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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7월08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7.14|조회수49 목록 댓글 0

 

 

 2018.07.14.. 예쁜 기상캐스터는 30도부터 폭염이라고 떠들어댔으니

 

 

 

 

 

  0708,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4.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우리 집에서 나서면 바로 모퉁이에 키 큰 전신주가 장승처럼 서있는 사거리가 보였습니다. 이쪽 편 모퉁이에 위치한 건물 민생약국 옆으로 우리 집이 있으면 대각방향 건너편으로는 광주여고가 있었지요. 우리 집 길 건너 바로 맞은편에는 팥빙수집이 있었고 민생약국 건너편으로는 편물이든가 뜨개실을 팔던 가게가 있었습니다. 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제부터 수학을 이용한다는 말인데 대체로 듣는 사람은 더 복잡해짐) 좌표 평면상에 xy축이 있고, 이 두 축으로 분할되는 네 개의 영역이 생깁니다. 이 네 개의 영역을 오른쪽 윗면부터 반시계방향으로 제1사분면, 2사분면, 3사분면, 4사분면이라 하며 이를 통틀어 사분면四分面이라고 합니다. 민생약국과 우리 집 위치가 2사분면이면 광주여고는 4사분면이고, 우리 집 맞은편인 팥빙수 집은 3사분면이고 민생약국 건너편인 편물 가게는 1사분면이 된다는 말입니다. 참 쉽지요, . 오늘은 이렇게 방향감각을 정확하게 잡고 나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집에서 나와 광주여고 돌담장 길을 따라 50m가량 걸어가면 광주여고 정문이 나타납니다. 정문 앞길 맞은편으로는 문방구가 있고, 팬시점이 있고, 서점도 한두 군데 있었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일 년 내내 푸른 플라스틱발이 쳐져있는 분식집도 있었습니다. 정문을 지나 돌담장 길을 주욱 걸어가면 돌담장이 끝나고 회색 페인트의 약간 낡은 2층 건물부터 시작해서 길가로 일반 민가가 연이어 들어서있었습니다. 그 길을 계속 걸으면 작은 골목길 하나를 지나 큰 도로와 만나는 사거리가 나오는데, 길을 건너 곧장 가면 상무관과 도청이, 왼편으로 가면 세무서가, 오른편으로 가면 장동교차로를 지나 전남여고가 나오는 교통이 복잡한 대로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70년 당시의 그림이니 지금은 지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광주여고도 없고, 세무서도 없고, 상무관이나 도청도 없어져버렸습니다. 광주여고 자리는 국립아시아 문화전당의 공용주차장이 되었고 세무서 자리에는 구청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요,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예전 그림의 풍경風景과 향기香氣를 맡으면서 나만의 지도를 새겨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말에 외출할 때는 이 길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도청이나 상무관, 충장로1가 쪽으로 나갈 때는 이 길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아침에 학교를 갈 때는 이 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곳 집은 바로 그해였던 고등학교1학년 이른 봄부터 살던 집이었는데, 그 시기에는 벌써 의젓한 총각이라 수많은 여학생 틈새를 걸어 다니기가 살짝 쑥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나오자마자 방향을 오른편으로 꺾어 장동교차로를 건너 광주경찰서 앞으로 직진을 해서 충장로 길을 따라 걸어 다녔습니다. 충장로는 시내중심 번화가이기도했지만 학교까지 가는 가장 짧은 지름길이기도 했습니다. 그해 여름,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았던 제주도 무전여행도 다녀오고 난 후 2학기가 무르익어 은행잎 화사한 가을이 되자 슬슬 대입 수험 준비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공부를 하는데 나만 노는 것도 이상하지만 노는 것도 친구가 있어야 재미나는 법이어서 놀더라도 조용히 놀든지 분위기 따라 공부를 하든지 하여튼 뭔가를 선택해야했습니다. 더운 여름에는 집 건너편의 팥빙수 집에서 가끔 팥빙수를 사먹었는데, 그때마다 본의 아니게 광주여고생들과 탁자를 이웃하고 먹어야 했습니다. 새삼 말하자니 좀 그렇긴 하지만 팥빙수 집이 원래는 생사탕生蛇湯 집이었다는 사실을 광주여고학생들이 다 까먹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면 생사탕生蛇湯 집이 무엇을 하는 집인 줄 몰랐던 게지요. 가을이 되니 팥빙수 장사를 치워버리고 뭔가 다른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마 상무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광주여고 돌담장 길을 걸어오다가 민가와 광주여고 돌담장의 경계인 회색 2층 건물 옆집인 한옥에 단팥죽 집이 새로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祝 開業화환도 없고, 커다란 간판도 없이 하얀 화선지에 그냥 단팥죽 시작합니다.’ 하고 문 위에 써 붙여 놓았습니다. 팥빙수와 단팥죽 공통점이라면 받침의 팥인데, 지금은 팥빙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단팥죽은 여전히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단팥빵을 포함해서 팥빙수, 단팥죽을 다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단팥죽을 사먹어 봐야지. 하고는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슬쩍 쳐다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장사가 안 되는지 단팥죽 맛이 없는 것인지 가게 안에 손님이 있는 것 같지도 혹은 들어 다니는 사람이 있어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뭔지 모르게 그 단팥죽 집은 전문 단팥죽 집이라기보다는 심심풀이나 취미삼아 아니라면 가계家計에 최소한의 도움을 얻고자 애호가 수준의 단팥죽 가게를 하고 있는 듯한 무료無聊의 그늘이나 허심虛心의 적요寂寥같은 분위기가 항상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을 경제용어經濟用語로 바꾸면 만성적자慢性赤字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70년 그 즈음이라면 그런 가게나 점포들이 이따금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서점이나 찻집이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좋게 말하면 시간과 여가를 담보로 서정敍情이나 낭만浪漫을 파는 듯한, 좀 사실적으로 말하면 저래 가지고 재료값이나 건지겠나 하는 걱정이 들도록 착한 영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참저참 해서 나는 그 단팥죽 집의 한적閑寂이 좋았고, 그 집 단팥죽 맛과 더불어 단팥죽을 만들어 내오는 주인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만한 단팥죽 집에 주방장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아마 비가 내릴 때마다 화사했던 은행잎이 풀 죽은 노랑나비 되어 땅바닥에 한 잎 두 잎 쌓여갈 무렵이었나 봅니다. 