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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5월06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6.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5.12|조회수31 목록 댓글 0

 

 

 2018.05.11.. 미세먼지가 다시 뭉클거린다

 

 

 

 

 

  0506,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6.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얼쑤~ 얼쑤~ 재미있고 흥겨운 시간은 빨리 지나갑니다. 진지~ 진지~ 마찬가지로 진지한 대화도 시간을 빨리 빨리 흘려보냅니다. 불교의 진리를 배우거나 알기 위해 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누구나 들어온 말이 대오大悟나 대각大覺이나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열반涅槃이나 해탈解脫, 과 윤회輪廻도 거의 매번 스님들의 법문 때마다 듣는 말들입니다. 열반이나 해탈이, 대오大悟나 대각大覺이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를 나타내는 함축어含蓄語인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 경지를 가리키는 깨달음이라는 말만 가지고는 사실 깨달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 말이지만 우리들은 살아생전에 깨달은 분을 본 적도 없고, 깨달은 분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깨달음을 알아차릴 안목이 애당초 우리들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항상 추상명사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깨달음이 이렇게 현실現實과 유리遊離되어 몇몇 수행자나 교학자들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사용될 뿐이라면 그 깨달음은 살아있는 깨달음이 아니라 죽어 있는 깨달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목적目的語로서의 깨달음이 아니라 동사動詞로서의 깨달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 불자들은 깨달음의 궁극적인 경지가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나 방법에 시선의 초점焦點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깨닫는 과정은 깨닫는 방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 과정과 수행 방법을 밝혀보는 대화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랑하는 불자들에게는 보람되고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가禪家나 선종禪宗에서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든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 또한 언어이고 문자인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산파술産婆術이라는 대화법對話法을 통해 사람들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시켜주었습니다. 상대방과의 대화와 질문을 통해 자신의 논설이나 논리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참된 앎을 알게 하는 대화법입니다. 이교도들이나 고통과 번민에 휩싸인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가르치신 부처님의 설법교화說法敎化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정도와 경우에 맞추어서 거기에 가장 적절한 가르침으로 모든 사람을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합니다. 중생들의 깨닫는 능력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가서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방법론은 방편시설方便施設이라고 합니다. 方便upaya은 접근하다.는 뜻이고, 施設prajnapti은 알아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처님의 교화방법들을 문답법問答法이라고도 합니다. 역시 향기 맑은 도반들과 함께 대화나 문답을 통해 깨닫는 과정과 깨닫는 방법을 하나 하나 확인하고 알아가는 방법은 좋은 정진精進의 한 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따뜻한 차와 차담茶啖을 다탁위에 올려놓고 둘러앉아 잠시 순간을 보냈을 뿐인데 시간이 벌써 많이 지나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도반님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 시간이면 도로의 가로등과 상가 점포나 도로변 가게의 불은 켜져 있지만 역시 어둠한 도로는 여기저기 텅 비고 한적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습니다. 서산 시내에서 서해안고속도로 통로인 서산IC까지는 2차선 길을 따라 꽤 먼 길을 달려가야 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 이십 여분이 도반님들과의 차 한 잔에 담긴 차담茶談을 정리하고 무의식세계에 가라앉아있는 옛 기억을 되살리는 데는 안성맞춤인 시간이 됩니다. 오늘밤에는 뜬금없이 국민학교5학년 여름방학이던 어느 토요일에 K시에서 트럭을 타고 화순까지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마이크로버스든 트럭이든 산굽이가 많고 경사가 심한 너릿재를 지나가려면 늘 차멀미에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아빠의 허락을 받고 사촌형과 트럭 화물칸에 타고 갔습니다. 트럭 화물칸이란 이를 테면 우리들에게는 오픈카에 해당하는 것으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사방팔방으로 터져있는 경치가 눈앞에 밀려왔다가 멀어져가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아주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트럭이 드디어 너릿재를 향해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리저리 굽이굽이를 빙빙 돌아가면서 올라가는 동안 넘실대는 주변 산경치가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고 지나갔습니다. 고개를 휘휘~ 돌려가면서 높은 마루와 깊을 골을 쳐다보다가 그때 예전에 어른들께 들었던 너릿재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니까 6.25를 전후해서 너릿재에 도라꾸와 제무시GMC가 들들~ 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그때 버스라야 목탄버스 수준이었겠지만 여하튼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버스라도 걷는 것보다야 나았을 테니까 사람을 가득 태운 채 화순에서 너릿재를 넘고 있던 시외버스가 있었답니다. 화순和順은 착한 이름하고는 달리 전체 면적 중 산지山地73%를 차지하고 있고 무등산, 모후산, 백야산 등 유명산을 거느린 산악지대여서 너릿재, 칠구재, 자울재 등 고갯마루도 많아 대낮에도 산적들이 출몰했던 야성野性의 고장이었습니다. 너릿재 아흔아홉 구비를 힘겹고 숨 가쁘게 둘둘 거리면서 오르고 있던 버스가 어느 산굽이를 돌아서는 순간 그만 딱 멈춰 섰더랍니다. 사람들은 에이 이놈의 버스가 또 서부렀네.’ 하며 푸념을 해대는데, 버스 맨 앞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운전기사님의 태도가 이상했다고 합니다. 등판이 넓은 기사님 얼굴이 노래지면서 자꾸 손가락으로 차창 밖을 가리키면서 오메.. 오메.. 할 뿐이었다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차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일까요 바위 같은 호랑이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서 송곳니를 드러낸 채로 으르릉~ 거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버스 승객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 했지만 연륜이 재산이라고 어느 나이 많은 영감님께서 자기도 이런 경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이럴 때는 각자 한 가지씩 소지품을 호랑이 앞으로 던져주고 그 중에서 호랑이가 무는 소지품의 주인을 버스에서 내려놓고 가면 호랑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승객들은 그 영감님 말씀마따나 각자 자신의 소지품 중에서 한 가지를 꺼내어 호랑이 앞으로 던져주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승객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다섯 살배기 아이의 코 수건을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내 아이는 절대 안 되고 자신이 대신 버스에서 내리겠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영감님 말씀이 아이 엄마가 버스에서 내린다고 해도 아무 쓸데없는 짓이 돼버리니 모두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스에서 내려놓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답니다. 그래서 아이엄마가 그렇다면 내가 내 아이와 함께 버스에서 내리겠다고 하자 다른 승객들도 안타까움에 혀를 끌끌 차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저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습니다. 이윽고 아이엄마가 아이를 품에 앉은 채 벌벌 떨면서 버스에서 내리자 길을 막고 있던 호랑이가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버스가 지나갈 수가 있었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호랑이가 아이와 아이엄마 옆으로 다가가는 것을 점차 멀어지는 창밖으로 내다보면서 숨을 죽이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고통스럽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이제 호랑이에게 놀란 버스는 부지런히 산굽이를 돌고 돌아 너릿재 정상에 거의 도착할 순간 아뿔사, 버스 바퀴가 비탈길 가장자리에 물려 미끄러지면서 그만 버스가 계곡을 향해 대굴대굴 굴러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날 버스사고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와 아이엄마라고 했습니다만 원래는 어린아이만 살아남을 운명이었으나 엄마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자신의 목숨까지 살렸다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인데, 이 믿기 어려운 사건이 신문에도 난 적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훨씬 뒤의 일입니다만 계곡이 깊고 산굽이가 험한 고갯마루에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꼭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의 원형原形이 어디엔가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 속에는 참 많은 의미意味들이 함축含蓄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정서情緖가 물씬 물씬 풍겨온다는 점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하늘의 일이어서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를 조신조신 상기想起시켜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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