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0.月. 이렇게도 줄기찬 빗줄기가 가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07월10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K시 고속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오후2시30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먼저 터미널 안에 있는 책방으로 가보았습니다. 한 열흘 전 인터넷 신간서적 안내에서 보았던 책이 판매대에 나왔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 각 주州의 성장 배경과 과정 그리고 성향 등을 분석해놓은 책이었습니다. 모두 아시는 것처럼 미국은 1620년에 영국 뉴잉글랜드 최초의 이민인 청교도 102명을 메이플라워 호에 태우고 메사추세츠 주州 연안에 도착을 해서 동부에서 서부로, 남부로 나라의 세력을 키워간 연방국가입니다. 그런 이유로 각 주州마다 탄생 과정과 성장 배경이 서로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연방법聯邦法이 있지만 또한 각 주州마다 독자적인 주법州法이 있어서 성격과 성향이 서로 다른 주州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연방국가 안의 한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도록 포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21C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을 잘 알고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책방을 이모저모 둘러보았으나 내가 원하는 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K시 구舊 시가인, 구舊 도청과 충장로가 있는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습니다. 모임 약속시간이 오후6시였으나 미리 K시에 도착을 한 것은 무언가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속터미널에서 십 여분 걸어가면 지하철 농성 역에 도착을 합니다. K시는 지하철이 한 노선이기 때문에 중간 역에 들어가게 되면 환승이라는 것이 없어서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가야합니다. 구舊 도청이 기념물처럼 서있는 문화의 전당 역까지는 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5.18 기념관이 들어있는 구舊 도청과 그 주변에 새로 건립한 아시아 문화의 전당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5분 남짓 걸리는 구舊 광주여고 사거리로 향했습니다. 구 광주여고는 아시아 문화의 전당 전용주차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나는 구舊 광주여고 정문에서 7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거의 이십여 년을 살았으나 구舊 광주여고에 들어가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는데 이제는 담장을 허물어놓아 안이 잘 들여다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십여 년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내가 우리 집에서 거주한 것은 고등학교 3년 동안 만이고 나머지 기간들은 서울을 비롯해서 외지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긴 하나 가장 꿈을 많이 꾸는 곳이 바로 이 집입니다.
보통 이집의 2층 옥상과 화장실에 대한 꿈을 많이 꿉니다. 2층 옥상 꿈을 꾼 날은 거의 옥상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유영遊泳하듯 하늘을 돌아다니는 꿈이고, 화장실 꿈을 꾼 날은 동산만한 고분위에 쭈그려 앉아 자연친화自然親和를 하는 꿈입니다. 그런데 동산 주변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고분 정상의 나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자연친화自然親和가 쉽지가 않습니다. 수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색해진 몸으로 어떻게 용을 쓰다가 생리작용에 성공을 하면 곧바로 사람들의 환호歡呼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버립니다. 그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2층 옥상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입니다. 실제 2층 옥상은 그렇게 넓지 않은데 2층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부터가 마치 태산泰山이나 화산華山을 오르는 길처럼 험하게 경사져있습니다. 고산준령高山峻嶺을 등산하듯 힘들여 2층 옥상에 올라가면 2층 옥상이 무척 넓게 보이는데, 옥상 저 너머로 아스라한 구름에 가려있는 신비한 풍경에 매료되어 그쪽을 향해 달려갑니다. 점점 빨리 달려 가다보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면서 두 발을 굴려 달리는 것이 아니라 잉어가 물속에서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면서 유영을 하듯이 두 다리를 나란히 모으고 꼬리지느러미처럼 위아래로 부드럽게 흔들면 몸이 스르르 떠올라 공중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두 팔을 날개처럼 저어가면 내가 바라보는 어떤 방향으로든지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파란하늘을 바라보는 경이驚異로움이 있는가하면 하늘을 날면서 땅을 내려다보는 통쾌痛快함이 있습니다. 땅에서 바라보는 푸른 하늘은 깊고도 무한無限하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땅세상은 선과 면의 구별區別이 분명하고 모임과 흩어짐이 단정하여 일목요연一目瞭然합니다. 나는 K시에서 두 번 이사를 하고 세 군데 집에서 살았었는데 유독 이집이 꿈의 배경이 되어줍니다.
