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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7월08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7.12|조회수22 목록 댓글 0

 

 

 2018.07.12.. 장마도 멀어지고 더위가 시작하는 시점

 

 

 

 

 

  0708, 일요법회 뉘우스 데스크 3.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한국 1등도시인 서울이나 미국 1등도시인 뉴욕에 가보고싶어하는 마음은 한국 마을에 사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미국 마을에 사는 미국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국민학교 시절이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모두 서울에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야 부모님을 따라서 가는 서울 나들이가 대단한 자랑거리였고, 친구들 앞에서 서울말을 멋지게 구사해보는 것도 폼 나는 일이었지만 그 서울말이 어쩐지 어색해서 친구들에게 흉을 잡히기에 딱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중학생쯤 되면 서울에 사는 친척을 의지해서 독립여행을 떠나는 일이 부러운 일이었는데, 그때는 고속버스가 없던 시기라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기차를 타고 떠나야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완행이라고 불렀던 야간열차인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에 놀러갔다 오는 경험은 꼭 한 번쯤은 해봐야지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뭘 좀 아는 축에 끼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에 완행열차라고 불렸던 보통열차는 나중에 비둘기호라는 멋진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역이라는 역에서는 빠짐없이 서야하는 보통열차의 임무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완행열차가 광주역에서 오후5시경에 출발하면 다음날 오전10시경 서울에 도착을 했으니 시간이 꽤 많이 걸리기도 했으나 더 중요한 것은 완행열차 안에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가야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장 저렴하고, 가장 느리고, 가장 많은 역에 정차를 하고, 가장 승객과 짐을 많이 태우는 기차였으니 필연적으로 밤을 새워가며 보고 듣고 먹고 냄새 맡고 느끼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거라는 상상想像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냄새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에는 중학생에게 다소 이른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과 호기심을 가슴속에 가두어둘 수만은 없었었던 모양입니다.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서 허락을 받고 서울에 사는 친척에게 연락까지 해주셨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던지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형과 함께 동행을 시켰습니다.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테네시 주의 멤피스는 남부의 손꼽히는 도시이고 전통이 있는 고장이지만 대학 진학을 할 때는 성적이 아주 뛰어난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테네시 주에 머무르거나 기껏해야 이웃 주인 앨라배마Alabama 나 조지아 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로 미국에서 대학 진학을 할 때면 비싼 학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대학들의 학비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미국 국적자로 자신이 사는 주안에서 진학을 할 경우와 미국 국적자인 경우와 외국인 유학생일 경우 학비가 기분 나쁠 만큼 다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외국인 유학생 한 사람이 미국 학생 한 사람 몫을 부담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학비의 단계가 여러 가지로 구분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을 하는 것인데, 아무렴 대학에서 원하는 성적표라는 조건이 달라붙습니다. 그리고 지방도시의 학생들이 의외로 대도시인 뉴욕생활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원시敬遠視하거나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인 딸아이야 남부인 테네시 주나 동부인 뉴욕이나 타향이기는 마찬가지다보니 부담 체감지수가 별로 다를 것이 없어서 마음 편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학을 진학하고 직장을 선택할 수가 있었던 것인데 멤피스 친구들에게는 그게 대단해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계휴가 시즌이 되면 딸아이를 의지하고 뉴욕으로 놀러오는 멤피스 친구들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인 딸아이가 고등학교 친구들의 뉴욕여행을 위해 함께 데리고 있으면서 주말을 이용해서 안내를 해주는 것이지요. 미국 아이들도 뉴욕에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당연한듯해 보이면서도 , 미국 아이들도 그렇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1969년은 그해 7월 여름방학을 시작하기 바로 전에 아폴로11호가 달에 착륙했습니다. 그리고 착륙선 선장인 닐 암스트롱은 이런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이것은 한 사람에게는 작은 한 걸음에 지나지 않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 미리 준비된 글인지 자신이 생각해낸 문장인지 그 순간을 묘사하는 이만한 글이 없을 만큼 잘 만들어진 문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행잎 화사하던 10월에는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이 한국에서 개봉을 했습니다. 감성 풍부하신 체육선생님께서 다음날 수업시간에 교실로 들어와 그러니까 나는 두 시간 동안 극장 안을 둥실둥실 떠다녔다고 영화평을 해주셨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고난 후 2년 뒤인가 이번에는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를 봤습니다. 그런 뒤로 모든 영화의 기준은 사운드 오브 뮤직닥터 지바고가 되었습니다. 내게는 아폴로11호의 달 착륙보다 사운드 오브 뮤직닥터 지바고가 있었던 한 해였습니다.

 

 

 

 

 

