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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7월01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6.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7.08|조회수69 목록 댓글 0

 

 

 2018.07.07.. 맑고 높고 푸른 천공天空으로

 

 

 

 

 

  0701,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6.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하늘색과 공기의 맑기로만 친다면 일 년 중의 대단한 하루로 쳐도 손색이 없을 날입니다. 미세머지도 한 자리 숫자, 초미세먼지도 한 자리 숫자입니다. 그 이유만으로도 오늘은 굉장한 날입니다. ‘6,70년대에 우리들이 자주 썼던 말 중에 ‘~해서 남 주나‘~을 물 쓰듯 하다는 시속어時俗語가 있었습니다. ‘~을 물 쓰듯할 정도로 물은 흔하고 범상한데다 어디서든 차고 넘치는 것이어서 무한정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물을 페트병에, 혹은 유리병에 담아서 점점 비싸게 팔아먹고 우리들은 점점 고액을 지불하며 사먹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속어인 ‘~을 물 쓰듯 하다는 말은 이제 의미가 퇴색되어 죽은 말死語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라 만약 시속어를 만들었다면 물보다 언어적 낭비가 훨씬 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순박했던 우리들이 철석鐵石같이 믿었던 공기도 이제 바닥을 슬슬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는 이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大氣를 공기空氣가 아닌 누렇고 거무스름한 색이 들어찬 색기色氣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제 공기는 한량없는 것이 아니고 제한되고 한정된, 머지않아 물처럼 사먹어야 하는 공산품工産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큰 단위의 생각이나 우려憂慮는 대통령이나 유엔사무총장에게 맡기고 우리들은 하루하루 생활에 매달려 분주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유엔사무총장은 우리들보다 더 바쁜 공적일정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고 삽니다. 말은 시끄럽지만 실제로 물과 공기를 돌보는 사람은 없고 걱정과 우려를 시끄럽게 떠드는 입들만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도 가끔 이렇게 초록草綠 물감 같은 추억의 하늘을 한 번씩 보여주는 듯합니다.

 

 

 

 

 

  오늘이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소서小暑이니 이제부터 진짜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이 대목쯤 해서는 홍도紅島 괴담을 이야기해야할 시간이라고 생각을 한다. ‘71년이라면 지나간 시간들이니 다 잊으셨겠지만 은근히 굵직굵직한 일들이 많았던 해였다. 우선 그해 가을 노벨 문학상 선정에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96년에 개봉했던, 망명시인 네루다와 어부의 아들인 우체부 마리오의 시적詩的 우정을 그린 일 포스티노IL Postino‘는 네루다의 망명시절을 모델로 해서 만든 영화였는데, 작품성이나 흥행성 모두 뛰어났던 좋은 영화였다고 기억을 한다. 그리고 11월에는 불세출不世出의 가수인 돌아가는 삼각지의 배호가 29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내가 생각을 할 때 여자 가수는 무조건 이미자와 심수봉이고, 남자 가수는 좀 뜸을 들여 따져보아도 역시 배호와 마리오 란자Mario Lamza였다. 그해 12월에는 나도 어쩌다 흑백 TV를 통해 직접 시청을 하게 되었는데, 화재사건을 생방송으로 중계를 했던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가 일어났고, 더위가 한창이던 8월에는 당시 우리들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실미도 사건이 터졌으며, 10월에는 본격적인 유신체제가 가동이 되면서 고려대학을 포함한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과 탱크가 캠퍼스에 쳐들어가는 괴이한 일들이 발생을 했다. 배호도 가고 재즈 뮤지션인 루이 암스트롱도 가고, 각 대학은 휴교령休校令이 내려 개점휴업開店休業인 상태로 나라 안이 이렇게 어수선했으나 고등학생들은 고등학생의 생활 범주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든지 그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학원에도 다니고 시험을 보고 방학이면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녔다. 그해 여름방학을 시작하자 우리들은 갑작스럽게 홍도행을 결정하고 성급한 시간표를 짰다. 그렇게 몇몇 친구들과의 돌발적인 홍도여행이 시작되었다.

