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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鏡虛의 生涯와 사상

작성자천장암|작성시간13.05.28|조회수58 목록 댓글 0

鏡虛의 生涯와 사상   원광대학교 대학원   李性陀

목차

1. 머리말
2. 時代的 背景
3. 鏡虛의 생애
4. 鏡虛思想의 특색
5. 맺는 말


1. 머리말

석가모니라는 인물이 이 땅에 태어나서 入滅한지 2,500여년 불교가 인도에서 원시불교(근본불교),부파불교,중관불교,유식불교 ,여래장사상, 밀교사상으로 이어지다 북쪽으로 중국에서 종파불교로 꽃피었고 우리 나라로 전래된 이래로 수많은 고승들이 출현하여 한국불교라 일컬을 수 있는, 또 굳이 불교라는 종교의 입장을 떠나서도 한국의 사상면,인물 면에서 찬란한 봉우리라 일컬을 수 있는 대단한 업적을 쌓아 왔다.
신라시대의 원효대사, 그는 회통과 화쟁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 독특한 한국불교의 사상을 정립한 위대한 불교사상가였으며 또 위대한 포교사이기도 했다. 실생활 면에서도 染淨無二, 眞俗一如를 주장하며 불교의 생활화,대중화를 실천하기 위해 대중 속으로 뛰어든 行動家의 모습을 보였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의 知訥.조선시대의 休靜대사등은 우리 나라 불교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긴 분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과 맥을 같이하며 근세기에 나타난 경허선사의 출현은 이 나라의 불교의 전통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도 우리 민족,민중 속에 뿌리를 둔 한국 불교의 꿋꿋함을 反證해 주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다시 경허선사를 조명해 보는 것은 그가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어 온 배불 정책으로 마르고 시들어 빠진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 또 한편으로는 10세기 초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세도정치의 계속으로 극도로 어지러워진 민중들의 생활상과 이미 역사적 탄력성을 잃어버린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맞물려 매우 혼란했던 그 시대에 그가 이룩한 깨달음의 경지와 그의 행적들은 항상 놀라움과 함께 어떤 의문점들을 우리에게 남겨주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그의 生涯와 思想을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함께 고찰해봄으로써 또 하나의 거대한 변혁기를 맞이하는 20세기 말에 서서,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닥칠지 갈수록 예상하기 힘들어지는 많은 변수 속에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시간을 초월한 붓다의 가르침이 100년전의 그를 통해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한번 살펴보려한다.


2. 時代的 背景

鏡虛(1849-1912)禪師가 생존했던 당시의 조선시대는 전세기인 18세기를 통해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경제적 변화에 위협을 느낀 보수집권세력이 천주교 禁壓을 내세워 실학자들을 숙청하고 반동적이고 쇄국주의적인 세도정권을 수립하여 민중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강화하여 소위 三政紊亂이 절정에 다다를 시기였다. 따라서 거기에 반대하여 농민전쟁(관서농민전쟁-일명 홍경래난), 민란(임술민란)들이 폭발하여 안동김씨 세도정권을 몰락시키고 대사 대원군 이하응의 시대가 성립되었다. 대원군 정권은 밖으로 쇄국주의를 강화하고 안으로는 書院철패, 戶布法실시, 관료사회의 기강확립을 통해 민중세계와 타협하면서 권력을 굳혀갔다.
그러나 대원군시대도 洋擾와 경복궁 재건 등으로 빚어진 재정적 곤란과 유생층의 반발 등으로 갑자기 무너졌다. 대신 들어선 민씨정권은 대비 없는 문호개방을 단행함으로써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 놓았다.
조선왕조시대의 식자층은 儒生과 佛僧뿐이였는데 유생은 대부분 관료 지망생으로서 그 생각과 행동이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안에 머물렀고 불승은 그 사회적 지위가 천인화됨으로서 체제외적 식자층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불교교단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핍박을 받아 왔기 때문에 교세가 극히 침체된 상황이였다. 기껏해야 절을 수호하고 보존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불교 본래의 사명인 교화나 사회활동과 같은 衆生救濟는 아예 손길을 돌릴 겨를을 갖지 못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수도장의 개설과 참되게 수행하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였다. 단지 의례적인 예식이나 외형적인 祈福에만 의존한 형식적 불교에 치중되어 있었다.
특히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불교를 조선침략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했다(으례 제국주의의 침략에 앞서 종교의 포교가 우선되었다. 전례를 보면 일본이 이를 따르려 했음은 쉽게 짐작될 만하다). 일본정부는 일본 불교계에 대해 조선에 布敎할 것을 종용했고(1877), 그것에 힘입어 일본 각 종파들이 조선에 진출하였다. 조선에 건너 온 일본 승려들은 조선불교발전을 위해 협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제국 정부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불교에 대한 국가 관리를 모색했다. 寺司管理署를 설치하여(1902) 僧徒와 사찰의 관리를 도모했으나 이 기관은 설치된지 2년만에 폐지되었고 일본 쪽의 조선불교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커져갔다.
이러한 당시의 불교상황을 생각해볼 때 경허의 출현은 침체된 불교계에 활력소를 불어넣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행과 수도에 눈을 뜨게 하여 공부하는 풍토를 조성케 함으로서 불교계에 생명력을 되찾게 하고 나아가서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있듯이 경허선사가 있었기에 후일 일본불교의 친일화 획책에 맞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분명히 하였던 많은 선사들이 있어 우리불교의 전통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히 보았다시피 불교계뿐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이 몹시 암울하고 혼란에 달했던 시기에 그는 홀연히 왔다 홀연히 갔지만 그 자취는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다.


