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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선학원 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3.05.25|조회수79 목록 댓글 0

<차 례>
Ⅰ. 머리말
Ⅱ.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인
Ⅲ. 불교교육의 전통성 강조와 회복
Ⅳ. 왜색화 금지와 호법운동
Ⅴ. 맺음말

 


선학원 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오 경 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국문요약>
선학원의 설립은 1910년에 진행된 임제종(臨濟宗) 운동과 같은 항일적 성격과
그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조선불교가 일본불교에 종속되는 것을 반대하는 명분
이라든지 운동의 주체 세력들이 선학원 설립에도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선학원은 설립과 중흥을 통해 급격하게 쇠퇴해 가는 계정혜(戒定慧) 3학(學)의
체계를 면면히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한 의도 역시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3학은
한국 불교가 지닌 독자성과 암울하고 질곡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생명력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이 존립의 근간이 불교의 일본화와 탄압, 그리고 소외로 소멸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당시 전통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은 수행자가 부인을
거느리고, 고기를 먹는 풍조와 신학문 강조로 인해 불교계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
다.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교무원(敎務院)과 대다수 본산 주지들이 학교교육만
을 강조하여 교리연구뿐만 아니라 지리학.심리학.천문학 등을 가미하고자 한 결
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묘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교리(敎理)를 연구한다는 자
긍심이 생겨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학원은 1931년 중흥을 계기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
다. 청정비구승의 수행풍토 개선을 위해 우선적으로 진력하였지만, 대승경전에
대한 설법과 백용성.송만공 등 고승들이 일반대중에게 다양한 설법과 강화를 펼
치기도 하였다.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의 배경에는 일제하 불교계의 화두이기도 한 대처식육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대처식육의 문제는 한국 불교의 이념, 수행, 교
육, 일제의 불교정책 등 당시 불교계가 직면한 근본적이고도 실제적인 문제와 결
부되어 있었으며, 해방 이후 불교계의 정화운동(淨化運動)으로 이어지기도 하였
다. 수행자가 부인을 거느리는 풍조는 1910년대 일본 유학승이 귀국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불교계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결국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
는 불교의 전통은 사라져 버렸다. 이에 대해 백용성을 중심으로 한 비구승들은
1926년 수행자가 부인을 거느리고 고기를 먹는 풍조를 금지하는 것을 건의하는
건백서(建白書)를 2차에 걸쳐 제출하기도 하였다. 불교계의 이러한 요구는 1935년
선학원이 개최한 제3차 조선불교 수좌대회에서 재현되었다. 교무원 종회(宗會)에
수좌들의 안정적인 수행과 그 환경을 위해 청정 사찰을 할애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1939년 선학원의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朝鮮佛敎禪
宗定期禪會)가 개최될 당시에도 계속되었다.
결국 선학원은 침체된 선원의 부활과 수좌들의 수행여건 향상만을 위해 설립
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침략과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인한 불교계의 혼란과 위
기를 총체적으로 극복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한국불교가 지닌 독
자성과 주체성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중흥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주제어: 선학원(禪學院),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 계율(戒律), 대처식육(帶妻
食肉), 조선불교수좌대회(朝鮮佛敎首座大會)

 

 



선학원 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 오경후 

 
Ⅰ. 머리말
일제하 불교사는 현대불교사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
에 그 가치는 중요하다. 그 영향 또한 현대불교사에 직접적으로 미치고
있기에 평가를 유보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근현대불교
사의 중요성이나 실제적인 영향은 그 연구를 부진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불교사 연구에서 근현대불교사 연구가 후발주자이며
질적 양적 성과가 더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가속도가 더해지고
있다. 친일과 항일이라든가, 정화운동과 같은 불교사와 이념이 혼재된
문제 역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단편적인 자료소개나 사실
나열과 같은 초기단계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도 남기고 있다.1) 초기단계
의 연구수준은 세부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기다리고 있다. 선학원사의
규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선학원사에 관한 연구는 그 불교사적 가치와는 달리 그 시기도 비교
적 짧고, 양적인 성과 역시 미진하다. 초기 연구는 정광호에 의해서 이
루어졌다. 1972년 그는 선학원의 설립배경과 전개를 포함한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였다.2) 그는 문헌자료와 함께 선학원 관련자와의 인터뷰
1) 선학원의 학술회의는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근현대불교사 연구에 대한 기왕
의 동향과 앞으로의 과제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학계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
하였다. 김광식, ..일제하 불교계 인물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논평., ..한국
근현대불교사연구의 동향과 과제..(서울: 한국불교선리연구원 학술회의자료
집, 2006), 73쪽
2) 정광호는 1972년 5월부터 9월까지 ≪대한불교≫에 .선학원반세기.라는 제
목으로 연재하였다. 이 글은 .한국전통선맥의 계승운동., ..근대한일관계사
연구..(인천: 인하대출판부, 1994)으로 정리되었으며[김광식, .일제하 선학원
의 성격., ..한국근대불교사연구..(서울: 민족사, 1996) 96쪽 각주4에서 재인
용] 또한 그의 저서 ..일본침략시기의 한.일불교관계사..(서울: 아름다운세상,
2001)에 재수록되었다.
선문화연구 창간호를 통한 구술자료 역시 소개하고 있는데, 선학원사에 관한 최초의 연구성과라는 의미와 함께 그 정확성과 구체성을 더해 주고 있다. 이후 김광식은 정광호의 논고를 기초로 1920~30년대 불교계에서 간행된 문헌자
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선학원의 활동을 시기별로 세분화.체계화시켜
정리하기도 하였다.3) 이러한 면모는 정광호의 연구보다 한 단계 진전된
것이다. 그러나 선학원의 설립배경과 전개, 변화라는 기초적 연구가 지
닌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선학원에 관한 연구는 이밖에도 선학원
에 관한 생생한 증언 기록이나4) 조계종교육원5) 그리고 김순석의 연구6)
가 있다. 그러나 김광식의 연구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선학원
사를 특정 종단사의 일부분으로, 혹은 지극히 부정적인 측면에서 평가
하고 있다.7)
이와 같이 선학원사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그 불교사적 위상과는
달리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성과 역시 불교계의
3) 김광식, .일제하 선학원의 운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8(천안: 독
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1994); .일제하 선학원의 성격., ..순국.. 63(서
울: 순국선열유족회, 1996); ..한국근대불교사연구..(서울: 민족사, 1996); .선학
원의 설립과 전개., ..선학원설립의 사적 의미고찰..(서울: 선학원한국불교선
리연구원 제1회학술세미나자료집, 2005)
4) 강석주.박경훈, ..제8장 한국불교 왜색화에 대한 저항., ..불교근세백년..(서
울: 민족사, 2002); 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 .석주스님-선학원과
함께 한 40년-., ..22인의 증언을 통해본 근현대불교사..(서울: 선우도량출판
부, 2002)
5) 조계종교육원, .선학원의 창립과 전통불교수호., ..조계종사(근현대편)..(서
울: 조계종출판사, 2001), 97-100쪽. ..조계종사..(근현대편)는 선학원사를 3페
이지에 걸쳐 아주 소략하게 취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6) 김순석, .선학원의 전통 선맥 계승운동과 ‘帶妻食肉’금지론의 전개., ..일제시
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서울: 경인문화사, 2004); .1930
년대 후반 선학원의 성격변화., ..선학원 설립의 사적 의미 고찰..(서울: 선학
원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제1회학술세미나자료집, 2005)
7) 태고종단사간행위원회, ..태고종사..(서울, 2006)