 

 

 

 

 

  홍도여행은 출발하기 전부터 무언가 약간씩 삐그덕거렸다. 예정에 없던 결정이다 보니 팀을 짜는데도 약간 문제가 생겼다. 이리저리 예닐곱 명의 숫자를 맞추었는데, 그중 한 친구가(사람의 심사心思를 파고들어 이성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이 친구는 나중에 심리학과 교수가 된다) 여행을 가는 장소로 홍도보다 다른 곳을 적극 추천하는 과정에서 논의를 하다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럼 너희들은 홍도를 함께 갈 사람을 구한 것이지 같이 여행을 가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물론 이 말에도 다수의 반응이 시큰둥하니까 같이 참여하려했던 두 친구가 도중하차를 선언해서 다섯 명이 그냥 처음 예정했던 대로 출발하기로 했던 것이다. 홍도를 가려면 역시 목포로 가서 흑산도·홍도를 가는 배편의 배표를 끊은 후에 그 배를 타고 홍도까지 가면 되었다. 그래서 일단 배를 타고 목포항을 출발했는데, 제주도 무전여행 경험이 있는 나는 배가 너무 작은 것에 약간 실망을 했다. 배도 작았지만 낡은데다가 승객을 많이 태워서 배안이 좀이나 붐볐다. 우리들의 자리는 역시 3등칸이라 갑판 밑창의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압도적인 공간이었다. 그래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짐만 3등칸에 옮겨다놓고 우리들은 거의 갑판에 올라와서 바다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날은 날씨도 그러려니와 바람이 강해서 파도가 꽤나 심했다. 자연 여기저기에서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다보니 멀쩡했던 사람들도 덩달아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뱃멀미라는 놈은 차멀미와는 수준이 달라 나중에는 토악질이 문제가 아니라 배창자가 꼬이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 점에서 다소 특별한 경험이었다. 3등칸은 아예 운명아 나 살려라.’ 하는 자세로 죽은 듯이 드러누워 토악질을 해놓은 그 냄새에 압도되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갑판에 있자하니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파도에 뱃멀미의 부담이 배가倍加되는 것 같아 그저 갑판 한구석에 얌전히 쭈그린 채로 앉아 있어야했다. 처음에는 말 수 없는 범생이 친구가, 그 다음에는 공부에는 왕도王道가 있다는 주장을 수시로 펴는 자칭 천재인 친구가, 그 다음에는 인간성 좋고 노래를 좋아해서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솔리토리 맨Solitary Man을 멋지게 불렀던 친구가, 그리고 나,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흑산도쯤 가서 뜨거운 용암을 사방으로 분출해버린 이름이 두 개인 친구가 차례차례로 뱃멀미를 했다. 어찌나 뱃멀미가 고통스러웠던지 제주도 무전여행을 갔을 적에 탔던 통통배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바다가 큰 바다라고해서 파도가 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얕은 바다의 파도가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 쉽게 말하면 난바다(원해遠海)인 태평양의 파도보다 든바다(근해近海)인 황해의 파도가 훨씬 크고 무섭다는 이야기이다. 배 난간을 부여잡고 보낸 고통스러운 시간을 여행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럼 좀 상황이 나아지지 읺을까 하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홍도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막상 홍도 항에 도착을 했더니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해결되어버렸다. 여행旅行이란 이동移動과 정지停止의 효율적인 조화調和라고 한다면 이번 홍도여행은 최악의 이동이 최선의 정지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수많은 경계를 물리치고 홍도에 도착을 했는데 배가 바닷가의 접안시설로 들어가지 않고 섬의 귀퉁이 쪽으로 돌아가 배 갑판의 높이와 비슷한, 침식작용을 받아 수직으로 선 낭떠러지에 배 앞부분을 대놓고 갑판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리라고 전달을 했다. 그것도 안전장치가 있어서 배에서 내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따라 배가 밀려났다가 다시 들어가 낭떠러지와 닿는 순간에 건너뛰어 내리도록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서바이벌 게임도 아니고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행동이지만 그때는 팔팔한 청춘이라 뭐 별로 어려워보이지도 않아서 선원의 손짓에 따라 황토색 배낭을 멘 채 펄쩍 뛰어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보통 한 차례에 서너 명가량 배에서 낭떠러지로 건너갈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배가 파도에 밀려나면 잠시 대기하고 있다가 배가 낭떠러지에 다시 닿게 되면 다음 차례 사람들이 건너가고 하는 방식이었는데 일단 대여섯 명 정도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배에서 대기 중인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다. 