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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8월05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6.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7.08.12|조회수88 목록 댓글 0

 

 

 2017.08.11.. 오늘 아침은 저 하늘이 바로 그리움인데

 

 

 

 

 

  0805, 일요법회 늬위스 데스크 6.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법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불단 향로 좌우에 세워져있는 촛대에 촛불이 오른편 초에만 살아있었습니다. 오른편 초는 아직도 절반가량이나 키 세워져있는데 비해 왼편 촛대의 초는 다 가라앉아서 촛불마저 꺼져있었습니다. 초를 갈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두리번거렸더니 불단 한 구석에 향과 불을 켜는 도구와 함께 날이 넓적한 끌이 한 자루 있었습니다. 촛대 속으로 녹아내려 늘어 붙어있는 초를 끌로 파내고 깨끗하게 닦아낸 뒤에 둥글고 긴 새 초를 끼워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른편 촛대의 초도 절반가량 남아있었지만 마저 새 초로 갈아 끼웠더니 불꽃으로 이어진 일주문一柱門처럼 보기에도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가뿐한 마음으로 초에 불을 붙여놓고 향을 한 자루 피워 향로에 꼽아놓고는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법당에서 나왔습니다. 등에 땀이 촉촉했습니다. 완연하게 화창한 아침이었습니다. 벌써 아침부터의 조짐이 오늘은 날씨가 펄펄 끓겠구나 하는 느낌 팍팍 전해져왔습니다. 다행이 요 며칠간 잠잠했던 바람이 들캉달캉 백일홍 나뭇가지를 흔들고 다니는 풍경이 그나마 한 가닥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맑고 깊게 트인 하늘과 앞산 등성이위로 뾰족이 올라와있는 태양의 오만함이 눈 시리게 따가웠습니다. 태양이 뿌려대는 날선 햇살도 다섯 겹 여섯 겹으로 허공중에 층층이 파도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날에는 왠지 몽땅 벗어젖히고 따끈따끈 불타는 태양아래서 일광욕日光浴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얼른 세면장으로 들어가 철벅철벅 목욕을 하고 나와 도량 입구 한켠에 있는 고구마 바위에 앉아서 몸을 말렸습니다. 그러다 그대로 돌아앉으면 절로 들어오는 길이 언뜻언뜻 보이면서 구불구불 길을 가리고 있는 검푸른 산기슭과 저만큼 떨어진 작은 산봉우리들이 몇 겹으로 겹쳐서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하늘을 머리에 인 채로 아슴하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양어깨와 등판에 햇살이 쨍알쨍알 쏟아지는 것이 간질간질 가려움처럼 느껴졌습니다. 가부좌跏趺坐로 앉아 눈을 살며시 감고 하늘의 통로인 천문泉門으로 기운을 받아들였다 내뿜었다를 반복하면서 가늘고 긴 호흡을 천천히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왔습니다. 수많은 소리들이 나를 지나가고 바람이 나를 거침없이 들어 다녔습니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 짙고 옅은 주홍색의 점들이 모양과 크기를 바꾸면서 모이고 흩어지는 동안 알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 세상이 새벽빛으로 참하게 물들어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고구마바위위에 벌렁 드러누워 보았습니다. 갓난아기의 잠자는 자세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몸가짐일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삼십 분가량 있었습니다. 여름다운 여름을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여본 것입니다. 이쯤해서 차실로 들어가 있으면 밭에서 돌아와 법당에 들어갔다가 나온 스님께서 뒤께 쪽마루 근처로 돌아 나와 미닫이문을 톡톡 두드리면서 커피 한잔 하시오. 라고 말씀을 건네올 것입니다. 여름이 사나운 목소리로 환호성歡呼聲을 지르면서 도량 마당을 둥글게 열 바퀴째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뒤께 미닫이문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커피 한 잔 하시오. 나는 갈매기처럼 날개를 벌린 책을 차실바닥에 엎드려놓고 미닫이문을 열고 뒤께 쪽마루로 나갔습니다. 커다란 머그잔 안에 담긴 진한 갈색 커피가 하얀 쟁반에 놓여있었습니다. 머그잔을 들고 스님 옆으로 쪽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평면 대형화면 같은 앞쪽 산비탈의 푸른색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더니 오늘은 하늘의 파랑이 땅의 푸르름에 전혀 밀릴 것 같지 않은 도도함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날에는 커피를 마시면서 어떤 화제를 들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다가 스스럼없이 나온 말문이 불교에 의한, 불교를 위한, 불교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국불교는 인도 정통 불교나 티베트나 중국불교와는 성격이 상당히 다른 불교입니다. 