구 광주여고 정문 앞길은 이제는 왕복2차선 규모를 갖추었습니다만 예전에는 차 두 대가 빠듯하게 비켜가기 어려운 구舊 도로였습니다. 그리고 정문 바로 위편으로 전봇대가 모퉁이마다 서있는 사거리가 있습니다. 사거리 한 모퉁이에는 생태탕 집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집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부터 있었던 낡은 한옥인데 집은 그대로이지만 용도는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그 집에 생사탕 가게가 있었습니다. 생태탕과 생사탕은 명칭이 비슷해서 이놈이나 저놈이나 비슷비슷한 탕 종류인 걸로 생각하기 쉬우나 탕은 탕인데 그 안의 내용물이 전혀 다릅니다. 나도 그때는 생사탕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낡고 붉은 기와 한옥의 허름한 가게 안에서 항상 무엇인가를 끓이거나 삶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여름날 요즘처럼 장마철이었는데 동네가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아마 다음날 아침에 탕을 만들려고 그날 밤 탕의 내용물이 될 물건을 자루에 담아 가게 안에 가져다놓았는데 글쎄 자루 주둥이가 느슨하게 묶여있었던지 자루 안이 꿈틀거리는 바람에 자루 주둥이가 풀려버렸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다음날 탕의 내용물이 될 생명들이 자유를 찾아 가게를 탈출하여 동네의 각 가정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침 장마철이라 질척한 빗물을 타고 매끄러운 몸을 움직여 하수도 수채 구멍이며, 담벼락이며, 수도가 있는 샘이며, 심지어는 화장실이나 부엌까지 내방을 했던 것입니다. 새벽녘에 집집마다 호들갑을 떠는 비명소리에 절망적인 신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후에는 경찰차와 소방차가 출동을 했습니다. 그 뒤로 얼마 있지 않아 생사탕 가게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팥빙수집이 들어왔습니다. 속에 물방울 같은 기포가 송송 들어있는 투명하고 네모난 얼음 덩어리를 압착기에 끼우고 슬슬 핸들을 돌리면 하얀 얼음 보숭이가 하얀 유리그릇에 소복하게 쌓였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편지 같은 얼음 보숭이 위에 까만 팥 두어 수저와 연유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빨갛고 파란 액체를 쭉쭉 뿌린 후에 바둑알만한 인절미 서너 개를 올려놓으면 팥빙수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집 팥빙수가 참말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주 여고생들 사이에 앉아 먹으면 평범한 팥빙수도 입술에 닿는 순간 설빙雪氷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집에 어느 사이엔가 생태탕 집이 들어와 탕탕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태탕 집 옆에는 낡은 슬라브 단층집의 추레한 방앗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름이 장동방앗간인데 옛날부터 팥 시루떡을 기막히게 하는 집이었습니다. 팥맛이 팔팔 살아있는데다가 떡이 포근포근하게 씹히고 달지도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간맞춤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습니다. 우리 동네 도로변의 낡아 지친채로 허름해진 몇몇 집들이 흘러간 옛날 모습을 이 도령 기다리는 춘향이처럼 슬그머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풍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몇몇 집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아쉬운 대로 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비가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K시 경찰서에서 옛 전남일보 사옥을 지나 금남로와 만나는 여기 좁으막한 길은 추억이 많이 깃들어 있는 길입니다. 학교를 갈 때도, 집에 돌아올 때도, 시내나 충장로에 나갈 때에도 꼭 이 길을 지나서 갔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집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모처럼 동생들을 만나다고 단정하게 입고 온 옷이 비에 젖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눈에 띄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앉았습니다. 창밖으로 기세가 등등하고 표정이 거칠어진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었던지 유리창에 어지럽게 몸을 부딪치면서 굵은 빗방울은 조각조각 작은 물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갔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창밖의 비오는 풍광을 쳐다보고 있는데 잠깐! 눈에 익은 풍경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동네 친구와 함께 이 길을 지나서 금남로 건너 충장로 입구에 있는 메밀국수 전문점인 산수옥山水屋이라는 음식점에 처음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친구와 반반으로 부담하기로 하고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았던 메밀국수를 시켜 둘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때 메밀국수나 짜장면 값이 15원이었습니다. 푸른 눈과 상고머리에 얼굴 붉었던 소년이 이제 환갑을 넘긴 초로의 남자가 되어 비오는 경치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비를 맞더라도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산을 펼쳐들고 편의점을 나섰습니다. 금남로를 건너 곧장 올라가면 K시 우체국이 나왔습니다. 여기부터가 옛날에는 일본식으로 본정통이라고 불렀던 K시 번화가인 충장로 입구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신시가지인 상무동 부근으로 사람들을 많이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젊은 사람들이 비좁은 길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꾸어 충장로 2가, 3가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옛날 생각이 나서 K시 우체국을 지나 사직공원 쪽으로 곧장 올라가보았습니다. 여기가 황금동이라는 동네인데, 스텐드 바라고 부르던 술집들이 즐비하게 있어서 유흥가 있었던 곳이고 친구 아버님이 운영을 하시던 박외과 라는 커다란 병원이 있었습니다. 친구 아버님은 K시에서 외과의로 명성을 날리던 분이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친구가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집도를 하신 의사는 친구의 아버님이셨고 맹장염 수술정도야 그분들께는 식은 죽 갓 둘러먹기 정도의 수술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해도 해낼만한 맹장염 수술이 잘못되어 친구는 재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맹장염 재수술이라니 의학에 문외한門外漢인 나도 처음 들어본 말이었지만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두고두고 생각나게 해주는 인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제는 황금동에 스텐드 바도, 유흥점도, 그리고 박외과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아들만 삼 형제였는데 의사였던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삼 형제 모두가 의사가 되었습니다. 황금동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K시 우체국으로 돌아와 충장로 2가부터 차례차례 아래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비가 점점 잦아들더니만 한참 뒤에는 우산을 접어도 괜찮았습니다. 충장로를 내려가면서 보았더니 옛날에 그 많았던 화려한 시계 점포와 회전식 전기통닭구이집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내 추억도 그 자리에서 그쳐버렸습니다. 이제는 동생들과의 모임에 시간을 맞추어 가야했습니다. 나는 지하철을 타려고 금남로 5가역으로 향했습니다. K시 지하철에는 선반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