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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07얼22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8.07.26|조회수67 목록 댓글 0

 

 

 2018.07.24.. 매미 우는소리 들리나요

 

 

 

 

 

  0722,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이제 슈퍼라는 이름을 내건 상점은 없고 모두 마트입니다. 마치 이발소나 이발관이라는 이름을 내건 이용업소理容業所는 없고 모두 블루클럽이나 헤어클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전 슈퍼가 전성할 때는 동네 슈퍼들도 장사가 곧잘 되었는데 요즘 동네 마트들은 장사가 시원치 않은 듯합니다. 그 상점도 ‘8,90년대 슈퍼시절에는 무척 장사가 잘 되던 곳이었는데 같은 장소인데도 이름이 마트로 바뀐 요즘에는 상당히 넓은 매장 공간이 헐렁하게 느껴집니다. 하기야 가정마다 차가 있어서 이동이 수월해진데다가 이왕이면 물건이 많이 있고 사람들이 박시글거리는 하나로마트나 이마트 같은 대형 상점을 사람들이 선호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형 마트가 꼭 가격이 저렴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대형大型, 대량大量, 다품목多品目 다인多人으로 인해 물건이 신선하고 저렴할 것이라는 착시현상에 선량한 고객들이 매번 넘어가고는 합니다. 오늘은 이발理髮을 하러 갔습니다. 요즘처럼 더위가 목덜미에서 산박거릴 때는 이발을 하면 더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실은 이발을 한 본인보다는 보는 사람이 더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보통 이발을 하고나서 두 달가량 지나면 서울보살님이 이발을 하라고 채근採根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긴 머리보다는 아이비스타일Ivy style이 더 어울려요.” 서울보살님이 나에게 이발을 채근할 때면 꼭 쓰는 말이 아이비스타일입니다.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본 적도, 더욱이 아이비리그Ivy League 근처에도(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프린스턴은 관광을 다녀왔습니) 가본 적이 없습니다만 서울보살님에게서 아이비스타일~ 하는 말이 나오면 아이비리그에 유학을 다녀온 셈치고 얼른 이발소에 가서 단정하게 이발을 하고 옵니다. 보통 아이비스타일하면 길쭉한 신사복 상의에 단추가 셋 달려있고 전체적으로 홀쭉한 차림을 말하는데,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단정하고 깔끔한 헤어스타일입니다. 그래서 ’6,70년대 장발과 히피문화가 쓰나미 되어 미국을 덮쳤을 때도 아이비스타일은 나름 자기식의 전통傳統과 가치價値를 고수固守했던 것입니다. 블루클럽에서 이발을 하고 동네슈퍼에 잠깐 들렸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구한 뒤 계산대 앞에서 있는데 계산대 옆에 큰 글씨로 외상사절이라는 표어標語가 붙어있었습니다. 아니 요즘 세상에도 외상을 요구하는 고객이 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옛 추억도 떠올라 직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요즘에도 외상으로 물건을 달라는 사람이 있어요?“ ”, 있어요.“ ”그럼 단골고객에게는 외상을 주기도 합니까?“ ”아니요, 안 주지요.“ ”그렇군요. 옛날에는 동네 상점에서 으레 외상장부를 만들어놓고 물건을 가져갔었는데 이제 외상을 일절一切 안 주는군요.