선학원 운동의 정신사적 기초 / 오경후 
抗日적 면모라든가 성격만을 전제하여 그 활동만을 규명하는 지극히 단
선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8) 선학원의 선우공제회나 부인선원의 활
동, 선학원 소속 승려들의 행적과 같은 세부적이고 본질적인 연구는 미
진한 실정이다. 여기에는 관련 자료의 부족과 같은 한계 역시 남아 있다.
아울러 이 시기 불교사라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근본적인 이해나 새로
운 해석의 시도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요컨대 선학원사는
그 설립배경부터 그 역사적 의의까지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진전시켜
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다. 특히 선학원의 설립은 조선총독부의 통치정
책 변화와 3.1운동의 영향 하에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려는 발로에
서 창설되었다고 한다.9) 아울러 쇠퇴한 선풍진작과 선방의 체계적인 통
할을 그 설립의 배경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10)
이러한 주장들은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의 직접적인 배경 요소로서 설
득력을 지니고 있지만, 선학원이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적 성격뿐만 아
니라 한국 전통불교가 지닌 정체성 확립을 규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
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선학원의 설립은 시기적으로 일본의
조선지배가 시작되었고, 불교탄압이 이루어진 시점부터 포함되어야 한
다. 그리고 선학원의 중흥 역시 한국 불교계의 본질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戒定慧 三學의 붕괴와 함께 결부시켜 설명되어야 한다. 때문
에 선학원의 설립이나 중흥은 불교정책의 시기적 추이라든가 당시 불교
계의 동향을 기초로 면밀하고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1921년 11월 30일 설립된 禪學院이 전통불교 수호를 표방하고 그 활
8) 이와 같은 지적은 2005년 선학원의 한국불교선리연구원이 주최한 학술회의
에서 구체적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선학원 설립의 사적 의미 고찰..(서울:
선학원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제1회학술세미나자료집, 2005)
9) 김순석, 앞의 책(2004), 137쪽; 김광식, 앞의 책(1996), 96쪽
10) 정광호, .한국전통의 선맥 계승운동-선학원을 중심으로-., ..일본침략시기
의 한.일불교관계사..(서울: 아름다운세상, 2001), 275-277쪽

동으로 한국근현대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지
의 사실이다. 더욱이 선학원의 활동이 護法과 抗日을 기본적인 성격으
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확고하다. 또한 일제시대 일본
불교의 침투와 불교탄압에 대한 항거와 해방 이후부터 진행된 불교계의
淨化運動은 선학원이 한국 근현대불교에서 정체성 확립의 산실임을 증
명하고 있다.
본 논문은 先學들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을 둘
러싼 문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선학원의 설립은 1911년 臨濟宗運動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일제하 講院과 禪院의 쇠퇴, 그리고 戒
律의 문란 등 한국불교의 정체성이나 존립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
다. 때문에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의 배경이 지닌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서는 위로는 1910년대와 창설기인 1920년대, 침체기 이후의 중흥기인
1930년대까지도 시간적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우선 일제의
불교정책과 당시 불교계의 동향 속에서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 문제를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또한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Ⅱ.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인
일제하 선학원에서 진행한 호법과 항일운동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
에 부속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한국
불교가 지닌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이었으며, 그 정신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임제종 운동의 계승
이었다.
임제종 운동은 1908년 3월 각 도 사찰대표 52인이 결성한 圓宗 宗務院의 大宗正 李晦光이 圓宗을 일본의 조동종과 연합시키고자 했던 움직
임에서 비롯되었다. 이회광은 불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일제의 정치
권력에 이를 인정받기 위해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1910년 10월 6일 조동종과 7개 조항의 연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이회광이 원종 종무원을 대표하여 전국 72개 사
찰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체결한 연합맹약이지만, 실질적으
로는 賣宗행위였다. 일본 조동종이 원종의 인가를 얻는데 도움을 주고,
원종이 조동종의 포교사를 초빙하여 일본포교와 청년승려의 교육을 촉
탁한다는 맹약의 내용은11) 한국불교의 전통과 독자성을 무시한 결과이
기도 하였다.
원종과 조동종간의 연합맹약이 불교계에 알려지자 많은 승려들이 연
합에 반발했으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대가 격렬히 일어났으니 실상은 다 같은 禪宗이지만, 曹洞은 그 계
통이 다른 파이고 臨濟는 自家라고 하는데서 생겨난 반감으로 인한 것이
고, 宗旨의 역사가 분명하지 않아 黨派사이에 암투가 이어서 일어났던
것이다. 朴漢永.陳震應.金鍾來 등이 文字와 言說로서 諸方으로 하여금
격렬히 일어나게 하여 경술년 음력 10월 5일 광주 證心寺에서 모임을 열
기로 하였다. 그러나 개회날짜가 되었지만 와서 모이는 이가 없어 대회
를 시행할 수조차 없었다.12)
임제종 운동의 발단은 임제와 조동은 동일한 선종이지만, 그 계파는
엄연히 다르다는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박한영 역시 “조선 현재 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에서 발하였음은 즉,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대하였다.”13) 한용운은 맹약체결의 불가를 “이 맹약이 실시되
11) 이능화, .梵魚一方臨濟宗旨., ..朝鮮佛敎通史.. 下(서울: 민속원, 1918), 938쪽
12) 위의 책, 938-939쪽
13) 정광호, .불교계 항일운동의 유형과 투쟁., ..일본침략기의 한일불교관계사..

면 조선불교의 사원은 완전히 조동종의 손에 들어가고 마는 것인즉 그
때의 조선불교는 실로 한 치도 용납하기 어려운 위기에 있었다.”고14) 술
회하였다. 결국 조동종과의 연합은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부속시킨다
고 인식하여 조약의 반대를 분명히 하고, 한국 불교의 연원을 임제종으
로 천명하였다.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이 松廣寺에서 회의를 갖고 임제종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先巖寺의 金擎雲 스님을
종무원의 관장으로 선출하였지만, 노쇠하여 한용운이 그 권한을 대리하
게 하였다. 이후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을 범어사에 두기도 하였다. 아울
러 1912년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이 범어사 주축으로 추진되어 경성에
개교되는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임제종 운동은 일제 총독부의 寺刹令
제정 공포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원종과 임제종은 사찰령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았고, 30본산제의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었다.15) 이후 이회광은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을 병합하고자 하였지만, 吳惺月의 반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였고 임제종은 일제 당국에 의해 철폐되었지만, 해산하지 않
고 범어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결국 임제종 운동은 사찰령과 총독부의 탄압 때문에 미완으로 끝났지
만, 우리나라 불교의 연원이 臨濟宗旨를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민족적 자각이 매우 뚜렷한 형태로 작용하고 있던 護法運動이며,
抗日運動이기도 하였다.16) 이와 같은 임제종 운동의 정신은 1921년 선
학원 설립을 계기로 부활하였다.
그것은 선학원의 설립 목적이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佛祖正脈을
계승하고자 했던 만공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17) 예컨대 그의 말은 조선
(서울: 아름다운세상, 2001), 217쪽
14) 한용운, .불교청년총동맹에 대하여., ..불교.. 86호(서울, 1931), 2-8쪽
15) 강석주.박경훈, ..불교근세백년..(서울: 민족사, 2002), 47쪽
16) 정광호, 앞의 책(2001), 217쪽