  완행열차 비둘기호는 세 명씩 앉아 마주보게 되어있는 좌석이 있었는데 좌석권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먼저 기차에 올라가 앉으면 그 사람이 자리 임자가 되었다. 그런데 미리 좌석에 물건이나 손수건 같은 흔적을 놓아두고 다른 승객에게 자리를 팔아먹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패거리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다투거나 싸울 수는 없었다. 정체불명들이 모든 좌석을 다 찜하지는 않았으니까 일찍 열차에 올라온 사람은 공짜로, 조금 늦게 올라온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좌석을 사서 자리에 앉았다. 광주역에서 비둘기호를 탄 사람들이 모두 밤을 새워 서울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다. 기차가 서울역까지 달려가는 도중에, 엄밀하게 말하면 서울역이 아니라 용산역까지, 수십 개가 넘을 어느 기차역에선가 내리기도하고 또 누군가가 새로 열차에 오르기도 했다. 전주나 대전 같은 큰 도시 기차역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시골 역에서는 사람이 하나면 짐 보퉁이는 서너 개에다 닭이나 강아지나 오리를 함께 데리고 열차에 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열차간이 동물농장으로 변해가는 것도 흥미로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시끄럽고 농장냄새가 퍼져나자 궁금궁금 했던 사람 사는 냄새를 어쩔 수 없이 눈과 코로 확인하게 되었다. 마주보는 두 좌석 중에서 나와 형, 그리고 앞좌석의 40대 후반 아주머니만 밤을 새워가면서 서울까지 동행을 했다. 전라북도에 들어서는 정읍역에 도착을 해서 두 사람이 내리자 아주머니 옆 두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하얀 교복을 입은 여고 학생 두 명이 가방과 짐 보퉁이를 들고 열차간으로 올라오더니 그 자리에 앉았다. 가방과 짐 보퉁이를 시렁에 얹는 것을 도와주고는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친밀한 일행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곧잘 나누게 되었다. 특히 오지랖 넓고 호기심 많은 아주머니 역할이 컸다. 서너 개 역을 지나치자 두 여고생들이 시렁에서 가방을 내려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금 후에 돌아왔다. 사복으로 말끔하게 갈아입고 얼굴을 화장까지 해놓으니 처음에는 다른 아가씨들인 줄 알았다. 물론 두 아가씨 다 예쁘기는 엄청 예쁘게 변해버렸다. 고향이 정읍이어서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는데 시골은 답답해서 있을 수가 없어서 방학이 많이 남아있지만 서울로 당겨 올라간다고 했다. 기차가 달려가는 사이에 열어놓은 차창으로 짐 보퉁이에 들어있던 감을 꺼내어 버렸다. 왜 그러냐고 아주머니가 물어보자 할머니께서 서울 가는 동안 열차간에서 먹으라고 싸준 우린 감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받아오긴 했는데 단감이 아니라서 누굴 줄 수도 없고 맛이 없으니 먹기는 싫고 해서 버린다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졸다가 아주머니보다는 두 아가씨를 훔쳐보다가 또 졸다가하면서 천안을 지나고 수원을 지나고 완행열차 비둘기호는 북쪽을 향해 기차역마다 쉬면서 줄기차게 달려갔다. 아침이 되면서 기차가 서울 인근으로 접근했는지 철로 주변에 있는 주택 지붕의 TV 안테나가 대밭의 조릿대처럼 솟아나있었다. 워낙 아침시간에 용산역에 도착을 하다 보니 친척집에 들어섰을 때도 아직 한낮이었다. 그날은 친척집에서 저녁을 먹고 동네 한 바퀴만 돌아보고 들어와 잠을 잤다. 다음날부터는 촌놈들이 서울에 가면 반드시 돌아보는 곳- 창경원, 남산 케이블카, 명동, 남대문 시장 -등을 돌아다녔다. 마침 장마전선 활성화되어 창살 없는 감옥처럼 장대비에 꼼짝 못하고 친척집에 묶여있던 날도 이틀이나 되었다. 친지 분께 그동안 고맙고 폐를 많이 끼쳤다고 감사의 인사를 꾸벅 한 뒤에 다시 가방을 챙겨들고 비둘기호 시간에 맞추어 용산역을 향했다.

 

 

 

 

 

  용산역에서도 광주행 비둘기호를 타는 데는 약간의 기술이랄까 요령이 필요했다. 정상적으로 개찰구를 통해 들어가면 열차간 안의 좌석을 정체불명의 사람들로부터 돈을 주고 사야할 테니 이른 시간에 개구멍을 통해 역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개찰구로 들어갈 때 역장 아저씨들이 기차표 귀퉁이를 뚫어주는데 그런 정도는 자기가 스메끼리로 똑같이 뚫어줄 수 있다면서 자신감을 비춰내 보였다. 과 여의 만남도 그렇지만 여행도 사람을 잘 만나야 고생을 줄이고 경비도 절약하는 것이라 용산역 매표소 앞에서 만난 중년 아저씨를 믿고 개구멍을 통해서 역 안으로 몰래 들어가 아무도 없는 비둘기호 열차간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일이 생겼다. 아직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있는데, 서너 사람이 열차간 안으로 들어오더니 우리들을 보고는 , 이 칸은 이 양반들이 먼저 찜을 했네 그랴.” 하고는 돌아서서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와 형은 이게 무슨 영문인가 하고 눈이 동그래져있었는데 같이 앉아있는 아저씨 말에 의하면 돈을 받고 팔기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좌석을 찜하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서 다른 패가 들어가 있는 열차간은 이중으로 찜하는 법이 없이 구역정리를 철저히 해서 서로 간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뭐 간단히 정리하면 날강도들 자기들만의 생존규칙인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같은 일행이 된 아저씨 말고도 얼굴은 매끈하게 생겼는데 열차간에서 만난 여자 털어먹는 이야기만 자랑스럽게 해대는 놈팡이 씨와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쓰고 말 수 없는 30대 초반의 아저씨가 있어서 완행열차가 밤이 되면서 야간열차가 되었으나 지루한 줄 모르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천안에서는 도시락을 사먹고 대전에서는 우동도 사먹었다. 천안은 내 나와바리 라면서 놈팡이 씨가 도시락 값을 냈고 대전에서는 우동 값을 선글라스 아저씨가 냈다. 아침이 되어 광주역에 도착을 하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나 이번 서울여행은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 진동하는완행열차 비둘기호의 추억만으로도 두고두고 만족할만한 여행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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