인도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들어온 한국불교는 삼국의 고대 국가 체제가 정비될 무렵에 전래되었기 때문에 국민정신의 고양과 사상 통일을 위하여 왕실의 보호아래 활발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불교는 종교로서의 구실만을 한 것이 아니라 서역과 중국의 문화를 우리나라에 전달하는 구실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불교는 한국 고대 문화를 성립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고, 인간 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깨닫게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철학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다양한 이유로 인해 삼국의 불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봉되었고, 고대 국가에서는 불교를 이용하여 국민의 사상적 통일과 정신적 지주로 적합하였기 때문에 왕실 불교라는 성격이 강했으며, 현세의 고통과 재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세 구복적求福的 신앙이었기 때문에 현세 구복불교라는 특징이 있었고, 국가의 흥망은 부처님 가호력加護力에 기대하는 호국 종교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국 불교라는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백좌강회나 인왕호국 반야경, 황룡사9층탑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던 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가서는 문화나 예술 쪽으로는 지대한 발전을 해나갔으나 정치와 국가체제를 아우르는 사상 면에서는 새롭게 득세하기 시작한 유교에 대해서 조금씩 힘이 바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에 들어서면 정치체제는 유교에 바탕을 두고, 종교는 불교를 근간根幹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중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면 불교와 일부 왕실 권력과의 밀착은 도를 넘어서 사찰들이 권력과 재산을 오로지하면서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고,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고리대금을 통한 영리사업을 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세력을 확충하고,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는 등 타락의 늪에 빠져들면서 말세적 현상이 팽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백성들의 원성과 비난은 하늘에 닿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일천여 년 만에 그 절정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조선에 들어서는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이 왕실의 기본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승려들은 도성 안(사대문안)에 들어갈 수 없는 법이 제정되었고,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었던 조선팔천朝鮮八賤(노비, 기생, 백정, 광대, 무당, 승려, 공장, 상여꾼) 안에 승려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에 도시의 유려한 포교 사찰들은 일체 폐쇄당하고 절집과 승려들은 모두 깊은 산속으로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을 지나 현대에 이르는 동안 비구대처 정화 분쟁과 총무원 권력 쟁탈전으로 인한 분쟁의 얼룩들이 만연한 가운데 아직까지도 한국불교는 고려말 이래의 과오와 실패에 대한 깊은 참회懺悔나 종교적 성찰省察을 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작금의 조계종 사태나 승가의 분란은 고려말의 불교적 재앙을 말끔하게 해소하지 못한 채 불교라는 허울을 둘러쓰고 있는 구차苟且스럽고도 난삽難澁600년 묵은 후유증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구bhikkhu란 부처님 가르침과 법dharma에 따라 부처님 제자가 되기로 맹세를 하고 계를 받은 걸식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걸식 수행자가 걸식 수행자가 아니고 걸식 수행을 전력全力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부처님 제자가 아니고, 그래서 비구가 아니고, 그래서 당연히 선량들로부터 공양을 받거나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그저 불온한 형상形相일 뿐입니다. 옛 어른들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라는 말로 후학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었습니다. 溫故而知新, 옛것을 제대로 알고서 새로운 것을 익힌다.는 종파宗派를 떠나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시대時代를 초월하여 우리들이 배워서 익히고 지켜야할 금과옥조金科玉條입니다.