臨濟宗運動禪學院 設立
白龍城.吳惺月.朴漢永.金擎雲.金擎
山.韓龍雲.湛海.金尙昊.金法麟
宋滿空.白龍城.韓龍雲.吳惺月.
金南泉.康道峰.金石頭
불교의 독자적 발전을 염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임제종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 선학원 설립에도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표 1> 임제종운동과 선학원 설립의 주도인물
표는 임제종 운동과 선학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
들이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선학원 설립의 근본
적인 배경을 검토하고자 한다. 白龍城은 1912년 5월 26일 범어사가 주축
이 되어 진행된 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 개교식을 주도하였다. 이 개교식
은 13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리에 종료되었다.18) 당시 백용성은
임제종의 조선선종중앙포교당의 포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로 가담하기도 하
였는데,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는 1921년 吳惺月.
宋滿空.金南泉 등과 함께 선학원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19)
1931년 선학원 재건 당시에는 송만공.한용운 등과 함께 일반대중에게
설법.강화 등의 행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20)
백용성의 정법수호와 항일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926년 5월과 9
월 127명의 비구승과 함께 조선총독과 일본 내무성 앞으로 제출한 ‘파계
생활금지’에 관한 建白書였다. 당시불교계에 풍미했던 帶妻食肉의 현상
17) 혜공편, ..만공어록..(서울, 1968), 50쪽
18) .布敎堂의 盛況., ≪매일신보≫(1912. 5. 28)
19) .朝鮮佛敎禪學院本部創建上樑文., ..禪學院略史..(서울: 선학원, 1986), 7쪽
20) 老婆, .禪學院日記抄要., ..禪苑..(서울: 선학원, 1931), 28-29쪽

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192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일본 유학생간에 현
저히 증가하게 되었다.21) 이것은 단순히 일본 유학생들에게만 국한된
倭色化의 경향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을 말살하고, 청정비구승의 수
행풍토를 저해하는 당시 불교계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당시 백용성의
건백서는 재가신자와 출가대중의 구별이 엄연히 있는데, 근자 출가 대
중 가운데 함부로 대처식육하는 마속들이 발생, 청정도량을 더럽히고
있으니 하루 속히 시정토록 해달라는 탄원서였다. 비록 일제의 미온적
인 태도로 그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백용성의 노력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韓龍雲은 역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의 호법
운동과 항일운동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대 문제를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지금 47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 감옥에 들어가 있는 한용운과 나와 두 사람이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通文을 내어 반대운동을 하는데 물론 우리의
主義는 역사적 생명을 가진 우리 불교를 일본에 부속케 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리하는 것이었지만, 그때 형편으로는 도저히 그러한 사상을 발
표할 수 없으므로 조선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에서 발하였은 즉 일본 조동
종과 연합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대하였었오.22)
인용문은 임제종 운동의 주역이었던 朴漢永의 술회다. 예컨대 한국불
교를 일본불교에 부속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부적절했기 때문에 단순히 종파가 다르므로 연합을 반대한 것이라
고 표현하였다. 당시 한용운은 反曹洞宗 투쟁을 위해 全羅道와 慶尙道
의 각 사찰을 왕래하며 임제종 운동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1911
년 1월 15일 송광사에서 개최한 임제종 임시 종무원 총회에서 임시 종
21) .佛敎月旦., ..佛敎.. 제4호(서울, 1924), 61쪽
22) .佛敎改宗問題(五)., ≪東亞日報≫(1920. 6. 28)

무원 관장대리로 선출되었다.23) 이듬해인 1912년 京城에 조선임제종 중
앙포교당이 건립되었을 때는 白龍城과 함께 開敎式을 주도하기도 하였
다. 이후 한용운은 선학원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1924년 禪友共濟會 정
기총회 임시의장 및 修道部 理事로 활동하였다. 선학원이 침체기를 극
복하고 1931년 재건되면서부터는 백용성.송만공 등과 함께 禪風振作과
대중화를 위해 일반대중에게 다양한 법회를 거행하였다.
한편 吳惺月은 일제하 불교계의 호법운동과 항일운동의 중심인물이
기도 하다. 그는 임제종 임시 종무원이 범어사로 옮긴 이후부터 적극 참
여하여 1912년 서울 寺洞에 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 건립에 결정적인 역
할을 하였다.
이때에는 사찰령이 이미 반포되어 30본사가 법으로 정해졌고, 30본사
주지가 차례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寺法을 제정하는 일을 맞
이하자 宗旨와 稱號를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 주지총회(5월 28일 원흥사
에서 개최)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南黨(즉 臨濟宗)은 범어사 주지 오성
월을 중견으로 임제종지의 의견을 제출하였고, 北黨(즉 圓宗)은 이회광을
영수로 하여 宗旨의 기선을 따로 세우기로 내정하고 총독부의 뜻이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24)
오성월은 임제종 운동 당시 이회광을 중심으로 한 30본사주지회가 일
제의 사찰정책을 수용하고자 했을 때 임제종의 종지를 한국불교의 종지
로 채택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이회광이 원종의 覺皇寺와 임제종
의 포교당을 합병하고자 하였을 때 오성월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
다.25) 그는 1921년 선학원 창설 당시에는 송만공.백용성.김석두 등과
23) .梵魚一方臨濟宗旨., ..朝鮮佛敎通史.. 下(서울: 민속원, 1918), 939쪽
24) .梵魚一方臨濟宗旨., ..朝鮮佛敎通史.. 下(서울: 민속원, 1918), 939-940쪽
25) .合倂이也自好., ≪매일신보≫(1912. 6. 19), 김광식, 앞의 책(1996), 82-83쪽에
서 재인용

함께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전의 범어사포교당을 처분하여 선학
원 설립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후 오성월은 선학원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5년 선학원이 朝鮮佛敎禪理參究院으로 개편
되면서 金南泉.金寂音과 함께 상무이사를, 조선불교수좌대회 때는 院長
소임을 거쳐 1941년에는 2대 理事長이 되었다. 오성월은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寺財를 출연하여 헌납하기도 하였는데, 임시정부는 湛
海.擎山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다.26)
이상 임제종 주도인물들은 단순히 이회광과 원종의 매종행위를 비판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불교계를 독자적이고도 주체적으로 주도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10여 년 이후 선학원의
설립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임제종 운동이 미완으로 끝난 이후 寺刹令
에 기초한 일제의 탄압은 심화되었고, 倭色化 역시 당시 불교계의 일반
적인 현상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한국불교가 지닌 존립과 정체성의
기반마저 위협을 받고 있었다. 백용성.한용운.오성월 등 임제종 운동의
주도인물들은 佛祖의 正脈을 잇는 정법구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정법구현운동은 이른바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한 것이고, 그
것은 청정비구승의 수행을 강조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의 정법구현의지
는 왜색불교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불교계의 抗日運動으로
해석된다.
1921년 5월 15일 서울의 석왕사포교당에서는 菩薩戒 戒壇이 마련되었
다. 선학원 창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였다. 이
회의에서 宋滿空은 조선불교가 식민지 총독 관할 밑에 있어서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사찰의 이전이나 폐합, 심지어 재산이나 사찰에 있는 기물
까지도 손을 댈 수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26) 임혜봉, .임제종의 자주화 운동과 법정사의 항일무장투쟁., ..일제하불교계
의 항일운동..(서울: 민족사, 2001), 64쪽

이런 판국이라 지금 조선 중들은 자꾸만 일본 중처럼 변질이 돼가고
있단 말입니다. 진실로 佛祖 正脈을 계승해 보려는 衲子들이 점점 줄어
들고 있다 그런 말이죠. … 우리는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을 하는 선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
지고 오늘 회의를 부치게 된 거올시다.27)
만공은 일제의 조선불교에 대한 간섭과 탄압으로 불교계가 倭色化되
어가고 청정비구승들이 줄어든다고 하였다. 때문에 선학원 설립은 조선
불교가 지닌 독자성을 수호하고 탄압에 대한 항거를 표방하고 실천하는
데 있었다.28) 이와 같은 선학원의 설립 배경은 이미 1910년 청정비구승
들에 의해 진행된 임제종 운동29)에 그 직접적인 연원이 있었다. 아울러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은 가까이는 임제종 운동
의 계승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오랜 역사 속에서 면면히 지켜온 정통
성을 수호하고자 진력하였다.

