을 깨우고 그렇게 무겁던 눈꺼풀을 밀어 올리면서 내 눈을 통해 무언가를 설명하시는 교수님의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을 했습니다. 나와 눈을 맞추신 교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계속해서 원전 몇 줄을 읽고 연이어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때 깨달은 것입니다. 학식이나 지식이상의 인품과 사람됨을 가르치는 방법이 또 다른 형식으로 분명 존재하고 있구나. 그래서 그 시간이후로 돼지감자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면서 중국철학사 원전을 매우 열심히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국철학사 원전을 공부한다고해서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공부를 하고 교수님 강의를 듣는 일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키워내는 일은 강요强要나 추궁追窮이 아니라 단비처럼 속 깊이 젖어들게 함이라는 사실도 그때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도 자취를 하면서 이사를 세 번 했는데 그래봐야 신당동 안을 빙글빙글 돌기였습니다. 첫 번째는 주인집이 내준 방을 다시 사용하겠다고 해서, 두 번째는 집이 팔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와야했고, 그래서 세 번째 집까지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 집의 해발 고도가 달랐습니다. 평지에서 언덕 중턱으로 그리고 드디어 작은 산등성이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옮겨간 산등성이 집이 흥미로운 집이었습니다. 산등성이에 아슴히 걸쳐있는 일자형 홑집인데 대문 쪽으로는 경사 급한 비탈길이 내려다보이는 장충동 골목길이고, 방안 창문을 통해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몇백 평이나 된다는 어느 부잣집 정원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이는 신당동 산마루 집이었습니다. 안방, 마루방, 건넌방, 아들방, 내방, 화장실 순서로 구조가 되어있는 자취집은 개인택시기사님인 주인아저씨와 귀가 약간 들리지 않은 아주머니와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두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맨 오른쪽 끝인 내방 옆방이 고등학교1학년인 이집 아들아이 방인데다가 벽이 얇고 방음이라는 개념이 없이 지은 집이라 소리는 서로 공유한 채 시각은 서로 다른 공간을 점유하면서 생활하는 독특한 형식이었습니다. 이사를 가고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한 달 여쯤 지나다보니 그럭저럭 그 집 사정에 대해 다소 알게 되고 밥도 몇 번 얻어먹고 하면서 집안 형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이상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어쩌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게 되면 밖으로 나갈 적마다 내 옆방인 아들아이 방에 불이 켜져 있고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몇 번은 그런가보다 하면서 그냥 지나쳤는데 한 번은 학기 중간시험에 걸려 게으른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두 주 동안은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주 동안 옆방 아들아이 방에서 밤새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작게 켜놓은 음악방송처럼 별로 방해가 될 만하지는 않도록 입안으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밤공부를 하는데 오히려 심심하지 않고 옆에서 함께 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사분사분 들려오는 목소리와 인기척이 밋밋한 밤을 깨뜨리는 낙숫물 같은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주가 지나고 다른 일로 연이어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도 여전히 옆방에서 그 소리는 들려왔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알게 된 사실인데 밤새 들려오는 중얼거리는 소리는 주인집 고등학생 아들아이가 밤새워 공부를 하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말시험 때는 일부러 옆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는데 교과서와 참고서를 읽고,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문제집을 풀면서 그 과정을 소리를 내어 읽어가며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이가 더 가까워진 뒤로는 새벽에 공부하는 모습을 한참씩 지켜보기도 했는데, 그 아들아이 방에는 책상이 없고 벽 한쪽으로 교자상이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아이는 교자상위에 앉은 채로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상위에 앉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 친구나 선후배들 중에서 공부하는 양으로는 아마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내 3년 선배 중 한 분도 두꺼운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워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미 여러 권의 영어사전을 폐기처분한 뒤에 마지막 손에 남은 영어사전이 얼마나 손때가 곱게 묻고 길이 잘났던지 반들반들하게 빛이 났습니다. 일요일에는 세수도 하지 않고 밥도 자기 방으로 넣어주는 밥을 혼자 생각날 때마다 먹어가면서 방안에만 틀어박혀 공부를 하는 경우도 보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은 십 몇 년 전 옛날 사람들이 공부했던 방식인데 그때에도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고등학교1학년이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주인집 아들아이는 장충고등학교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독서반에 가입해서 글도 쓰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등 중학교 때부터 상상했던 고등학교생활을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었으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번도 1학년 전체 일등을 못 해보고 내내 이등을 하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있는 한 자기가 일등은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럴 경우에 보통 항상 일등을 고수하고 있다는 아이가 한번쯤 보고 싶어지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과 사리분별事理分別이 똑똑한 것과 돈을 잘 버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아이 이름이 성계였고, 성은 이 씨였습니다. 독특한 이름에, 독특한 공부 방식에, 독특한 수면 양이었습니다. 택시기사이신 아버지는 법대를 가라고 권하고 신앙생활이 신실한 어머니는 신학대학을 가라고 권하는데 아직은 어디를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등학교1학년이 직업과 연결되는 진로를 아직 잘 모르는 것은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세가 어려운 집안의 노력파 우수학생의 일생이 성취감 때문에 피곤할 수도, 성취감이 강한만큼 행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주인집 아들아이가 무엇보다도 스스로 원하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아이가 고등학교2학년에 올라갈 무렵 나는 잠실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어쩌다 동대東大 앞을 지나다보면 신당동 산마루 집에 들려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도 드리고 아들아이 안부라도 묻고 싶지만 내 상상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아들아이의 현실이 혹여 다르게 나타날까봐 그만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행복을 지켜주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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