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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5월14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7.05.16|조회수73 목록 댓글 0

 

 

 2017.05.14.. 그런대로 보통인 이 미세먼지수치라도 언제까지 가줄지, 나 원 참말로

 

 

 

 

 

  0514,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족저근막염足底筋膜炎(Plantar fasclitis)이라는 질환이 있습니다. 족저근막은 종골Calcaneus이라 불리는 발뒤꿈치 뼈에서 시작하여 발바닥 앞쪽으로 5개의 가지를 내어 발가락 기저 부위에 붙은 두껍고 강한 섬유띠를 말한다. 발의 아치를 유지하고 충격을 흡수하여 체중이 실린 상태에서 발을 들어 올리는데 도움을 주어 보행 시 발의 역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족저근막이 반복적인 미세손상을 입어 근막을 구성하는 콜라겐의 변형이 유발되고 염증이 발생하는 것이 족저근막염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족저근막염은 특별한 치료 없이도 천천히 스스로 증상이 좋아지는 자한성Self-limiting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좋아지기까지 약 6~18개월가량의 시간을 요하여 무작정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족저근막염을 방치한 채 계속해서 무리를 하면 무릎, 고관절, 허리 등에 이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족저근막염은 갑자기 일을 많이 하거나 운동량을 늘리거나 하면 찾아오는 발바닥 질환인데 특히 육상경기나 마라토너들에게는 일상적으로 끼고 사는 질환중 하나입니다.

 

 

 

 

 

  초파일을 지내고 돌아오는 첫 번째 일요일에도 일요법회를 하려고 천장암에 갔습니다. 불에 타 아무 것도 없어서 눈길이 시원해진 염궁선원 터 한켠을 일궈 가꾸어놓은 고추밭과 호박 구덩이를 보고 있다가 저만큼 서있는 행자님과 어느 거사님이 대화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병원에 갔다 왔는데 족저근막염이라고 하더라고요. 신고 있는 신발이 딱딱해서 충격을 흡수해주지 못해 발바닥에 무리가 갔다고 하더란 말이지요... 족저근막염이라, 그 용어를 절에서 들으니까 조금 생소했지만 양재천에 있는 영동5교아래 마라톤 클럽에 가면 흔히 듣던 말이었습니다. 매일 20Km씩 열심히 달리고 운동을 즐기는 마라토너들이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일반인보다 훨씬 건강해야할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몸 중에서 다리와 발에 필요이상의 부담과 무리를 주어 족저근막염, 고관절염증, 발목과 무릎의 연골파손 등으로 크고 작은 잔병에 시달리는 마라토너들을 보면 운동을 통해 얻은 것 못지않게 잃은 것 또한 많아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태자시절의 환락과 요기 수행자로서의 고행을 다 겪어보신 뒤에 중도中道의 묘를 깨달으신 것이 당연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유가儒家에서 중용中庸의 도를 논할 때 쓰는 말이지만 부처님의 중도中道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점이 있어서 역시 성인들의 안목은 유사한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들려오던 대화중 행자님의 족저근막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차, 머지않아 행자님이 떠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젊고, 활기차고, 수덕사 큰 절에서도 욕심내는, 일 잘하는 행자님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던 행자님은 유독 서울보살님만은 절에 오래있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나에게 했었습니다. 서울보살님만의 관점이 있었겠지만 조금 유의해서 관심을 가진다면 행자님의 행자수행 포기가 전혀 못 알아차릴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삼십 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에 활기 있고 건장하고 기본소양까지 갖추고 있는 예비스님인 행자님은 요즘 세상에는 거의 천연기념물에 가깝도록 보기 드문 인적자원입니다. 새싹에 물을 주듯, 쇠를 단련하듯, 잘 관리하고 보살피며 단계적으로 친절하게 이끌어서 계행戒行과 정진력精進力이 두터운 청정한 스님으로 키워 가야할 터인데 여전히 절의 풍토는 1960,70년대 사고방식인 채로 손쉬운 노동력으로 부리기만 하고 홀로 방치하여 불교의 미래를 절 안에서 자진自進해서 포기하고 있습니다. 예비스님들인 행자님들의 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만 걱정을 할 뿐이고 예비스님들에게 흡인력 있는 대책이나 관리방안은 거의 없습니다. 마치 한 나라가 아직도 애국심과 충성심에만 의지하여 국민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끝없이 바라기만 한다면 국가경쟁력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 국민들은 그 정부를 지지하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사회인 21C에 들어서도 신심信心과 근기根機에만 의지하여 모든 것을 인연소치因緣所致 탓으로만 돌리면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고리타분한 과거의 행태로 불교의 인재를 기르려는 안이한 생각으로는 30년 후의 불교현실이 눈앞에 불처럼 분명하게 보일 뿐입니다.