 

Ⅲ. 불교교육의 전통성 강조와 회복
일제하 불교계의 뚜렷한 변화는 일제의 탄압과 간섭, 倭色化로 禪敎
學의 위기와 쇠퇴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戒定慧 三學
의 체계가 와해된 것은 한국불교가 지닌 전통성과 생명력의 중요한 근
27) 혜공편, ..만공어록..(서울, 1968), 50쪽
28) 이러한 흔적은 선학원의 .선우공제회취지서.(..한국근세불교백년사.. 제2권
(서울: 삼보학회, 1965), 9-10쪽)에도 잘 나타나 있다.
29) 임제종운동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된다. 정광호, .불교계 항일운동
의 유형 및 투쟁., ..일본침략기의 한일불교관계사..(서울: 아름다운세상, 2001),
211-217쪽; 김광식, .1910년대 불교계의 조동종 맹약과 임제종 운동., ..한국
근대불교사연구..(서울: 민족사, 1996), 53-94쪽

간이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선학원의 설립은 침체된 선풍진작뿐만 아
니라 쇠퇴해져 가는 선교학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의 전통성 부활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이라고 專門 講院이 없는 것은 아니요, 땔감을 지고 스승을 쫓는
학인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講堂이라는 그 곳
에는 쓸쓸하고 적막하기가 찬바람 부는 빈들과 같이 아무 화기애애한 맛
을 발견할 수 없이 그저 기계적인 것 같으며, 身捿講肆한다는 학인들도
아무 용기 없이 그저 두 어깨가 처지고 마치 도살장에 들어온 소처럼 낙
오의 한숨만으로 일종의 取食客的, 浪漫的, 虛名的으로만 허송세월하려
는 것은 통계수자가 증명하는 바이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두 가지 원인이 도화선이 되어서 내재적 모순이 생겼다는 것을 단언하고
자 한다.30)
1928년 1월 최기정이 묘사한 1920년대 傳統講院의 실태다. 한국불교
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근간인 敎學이 학인들조차도 무기력할 정
도로 쇠퇴해졌음을 알 수 있다. 최기정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하였
다. 첫째는 俗人이나 일반 승려, 더욱이 師僧조차도 講堂學人을 시대에
뒤진 인물들로 인식하여 衣食을 구걸하고 어려운 생활난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생충의 한 부류로 증오한다는 것이다. 전통 강원교육의 부활을
주장했던 운허스님은 당시 敎務院이나 대다수 本山 주지들이 교학 진흥
의 방책을 학교 교육에 두고 강원교육을 배척하였다고 하였다. 아울러
“재래의 강원교육이 신지식과는 아주 담을 쌓은, 너무 태고적이며, 수구
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경학을 연구하는 데는 심리학.종교학.지리학.생
리학.수학.천문학 등을 가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1) 둘째는 ‘소위
30) 崔其正, .金剛山楡岾寺의 經院設立을 듣고., ..佛敎.. 43(경성: 불교사, 1928),
39쪽
31) 강석주.박경훈, .교학진흥의 움직임., ..불교근세백년..(서울: 민족사, 2002),


학인들이 현실의 가시덤불에 얽매이고 끄달려서 다만 소극적으로 낙망,
우울, 번뇌의 그물 속에서 끝없이 헤매일 뿐이어서32) 스스로 시대에 낙
오된 인물로 자포자기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玄妙難則한 敎理와 무한
대의 진리를 연구한다.’는 자긍심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매월 많은 돈
으로 학교교육을 시키면서 自家寶藏을 탐구하려는 학인들에게는 三合
料도 오히려 아깝게 여기는 것은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나의 것’을 아름
답게 여길 줄 모른다고 개탄하였다. 최기정의 기고는 불교계의 침체는
불교가 탄압받기 시작한 조선시대 이후 지속화되어 일제하에서 극단적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1920년대 불교계의 신진 승려들은 재래식 講院敎育으로는 새로
운 시대에 맞는 인재를 양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교가 사회에 기여할
수도 없으므로 강원교육보다는 신학문을 익혀야 하고 학교교육을 받아
야 한다고33) 하였다. 때문에 1910년대부터 신교육우선정책으로 인해 기
존 강원은 지방학림으로 전환되었고, 강원이 폐교되는 사례가 속출하였
다. 각 사찰에서는 경성 또는 일본으로 留學僧을 선발해서 寺費로 파견
하였다. 일본 유학승의 출현은 1910년대 말경으로 1914년경에는 13명의
유학생이 있었다고34) 한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재일 유학생에 대한
인식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127쪽
32) 최기정, 앞의 글(1928), 39쪽
33) 강석주.박경훈, .교학진흥의 움직임., ..불교근세백년..(서울: 민족사, 2002),
124쪽에서 재인용
34) 姜裕文, .東京朝鮮佛敎留學生沿革一瞥., ..金剛杵.. 21호(서울, 1933), 22쪽[김
광식, .1920년대 재일 불교유학생단체 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서울: 민족사, 1998), 128쪽에서 재인용]. 실제로 일본 동경에 유학승으로 가
있던 당시의 학승들은 60여 명이었지만, 이중 정규학교에 나가는 자가 40여
명, 그중에 駒澤.大正.立正大學 등 불교대학에 다니는 학승이 13명이었다고
한다.(강석주.박경훈, 앞의 책(2002), 126쪽)


첫째, 공부만 시키면 俗人이 되고 만다고 합니다. 동경유학생의 역사가
이미 오래였지만, 業을 마치고 돌아 온 자들 중에 娶妻를 하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둘째, 자기를 길러 준 은인인 주지축출운동이
가장 長技인 特点이라 합니다. 셋째, 불교를 모른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이유는 背恩忘德이란 표어가 되어 학생을 기르는 것은 養虎遺患이요, 한
가지라도 필요가 없다고 따라서 종래 학비거절, 금후로는 학생은 기르지
말자는 것이 그네들의 不文律로 지켜오는 共通決心이라 합니다.35)
인용문은 일제하 일본 유학승을 둘러싼 佛敎界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
다. 1920년대 불교유학생 단체인 朝鮮佛敎留學生學友會는 한국불교를
일본의 임제종에 합병하려 한 이회광의 의도를 분쇄하려는 움직임도 보
였다.36) 그러나 유학승들이 귀국 후 보여 준 왜색화와 주지축출이나 교
학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한국불교 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저해하는 심
각한 문제였다. 그러한 유학승들에게 불교의 진흥을 위한 사명감을 기
대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유학승들은 불교보다는
다른 전공을 택하였고, 갈 때는 혼자 가서 돌아 올 때는 아내와 둘이서
돌아왔다.37) 1928년 3월 개최된 朝鮮佛敎學人大會 당시 최초 발기인이
었던 운허스님은 “강원을 마친 학인이 아주 드물게 강사가 되면 그래도
절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강원출신은 어디 의
탁할 곳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經學을 공부할 길이 없었다.”고 발기의 동
기를 술회하였다. 이것은 학인대회가 강원 교육제도의 개선을 위한 것
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불교의 근간이 쇠퇴하여 그 진흥이 정지될
까 염려한 운동이었음을 의미한다.38) 실제로 운허스님은 이후 학인들의
35) 伽倻衲子, .背恩忘德(第一信)., ..佛敎.. 第23號(서울: 불교사, 1926), 31-32쪽
36) 金光植, .1920年代 在日留學生團體硏究., ..죽당이현희교수화갑기념한국사
학논총..(서울: 동방도서, 1997); .1920年代 在日留學生團體硏究., ..한국근대
불교의 현실인식..(서울: 민족사, 1998)
37) 강석주.박경훈, 앞의 책(2002), 125-127쪽


