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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경허집 발간의 불교사적 의의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3.05.25|조회수48 목록 댓글 0

경허집 발간의 불교사적 의의
| 2010·10·30 09:12
  

 

[최병헌 칼럼] '경허집 발간의 불교사적 의의'

선풍 진작 추구하던 수좌들의 염원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에도 큰 기여


 

‘우리 공로자의 표창은 우리 손으로’ 라는 표어 아래 1942년『경허집』을 발간한 것은 한국근대불교사에서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이것은 한국 근대선의 부흥자로서의 경허의 불교사적 위치를 정립시켜주고, 나아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이 책의 발간을 주관한 곳이 선학원이었고, 40여명에 이르는 발기인의 명단에 당시의 대표적인 선승들이 망라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선학원, 선우공제회, 선리참구원, 조선불교선종 등으로 이어지면서 일관되게 전통불교의 수호와 선풍의 진작을 추구하여 왔던 선원수좌들의 염원의 결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용운의 『경허집』서문에 의하면 1935년에 이미 송만공이 간행을 목적으로 원고를 수집하여 한용운에게 교열과 서문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이 해에 선학원은 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불교선종을 창립, 종규를 비롯한 일련의 규칙을 제정하고 경허의 사법제자들인 신혜월, 송만공, 방한암 등을 종정으로 선임한 바 있었는데, 이때 『경허집』 간행도 함께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허의 만년 잠적하던 때의 글까지 전부 찾아 완벽을 기한 뒤에 인쇄에 부치자는 주장에 따라 발간은 미루어졌다. 1942년 봄에 다시 김영운과 윤등암 등이 경허가 만년에 은거하였던 갑산, 강계와 만주 등의 지역을 찾아 유고를 수집하고, 마침내 6월 발기하여 9월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경허집』 간행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단순히 자료 수집상의 문제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을 통하여 본말사체제라는 분할통제 방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한국불교계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시켜 준다는 미명하에 조선초기의 선교양종을 표방하였는데, 이에 비판적인 선원수좌들은 친일지주적인 성격을 띤 본산주지들에 대항하여 전통불교의 수호와 선풍의 진작을 추구하는 선학원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선원수좌들의 끈질긴 노력은 1935년의 조선불교선종의 창립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선종의 표방은 실체가 모호한 선교양종에 대항하여 선종 주류의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내세우려는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1937년부터 일제의 후원을 받아 총본산운동이 추진되어 1941년 조계종이 창립되기에 이르자, 교단의 실권을 갖지 못하였던 선원수좌들에 의한 선종은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선원수좌들은 1939년과 1941년 연이어 선종의 정기선회를 개최하면서 선풍진작과 정체성확립을 위해 끈질긴 노력을 전개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특히 1941년 조계종이 발족되기 직전 유고법회 개최를 계기로 하여 선학원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조선총독부에 회유되어 조계종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학원을 중심으로 하여 『경허집』을 발간한 것은 경허 개인적인 선양사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43년 간행한 선학원 판 『경허집』의 정혜결사문 끝부분에 ‘삼가 이 수승한 인연으로 (한국)황제폐하 성수만세…’로 시작되는 11행이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전시총동원체제하에서의 일제총독부 당국의 검열에 걸려 삭제될 정도로 일제의 불교계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얼마나 철저하였던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출처 : 법보신문 10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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