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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7월01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7.05|조회수43 목록 댓글 0

 

 

 2018.07.05.. 새벽에 비

 

 

 

 

 

  0701,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지금도 그곳을 영굴 제연동이라고 기억을 하고 있는데 어쩌다 그 동네가 생각나서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보려면 그런 동네에 대한 자료가 없음이라고 화면에 떠올라온다. 내가 그곳 지명을 잘못 알아들었든지 혹은 잘 알아들었지만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곳이 영굴 제연동이라는 기억에는 변함이 없다, 지난 50년 동안만큼은. 그리고 그 장소가 어디쯤인지 확연하지는 않으나 정읍에서 어디론가 한참 더 들어갔든지 아니면 좀 더 위로 올라가 부안이나 김제 부근 혹은 전혀 방향이 다른 임실방면은 아니었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다. 그곳이 전라북도임에는 분명한데 바닷가는 아니었고 내륙으로 한참 들어가 있으면서 어느 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지류가 흐르고 있던 곳이었는데, 그 부근에서 전통방식대로 닥지를 생산하는 곳이 있어서 닥종이 생산과정을 구경하기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어찌어찌 그 시골 동네를 찾아간 것은 그해 여름 방학이 되자 집안사람들과 단체로 여름휴가를 떠났는데, 구성인원으로는 사촌 형님들과 외숙들과 외숙모 한 분까지 포함하여 범 사돈단합대회 성격을 띤 보기 좋은 집안모임이었다. 더구나 큰 외숙을 제외하고는 형님들과 외숙들의 나이 터울이 비슷비슷해서 평소 친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그 즈음에 한창 라면 맛에 불이 붙어 우리 식사를 책임질 쌀과 보리 못지않게 삼양라면을 잔뜩 가지고가서 라면도 참 많이 끓여먹었다. 우리 일행 중에서 작은 외숙이 낚시를 무척 좋아하셔서 낚시터를 여기저기 방방곡곡坊坊曲曲 천리만리千里萬里 많이 돌아다녔던 모양으로 작은 외숙이 알음알음으로 정보를 낚시꾼들에게 전해 듣고는 강력하게 추천을 해서 낚시 겸 천렵川獵 겸 물놀이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친가親家와 외가外家사이를 이어주는 중개인은 당시 중학교2학년이었던 나밖에는 없었지만 형님들과 외숙들은 서로 나이에 맞추어 잘 어울렸으니까 내가 사돈단합대회를 위해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고 나는 내 놀이만을 찾아 열심히 놀면 되었다. 낚시질을 할 때는 작은 외숙 옆에 앉아있었고, 조각배를 빌려 노를 저으면서 강을 따라다닐 때면 막내 형님과 함께 했고, 식사시간에는 외숙모 옆에 붙어 앉아있으면 매사가 영양가 있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잘 풀려나갔다. 대략 일주일가량 영굴 제연동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아마 처음에는 4일정도 예정으로 휴가를 떠났던 것이 그 장소가 일반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골 강마을인데다가 찾아가는 교통편이 다소 복잡해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관계로 사람들이 순박하고 강마을이 한적한데다 뒷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시선 트이는 시원하고 풍성한 강줄기와 어리숙한 물고기들에 매료되어 양가兩家의 만장일치滿場一致로 휴가기간을 연장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68년도 여름이 한창인 7월말에서 8월초였을 것이다.

 

 

 

 

 