그날따라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광주여고 돌담장 길을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비온 뒤 끝의 으스스한 기운이 목덜미를 섬찟하게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른편의 희부연 형광등 불빛 아래로 약간 퇴색한 단팥죽 시작합니다화선지가 붙어있는 단팥죽 집을 쳐다보았습니다. 창안으로 아직 불이 켜있어서 영업이 끝나지는 않았나 봅니다. 따뜻하고 고소한 단팥죽의 향기가 코에 스르르 밀려드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가게 문을 스르르 열고 들어섰습니다. 단팥죽 집 안은 내가 상상을 해보았던 것처럼 하얀 벽에 격자창 하나와 소박한 탁자 몇 개, 그리고 의자가 놓여있었습니다. 안쪽으로는 주방이 있어서 단팥죽을 그 안에서 만들도록 준비되어있었지만 가게 주인은 탁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격자창 아래 탁자에 앉으면서 가게 주인을 쳐다보았습니다. 가게 주인은 뜨개질하던 바늘과 실을 탁자에 내려놓고 나를 향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국민학교에 다닐 만한 40세 전후의 주인 아주머니는 무엇으로?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차림표를 보았더니 단팥죽 외에도 쌍화차, 대추차, 생강차, 유자차 등이 있었지만 역시 이 집 대표 음식은 단팥죽이었습니다. 단팥죽을 시키고 나서 이제 새로 설치한 연탄난로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양은 주전자 꼭지의 하얀 김을 쳐다보았습니다. 잠시 뒤에 주인 아주머니는 김 오르는 단팥죽을 그릇에 담아들고 주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작은 스푼으로 단팥죽을 한 입 또 한 입 천천히 떠먹었습니다. 단팥죽에는 통 단팥과 가래떡이나 잣이 들어있어서 왠지 전문 단팥죽 집이라기보다는 어느 작은 도시에 사는 이모님 댁에 놀러가 먹는 단팥죽 맛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단팥죽이 담긴 그릇을 들고 걸어오는 모습을 쳐다보았습니다. 표정에 별로 변화가 없는,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 다소 어두워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웃으면 드러나는 하얀 이와 입매가 예쁠 것 같은 얼굴 윤곽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웃어보지 않았거나 웃을 일이 거의 없어서 생활에 무덤덤해진 얼굴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는 웃었을 때의 얼굴을 상상하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심하거나 경직된 표정 뒤에는 화사하고 해맑은 얼굴을 감추고 있는 듯해서 얇고 상이한 두 개의 가면을 겹쳐 쓰고 있는 것 같은 다소 혼돈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단팥죽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 아주머니에게 돈을 내밀었더니 네. 하고는 잔돈을 내주었습니다. 단팥죽 집에 들어올 때도, 단팥죽을 먹고 집에서 나갈 때도 아무런 말이 없다가 오직 단팥죽 값으로 내민 돈을 받았을 때 네, 한 번이 대화의 전부였습니다. 그 말없던 동안에 단팥죽의 달콤한 냄새와 주전자에서 끓고 있던 오차 냄새가 함부로 섞여있는 고소한 냄새가 내 마음에도 베어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뒤로도 몇 차례인가 단팥죽 시작합니다가 쓰여 있는 집에 들어가 단팥죽을 먹었지만 거의 주인과 손님이 나누는 대화는 네. 한 마디였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통 단팥과 가래떡이 들어있는 단팥죽도 격자창 아래 탁자에 홀로 앉아서 먹었습니다. 다음해 봄이 되자 단팥죽 시작합니다화선지가 문 위에서 떼어져있었고 그로부터 머지않아 단팥죽 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 여름 제주도 무전여행이 몸을 움직여 알아가는 관계關係에 대한 수고로운 여행이었다면 그 겨울 단팥죽 집 탐방은 회색 마음을 움직여 찾아가는 성장의례成長儀禮인 무전여행이었나 봅니다. 광주여고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다가 우리학교로 오셔서 영어를 가르친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우리들을 쳐다보지 않고 항상 교실 천장을 보고 수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님처럼 영어 단어와 문장들을 많이 알거나 외우고 있는 선생님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처음 보았습니다. 그 선생님이 일 년 동안 딱 한 번 광주여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광주여고에도 공부를 꽤 하는 녀석들이 있었지, 한두 녀석 정도는 말이야.’

 

 

 

 

 

  며칠 전 유튜브를 통해 (あん): 단팥 인생 이야기라는 일본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납작하게 구운 반죽 사이에 팥소를 넣어 만든 전통 단팥빵 도라야키에 얽힌 내용의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내게도 단팥에 얽혀있는 이야기가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한 번 기억하니 모든 것을 다 추억해내기는 별로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본래 기억記憶이란 장면과 장면들의 단편적인 것이라면 추억追憶이란 자신만의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는 삶의 한 마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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