“ 짧은 대화 속이었지만 하마터면 잊고 지나갈 뻔했던 그 이야기가 외상의 추억과 더불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74년 그해도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슬슬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1번지인 서울시 종로구에 소격동昭格洞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종로구가 정치1번지인지는 잘 모르겠고 소격동이라는 동네는 내가 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조계사 위에 있는 안국동 사거리에서 풍문여고와 덕성여중 돌담길을 따라 주욱 걸어 올라가면 덕성여중 담장이 끝나면서 왼편으로 나오는 동네가 소격동인데, 조선시대에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있어서 동네이름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격동만큼이나 자그마한 주변 동네 명칭도 흥미롭다. 소격동 주위의 안국동이나 삼청동은 큰 동네지만 정독도서관이 있는 화동이나 법련사와 법륜사가 있는 사간동, 브라질대사관이 있는 팔판동은 작고 잘 알려지지 않아서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팔판동八判洞은 이름만 딱 들어도 알겠는데 사간동司諫洞은 듣고 잠시 생각을 해봐야한다. 사간동이라, 간사奸邪한 정치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뜻은 아닐 것이고 아니, 사실은 그 정반대다. 사간원司諫院은 사헌부, 홍문관과 더불어 삼사三司라고 불렸던 언론기관으로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관장하는 관서로서 왕의 언행과 그릇된 정치를 지적하고 논박하는 사정기관이었다. 사간동은 사간원이 있었던 곳이라서 그런 동네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보면 소격동을 포함한 사간동, 팔판동, 안국동, 삼청동 등은 예로부터 사대문안의 버젓한 명문 동네였음에 분명하다. 소격동의 가을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지금은 북촌北村이라고 불리면서 유명해져버린 이웃 동네와 주변의 가회동, 그리고 삼청동의 삼청공원이 경치가 수려하고 의외로 한적해서 걷기에도 산책을 즐기기에도 맞춤이었다. 그리고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예전에는 그 자리에 국군수도통합병원이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경복궁이 있었는데, 건춘문建春門 위쪽으로 문이 하나 더 있어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사용되었다. 건물 지붕 형태가 법주사 팔상전八相殿을 본떠 만들어놓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사용 중인데, 그때만 해도 최신 시설을 갖추어놓았던 현대식 건물의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내가 원래 역사歷史와 고적古蹟, 옛 제도制度와 옛 물건들은 좋아하는 취향이라 걸어서 십분 거리인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시로 들어 다니면서 주말을 거의 많이 보냈다. 입장료 저렴하지, 시간제한 없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지, 상대방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신경을 써가며 대화할 필요 없이 혼자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 되지, 걸어 다니다가 다리가 아프면 휴게실 의자에 앉아 그날 감상문을 쓰면 되지, 식사시간이 다가오면 얼른 집으로 돌아오면 되었으니까 나처럼 달큰한 연애를 잘 못하는 고지식한 성깔머리에게는 최고의 공간이자 시간활용이고, 취미생활이자 지식의 보고였다. 사실 그 시기에 배우고 느꼈던 문화재나 유물, 역사적 사실과 문화사적 흐름 등은 평생을 두고 글쓰기의 밑천이자 지적 재산이 되어주었다.

