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5.木. 맑음
남도순례南道巡禮, 우동 한 그릇.
천장암에 마음을 내려놓은 후 매주 일요법회를 마치고 도반님들과 성지순례를 다닌 뒤로 일 년이 넘어서야 하룻밤을 머물고 돌아오는 일박이일一泊二日의 남도사찰순례南道寺刹巡禮를 떠나게 되었다. 여러 단체를 통해서 수많은 법우님들과 다양한 사찰순례를 다녀보았지만 이번 사찰순례는 다소 각별各別한 데가 있어서 의미 있는 순례巡禮길이고, 여행旅行길이고, 소풍逍風길이었다. 오전9시에 천장암에 모두 모여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일정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서야 10시 가까이 되어 출발하였으니 이른 시작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일상처럼 편안하고 사분사분한 첫걸음이었다. 천안 당진간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첫 번째 휴게소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일단 첫 번째 휴게소로 들어가 보았는데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인데다가 먼저 도착해있던 1호차 일행들이 미리 차를 한 잔 씩 마시고 부릉~ 떠나버리는지라 우리들도 괜히 들렀나? 하는 심정으로 바삐 휴게소를 나왔다. 우리 차에 탄 백화보살님이 다른 차량들과 주고받는 부지런한 카톡을 통해 점심식사는 호남고속도로 초입인 여산 휴게소에서 한다고 알려주었다. 점심식사를 여산휴게소에서 한다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자주 오르내렸던 나는 그 많은 휴게소 중에서도 음식 맛이 있기로는 죽암휴게소와 여산휴게소를 치켜세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안논산간 민자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대전까지 돌아갈 필요가 없어져서 죽암휴게소는 들려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래서 죽암휴게소의 햄버거 맛과 핫도그 맛도 잊힌 지 그 만큼의 시간이 흘러갔다.
지금은 오십이 넘은 내 아우들이 중학교 다닐 적에 함께 서울로 데리고 가면서 고속버스가 들어간 죽암휴게소에서 햄버거와 핫도그를 사주었더니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그때 이야기를 두고두고 한 기억이 남아있기도하다. 그때 서울로 데리고 간 동생들에게는 다른 곳은 다 그만두고 서울대와 고려대와 연세대와 동국대 캠퍼스를 구경시켜주었다. 큰형이 직접 안내하는 서울 캠퍼스투어를 별로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순방巡訪 덕분인지 동생들도 나를 따라 줄줄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넓고 넓은 바다에 떠있는 한 점 섬처럼 끝없는 고속도로 한켠에 붙어있는 휴게소도 한 점 섬 같은 곳이다. 망망대해에서 중간기착지인 섬이란 잠시 들러 지나치는 곳이지 마음을 내려놓고 머무는 곳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속도로 휴게소도 누구든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잠깐 들렀다가 떠나는 곳이다. 그래서 고속도로 휴게소의 기억은 짧고 단편적이다. 그렇지만 짧고 단편적인 것들이 반복되면 길고 깊어진다. 이만한 크기의 한반도 땅에서라면 순례든 탐방이든 여행이든 고속도로 휴게소를 거쳐 가는 기억이나 추억은 바다 속에 잠겨있는 섬의 숨겨진 부분만큼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미 나에게는 죽암휴게소와 여산휴게소는 큰 섬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벗어나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있는 여산휴게소에 도착했다.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벌써 일행들이 자리를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있는 일행들에게 우동과 라면 중 무엇을 드실래요? 하고 백화보살님이 물었다. 라면이 다섯, 우동이 셋이었다. 옆에 앉은 태평거사님께 “아니 아침식사도 집에서 라면을 드셨다면서 또 라면을 먹어요?” 하고 물었더니 소탈하게 씩 웃으면서 “김밥에는 역시 라면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식탁위에는 팔모보살님께서 손수 준비해온 김밥이 알루미늄 은박지에 싸인 채 탐스럽게 놓여있었다. 잠시 후 우동과 라면이 나왔다. 이번 순례일정의 총무를 맡고 있는 백화보살님과 친구 진월거사님께서 주문부터 서빙까지 몽땅 해주시는 바람에 우리들은 편안하게 앉아서 음식을 즐길 수가 있었다. 3500원짜리 라면과 4500원짜리 유부우동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며 ‘날 잡수~’ 하는 표정을 짓고 식탁에 올라왔다. 맑은 국물에 통통한 국수 가락과 몇 점의 파, 그리고 노란 유부가 올려 진 평범하기 그지없는 휴게소 유부우동이 이렇게 맛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뜨끈한 우동국물의 간도 좋았고, 쫄깃한 면발도 좋았고, 모처럼 먹어보는 노란 단무지도 감각적感覺的이었지만 함께 먹는 그 자리의 그 분위기가 참으로 행복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어야하는 이유가 그저 배를 불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안平安과 한데 모인 행복감幸福感의 성취라고 한다면 여산휴게소의 유부우동 한 그릇은 깊고 넓은 의미意味와 정취情趣를 모두 껴안고 있었다. 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순례일정의 첫 점심식사를 하면서 일박이일 성지순례의 만각萬覺 중 벌써 절반을 만끽滿喫하고 있는 중이었다.
(- 남도순례南道巡禮, 우동 한 그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