 

 

 

 

 

  잠시 세면장에 다녀왔더니 스님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쪽마루에 올려있는 머그잔들을 하얀 쟁반에 담아 공양간으로 가져가 설거지를 한 다음 살강에 엎어놓고 차실로 돌아왔습니다. 계곡의 분지 틈새에 있는 길고 넓은 도량 안에서 스님이 어디 있는 줄은 알 수가 없습니다. 둥근 뱀이 스르르 기어 다니는 계곡 쪽의 긴 풀밭에는 가지 않았겠지만 그곳 말고도 갈만한 곳은 너덧 군데가 넘게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는 거의 차실과 공양간과 고구마바위 근처를 활동무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토요일과 내일 일요일 이틀간의 햇살이 올 여름의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 글을 쓰면서 딱 일주일 전의 햇살을 상기해보았습니다. 햇살이 너무도 장해서 이런 날에는 차실에서 독서만 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으나 오전에 한 시간가량 고구마바위에서 한여름 날의 알몸 일광욕日光浴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실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소설과 시사지時事誌를 번갈아가면서 읽었습니다. 그래봐야 벽을 따라 주욱 쌓아놓은 책들의 1/3정도밖에 못 읽었습니다. 집에서는 책을 1시간가량 읽으면 눈이 피로하고 글자가 겹쳐보기도 하는데 모후산母后山 목탁암木鐸菴에 와서 책을 보면 그런 현상이 말끔히 사라지고 눈이 한사코 싱싱한 채로 살아있어서 참 별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스님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물이 맑고 공기가 좋거든. 그러니 간장도 맛나고 고추장도 맛나단 말이지. 스님 말을 들을 때면 또 그런 것도 같아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점심공양에는 엽삭젓 남은 것과 고구마순 고등어조림 남은 것을 마저 먹어버렸습니다. 물이 맑고 공기가 좋아 지어놓은 밥이 기본적으로 맛이 있으니 엽삭젓과 고구마순 고등어조림까지 덩달아 맛이 있어서 밥을 두 번이나 퍼서 먹었습니다. 아마 사춘기 이래로 이번 모후산 목탁암 기도·독서· 템플스테이 여드레 동안이 가장 많이 밥을 먹은 시기로 기록되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매 끼니마다 잘 먹고 또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기까지에는 엽삭젓과 생갈치구이와 고구마순 고등어조림과 수제비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설거지를 한 다음 공양간에 앉아 홍차를 한 잔 마셨습니다. 좋은 홍차라 몇 차례 더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먹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홍차의 마른 추억향追憶香이 감도는 떫은 듯한 맛을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설탕을 한 스푼 넣어서 먹었습니다. 여기에 우유를 넣어서 인디안 식 밀크 티인 짜이를 만들어먹으면 더 맛났겠지만 짜이는 역시 이른 아침에 먹는 맛이 으뜸입니다. 인도에서 성지순례나 여행을 할 때면 의외로 열차를 많이 이용하게 됩니다. 인도가 일찍부터 열차수송이 잘 발달된 나라이고 장거리 여행에는 열차가 편리한 점이 많이 있기 때문이지요. 열차를 타고 새벽녘에 외딴 시골 정거장에 잠시 정차해있으면 철로 주변에 수많은 짜이 파는 사람들이 일회용 진흙 도자기에 뜨거운 짜이를 따라주면서 짜이.. 짜이.. 하고 외쳐댑니다.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한 열차에서 창문으로 건네주는 깜깜한 새벽녘의 짜이 한 잔은 인도라는 거대하고 불확실한 환상을 가슴 속에 부드럽게 녹여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새벽 열차 안에서 마셨던 짜이와 인도 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면서부터 공기 중에 섞여있어서 코를 강하게 울려주던 인도 냄새인 찬단향입니다. 물론 닐루빠 탈라티라는 이름도 역시 생각이 납니다. ‘90년도에 인도에 갔을 적에 현지 임원으로 참석을 했던 인도 아가씨였는데 한 보름간 일행들과 함께 북부지방을 주로 돌아보았습니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에서 처음 만나서 상면식을 하고 보름 후 델리에서 임무를 마치고 헤어진 뒤 우리 일행들은 중부와 남부를 향해 떠났습니다. 전용버스가 일정에 맞추려고 이른 새벽부터 달려서 인도 어느 시골 길가에 잠시 정차를 했는데 버스에서 내렸다가 다시 오를 때 보랏빛 나팔꽃을 한 송이 꺾어들고 올라와 나팔꽃을 빙빙 흔들면서 굿모닝 대신에 모닝 글로리!” 로 아침인사를 대신해준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팔꽃의 원산지가 인도라니 참으로 닐루빠 탈라티로부터 강렬한 아침인사를 받은 셈이었습니다. 그 나팔꽃은 영어책 갈피에 넣어두었던 것을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납작하게 종잇장처럼 눌려있는 보랏빛 나팔꽃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닐루빠 탈라티도 이제는 오십 대 중반의 자상한 인도 할머니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시간은 한국이나 인도나 우리들이 이 공간에서 느끼는 동안은 동일하게 지나간다고 알거나 믿고 있는 한 그럴 것입니다. 점심공양 후에는 차실에 있다가 뒤께 쪽마루에 나가 앉아있는데 모처럼 스님께서도 쪽마루에 나와 앉아 차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후3시경 무렵부터 하늘이 점차 어두워졌습니다. 멀리서 천둥 뇌성소리가 멀고 가깝게 들려오고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하얗던 뭉게구름이 갑자기 어두컴컴한 먹구름으로 변하면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바람이 사방에서 함부로 쏘다녔습니다. 그러다 참다 터진 설사처럼 시원한 장대비가 한동안 싸그리 쏟아져 내렸습니다. 하늘로부터 길게 이어진 청죽靑竹 같은 빗줄기가 보는 사람 마음까지 시원하도록 주룩~주룩~ 기세氣勢 좋게 내려주었습니다. 뒷마당으로 뛰어 내려가 직접 두 어깨로 비를 맞지 않더라도 온몸이 상쾌해져갔습니다. 비가 멈추자 얼른 밭에 나가봐야겠다면서 스님은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는 앞께 툇마루로 자리를 옮겨 계곡너머 소나기를 맞아 더 푸릇해진 앞산 등성이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여름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활기찬 하루였습니다.

