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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12월31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1.04|조회수85 목록 댓글 0

 

 

 

 2018.01.04.. 연암산 높은 하늘이 푸른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1231,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기 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예천동보살님 댁에서 도반님들과 차와 덕담德談을 즐기다보니 벌써 시간이 밤9시를 지나고 있었다. ,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오늘이 정유丁酉年을 보내는 1231일이라 예년 같았으면 오후 너덧 시경에 서울을 출발해서 이 시간에는 천장암 법당에서 새해기원 철야기도를 한창 올리고 있을 시간인데 이번에는 1231일이 일요일이 되는 바람에 거꾸로 서산에 아침 일찍 내려와 사시마지 불공과 일요법회를 보고 송년모임까지 마친 뒤 서울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려니 예천동보살님께서 여기에서 모두 함께 주무시고 내일 무술년 11일 아침에 천장암에 올라가 기도를 하자는 제안을 해주셨고, 정덕거사님께서는 가까운 거사님 댁으로 가서 휴식을 취한 뒤 새해 소망 해맞이를 가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고마운 제안을 또 해주셨다. 물론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때는 아직 천장암을 알지 못했던 때여서, 그해 마지막 날이면 집에서 가까운 봉은사나 불암산 천보사에서 철야기도를 한 다음 운길산 수종사나 불암산에서 새해맞이 해돋이를 구경하고는 했는데 웬일인지 이제 새해 해돋이 구경을 하고 싶다는 열정이 솟아나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법회모임과 형제모임 이외의 다른 모임들에는 열정이 시들해진 모습을 새삼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전 어른들 말씀에 나이가 들면 재미있는 일도 맛있는 음식도 거의 없더라는 바로 그런 현상이 나에게도 슬슬 찾아오는 중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다 서울보살님 몸이 아직 회복 중이라 무리라는 생각에 고마운 말씀을 사양하고 도반님들과 일일이 새해 덕담德談을 나눈 후 차에 올랐다. 오늘이 연휴가 들어있는 연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도로상태가 뻥 뚫려있는 게 너무도 시원스러웠다. 도로 상태는 평소보다 훨씬 좋았으나 차량 속도는 천천히 조절을 해가면서 사분사분 달려갔다. 대략 두 시간이 지난 후 서울에 들어서서 우리 집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탄천2교를 지나가는데 도로 가장자리 3차선에 차들이 비상깜빡이를 켜고 줄줄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도 차량 속도를 늦추어가며 2차선으로 차선을 바꾸어 달리는데 저만큼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롯데타워 빌딩 외벽의 총천연색 네온이 여러 가지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본 서울보살님이 아참, 오늘 자정에 새해맞이 불꽃놀이가 롯데타워에서 있나 봐요.” 라고 말을 해주었다. 으흥, 불꽃놀이란 말이지요. 지난 크리스마스와 그 앞서서 롯데타워 개장식 때도 불꽃놀이가 있었나본데 나는 아직 보지를 못했고, 사실인즉슨 내가 밤하늘에다 대고 쏘아대는 불꽃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대화중에 롯데타워 불꽃놀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느 분이 불꽃이 빌딩 안쪽에서 터져 나온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어떤 형태의 불꽃놀이라는 말인지 두 눈으로 보지 않은 상황이라 궁금하기도 했다. 그때가 1231일 밤 1142분경이었다.

 

 

 

 

 

 

 