남자들은 갑판에서 펄쩍 뛰던지 한 발을 먼저 낭떠러지에 걸치고 다른 발을 얼른 건네면 되었는데 이번에는 첫 번째 도전자가 아리따운 여자 사람이었다. 남자들이 하는 것을 보니 별로 어려운 동작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던지 여자는 갑판 끝을 왼발로 딛고 오른발을 뻗어서 낭떠러지에 걸쳤다. 그런데 남자에 비해 동작이 늦어서 왼발을 움직이려는 순간 배가 뒤로 밀려나기 시작을 했다. 허공중에서 여자 사람의 두 다리가 배가 뒤로 밀려나는 만큼 서서히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글쎄 그때 내가 그 여자 분의 바로 맞은편에 서있었는데, 여자 사람의 얼굴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나도 엉겁결에 상체를 숙여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내손을 얼른 낚아채듯 잡은 여자 사람은 다행히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었는데, 내 가 엎드리는 바람에 등에 메고 있던 배낭 양옆에 꽂아놓았던 폴대가 낭떠러지 아래쪽으로 추락을 해버렸다. 여자가 내 옆으로 두 발을 딛는 것을 본 것과 동시에 낭떠러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더니 상당한 높이였고, 폴대가 떨어진 곳은 파도가 절벽을 때리는 바위투성이의 해식애海蝕崖 아랫부분이었다. 폴대가 떨어져내려 파도 위로 솟구쳐 나온 바위에 튀겨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순간 여자 사람이 만일 내 손을 잡지 못했다면 하고 생각했더니 그만 아찔해지는 것이었다. 여자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위험에 처한 것을 본 선원들은 승객들이 낭떠러지로 건너가는 것을 중지시키고 배를 돌려 접안시설로 향했다. 다음 날 선원 중 한 사람이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놀고 있는 나를 찾아와 폴대를 네 개 다 건네주었는데 하나는 부러져있었다. 그런데 왜 선원들은 배를 몰아 접안시설로 가지 않고 낭떠러지에 배를 대고 승객들에게 곡예를 하듯 건너뛰기를 요구했을까 두고두고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71년도 한국이라서 가능했던 일일까, 혹은 선장과 선원들이 접안시설 사용비용을 아끼려고 그랬을까. 그렇지만 그 생각은 당치 않은 것이 그 많은 승객들을 그런 방법으로 다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어서 스스로 납득이 갈만큼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친구 중 하나가 바위에서 바닷물로 뛰어내렸는데 바로 수면 아래 숨어있던 바위 모서리에 발이 스쳐서 속살이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찢어져버린 것이다. 즉시 보건소를 찾아가 치료를 받고 상처를 여러 바늘 꿰맸지만 그 친구는 나머지 여행 일정 중에도 바닷물 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사건이 줄지어 일어난 데다 발을 다친 친구의 불편도 덜어줄 겸 홍도紅島 안에서도 잦은 이동을 삼가고 원래 흑산도까지 돌아보자던 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주로 해수욕장에서만 한가로이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 하루 중에 비가 왔다. 섬에서는 비가 오면 바람이 분다. 그래서 하루 내내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해수욕장에서 예의도 눈치도 없는 비가 내리면 따로 할 일이 없다. 아니, 할일이 없다기보다는 무언가 할 의욕을 잃어버린다. 해수욕장이란 해수욕을 하는 곳인데, 비가 오면 기온이 내려가고 기온이 내려가면 바닷물이 차가워지므로 바닷물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그러니 할 일이 없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할 일을 만들었다. 인간성 좋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솔리토리 맨Solitary Man을 앞장세워 노래를 불렀다. 그 즈음에는 펄시스터즈의 님아, 커피 한잔,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나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 그리고 라나에 로스포의 사랑해가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그렇긴 해도 이 노래는 잘 부르기가 조금 어려웠다. 사실 양희은의 노래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한계령이었다. 물론 이 노래도 잘 부르기가 꽤 어려웠다. 그야 양희은 노래가 대부분 그렇긴 했다. 그보다 뒤에 나온 이용복의 노래가 부르기에는 더 쉽고 밝아서 좋았다. 그래서 홍도紅島는 홍도 괴담과 더불어 홍어나 홍삼보다는 비와 바람과 노래가 기억에 더욱 남아있다. 그리고 가수 홍민보다는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솔리토리 맨Solitary Man을 잘 불렀던 인간성 좋은 친구가 더 생각이 난다. 그 친구는 지난해 고인故人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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