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5,14.日. 하루 내내 그녀를 쳐다보았다고? 나는 하루 내내 하늘만 쳐다보았거든
05월14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아침 일곱 시가 되자 재빨리 서울을 벗어나버렸으니 하품만 남겨놓은 서울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 여덟 시가 되면서 화성 휴게소를 스치듯 지나쳤으니 역시 옆모습뿐인 화성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 여덟 시 삼십 분경 당진을 쌍 날갯짓 제비처럼 등 너머로 흘려보냈으니 글쎄 등 뒤의 당진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침 여덟 시 사십 분에 해미IC를 통과했으니 해미海美는 당신의 먼 모습처럼 좀 알겠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돌계단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으니 바람 따라 해동청海東靑 은보라매 솟구치는 천장암 하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주차된 우리 차 지붕에라도 올라가 펄쩍 뛰면서 환호를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이 들썩여 관세음보살님이라도 나타나시면 마치 당신을 본 듯 담쑥 보듬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의 미세먼지 공포가 광풍狂風에 박쥐우산이 뒤집히듯 시원하게 날아갔습니다. 올봄에 처음 보는 은빛 비늘구름이 천공天空의 가장자리에 살짝 걸려있었습니다. 수창국민학교 6학년1반 때 1분단 창가에 앉아 산수시험을 치르면서 유리창 너머로 흘낏 보던 그 풍경風景, 그 하늘이었습니다. 어제 바람의 힘을 빌어서 고북 하늘에 뿌려댄 비 덕택이었습니다. 그 비는 우중충한 서울 송파구 하늘에도 잠시 요란스레 내렸었습니다. 하늘이 짙푸르니 땅과 숲이 단박에 살아났습니다. 황토는 붉고, 물은 투명하고, 숲은 검푸르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민낯으로 보였습니다. 만물萬物이 선연鮮然하다.의 ‘선연鮮然’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법당에서 보나, 공양간에서 보나, 꽃 삽질을 하면서 보나 선연鮮然했던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공양간 마당에 긴 화단을 만들었습니다. 축대로 쌓아놓은 공양간 마당 가장자리에 기와를 몇 겹으로 쌓아올려 낮은 울타리를 만들어놓은 곳이 있습니다. 그 기와 울타리를 따라 안쪽으로 네 뼘 가량 넓이만큼 기다랗게 복토를 하고 앞줄에 수키와를 일렬一列로 가지런히 엎어놓아 화단의 경계를 표시했습니다. 절 뒤편 언덕 노지露地에서 푸르른 하늘을 쑤석이듯 마구마구 삽질을 해서 황토를 마대에 담아 차에 싣고 와 마당의 기와 울타리 앞에 서너 차례 흙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울력거리가 심란心亂하게 마당에 어질러져있는 것 같더니 정덕거사님이 수키와로 한 장 한 장 경계를 만들어가면서 호미를 좌우로 흔들어 황토를 스윽~ 슥~ 골라가자 두 시간 뒤에는 길고 가지런한 화단이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묘길수보살님이 손가락으로 화단을 한 줄로 죽 그어 간 뒤에 물결처럼 생겨난 작은 골을 따라가며 패랭이꽃 씨를 꽃봉투에서 탈탈 털어가면서 어린 추억 같은 까만 흔적을 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으로 흐릿한 추억을 덮듯이 붉은 황토를 덮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올 여름이나 가을에는 석죽화石竹花라고도 부르는 패랭이꽃을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석죽을 좋아해서 앞뜰 가득히 석죽을 심어놓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던 고등학교2학년 때 고문古文을 가르쳤던 담임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돌계단 아래 화단에는 여주와 금낭화를 심었습니다. 먼저 심어놓은 고추를 위해 지지대를 세우고 하얀 줄을 매어주었습니다. 태평거사님은 알루미늄 지지대를 망치로 뚝딱뚝딱 박았고, 정덕거사님은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줄을 매었습니다. 햇살이 푸른 하늘에서 폭락하는 주식처럼 떨어져 내리자 나는 검은 차양 모자를 쓰고 그런 풍경들을 말끔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주지스님 거처 옆 작은 비탈에는 코스모스를 심었습니다. 산신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앉아 인법당 뒤편 세 평 마당을 쳐다보았더니 지난 일요일 만들어놓았던 화단에 붉은 꽃 양귀비 한 송이가 피어있었습니다. 돌계단 옆의 둥치 굵은 백목련 나무에는 푸른 잎만 성성한데 산신당 앞의 키 작은 자목련 나무에는 아직 보라색 꽃이 몇 송이 매달려있었습니다. 출렁~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 솔개 바람이 지나가자 붉은 철쭉꽃에서 흰빛이 드러나게 나타나보였습니다. 붉은 꽃도 나이가 들면 얼굴에 흰빛이 도는 모양입니다.
점심공양에는 호박국수를 삶아먹었습니다. 국수에 누른빛이 돌아서 왜 그러느냐고 공양주보살님께 물어보았더니 호박국수라고 했습니다. 냉면 그릇에 담긴 국수 두 사리에 육수를 부어넣고 호박나물과 홍당무나물을 고명으로 올려 먹었습니다. 호박국수는 총각무와도 김장김치와도 맛이 잘 어울렸습니다. 그래서 두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그런데 도량 마당에 길고 가지런한 화단花壇을 만들고 났더니 어느새 배가 꺼져버렸습니다. 날이면 날, 끼니면 끼니마다 뭔가를 꾸준하게 먹어보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역시 꾸준하게 배가 꺼져버립니다. 그렇긴 해도 역시 시간마다 꾸준하게 생각을 해두지만 시간이 지나가도 꾸준하게 머리가 꺼져버리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밥은 밥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골고루 먹고 살아가야하는 모양입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가도 결코 꺼지지 않는 머리를 위해서도 분명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