3. 鏡虛의 生涯

경허의 생애는 결코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어쩌면 쓸쓸하고 초라하기만한 생애였다. 그는 마을에 살았으되 집을 가진 바 없었으며, 절에서도 그 흔한 주지살이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집도 절도 없는 '無所有' 그대로였다.
그는 1849년 8월24일 전주 子東里에서 礪山 宋斗玉씨와 密陽 朴氏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세상에 나온지 3일 만에야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니, 경허 출생부터가 神異에 감싸인 듯하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으나 뼈대있는 선량한 가문이었다. 경허 나이 9세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따라 시흥 淸溪寺에 入山하여 桂虛大師 法下에서 출가자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그의 형 역시 공주 麻谷寺에서 일찍이 득도하였다. 그러고 보면 경허의 집안은 온통 佛緣으로 가득한 감마저 든다.
淸溪寺에서 시작된 어린 경허의 행자생활은 가혹하리 만치 힘든 것들이었다. 그는 나무하고 물긷고 밥짓는 일로 하루 해가 모자랄 정도의 고된 생활을 했지만 조금도 싫은 생각이 없었다. 그의 나이 14세 때 朴處士라는 儒者에게서 처음으로 문자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는 매일 5~6장의 글을 능히 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才童으로 칭송이 자자하기도 했다.
이때 경허에게 불연을 처음으로 맺어준 계허대사가 퇴속하면서 어린 경허를 계룡산 東鶴寺에 있는 萬化講伯에게 천거하였다. 이 동학사 만화강백 밑에서 경허는 一大時敎와 儒典.老莊까지 두루 섭렵하여 약관에 이미 발군의 실력을 공인 받게 되었다. 경허는 23세때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되어 諸方學人을 지도하며 30세 전후 젊은 강백으로 크게 명망을 떨쳤다.
경허의 나이 31세 때 여름 어떤 일로 상경 도중 천안 인근에서 모진 風雨를 만나 민가에 머물러 피하려 했으나, 악성 호열자가 만연되어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깨달았다. 그는 비로소 발심하여 동학사에 되돌아 와서 학인들을 해산시키고 강원을 철폐해 용맹정진하던 중 11월 보름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言下 에 豁然大悟하였다.
다음 해 봄에 호서 연암산 天藏寺로 옮겨 한자리에서 保任에 들어갔다. 경허는 천장사에서 保任 중 옷 한벌로 내내 지내며, 고된 정진을 하여 마침내 33세 때 6월 一大事를 마치고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悟道歌'를 읊은 뒤 전통적으로 禪家에서 중요시하는 傳燈淵源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가 읊은 오도가는 오도후의 첫 一聲이라는 데도 의미가 있지만 내용도 매우 훌륭하다. 경허는 오도가에서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솔직히 표현하면서도 凡人들에게도 佛法의 소중함을 알고 속히 내재된 佛性을 깨달으라고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오도가 말미에 다음과 같이 붙인 七言絶句頌은 그의 깨달음의 실체를 집약해 놓은 것이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이로부터 경허는 20여년간 천장사와 수덕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오가며 호서일대에 禪風을 진작시키는 한편 부산 범어사와 해인사등 영남일대에도 禪院을 개설케 하여 法主로 추대되어 衲子를 제접하면서 修禪結社의 淸規를 짓기도 하였다. 그는 또 전라도 송광사와 화엄사등 호남 일대 여러 곳을 다니며 선원을 창설하여 禪衲을 지도함으로써 전국적으로 禪風을 大振케 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염불과 주력 등 주로 타력신앙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견성성불이란 看話大悟의 선풍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白坡를 통해 전수되는 계율 중심적이고 고식적인 修行禪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開悟見性을 표방하는 實參實究의 선풍은 경허에게서 재현되었으므로 경허는 禪界의 중흥조로서 큰 의미를 안겨 준다.
그는 또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해 내었는데 그 중에서도 滿空.慧月.漢岩.水月 등은 큰 수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들은 경허의 뒤를 이어 이 나라 불교계에 宗匠으로서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도 그 문하들이 불교계에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경허는 禪客과 제자들을 지도하는 여가에 우리말로 된 <중노릇하는 법>과 <法門曲> 등을 지은 것을 비롯해서 上堂法語와 詩頌,序文.記文 등의 文類와 問答類의 書簡과 歌 등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나 그래도 비교적 그가 활동한 범위 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글을 남기고 있다. 또한 그는 修禪者들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禪門撮要》편찬불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경허는 또 해인사에서 국왕의 칙명으로 추진하는《藏經》간행불사에 證明으로 참여한 것을 위시하여, 부산 범어사 금강암과 摩訶 寺 羅漢殿 改粉佛事 등 숱한 불사에 증명이나 법주로 참석하여 늘 법문을 하였다.
경허의 나이 56세 때 오대산 월정사에서〈大方廣佛華嚴經〉법회에서 법문한 데 이어, 석왕사에서 五百羅漢殿 改粉佛事에 증명을 끝으로 절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만다. 그렇게 願力에 찬 설법과 衲子들에게 길잡이 노릇을 하던 경허, 숱한 일화와 신화 , 그리고 파격적인 기행과 신비적인 처신으로 늘 화재를 모아 오며 많은 감동과 억측들을 자아내게 했던 근세의 善知識 경허가 오랫동안 몸담아 온 山門을 벗어난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유랑행각에 나선 경허는 三水.甲山.長津을 떠돌다가 강계군 종남면 한전동 淡如 金鐸의 집에 머물며 선비 朴蘭洲, 또는 有髮居士 朴進士로 訓蒙生活을 하는가 하면, 관서와 관북 일대는 물론 국경을 넘어 만주지방까지 非僧非俗차림으로 떠돌며 많은 선비 隱者들과 더불어 詩情酒話에 젖기도 하였다. 그때 경허는 金淡如.金有根.李汝盛.諸益 등과 어울려 지내며 주옥같은 禪詩들을 남기게 된다.