  그때는 시외버스 차부가 구 광주역 사거리 길 건너편에 있었으니까 일단 모두 집에서 모여 가방과 짐을 확인하고 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이동을 했는데, 이때 어쩌다가 내가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일행들이 택시에서 내려 보았더니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차부입구부터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는데, 이고지고 날이면 날마다 수시로 하는 휴가여행이 아닌지라 누구라도 아차하면 부산한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택시에 실어놓은 짐 한두 개를 놓고 내리기 십상十常이었다. 그때는 예매제도도 없었던 모양으로 그저 매표소로 달려가 표를 빨리 끊고 자신이 타야할 차를 기다렸던 습성으로 인해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가 사람들의 행동이 부산해져버렸다. 총 대장인 큰 외숙과 총무인 막내 형님이 매표소를 향해 달려갔고 다른 분들도 각자 짐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데, 그때 내 눈에 뭔가가 반짝 띄었던 것이지요. 우리들을 내려준 택시가 막 출발하여 사거리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을 냅다 달려가 겨우 택시를 잡았거든요. 그리고 택시 기사님께 뒷 트렁크를 좀 열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뒷 트렁크를 열어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텐트와 폴대, 팩 등등이 들어있는 커다란 가방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얼른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들고 택시 기사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꾸벅하고는 우리 일행들이 가고 있는 차부 안으로 따라 들어갔더니 가족들이 한군데 모여 있다가 나를 보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버스표를 끊어서 막내형님과 나란히 걸어오던 큰 외숙에게 작은 외숙이 텐트 이야기를 전하자 큰 외숙께서 내 머리를 쓸어주더니 응, 네놈이 한 건 했구나. 라고 말씀하시면서 등을 툭 하고 쳐주었다. 여하튼 더웠지만 기분 좋은 출발이었고, 버스 뒷자리에 앉아 바깥 경치를 구경하다 꾸벅꾸벅 졸다가 하면서 정읍이던가 부안이던가 하는 거점도시 차부에 도착을 했다. 날씨는 더운데다가 시간도 꽤 오래 걸려 모두 졸며 흔들리며 부스스해진 얼굴로 버스에서 내려셔 이번에는 완행 군내버스에 해당하는 지선버스로 갈아타고 시골의 면단위까지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외버스에서 내려 다시 지선버스표를 끊고 지선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이동을 하다가 또 무엇인가 내 눈에 반짝 하고 띄는 것이 있었지요. 그래서 나는 후다닥~ 하고 달려가 우리들이 타고 왔던 시외버스로 뛰어 올라가서는 저 뒤쪽의 좌석 밑 부분을 주욱~ 살펴보았지요. 그랬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혹시 하고는 좌석 너머 뒤 공간을 들여다보았더니 역시나 그 안쪽으로 보퉁이 하나가 뎅그라니 숨어있었다. 좌석 등받이에 가슴을 대고 상체를 깊숙이 숙인 채로 이런저런 반찬들과 간식과 양념 통들이 들어있는 보퉁이를 들어내서 버스에서 내려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이번에는 박수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튼 상으로 사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먹고 있는데 큰 외숙께서 나에게 말하셨다. “네 놈이 평소 천방지축天方地軸인 줄 알았는데, 물건을 잘 챙기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게냐?” 하고 물어본 것이다. “뭐 특별한 방법은 없고요, 그저 처음에 총 보따리 수를 알아놓고는 내릴 때마다 보따리 개수만 한번 세어보면 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흐흥, 그렇구나. 하지만 알고도 맨날 잊어버리지.” 하셨다. 면으로 들어가는 지선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어디론가 구불구불 들어갔는데 지선버스 종착점이라는 데가 우람한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는 초입의 울창한 숲 가장자리인 길가였다. 기사님께 우리들의 목적지까지 거리를 물어보았더니 차로도 이십 여분은 더 걸리고 걸어가면 아마 두어 시간은 걸릴 거라는 대답에 큰 외숙께서 기사님과 무언가 대화를 속닥속닥 나누더니 그대로 지선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영굴 제연동까지 달려갔다. 크지는 않았지만 점차 폭이 넓고 깊어지는 하얀 강이 내려다보이는 비스듬한 산기슭에 10여 가구의 집들이 자유롭게 흩어져있는 강마을은 뒤로는 산기슭을 타고 올라가는 푸른 숲이 있고, 아래로는 좁은 모래밭에 말뚝을 밖아 매어놓은 조각배 두세 척이 수면을 따라 흔들거리는 품 넓은 강에 아침이면 낯바닥을 슬그머니 비춰볼 것 같은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그 중에서 큰 집으로 들어가 민박을 요청했더니 방 두 개를 내주어서 그날부터 하계휴가가 시작이 되었다. 영굴 제연동에 도착을 해서 저녁을 지어먹고 났더니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해서 첫날은 가는 데만 하루 일정이 소요돼버렸다.

 

 

 

 

 

