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 요 법 회

04월29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5.03|조회수29 목록 댓글 0

 

 

 2018.05.03.. 선선하고 희고 오메.. 오메.. 저 하늘 좀 봐봐봐

 

 

 

 

 

  0429,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 생활은 대체로 즐거웠습니다. 나이가 많은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은 아직도 국어시간에 받아쓰기를 시켰으나 그리 무서운 선생님은 아니었습니다. 시골학교와 도시학교의 다른 점이라면 학과목 수나 수업시간이나 수업량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역시 매일, 한주, 한 달에 치르는 시험의 횟수가 기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내 적응이 되었습니다. 한 집에서 살게 된 한 살 많은 사촌 형이 같은 학교 6학년이었는데, 5학년인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항상 피곤한 얼굴에다 여름에도 입고 다니던 긴 쓰봉 속에 숨기고 있는 종아리에는 새끼 같은 붉은 줄이 항상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아리에 나있는 매 자국에도 등급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테면 10등까지는 한 문제 틀리는데 문제 당 세 대라면 20등까지는 문제 당 두 대씩, 그리고 30등까지는 문제 당 한 대씩 하는 식으로 성적이 올라갈수록 체벌이 강화되는 이상한 시스템이지만 대부분의 학부형들이 자신의 자녀가 틀린 문제 당 세 대씩 등급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도 개발도상국인 1960년대 한국 아니라면 세상에 그 유래가 없을 만큼 독특한 교육방식이고 강렬하게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30등 이하는 어떻게 학습지도를 했는지 궁금하겠지만 또 다아~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6학년 한 반의 학생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도 살짝 궁금해져옵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K시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컸던 학교였는데, 다음해 6학년이 되고 보니 모두 18반까지 있었고 남학생반이 10반까지였습니다. 우리 반은 학생 수가 110명가량이었는데 내 번호가 103번이었습니다. 수업환경이 그러다보니 수업의 능률 극대화를 위해서 선생님 지휘봉이 정신봉精神棒 구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략 3,40여 명의 아이들에게만 집중을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조취만을 취할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때가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에 힘입어 학령아동의 취학률이 양적폭발量的爆發을 시작해버린 시점이라 어찌해볼 수 없었던 한국의 사회적 여건이자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벌써부터 저학년 학생들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이부제二部制 또는 삼부제三部制 수업을 하고 있었고, 그래도 부족한 교실을 충당하기 위해 멀쩡한 강당이나 실습실 등 공간에 베니어판으로 칸막이를 해서 임시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유사이래有史以來의 엄청난 학생들이 유사이래有史以來의 학구열에 불타던 시절이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란 전쟁 후 또는 혹독한 불경기를 겪은 후 사회적·경제적 안정 속에서 태어난 세대를 지칭합니다.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부터 1965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고 평가받는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의 세대와는 달리 경제적 성장과 풍요 속에서 높은 교육 수준과 미디어 영향으로 다양한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을 주도해 왔습니다. 로큰롤 음악과 히피문화가 베이비붐 세대의 대표적인 문화이며, 이들은 냉전의 이념아래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반전운동을 전개하고, 해방, 시민 사회의 권리운동 등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과학기술의 발전, 에너지 위기, 우주선 시대를 겪었고, 1980~1990년대 소비주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이후인 1955년부터 1963, 일본의 경우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를 베이비붐 세대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학구열이 아무리 불타올라도 아이들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관심과 분수에 맞게 각다 놀고 즐기는 방법을 하나하나 개척하고 습득해갔습니다. 경제관념이 빨리 형성된 아이들은 뺀, 두비, 쌈을 따지는 동전 쌈치기 놀이에 열중했고, 힘이 넘쳐나는 아이들은 말뚝박기놀이와 찜뽕에 신이 나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만화가게를 드나들면서 앞으로 문학의 바탕이 될 신간 만화 탐독을 하기 시작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60년대는 김종래, 손의성, 박기당, 백산, 향원 등의 만화가 인기가 있었는데, 나도 굳이 유파를 나누어본다면 아마 만화파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만화 취미는 고우영의 초한지楚漢誌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그리고 오제 아키라의 명가名家의 술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만화에 관련된 기억을 시간을 소급遡及해서 추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1963621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날이라면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였고, 더위를 살짝 느낄 만큼 초여름 햇살이 밝고 강렬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장흥에서 국민학교 3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인데 그날 수업이 끝나고 학교정문을 나섰습니다. 학교정문 주변에는 칡이나 대사리나 불량주스나 솜사탕을 파는 장사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깔아놓은 돗자리 위에 만화를 더미더미 쌓아놓고 임시 만화방을 차려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나는 친구들 몇몇 아이들과 함께 돗자리 옆에 쭈그리고 앉아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하고 이리저리 고르다 몇 권의 만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중 한권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것입니다. 그날 봤던 만화하며 하지夏至라는 것까지 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인지 나도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그 다음날인가 조회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학교가 파한 뒤에 우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더니 세월아~ 가거라~ 하는 한량 같은 걸음걸이로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해찰을 해가면서 길거리에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더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학교를 오고갈 때도 시간을 아껴 허투루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긴 훈계를 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나를 견주고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학교를 파하고 난 뒤 하교 길에 만화가게를 슬슬 들어 다니면서 만화보기를 즐겨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 바로 위편으로 경양방죽이라는 커다란 방죽이 있었는데 이때쯤이면 방죽의 물이 완전히 썩고 오염이 되어서 방죽의 농업용수 기능은 상실해버렸고 그냥 거대한 물구덩이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죽 가장자리를 빙 둘러서 무허가 간이 집들이 촘촘히 들어차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경양방죽 주변에도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낮에 보이는 구질구질하고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밤에 각각 집에서 비치는 불빛이 방죽에 길게 반사되는 풍경은 마치 별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밤중의 하늘은 검고 푸르른 데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경양방죽 저만큼 위에서는 은하수銀河水가 흩뿌린 보석처럼 보슬보슬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