 

 

 

 

 

  그때 국립중앙박물관은 현관을 들어서면 선사실부터 시작해서 삼국시대실과 고려실, 그리고 청자실, 백자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다가 조선시대 수묵화실과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서역실도 있었고, 고려 불상과 조선시대 불상을 함께 모아놓은 불상 전시실도 있어서 나에게는 참으로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별로 높지 않아서 평일에는 말할 것도 없고 주말에도 관람객이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이를 테면 버스를 대절해서 오는 유물 탐방객이나 문화 답사객들이 거의 없어서 소란스러울 일이 별로 없었다. 주로 숙제를 하러온 학생들이나 문화재 관련 전공자나 취미자들이 많이 들어 다녔을 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은 청자실靑瓷室과 백자실白瓷室, 그리고 조선시대 수묵화실水墨畵室과 불상佛像 전시실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국보 169호인 청자양각죽절문병靑瓷陽刻竹節文甁을 가장 좋아했다. 일명 누비주름죽절문병이라고도 하는 이 청자기는 대나무로 표면을 감싸서 사용하던 죽제병竹製甁을 본떠 만든 청자병靑瓷甁인데, 한 번 박물관에 들어가면 그 아름다음에 넋을 잃고 삼십여 분씩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중앙박물관에서 국보 169호가 보이지 않더니만 1986년 중앙청이었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로 잠시 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이전을 하고나서는 영영 그 소식을 알 길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십몇 년 전에 청자양각죽절문병이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달려가서 하루 내내 가멸찬 눈 호사豪奢를 하고 온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용산구 이태원로 소재 삼성 리움 미술관에서 청자양각죽절문병을 임대형식으로 빌려와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것이다. 원래 청자양각죽절문병의 임자가 리움 미술관이었던 모양으로 아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유도 다 그런 까닭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살고 있었던 하숙집에서는 주인아저씨가 가까운 거리의 동네 슈퍼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무엇이든 필요하면 주르르 달려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오고는 월말이면 한꺼번에 갚았다. 뭐 월말이면 한방에 몽땅 갚는다니까 월말에 월급을 받아서 갚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학생신분이라 월말에 집에서 한 달분 용돈이 올라오면 그 돈으로 외상값을 갚았다는 이야기다. 외상장부에 이것저것 써넣고는 그 옆에 내 사인을 한 뒤에 물건이든 주전부리 등 뭐든 갖다가 쓰고 먹고 하다보면 월말에는 그 외상값이 만만치가 않았다. 옛날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 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외상으로 사거나 먹는 재미라는 게 있어서 쉽사리 외상거래를 끊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때는 주인아저씨가 슬쩍 외상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 그해가 외상거래를 해보았던 마지막 년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다른 동네로 옮기고 자취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외상을 해주는 가게도 없었고 또 외상거래를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건 그런데 그해 가을 어느 날, 신문에서 이상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늦가을로 들어서면서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안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박물관 각 실마다 배치된 안전요원들이 잇따라 죽어간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평소 잦은 박물관 방문으로 인해 각 실안에서 근무하는 안전요원들도 몇몇 아는 분들이 있는지라 뭐라 말할 수 없는 호기심好奇心과 궁금증이 화악~ 가슴속에서 생겨났다. 소위 박물관 전시품 보호 관리를 위해 각 실안에 한 명씩 배치되어있는 안전요원들은 각 실 한 구석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근무를 해야 하는데, 그 시절에는 관람객에게 설명이나 안내라는 것은 없었으니까 하루 내내 그렇게 지켜보면서 앉아있는 것이 주 업무였다. 이유야 어떻든 늦가을로 들어서면서 안전요원 몇 사람이 한두 달사이로 연거푸 쓰러지니까 박물관안팎으로 흉흉洶洶한 소문이 돌기 마련이었고, 안전요원들도 필요 이상의 민감한 태도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 즈음에는 나도 부지런히 박물관을 들어 다녔던 때이기도 해서 다른 관람객들보다 이런저런 소문이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평일에는 보통 오후6시면 박물관 개관이 끝나는데 토요일이나 일요일, 또는 공휴일에는 한 시간 더 늦은 오후7시에 박물관 문을 닫혔다. 벌써 11월 오후6시경이면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웠고, 박물관 안에 있는 각 실도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 관람객마저 뚝 끊겨있어서 하루 내내 근무를 서야하는 근무자가 아닌 관람객 입장에서도 싸늘하고 불온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무심히 어느 실로 들어갔다가 구석에 앉아 있는 검은 형상을 보고 섬뜩하게 놀랐던 경험도 있었지만 실은 검은 형상이란 바로 안전요원이었던 것이다. 관람객이야 그런 정도였으나 안전요원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인 소문이 떠돌았고 일부 근무자들은 그 소문을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쉽게 말하면 불온한 기운이 박물관 안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 근무자에게 얻어들은 것이라서 사실 긴가민가했으나 본래 박물관에 전시 중인 유물이나 유품이라는 것이 죽은 사람과 관련 없는 물건이란 하나도 없는 것이라서 일견一見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박물관 분위기라는 게 늘 차분하도록 가라앉아있는데다가 과거와 현재의 시간과 공간이 마구 섞여있는 곳이어서 유일하게 고인故人들과, 죽은 사람들이라고 쉽게 고쳐 말해도 된다, 대화가 가능한 곳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나 세력이 있다고 한들 현 상황을 부정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알고 있던 한 근무자도 하루하루 근무를 하기가 너무도 길고 마음이 불안해서 신중하게 이직을 고려하는, 하여튼 그런 상황이었다.