각성을 촉구하는 글에서 帶妻僧을 두고 “불교인으로서의 행동은 추호도
없으면서 三寶를 남취하여 속가의 처자식 양육에 충당하며, 세력 확장
과 분쟁을 일삼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39)
한편 禪院 또한 암울한 講院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장황한 인용문
은 그 처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現今 朝鮮寺刹에서 20년이나 30년 동안을 久參衲子로 禪院생활을 하
던 진실한 수행납자의 말로를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갈수록 산이요 갈수록 물이라 어느 곳이든지 住接할 곳이 없다. 독
신으로 지내는 몸이 되고 본즉 세속생활과 다름이 없는 在家寺院에 들어
가서는 발붙일 곳이 없으며, 금전이 없어 無人空庵같은 곳에 가서는 먹
고 공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할 수없이 불완전한 禪室이나마 찾아가
면 한 三冬을 지내기가 무섭게 廢止宣言을 듣고 축출을 당하며, 또는 폐
지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선원은 식량이 없으므로 인원을
제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방부를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을 당
하고 만다. 그래서 春風秋雨에 회한을 품고 황량한 길거리에 서서 헤매
다가 뜻하지 않게 병이 들면 간호한번 받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사망하는
자가 非一非再하다.40)
일제하 불교계에서 청정비구승의 안전한 수행환경 마련은 왜색화와
38) 일제하 불교계의 강원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된다. 김광식,
.1930~1940년대 재일 불교유학생 단체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서울: 민족사, 1998); 김광식, .1930년대 강원제도개선문제., ..근현대불교의
재조명..(서울: 민족사, 2000); 김광식, .조종현.허영호의 불교교육제도인식
과 대안., ..근현대불교의 재조명..(서울: 민족사, 2000); 조계종교육원, ..조계
종사.. 근현대편(서울: 조계종출판사, 2001), 104-108쪽; 강석주.박경훈, .교학
진흥의 움직임., ..불교근세백년..(서울: 민족사, 2002)
39) 耘虛沙門, .宗敎와 宗敎人을 論하여 學人의 覺醒을 促함., ..弘法友.. 제1집
(서울, 1938), 16쪽
40) 金泰洽, .護禪論., ..禪苑.. 第2號(서울: 선학원, 1932), 6쪽