  그래서 일단 탄천2교에서 내려와 탄천유수지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모자와 목도리와 장갑으로 온몸을 추위로부터 겹겹이 무장을 한 뒤에 유수지 화장실에 들렀더니 화장실 문이 잠겨있었다. 무언가 다른 방도가 있겠지 하고는 고개를 둘러보았더니 길 건너편에 네온이 반짝거리는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가 보였다.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으나 우리 동네에 있는 눈에 익숙한 위치라 거침없이 매장으로 들어가 2층 홀 한켠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고 홀 안을 둘러보았다. 젊은 부부의 가족단위 나들이나 청춘남녀들의 한해를 정리하는 화려한 모임들이 여기저기에서 만발하고 있었다. 따뜻한 홀 안에서 밖으로 나와 탄천2교로 걸어 올라갔더니 도로 가장자리의 불법주차 차량은 점차 늘어나 깜빡이를 켜놓은 채 3, 2차선을 폭넓게 점유하고 있었고, 걷는 사람들은 다리 중간에 있는 전망대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제 자정 5분전이 되었다. 탄천을 건너는 다리 위라 바람이 쌀쌀했으나 전망대 안쪽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바람에 그런대로 온기가 돌았다. 드디어 롯데타워 빌딩 외벽에 숫자 100이 써지더니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을 했다. ... 10 .. 9 .. 8 .. 7 .. 6 .. 까지는 한국말로 five부터는 영어말로 외쳤다. ... four .. three .. two .. one .. New~ Start! 이러한 외침은 별다른 뜻은 없었고 2018년 새해부터는 한국어와 영어를 나의 공용어로 삼겠다는 의지를 말로 표현해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대화 도중 어느 분의 말대로 화려한 불꽃이 빌딩 안쪽에서 터져 나왔다. 불꽃을 쏘아 올렸다는 표현보다는 터져 나왔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탄천 바람을 맞으면서 대략 10여 분간에 걸친 불꽃놀이와 현란한 네온 쇼를 구경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불꽃놀이 관람평은 가지가지였다. 내 옆 벤치에 올라가 아빠가 찍어주는 동영상 카메라 앞에 서있던 검은 패딩차림의 여대생은 불꽃놀이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보려고 한밤중까지 마음 설레며 기다리다가 추위에 떨면서 30분을 다리 위에서 서성였는데 지난번에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반복할 뿐이네요. 짜증이 나고 추워죽겠어요. , 왕짜증이에요.” 처음 보았던 나는 그런대로 신기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벌써 두어 번 같은 불꽃놀이를 보았던 그 아가씨에게는 그 반복이 짜증과 추위의 연속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 속담에도 듣기 좋은 꽃타령도 한 자리 반이라는 걸로 봐서 인기 있는 노래도 2절 째로 들어가면 벌써 입안에 신맛이 돌더라는 이야기이다. 이걸 보더라도 구경하는 사람이 지루하거나 지겹지 않게 또는 짜증나지 않도록 무언가를 보여주려면 얼마만큼의 노력과 얼마만큼의 기발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지 새삼 경각심을 돋워주는 관람평이었다. 이 불꽃놀이를 위해서 4.5t의 화약과 40억 원의 비용에 눈송이 효과를 위해 뿌려댄 2.5t의 흰 종이를 주최측이 사용했다고 하니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용)로 따져볼 때 주최자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큰 행사였을 듯했다. 그리고 다음날 인터넷 뉴스에 롯데타워 빌딩 주변에 쓰레기가 되어 널려있는 하얀 종이 부스러기들에 대한 기사와 수많은 댓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행사를 진행했으면 뒤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내야지...’ 하는 등으로 당장 쓰레기가 되어버린 2.5t 분량의 눈송이 효과 종이 부스러기가 골치 덩어리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새해맞이 불꽃놀이까지 잘 구경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새벽1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20180101일 새벽 01시가 되었구나. 한 해가 바뀌었고, 한 살을 더 먹었고, 한 해가 더 가까워졌고, 한 해가 더 축적되었으니 시류를 따라 세상은 더 다양하고, 더 분주하고, 더 바쁘게 변화를 해가겠지. 아마 그럴 테지.

 

 

 

 

 

 

 