 

 

 

 

 

  아마 지난 2월초순경 쯤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 일요법회 때 처음 보는 젊은이 한 사람이 법회시간에 주지이신 백운스님 바로 앞쪽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시불공이 끝나고 일요법회를 보면서 그날 읽었던 경전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젊은이도 이야기에 잠깐 참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 주 일요일에 일요법회에 갔더니 그 젊은이가 머리를 깎고 행자님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행자님이 한 분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 행자님이 삼 개월 가량 지나자 새벽 도량석도 하고, 예불 종성도 하고, 힘든 울력도 해가면서 행자님 모습으로 조금씩 바뀌어갔습니다. 지난 4월말 일요법회시간에는 빠알리경전 낭독시간에 마지막 제자, 수밧다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 내용 안에 이런 대목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밧다는 부처님을 뵙게 되었다. ...... 부처님 말씀을 듣고 수밧다는 그 말씀을 찬탄하면서 부처님께 출가를 허락해주시도록 청하였다. 그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드디어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부처님 마지막 제자였다.’ 여기에서 ...... 로 생략된 부처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행자님이 아마 생략된 부처님 말씀은 사성제四聖諦나 팔정도八正道였겠지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행자님 말이 맞습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 초전법륜初轉法輪인 중도中道와 네 가지 거룩한 진리가 바로 팔정도八正道와 사성제四聖諦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르나트에서 오 비구에게 두 번째 담마의 바퀴를 굴리신 것이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가르침인 삼법인三法印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확하게 잘 봐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여래가 깨달은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중도는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다.’ 라는 말과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로 이르는 거룩한 진리는 일찍이 어느 누구도 말한 적이 없고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에게 이 들어본 적도 없는 진리를 알았다는 통찰력이 일어났고 지혜가 생기고 앎이 생기고 빛이 생겼다.’ 라는 말씀입니다. 사성제四聖諦의 처음인 고괴로움으로 파악하지 않고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실이나 과거나 미래의 괴로움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로 파악할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사성제를 통해서 무엇이든 생기는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연기緣起의 실상實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수십 년이 걸려도 부족한 시간인데 절에 들어온 지 세 달이 미처 되지 않은 행자님도 불법의 요지要旨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쉽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절 안에서의 가르침의 체계가 부실하거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엊그제인 14, 일요법회 시간을 마치고 점심공양을 하고 있는데, 행자님이 그날 아침에 행자복과 자신이 쓰던 물건들을 방에 단정하게 정리해놓고 자신이 절에 올 때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고 말없이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텅 비어 눈길이 시원해진 염궁선원 터에서 족저근막염이라는 행자님 말을 들은 후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서산 고북면에 있는 연암산의 조그만 절집인 천장암에서 있었던 지난 삼 개월에 걸친 젊은 행자님 이야기였지만 승가僧伽에 왜 예비스님인 행자 지원자가 급감을 하고 있는지, 타종교에 비해 20세 이하의 젊은 불교신자가 왜 거의 없는지, 전체적인 불교신도수가 왜 급감을 하고 불교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이고도 안타까운 사례였습니다. 21C 현대사회에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것은 결코 미덕美德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인연소치因緣所致가 아니라 의지와 투자와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이런 시행착오試行錯誤와 혼란混亂이 가중될 뿐입니다. 사월초파일도 지나고 봄날은 하염없이 세월 따라 가고 있는데,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자유자재하고 걸림이 없어 아무 것도 오고감이 없는 부처님 도량 안에서 젊은 행자님 한 사람이 인연소치因緣所致만은 아닌 듯 봄바람 가을비처럼 왔다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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