신식교육의 장려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시 종단이나 해당 사찰들은
신식교육만을 주장하여 지원하였고, 대처승들 역시 이들을 괄시하였다.
禪院은 식량의 부족 등 수행여건이 열악하여 오래 있을 수 없어서 결국
은 길거리를 헤매다가 그대로 사망한다는 내용이다. 禪風을 振作하고
布敎하기 위한 것이 선학원 창설의 직접적인 목적이었지만, 한국불교의
명맥을 독자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궁극적이고 창설 목적의
본질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침체기를 극복하고 1931년 재건기의 선학원
은 그 중흥의 목표를 단순히 선학원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백용성.송
만공.한용운 등이 일반대중에게 설법과 강화 등을 거행하였으며, 포교
목적을 위한 대중지 ..禪苑..를 간행하였고, 地藏기도와 ..涅槃經.. 등 대
승경전에 대한 설법41)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아울러 쇠퇴한 선풍을
진작시키고, 청정비구승의 수행환경을 향상시키고 자립의 활로를 개척
하기 위해 禪友共濟會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선학원은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해 1931년 중흥을 맞이하여 3차례의 전
국수좌대회를 개최하여 청정비구승의 수행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진
력하였고, 재단법인 구성 이후인 1935년에는 재산이 14만원으로 확충되
었고, 확충된 禪院에서 전국 수좌 368명이 선학원의 후원 하에 수행하는
결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42) 더욱이 선학원의, 청정비구승의 수행풍토
조성과 禪院 지원에 대한 노력은 중흥기에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선원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에서
선학원의 지방 선원과의 유기적 관계와 지원은 한국 불교의 명맥을 유
41)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第2號(서울: 선학원, 1932), 85쪽. 선학원에서는 선
수행을 통한 선풍진작뿐만 아니라 다양한 법회를 거행하였다. 1931년 2월
20일에는 칠일기도가 시작되었고 炭翁和尙이 ..維摩經..을 설하였으며, 5월
31일에는 金泰洽和尙이 ..圓覺經.. 講話가 있었다.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創刊號(서울: 선학원, 1931), 28-29쪽
42) ..禪苑.. 제4호(서울: 선학원, 1935), 42-43쪽
1931 ..선원.. 창간호, 42쪽
1932.2 ..선원.. 2호,
87-88쪽
1932.8 ..선원.. 3호, 72-73쪽
1935 ..선원.. 4호, 42-43쪽
유점사 선원(70)
오대산 상원암(30)
표훈사 선원(신설, 15)
직지사 선원(20)
대승사 선원(37)
은해사금락선원(창설)
석왕사내원선원(재정
문제로 강원으로 변경)
정혜.수덕 선원(40)
직지사 천불선원(20)
표훈사 선원(20)
유점사 선원(20)
도리사 선원(15)
건봉사 선원(12)
범어사 선원(7~8)
오대산상원 선원(10)
봉은사 망월선원(10)
백양사 선원(13)
화엄사 탑전선원(5)
해인사 퇴설선원(10)
범어사 선원(15)
범어사 내원암선원(7)
범어사 마하사선원(5)
경성안국동선학원(23)
통도사내원암선원(27)
은해사 운부선원(5)
은해사 금락선원(10)
김용사대승사선원(11)
도리사 선원(15)
유점사 비로선원(15)
유점사 표훈사선원(4)
표훈사 부인선원(10)
유점사신계사 미륵선원(7)
월정사 상원선원(15)
석왕사선원(15)
석왕사 내원선원(17)
통도사 백련선원(16)
승가사 선원(11)
양주망월사 선원(14)
고운사 선원(9)
금강산마하연선원(37)
도리사 태조선원(22)
직지사 천불선원(12)
범어사 사자암선원(9)
월정사 상원선원(20)
대승사 선원(11)
김용사 선원(12)
불영사 선원(12)
동화사 금당선원(11)
범어사 금어선원(15)
범어사 내원선원((21)
송광사삼일암선원(14)
경성 중앙선원(25)
은해사 운부선원(23)
보현사 극락전선원(6)
양화사 선원(3)
해인사 퇴설당선원(9)
지하는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표 2> ..禪苑..지에 소개된 지방선원의 수적 변화
( )안은 수행중인 대중명수
..선원..지에 소개된 각 사찰의 禪院은 수행 중인 대중의 수가 점차 증
가 추세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선학원이 창설될 당시 인
적 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찰들의 선원은 1935년에 이르면 약 368
명의 수좌가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비록 이들 선원과 선학원의 관계
를 구체적으로는 살피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한국불교의 정통성
을 수호하고자 했던 선학원의 창설과 그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후 선학원은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
究院)으로 개편되었다. 여전히 열악한 수좌(首座)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
선하기 위해 그 재정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개
편 이후 선학원은 지방 각 선원과 연락과 통제를 활발히 하였고, 선방
증설 및 수좌대우를 개선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선종의 독립발전
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포교사를 지방에 보내 설법포교를 적극적
으로 추진하였다.
선학원이 침체기를 극복하고 중흥의 결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전국
각 사찰의 재정적 지원과 그 법적 보호, 아울러 청정비구승들의 수행환
경 개선과 지원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컨대 1934년 재단법인 개
편 초기 선학원의 예산은 1,427원에 불과했지만, 1935년에는 140,000원
에 이르렀다. 아울러 선리참구원에서 직접 경영하고 있었던 선방도 5개
나 될 정도였다.
요컨대 선학원의 설립과 활동은 단순히 일제하 침체된 불교계의 선풍
진작과 禪院만을 진흥하는데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간섭과 탄
압이 시작된 직후부터 더욱 침체된 불교계의 총체적인 위기상황을 극복
하려는 배경에서 설립되었으며, 청정비구승의 수행환경 향상을 위해
1931년 중흥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Ⅳ. 왜색화 금지와 호법운동
일제하 한국불교의 위기와 굴절은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일본불교의
침투와 그 영향이었다. 이른바 대처식육으로 대표되는 왜색화는 일제의
대조선 종교정책의 일환이자 당시 불교계의 불교 개혁을 명분으로 한
굴절이었다.
특히 帶妻食肉의 문제는 한국불교의 護法과 抗日의 성격을 동시에 포
함한 일제하 불교계의 화두였다. 더욱이 대처문제는 교육제도의 개선과
유학승 문제, 총독부의 불교정책 등 한국불교의 존립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선학원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어 일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
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淨化運動43)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대
처식육의 풍조는 한국불교의 護法과 抗日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세속에 관해서는 일체 行事를 멈추고 출가하여 도를 닦는 二衆
을 比丘.比丘尼라고 하는데 佛律의 二百五十戒, 十重大戒, 四十八輕戒를
받고 妻帶肉食을 엄히 금하는 것이 霜雪과 같다.44)
출가수행자들이 三寶의 하나로서 귀의와 공양, 공경을 받게 되는 것
은, 청정한 계행에 근거한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계와 율은 개인의 청
정과 해탈, 그리고 승단의 청정과 화합을 실현하기 위한 출가자의 삶의
질서이고 수행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대 한국불교의 계율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일제하의 대처식육 문제는 불교계의 전통과 개혁의
중심과제 역할을 하였다. 帶妻食肉은 살생과 음행 금지에 대한 파계 행
위다. 沙彌律儀(十戒律)에서는 첫째, 不殺生과 셋째, 不邪淫으로 경계하
고 있으며, ..四分律..에 의한 250조의 비구계 가운데는 4조의 바라이법
이 있다. 음행은 이 가운데 첫 번째 항목인데 출가자로서 여성과의 성교
를 말한다.45) 한국불교는 전통적으로 淸淨持戒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는
43) 韓國近現代佛敎史에서 淨化運動은 현대불교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정화운
동은 현 불교종단의 이해관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많은 문제점
과 과제를 남기고 있다. 때문에 정화운동에 관한 연구는 그 개념과 시점, 전
개와 성격 등 그 전모를 객관적으로 면밀히 살펴야 한다.
44) 白龍城, .僧侶肉.妻帶問題に關する嘆願書., ..朝鮮佛敎.. 第27號(서울, 1926),
33쪽
45) 凝然大德著 平川彰譯, .律宗., ..수행과 계율.. 제10회 선우논강 발표요지문
(서울, 2004), 109쪽
데, 그 사례는 승려의 碑文이나 각종 僧傳기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得度 후에 연령이 만20세 이상에 이른 자는 比丘戒를 受持하게 함. 다
만 帶妻食肉하는 승려에게는 이를 불허함.46)
1912년 10월 15일 조선총독부가 인가한 각본말사법은 대처식육하는
승려가 비구계를 수지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적어도 1910
년대 초까지 대처식육의 건의47)와 풍조가 있었지만, 한국불교가 지닌
淸淨持戒를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승들이 귀국하
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상황은 달라졌고 심각해져 갔다. 유학승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대부분 결혼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당시 불
교계의 개혁세력으로 등장하여 보수 세력과 대립하기도 하였다.48) 더욱
이 대처유학승들은 귀국 후 本山의 사찰의 주지에 취임하고자 그 寺法
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현재 조선에서 종전 30본산의 주지직에 있는 자는 계율을 엄격히 지
킨 청정한 승려가 아니면 안 되었다고 한 것이 寺法의 明文에 규정되어
왔지만, 근래 內地 유학출신 청년 승려의 귀국이 늘어남에 따라 그 본산
에 들어가는 자가 많아진 일이 원인이 되어 내밀히 부녀를 거느리고, 僧
戒를 문란하게 하는 자가 증가함에 따라 오히려 寺法을 다시 고쳐 육식
46) .各本末寺法. 第8章 僧規, 58條, ..朝鮮佛敎通史.. 下(서울: 민속원, 1918), 1149

47) 한용운은 1910년 3월 .中樞院獻議書.와 同年 9월 .統監府建白書.를 제출하
여 승려의 결혼을 허락하여 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한용운 지음 이원
섭 옮김, ..조선불교유신론..(서울: 운주사, 1992), 25-130쪽
48) 유학승들이 졸업하여 귀국하는 날이면 경성 역에서 하차하기 전에 娶妻부터
해서 지나간다고 하여 스승들이 제자들의 유학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佛敎
月旦., ..佛敎.. 제4호(서울, 1924), 61쪽


대처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자고 주장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본산 측에서
당국의 양해를 구하는 운동을 하기에 이르렀으며…49)
1926년 불교계의 상황은 한국불교의 근간이었던 淸淨持戒의 정신이
세속의 유행에 따라 변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더욱이 “畜妻 여부는
개인에 관한 문제여서 공인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거론할 필요도 없지 아니한가”하는 논의까지 일어났다.50) 결국 대처승
들은 총독부 당국에 대처식육을 인정하는 寺法의 개정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백용성을 위시한 비구승들은 “僧된 자의 持戒修道함은 당연한 본
분사인데 어찌 寺法을 개정하여 대처자로서 주지되기를 당국에 희망하리
오. ……”라는 내용으로 ‘파계생활금지’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하였다.51)
現今 朝鮮의 승려는 妻帶.肉을 감행하여 청정사원을 오염시키고 더
럽히는 마굴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니 僧體를 바로 보면 실로 통탄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僧侶에게 妻帶할 것을 허락했다면 在家二部衆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각하는 僧規를
明察하여 출가자의 처대육식을 엄금하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破
戒僧의 比丘戒를 취소하여 淸信士女의 지위에 처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
다고 믿습니다. 처대승려가 날로 증가하여 전 조선사찰이 부패되어 가는
점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現今에는 처대승려가 조선 사찰의 권
리를 장악한 까닦에 진실한 승려로 공익을 우선시하고 검소하거나, 계율
을 준수하거나, 승속의 모범이 되는 年高衲僧과 修行衲子들은 자연히 쫓
겨나 눈물을 흘리고 방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금후 이 사천대중이 어느
곳에서 편안히 지내겠으며, 또 불교의 殘命은 어떻게 되겠습니까.52)
49) .僧侶肉.妻帶の可否., ..朝鮮佛敎.. 제26호(서울, 1926), 23쪽
50) 백성욱, .현대적 불교를 건설하려면., ..불교.. 24(서울, 1926), 8-16쪽
51) 김태흡 편, ..용성선사어록.. 하(서울, 1941), 제26장
52) 白龍城, .僧侶肉.妻帶問題に關する嘆願書., ..朝鮮佛敎.. 第27號(서울, 1926),