 

 

 

 

 

  토요일 오후라면 데이트 같은 달콤한 시간이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을 내게는 박물관 관람만큼 평화롭고 아늑한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토요일 오후에는 폐관시간이 한 시간이나 더 연장이 되고 폐관을 앞둔 두어 시간은 거의 박물관 전체를 나 홀로 독차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넓고 한적閑寂하고 자유로웠다. 그날도 늦은 점심을 먹고 박물관 나들이에 나섰다. 어쩌면 첫눈이 내릴지도 모를 만큼 잔뜩 흐리고 바람 끝이 쌀쌀한 날이었다. 잰 걸음으로 중앙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더니 따스한 공기가 부드럽게 사방으로 흘러 다니고 있었다. 여느 공예전이나 미술전과는 달리 박물관 유물이나 전시품은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볼 때마다 보는 관점이랄까 대상을 받아들이는 시각이 조금씩 달라져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날씨도 이런데다 오후가 늦어지자 자연 관람객들이 슬금슬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수묵화실과 청자실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고 잠시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다가 휴게실 의자에 앉아 그날 감상문을 작성하고는 이제 한 군데만 더 들렸다가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지 생각을 했다. 아직 폐관시간까지는 여유가 꽤 있었지만 오늘 오후는 너무도 호젓한 것 같아 박물관 안을 돌아다니는 따스한 공기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실 안으로 들어가 몇 가지를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생각을 해본 뒤에 그 실을 통과해 나오려는데 한 쪽 구석 의자에 근무자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 실 근무자는 내가 알고 있는 분이라 가벼운 목례라도 하고 갈 양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는데 어, 이상하다. 내가 전혀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이 짙은 곤색 근무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목례를 하려다가 엉거주춤 눈길을 돌리고 그 자리를 지나쳐 그 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직을 신중하게 고려해보고 있다더니 정말 최근에 그만두었나보다고 생각하면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현관 옆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다 나와 눈길이 마주쳤는데 어라, 바로 그 실 근무자였다. 그래서 내가 오늘 어느 실 근무 아니에요? 하고 물었더니 응, 잠깐 전화가 와서 사무실에 전화를 받으러 왔다가 다시 그 실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내가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실 근무자 이야기를 빨리 해주었더니 근무자의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 다른 직원 한 사람을 데리고 나오면서 함께 그 실로 가보자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이 거의 달리다시피 그 실로 쫓아 들어갔다. 그렇게 그 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자 의지에 앉아있던 검은 형체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반대편 입구 쪽으로 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쫒아가 보았으나 입구 밖에는 그리고 그 주변에는 아무 것도 있지 않았다.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실 근무자들이 모여들었고 방금 전 상황을 듣고는 모두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근무자가 이번 주만 벌써 몇 번째 보는 것 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더러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을 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보았던 짙은 곤색 근무복 차림의 처음 본 근무자는 절대 무섭거나 흉측한 인상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두렵고 무섭기보다는 허탈하거나 슬픔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던 늦은 오후 첫눈을 암시하는 잿빛 하늘을 닮은 그런 모습이었다. 신문에 나거나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뒤로 어떤 행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동안 시간이 지나자 그런 이야기들이 잠잠해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평화롭고 차분한 박물관 본래의 분위기가 돌아왔다.

 

 

 

 

 

  새로 이사 간 집이 박물관에서 멀어지고 다른 일에 또 재미를 붙이자 박물관 가는 일이 점점 뜸해지다가 군대를 가는 바람에 한동안 박물관에 가지를 못했다. 세월이 풍선처럼 날아올라 2005년 용산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을 한 뒤로는 내 아이들을 데리고 몇 차례 다녀왔고 특별전이 있으면 개인적으로도 용산 박물관에 다녀왔는데, 근래 7,8여 년 동안에는 박물관에 가본 적이 아마 없는 듯했다. 아니, 한 번인가 있었다. 2011년 봄 이었던가 실크로드와 둔황전이 있었는데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전시된다는 소식을 듣고 박물관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리고 두세 시간동안 왕오천축국전 앞에만 서있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전시한 세 차례의 실크로드 전을 모두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처음에는 현 국립민속발물관 자리였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번째는 구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 번째로는 이곳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둔황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박물관에서 무엇을 보고오든 자유다. 박물관에서 무엇을 배우든 그것도 자유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무엇을 느끼든 정말 자유다. 애당초 호박이나 고추, 그리고 박물관 따위에 의지나 의미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곳에서 의미를 찾고 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순전히 각자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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