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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5월13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5.15|조회수33 목록 댓글 0

 

 

 2018.05.15.. 맑은 하늘의 호와 오, 청정淸淨과 오염汚染사이

 

 

 

 

 

  0513,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요즘 영국작가 <버지니아 울프>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습니다. 여류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기법을 발전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이며 뛰어난 작가로 손꼽히며,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열세 살부터 겪기 시작한 신경쇠약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스물두 살 되던 해의 자살기도에 이어 평생을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문학 활동을 했던 버지니아 울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시골집에 피신해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이른 아침 남편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강가로 나가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은 뒤 스스로 삶을 마감해버립니다. 한 마디로 부담스럽고 불편하지만 뛰어난 작가로 평판을 받은 작가라 한번은 스치고라도 지나가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거의 스스로에게 등 떠밀려 읽게 된 책입니다. 물론 재미없습니다. 읽는 내내 계속 읽을 것인지를 갈등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서평이 붙어있는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스처럼 갈등의 독자군讀者群에 함께 휩쓸려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읽고 싶거나 읽어야만 하는 책이 있다는 것은 돈을 쓱싹 버는 일과 더불어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책 댈러웨이 부인의 독후讀後 서평書評이 약간 눈에 거슬립니다. 난해한 의식의 흐름 기법내적 독백을 채택했다는 실험적 의의를 넘어서 예술적 성취까지 이루어 낸 영국 모더니즘 소설의 고전 은 책 뒷장에 쓰여 있는 서평이고, 아마도 절묘하고 더 없이 훌륭하게 구성되어있는 이 걸작에서... 울프는 다른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소설을 쓰는 원리로 표층과 심층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을 터인데, 그녀는 표층을 선택한 다음 할 수 있는 한 깊이 파고든다. - 는 영국작가 <E. M. 포스터>의 서평이고, 그녀의 작품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성과 창조력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 사이에서 절묘한 실험을 성공시킨 영문 소설이다. - 는 남미의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논평입니다. 아니 거슬린다기보다는 서평도 이해하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건 그런데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했으니 이 기회에 한 번씩 읽어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어디 당신도 이 지루함을 한번 당해봐라.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만 막상 권유대로 책을 읽다보면 그런 오해가 생길만도 하다는데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석지현이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이 스님의 책을 ‘70년대에 몇 권 읽은 적이 있어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스님들의 이름은 일감, 운학, 진철 등 법명이나 법호를 부르는데 석지현 스님은 꼭 앞에 석을 넣어 석지현이라고 표기하고 불렀습니다. 이란 부처님 제자라는 뜻입니다. 읽었던 책 제목이 신 혜초의 길을 따라서였든가 신왕오천축국전이었든가 확실치는 않지만 인도에 관심이 많았던 시기에 기행문으로 쓰인 책이라 쉽고 흥미로워서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석지현 스님을 1981년도 겨울에 경복궁 부근의 법련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날 법련사에서 무슨 모임이 있어서 모임에 참석을 하고난 뒤 함께 한 일행 중 한 분이 어느 스님과 수인사를 나누는데, 그 스님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석지현입니다. 하는 소리에 무심코 그쪽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그 만남은 끝이었고 석지현 스님 입장에서는 나라는 사람이 옆에 서있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지나가버렸을 것입니다. 그 후로 스님들이나 글을 쓰는 문인이나 작가들과 함께 인도를 드나드는 경우가 생겼는데 아무래도 처음 읽었던 석지현 스님의 책 내용이 선입견으로 작용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류시화식 편견이나 강석경식으로 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차츰 내 관점으로 인도와 저 너머의 세상을 보는 방법에 익숙해져갔습니다. 인도 나라가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고 왕자와 수행자로써 환락과 고행을 통해 중도中道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원인을 제거해 열반을 성취한 땅이긴 하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더럽고, 열악하고 거친 환경에 둘러싸인 채 극부極富와 극빈極貧이 존재하는,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넘쳐나게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곳이 살아 숨 쉬는 우리들 모두의 이상향理想鄕이거나 꼭 그곳에서만이 우리들이 영생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하거나 성스러운 곳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일상과 일상속의 고통과 갈등이 있고, 별별 인생의 험난한 역경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도 나라 사람들도 일상의 고통과 인생의 역경 안에서 목마른 갈증과 고통을 반복하며 넓고 뜨거운 대지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곳은 수행자들을 위한 영혼의 안식처 같은 천혜의 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흙냄새 진하게 풍기는 땅인 것입니다.

 

 

 

 

 

  아들아이가 서울에서 출장 업무를 마치고 일요일 오후에 미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예약했다고 했습니다. 원래 일요일이면 고북 천장사의 일요법회가 있는 날인데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해서 아들아이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겸 배웅을 하기로 했습니다. 집에서 조금 일찍 출발해서 서울보살님 친구네가 경영하는 양복회사에 들려 아들아이 양복을 두어 벌 골랐습니다. 서울보살님의 연락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일부러 서울보살님 친구 분과 사장님이 본사 매장까지 달려 나와 반겨주어서 팔각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이곳 사장님 역시 회사를 운영하기 전에는 금융권에서 일을 했던 뱅커 출신이라 아들아이와 이런저런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면서 마신 커피가 향이 짙고 맛이 있었습니다. 나는 커피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커피 맛을 분별할 정도는 아니지만 맛이 있다든가 향이 진하다든가 정도는 혀와 코로 느낄 수는 있습니다. 요즘에는 절에서도 작설차나 보이차 못지않게 커피콩을 갈아 내려서 먹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스님들과 커피를 마시는 일이 잦습니다. 그래서 이참 저참 커피를 마시다보니 커피가 조금은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입맛이 숭늉에서 보리차로, 보리차에서 홍차나 커피로 바뀌는데 30년이 미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오감五感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관이 미각味覺이라고 하는데 미각이 그렇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시각이나 청각이나 후각을 사로잡는 데는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감五感을 느끼는 방식이 변화하면 자연 오래된 습속習俗이나 풍습風習에도 변화가 따라옵니다. 문화와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오는 것은 물론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변화에는 속도가 존재하게 되는데, 그 속도감을 받아들일만한 여유餘裕와 포용력包容力이 우리와 우리 사회에 건강하게 살아 있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변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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