인용문은 백용성과 127명의 비구승들이 조선총독에게 보낸 탄원서의
내용이다. 1926년 5월 건백서를 제출하였지만, 조선총독부가 아무런 반
응을 보이지 않자 2차 건백서를 보낸 것이다. 5월에 보낸 1차 건백서와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2차 건백서에서는 그 요구상항이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불교계가 대처육식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승려의 대처행위를 금지하고자 하였
다.53) 그 구체적인 조치로 대처승의 비구계를 취소하여 재가불자인 淸
信士女의 지위에 있게 할 것을 원하였다. 또한 “持戒승려에게는 몇 곳의
本山 사찰을 할당해주어 안심하고 도를 닦게 할 것이며, 대처승려 역시
몇 곳의 사찰을 지정해 주어 파계승과 지계승의 구별을 명확하게 해줄
것”을54) 탄원하였다. 그러나 청정비구승의 건백서에도 불구하고 조선총
독부는 승려들에게 대처식육을 허용하였으며, 대처승도 본사주지가 될
수 있도록 사법개정을 신청하도록 각 본사에 지시하였다.55) 이것은 1926
년 寺法 가운데 ‘주지자격규정’에 관한 항목에서 ‘비구계를 구족해야 한
다.’는 조항을 삭제할 것을 종용하면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대부분의 사
찰이 1929년까지 이 조항을 삭제했다는 것이다.56)
이와 같이 1926년 두 차례의 건백서 사건은 한국 전통불교에 대한 護
法과 抗日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건백서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10여 년 후 선학원에서 동일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娶妻.肉하는 승려들이 사원을 장악케 됨으로
말미암아 修行衲子와 年高衲子에게 몇 개 본산을 割給하여 청정사원의
33쪽
53) 1925년 교무원에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비구.비구니는 7,188명으로 집계되
었는데, 결혼하지 않은 승려는 4천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具萬化, .そ
の罪三千大千世界に唾棄する處無し., ..朝鮮佛敎.. 第28輯(서울, 1926), 19쪽
54) 백용성, 앞의 글(1926)
55) .寺刹住持의 選擧資格 改正., ≪매일신보≫(1926. 11. 26)
56) 최금봉, .三十一本山主持會同見聞記., ..佛敎.. 第2號(서울, 1937)

전통을 유지케 하라.”는 부분이다.
선학원은 1931년 중흥을 계기로 한국불교 선종의 중심기관임을 내세
우면서 그 위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3차례에 걸쳐 개최된
朝鮮佛敎首座大會는 청정비구승의 수행환경을 향상시키는 것이 기본적
인 목적이었다. 특히 1935년 제3차 수좌대회에서는 당시 불교계 통일기
관이었던 敎務院 宗會에 수좌들을 위해 청정사찰 몇 곳을 할애해 달라
는 건의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57) 그러나 대처풍조가 더 이상 새로
운 것이 아닌 일반적 현상으로 정착한 이상 선학원의 요구조건은 무의
미한 것이었다. 그 맥락은 역시 1926년 백용성을 위시한 127명의 비구승
이 제출한 건백서의 성격과 동일하였고, 그 결과 역시 다르지 않은 것이
었다. 때문에 선학원은 자력구제방안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이른
바 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으로 인가를 받았는데, 1935년 자본금은 설립
당시 9만원에서 여러 곳에서 답지한 기부금으로 14만원이 되었고, 재단
법인에서 운영하는 선원이 5개나 된다고 하였다.58) 재단법인 설립 당시
滿空.慧月.漢岩.惺月과 같은 대표적 인물들은 선학원 설립 이전부터 진
행해 온 호법과 항일운동을 선학원의 재단법인 설립을 통해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좌들을 위한 청정사찰 할애에 대한 요청은 1939년 朝鮮
佛敎禪宗定期禪會에서도 거듭되었다. 당시 선학원은 경상.구하.종헌 3
인을 교섭위원으로 정하여 모범 叢林 건설을 위해 지리.가야.오대.금
강.묘향 등 5대 산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요구하였다.59)
요컨대 선학원은 전통 불교수호를 위한 자구책을 모색하면서 대처승
57) 정광호, .한국 전통선맥의 계승운동-선학원을 중심으로-., ..일본침략시기
의 한일불교관계사..(서울: 아름다운세상, 2001), 290쪽
58) .우리 각 기관의 활동상황., ..선원.. 4호(서울, 1935), 29-34쪽
59) 정광호, 앞의 글(2001), 293-294쪽.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는 이전 朝鮮佛敎首
座大會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 禪會에서는 금강산 마하연을 모범선원으로
지정하여 초심납자들을 지도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一鉢無碍의 雲水僧에게
정식으로 救療費를 예산에 넣어서 질병구호를 시행하자고 하였다.

과 구별되는 청정사찰 할애를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대처식육의 풍조
로 인한 한국 불교의 전통성 와해는 강원과 선원의 황폐화보다 더욱 심
각한 것이었고,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함께 존립조차도 위협하는 것이었
다. 때문에 청정비구승에 대한 보호는 필연적이었고, 그것은 선학원 중
흥의 일차적인 목적이 되었다. 선학원은 이후 대처식육과 같은 왜색화
의 경향을 해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종식시키고자 진력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 현대불교사의 한 획을 그었던 淨化運動이다.

 

 

 


Ⅴ. 맺음말
선학원에 대한 이해는 한국 근현대불교사를 이해하는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 자체가 단순히 일제하 불교계의 한 단체가 설립되어 전통불교
수호운동을 전개했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실제적 역할이나 상징
성 그리고 역사적 의미가 지대하다. 선학원에 대한 이해는 곧 일제하 불
교계의 동향이나 이념 등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척도로 해석할 수 있
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한국근현대 불교사에서 선학원이 지닌 불교사
적 위상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선학원은 조선시대 이래 쇠퇴한 禪風을 진작시키고, 일제의 간
섭을 받지 않고 수좌들이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되
었다. 그러나 선학원의 설립은 이미 일본 지배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1910년에 진행된 臨濟宗 運動과 같은 항일적 성격과 그 맥락을 함
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임제종 운동이 조선불교가 일본불교에
종속되는 것을 반대하는 명분이라든지 운동의 주체세력들이 선학원 설
립에도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제종 운동
이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 반대와 같은 항일을 표방한 것은 일제하 한국
불교계가 시종일관 표방한 것이었고, 그 실현을 위해 진력했던 것은 조
선불교의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발전을 의미한 것이었다. 송만공이 언급
한 바에 따르면 선학원은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禪房을 꾸
려 佛祖 正脈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는데, 그것은 임제종 운
동의 성격과 결코 다르지 않다. 아울러 백용성.한용운.오성월 등 임제
종 운동의 주역들이 10여 년 후 선학원 설립에도 참여하여 보여 준 주체
적 면모는 護法과 抗日이라는 일맥상통한 측면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호법과 항일의 표방은 선학원의 설립과 중흥정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즉 선학원이 일제하 불교계의 다양한 항일과 개혁운동을 관통하는 근본
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선학원은 일제하에서 급격하게 쇠퇴해 가는 戒定慧 三學의 체계
를 면면히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한 의도 역시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三學은 한국 불교가 지닌 독자성을 상징하고 있었으며, 당시 불교계가
질곡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생명력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이 존립
의 근간이 불교의 왜색화와 탄압, 그리고 소외로 소멸될 위기에 처한 것
이다. 당시 전통 선원이나 강원은 대처육식의 풍조와 신학문 강조로 인
해 불교계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전통 선원의 상황은 처참하기까지
하였다. 전 생애를 正覺을 위한 수행에 바친 수좌들은 마땅한 수행처가
없었으며, 대처승의 사원에서는 쫓겨나기 십상이었다. 더욱이 식량이 없
다는 이유로 선원에서는 방부를 받기가 어려웠고, 결국은 길거리를 헤
매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은 전통 강원도 다
르지 않았다. 학인들은 그 스승조차도 시대에 뒤진 인물로 바라보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학인들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衣食을 구걸하거나 쫓겨
날 지경에 놓여 있었다.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敎務院과 대다수 본산
주지들이 학교교육만을 강조하여 교리연구뿐만 아니라 지리학.심리학.
천문학 등을 가미하고자 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묘하고 헤아
리기 어려운 敎理를 연구한다는 자긍심이 생겨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
려운 일이다.