  강변 모래밭에 텐트를 쳐놓은 뒤에 사소한 간식거리나 장비들은 여기 놓아두고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었다. 가장 부지런한 작은 외숙은 대나무 낚싯대를 대여섯 개 부챗살처럼 펼쳐서 강물로 드리워 놓고 선글라스에 밀짚모자를 쓰고 찌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강물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낚싯대를 잡아 챌 때마다 큼직한 붕어나 하얀 물고기들이 낚시 바늘에 딸려 올라왔다. 그리고 한 이틀쯤 지나자 이제부터는 잉어를 잡아봐야겠다면서 주낙을 펼쳐놓고 얼레를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대낚시보다는 주낙이 훨씬 단순하고 쉬워보였다. 낚싯줄이 두툼하게 감겨있는 얼레를 모래바닥에 꼽아놓고 낚싯줄 끝에 있는 납봉과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너덧 개의 낚시 바늘을 물에 이겨놓은 찰진 낚싯밥으로 동그랗게 감싸서 삿대에 집어넣고 어깨너머로 후리듯이 멀리 던지면 강 가운데만큼 날아간 둥근 납봉이 강물로 퐁당~ 빠져 들어갔다. 그러면 얼레를 감아 낚싯줄을 팽팽하게 당긴 후에 얼레를 모래바닥에 박아놓고 팽팽한 낚싯줄에 딸랑이를 걸어놓고는 그저 기다리면 되었다. 어신魚信이 있으면 즉시 딸랑이가 흔들리면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어주므로 낚싯줄을 채듯이 잡아당겨주면 대체로 낚시 바늘에 순박한 물고기가 딸려오기 마련이었다. 주낙은 대낚시에 비해 태양아래 눈부신 수면 위의 찌를 오랫동안 째리고 볼 필요도 없고 그저 딴전을 피우다가도 딸랑딸랑~ 하는 소리만 듣고 달려가서 낚싯줄만 채듯이 잡아당기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주낙은 대낚시에 비해 삿대에 넣고 두 팔 벌려 휘두른 납봉이 수심 깊은 강 가운데까지 날아가기 때문에 한 번 어신이 왔다하면 대개 큰 물고기가 걸려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낚시꾼인 작은 외숙은 월척 붕어보다도 잉어를 귀하게 생각해서인지 잉어에 집착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수염이 있는 놈이면 잉어고 얼굴이 매끈한 놈이면 붕어인데, 사실이지 토종 월척 붕어는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비늘하며 타원체의 갸름하고도 둥그스름한 몸체가 매우 아름다웠는데도 순수 잉어와는 애초에 태생이 다르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맑고 푸른 강물이 유유자적悠悠自適 좋았던지, 물고기가 하늘서당아이처럼 어리숙했던지 물고기들이 자주 잡혀주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큰 외숙은 젊어서 운동선수였기 때문인지 강물 속을 들락거리면서 주로 수영을 하고 시간을 보냈다. 혼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어디만큼 갔다가 한참 뒤에야 별로 힘든 기색도 없이 돌아오고는 했다. 가끔 크롤영법으로 헤엄을 치기도 했지만 대부분 평영으로 장거리 수영을 즐기는 것 같았다. 물론 수영을 배워보면 무슨 무슨 영법泳法보다도 일단 평영平泳에 익숙해지면 어떤 물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어진다. 평영은 힘들이지 않고 오랫동안 물속에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물과 가장 친밀한 영법泳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큰 외숙이 물속에서 보여주는 평영平泳은 참 부드럽고 편안해보였다. 힘들지도 않고 숨이 가쁘지도 않아 보여서 저렇게 헤엄을 치다보면 더 멀리 강 끝까지 한 없이 가도 될 것만 같았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큰 외숙은 젊었을 적 수영선수였었다.

 

 

 

 

 