  새해 11일 아침에 두바이에 출장을 가 있는 아들아이와 뉴욕으로 돌아온 딸아이와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새해인사를 하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와 잠깐 읽던 책을 마저 보고 있는데 서울보살님이 방으로 들어와 형수님에게 방금 전화가 왔었다면서 시골 큰어머님의 부고를 전해주었다. 몇 년 전부터 K시 요양원에 계시던 큰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면 오늘이라도 바로 고향에 내려가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큰집 사촌들은 모두 다 고향에 내려가 있을 것이고 작은집 사촌들에게 연락을 해보았더니 제각각 출발 시간들이 달라서 나라도 먼저 내려가야겠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울보살님이 같이 가겠다고 해서 보살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고 했다. 아직 자동차를 타고 장거리 출타가 무리일 것 같아 혼자 다녀오려고 했는데 서울보살님 입장에서는 큰어머님 초상에 조카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이것저것을 좀 챙겨놓고 출발하려니 벌써 시간이 오후가 되어있었다. 오늘이 11일인데다 사흘 연휴 마지막 날이라 차가 많이 밀리지 않을까 살짝 걱정을 했는데 서울에서 빠져나가기가 힘들었지 막상 고속도로 위에 올라서니 툭 트인 시야가 참 좋았다. 고속도로를 타고 네 시간가량 걸리는 고향길은 지체나 정체 없이 순조롭게 길을 줄여가면서 예정된 시각에 도착을 했다. 발인이 내일 모레라서 오늘밤에는 사촌들과 친지 몇 분 정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차를 몰아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넓고 텅 빈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밖으로 나섰더니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로 훅~ 스며들었다. 코트를 꺼내 어깨에 걸치고 장례식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갔더니 큰집 형제들과 조카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아직은 한가한 분위기 속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큰어머님 영정 앞에 분향을 하고 국화 한 송이를 놓고 나서 재배를 하고 잠시 묵념을 한 후에 상주들과 맞절을 했다. 큰 형님, 작은 형님, 셋째 형님, 그리고 막내와 매형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넷째는 원예기술 사업자 외국 연수중이라고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본 칠십 줄의 형님들이 많이 늙어있었다. 예를 갖춘 다음 편안하게 둘러앉아 사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58년 개띠인 막내가 올해 환갑으로 지난 1231일자로 정년퇴임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이야! 하고 놀랐다. 형님들이 나이가 드신 줄은 알겠는데 항상 막내인 막내 동생조차도 환갑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개구쟁이가 숨어있는 막내의 얼굴을 새삼 들여다보았으나 도무지 실감이 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았더니 막내 동생의 하얀 머리털하며 이마의 짙은 주름이 직장이나 밖에서는 충분히 어른 대접을 받았을 풍모가 엿보였다. 이제 손자들 틈새에서 할머니가 되어버린 누이들과도 인사를 하고 형수님들과 제수씨들에게도 줄줄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고속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도중 휴게소에 잠깐 들려 식사를 하고 왔지만 제수씨가 차려준 밥과 음식들을 한 번 더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큰어머님 영정이 있는 곳으로 가서 형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 일들을 회상하고, 추억하고, 되새겨 보았다. 조금 더 늦게 작은집 사촌들이 모여들고 시골에서 친지들 여러분이 함께 자리를 하자 그런대로 넓은 홀 안이 북적거렸다. 시간이 자정이 넘어서자 갈 사람들은 다 가시고 큰집 작은집 형제들과 조카들만 남게 되었다. 이제 부산해질 내일과 모레를 위해 한숨을 붙일 준비들을 하고 있는데 큰형님이 나에게 오셔서 동생 우리랑 여기에서 끼워 잘 텐가 불편하면 근방 호텔에 방을 준비해두었으니 그쪽으로 가서 잘 텐가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형님 내일모레 큰어머님 발인까지를 보고 가야하는데 제가 내일 오전에 일정이 잡혀있어서 불가피하게 오늘 새벽에라도 서울로 올라가야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큰형님께서 두 손을 내저으시며 그래, 이렇게 초상집에 와주면 되었지. 암암, 밤길인데 천천히 조심해서 올라가게.” 라고 말씀하셨다. 모두에게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서는데 옛날 함께 산 적이 있던 큰형수님께서 다가와 시아제 밤길인께 조심해서 잘 올라가시요 잉.” 하면서 눈물바람을 하셨다. 하얀 박꽃 같던 큰형수님이 어느 샌가 이제 일흔 나이를 넘긴 머리 하얀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의 친 시동생들보다 대렌님.. 대렌님.. 하면서 훨씬 나를 예뻐해 주셨던 그런 큰형수님이었다. 형수님의 두 손을 꾹 한 번 쥐어드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어둡고, 넓고, 텅 비어있어서 휭한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오후에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올 때보다 더 한적해지고 고요해진 고속도로를 달려서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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