결국 당시 불교계의 선교학과 선원.강원의 존립은 총체적인 위기상황
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학원 설립과 중흥은 단순히
선풍진작과 대중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28년 朝鮮學人大會가
전통 강원의 부활을 목적으로 개최되기도 하였지만, 선학원은 1931년
중흥을 계기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정비구승의 수행풍토 개선
을 위해 우선적으로 진력하였지만, 대승경전에 대한 설법과 백용성.송
만공 등 고승들이 일반대중에게 다양한 설법과 강화를 펼치기도 하였다.
한편 선학원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일제하 불교계의 화두이기도 한
대처식육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대처식육의 문제는 한국
불교의 이념, 수행, 교육, 일제의 불교정책 등 당시 불교계가 직면한 근
본적이고도 실제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으며, 해방 이후 불교계의
淨化運動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대처의 풍조는 1910년대 유학승이 귀
국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불교계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들은 불교계의 개혁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스승을 축출하고 주
지직을 희망하여 총독부 당국에 대처식육을 인정하는 사법개정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결국 持戒修道의 전통적인 佛家의 전통은 사라져
버렸다. 이에 대해 백용성을 중심으로 한 비구승들은 1926년 수행자의
대처식육 금지를 건의하는 건백서를 2차에 걸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修行衲子와 年高衲子에게 몇 개 本山을 할급해 달라는 요청은
10여 년 후 선학원의 활동으로 계승되었다. 예컨대 1926년 9월 제2차 건
백서는 破戒승려에게 몇 곳의 本山 사찰을 할당해 주고, 持戒승려에게
역시 몇 곳의 본산 사찰을 지정해 주어 파계승과 지계승의 구별을 명확
하게 해줄 것을 탄원하였다.
불교계의 이러한 요구는 1935년 선학원이 개최한 제3차 조선불교 수
좌대회에서 재현되었다. 교무원 宗會에 수좌들의 안정적인 수행과 그
환경을 위해 청정 사찰을 할애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1939년 선학원의 朝鮮佛敎禪宗定期禪會가 개최될 당시에도 계
속되었다. 이때에는 지리산과 금강산 등 5대산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청정사찰로 할애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교섭위원까지 구성하였다.
대처풍조가 일반화되어버린 당시 선학원의 요구조건은 비록 무의미하
게 끝나버렸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불교계의 왜색화에 대항한 호법과
항일정신의 계승이었다. 선학원의 전통불교 수호의지는 결국 자구적 노
력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선학원은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청정비구승들
이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였다.
결국 선학원은 침체된 선원의 부활과 수좌들의 수행여건 향상만을 위
해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침략과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인한 불
교계의 혼란과 위기를 총체적으로 극복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한국불교가 지닌 독자성과 주체성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중
흥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대처식육의 풍조에 대응한 수좌들
의 청정사찰 할애요청은 1920년대부터 불교계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선학원은 중흥기인 1930년대부터 해방 이후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대처종단에 대한 대응
은 한국불교의 독자성이나 자존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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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부, 1994.
정광호, ..일본침략시기의 한.일불교관계사.., 아름다운세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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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교육원, .선학원의 창립과 전통불교수호., ..조계종사(근현대편)..,
조계종출판사, 2001.

372 선문화연구 창간호
김순석, .선학원의 전통 선맥 계승운동과 ‘帶妻食肉’금지론의 전개., ..일
제시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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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 .梵魚一方臨濟宗旨., ..朝鮮佛敎通史..下, 민속원, 1918.
정광호, .불교계 항일운동의 유형 및 투쟁., ..일본침략기의 한일불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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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第2號, 선학원, 1932.
白龍城, .僧侶肉.妻帶問題に關する嘆願書., ..朝鮮佛敎.. 第27號, 1926.
선학원, ..禪學院略史.., 1986.
선학원, .禪學院創設緣起錄., ..韓國近世佛敎百年史.. 제2권.


<Abstract>
The Historical Foundation in Seonhakwon(禪學院)'s Movement
Oh, Kyeong-Hwo
The establishment of Seonhakwon(禪學院) had something to do with an anti-Japanese
character such as Imjejong(臨濟宗)‘s movement. Through establishment and restoration,
Seonhakwon(禪學院) intended to develop and succeed to a system of three learnings(三學)
such as Buddhist commandments(戒), feeling(定) and knowledge(慧). Three learnings(三學)
were an originality of Korean Buddhisim. These were a root of vitality, and it was a power
that Korean Buddhisim overcame a dismal age. This root came to a crisis, because of
japanizing Korean Buddhisim, pressure against Korean Buddhisim and estrangement to
Korean Buddhisim. Monks in Korean traditional seonwon(禪院)s and gangwon(講院)s got
married, ate meat. So Korean Buddhisim was indifferent to these monks. This was an result,
because the place in charge of religious affairs(敎務院) and most head priests of head
temples emphasized a school education.
In this situation, Seonhakwon(禪學院) provided a wide variety of activities taking a
restoration in 1931. These activities were a close connection with a question for Buddhist
meditation to get married and eat meat. And these activities succeeded a cleanup movement
in Korean Buddhist world after liberation. A trend for monks to get married generalized
in Korean Buddhist world of 1920's. So Buddhist monks with Baek Yong Seong(백용성)
entered a protest(建白書) covering double times, and they proposed to prohibit getting
married and eating meat. This demand was reappeared in the third Korean Buddhism Most
Reverend Priest meeting(朝鮮佛敎 首座大會), and Seonhakwon(禪學院) held this meeting
in 1935.
Seonhakwon(禪學院) intended to overcome the disorder and crisis of Korean Buddhist
world, so this was created by a Japanese aggression and an influx of Japanese Buddhism.
And Seonhakwon(禪學院) strove to preserve and succeed the originality and subjecthood
of Korean Buddhism.
Key Words: Seonhakwon(禪學院), Imjejong(臨濟宗)‘s movement,
thing to get married and eat meat(帶妻食肉), Most Reverend Priest
meeting(首座大會), Buddhist commandments(戒律)

 

 

첨부파일 선학원 오경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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