  큰 형님은 강마을에 휴가를 와서도 텐트 안에서 독서가 주된 활동이었다. 그러니까 도서관이나 서재 대신 산속 강마을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지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는 것이 유일한 취미처럼 보였다. 큰 형님은 낮잠을 자도 꼭 책을 베고 잤다. 큰 형님은 직업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연구하는 학자라는 분위기가 꼭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가르쳐줄 때도 말의 높낮이가 거의 일정해서 말하는 입장에서는 하루 내내 말을 하고 있어도 별로 힘들 것이 없겠지만 들어야하는 입장에 서보면 아차하면 졸리기 일쑤이니 몹시 신경을 집중해야했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을 해서 들어야만 큰 형님의 말이 재미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작은 형님은 건축사여서인지 무언가를 만들거나 부수기를 좋아했다. 손재주가 좋아서 웬만한 것은 뚝딱~ 뚝딱~ 만들기도 잘 하지만 또 새로운 것을 보면 뜯어보거니 부셔놓기도 잘했다. 강마을에 와서도 가장 사용 적합한 형태로 만든다면서 막내 형님을 데리고 모래밭의 텐트를 벌써 몇 번이나 뜯었다 설치했다를 반복했다. 한쪽을 들어올리기도 해보고, 다른 천을 잇대어 공간을 넓히기도 해보고, 천막처럼 사방 공간을 훤히 트이게도 해보고, 마을에서 차일을 빌려와 텐트에 잇대어 담처럼 둘러놓기도 했다. 작은 외숙에게 낚시를 금세 배워서 작은 외숙보다 물고기를 더 잘 잡았다. 막내 외숙은 음식을 만들고 요리하기를 좋아했다. 형수인 외숙모 옆에 서서 붕어찜이나 매운탕을 열심히 만들면서 조리된 요리나 음식의 맛보다는 그 과정들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저런 막내 외숙이 밖에서는 자주 주먹질을 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막내 외숙 안에는 또 다른 막내 외숙이 한 사람 더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유일하게도 큰 형님인 큰 외숙 앞에서는 예의바른 동생이고 조카인 내 앞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자상한 삼촌인데, 이따금 엄마를 통해서 들려오는 막내 외숙의 거친 무용담武勇談은 잘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또 막내 외숙은 요리를 좋아하는 감성남感性男이 아니었던가? 그렇기는 하지만 막내 외숙의 잘 발달된 근육질 몸과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을 보여주는 번듯한 콧대를 보면 저렇게 야성이 풍겨나는 힘과 기세를 안으로 숨겨놓고만 살기에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내 외숙이 물구나무를 선 채로 팔굽혀펴기를 아침마다 하는 것을 자주 봐왔던 것이다. 나는 낚시질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막내 형님과 함께 놀았다. 그것도 민박집 소유의 조각배를 빌려서 노를 저어가며 강물 따라다니면서 구경도하고 수영도 했는데 막내 형님과 꼭 붙어 다녔던 이유 중의 하나라면 큰 외숙께서 막내 형님을 내 보호자로 지명을 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막내 형님은 조용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반듯한 태도의 사람이었다. 말수도 적고 사려 깊은 타입이어서 남과 다투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자신을 잘 나타내지 않는 유형類型이었는데 뒤에 직업군인이 되어 직설적이고 용감무쌍勇敢無雙해진 것을 보고는 아니, 막내 형님에게도 이런 면이 가슴속에 미묘한 씨앗으로 숨어있었던 모양이요라고 말을 했더니 막내 형님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 그렇단다. 제복이 사람을 만들어간단다.” 라고 말을 해주었다.

 

 

 

 

 

  영굴 제연동에서 하계휴가를 보내는 도중 딱 하루 동안 비가 왔었다. 장맛비였던지 지역성 호우였던지 제법 거센 비가 하루 내내 내렸다. 그래서 그날은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집안으로 들어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우리 옆집으로 휴가객이 한 팀 오게 되었는데 어떤 어떤 사정으로 해서 점심을 우리가 머무는 집에서 함께 하게 되었다. 식사를 하면서 어른들끼리 이런저런 말들을 나누고 식사가 끝난 뒤에도 휴가지에서 비오는 날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방에 들어앉아 대화를 하는 것 말고는 마땅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분들은 서울에서 왔다고 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얼굴이 하얀 두 딸들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분들도 원래는 광주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갑자기 분위기가 활발해지면서 대화에 활력이 솟아나는 듯했다. 그쪽 분이 교육계에 있다고 하니 큰 외숙도 교육계에 계신 분이라 서로 누구 누구를 물어보더니 간접적으로라도 누군가를 통해서 서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어른들이야 재미난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나 젊은 형님들이나 어린 나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얼굴 하얀 두 딸들도 재미가 없기는 나와 마찬가지인 듯 했다. 다음날에는 해가 번쩍 하늘 높이 올라와서 강마을에 맑고 쾌청한 날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편의시설이 전무全無한 자연친화형 휴가지는 잘 맞지 않았던지 하루를 지낸 다음날 서울에서 오신 분들은 떠나버렸다. 그러고도 우리들은 이틀인가를 더 머물렀다가 꿈만 같았던 시간들을 보낸 뒤에 영굴 제연동을 떠났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일단 지선버스가 들어오는 종착점까지 걸어가야 했다. 바위도 녹아내리는 8월초의 한 여름이라 몹시 뜨겁고 더웠지만 도중에 소나기가 한 번 시원스럽게 쏟아져주는 바람에 그나마 짐과 보퉁이를 들고 걸을 만했다. 지선버스를 타고 또 시외버스로 바꾸어 타고 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년에도 또 범 사돈단합대회 겸 하계휴가를 가자고했지만 그것이 제1회이자 마지막 회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한 번의 하계휴가는 집안 행사에서 서로가 만날 때마다 즐거운 기억과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해주어서 양질의 친목을 확대재생산하는 추억의 창고가 되고 또 되고 또.. 로또.. 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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