 

 

 

 

 

  저녁공양에는 지난 번 끓여먹고 남겨둔 밀가루 반죽이 꼭 한 끼 분량이 남아있다면서 한 번 더 수제비를 맛나게 끓여준다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삼세판 세 번째이니까 이번에는 결코 입맛에 짜지 않도록 간에 세심한 신경을 쓰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저녁공양으로 수제비와 밥을 곁들어 먹었습니다. 수제비를 떠먹으면서 사이사이에 한 번씩 수저로 떠먹는 밥이 참 맛있었습니다. 저녁공양을 마치고 설거지를 한 다음 차실로 가서 차를 마시면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께서 어느 도반 절에 가서 차를 마셨는데 이렇게 마시는 것을 보았다면서 녹차에 보이차를 섞어서 차를 빼주었습니다. 그렇게 마셔보았더니 보이차의 지푸라기 썩은 맛이 약간 순화醇化되고 녹차의 은은한 맛이 슬그머니 배어들어 또 그대로 괜찮아 보였습니다. 보이차와 녹차를 섞은 차를 마신 때문인지 잠을 자는 동안 두 개의 기운이 몸 안에서 힘차게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자기 전에 잠깐 세면장에 다녀왔는데 진청색眞靑色 밤하늘은 말짱하게 구름이 걷혀있어서 산등성이 위로 불쑥 솟아있는 음력 열나흘 달이 탱탱한 보름달을 온 얼굴로 시샘하고 있었습니다. 네에,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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