안다는 것 얕은 소견 이름만 높아 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기만 하구나
모를 일이여,어느 곳에 가히 몸을 감출고
어촌이나 술 좌석이 어찌 처소가 없으리요만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더욱 새로워질까, 다만 그를 두려워하노라.

識淺名高世危亂 不知何處可藏身
漁村酒肆豈無處 但恐匿名名益新

이렇게 이름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승비속의 風狂을 띤 선각자들은 많았다. 끝으로 경허의 생애를 좀더 본질적인 면에서 생각해 봄으로 해서 경허의 내면에 흐르는 정신 세계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허의 나이 31세 때 悟道후 절 집안에서 縱橫으로 활약하며 선맥을 크게 떨쳐 선의 중흥조가 되었지만 그 자신은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경허는 선의 형해화와 固着化를 막고 살아 움직이는 선자의 길을 모색해 再出家를 감행하게 되었으며 그 재출가의 세계가 비승비속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무릇 세상의 범인들이 고뇌를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를 하듯이, 경허 그는 깨침의 성역에서조차 벗어나 永遠性을 찾아 깨달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거듭거듭 구하려는 것이다.
경허의 나이 64세 때 4월 25일 甲山 熊耳坊 道下洞에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든다.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그는 그 게송 밑에 一圓相도 그린다. 한 시대를 주름 잡았던 大宗匠 경허는 세상에 나올 때나 떠날 때나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철저하게 무소유로 일관하였다.


4. 鏡虛思想의 특색

먼저 선사상이라고 간단히 요약되어지는 그의 사상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선종이란, 선이란 무엇인지 잠시 알아보자.
중국불교에서 선종이 자기 주체만을 강조하고 마음 밖의 다른 것을 부정한다면, 淨土宗은 오직 부처님 원력의 배를 따고 해탈의 세계에 나려한다(往生). 유종과 밀종이 律儀와 儀禮를 통해 해탈에 도달코자 한다면 선종은 오히려 격식을 거부하고 의례를 깨려 한다(格外). 天台가 교리와 관행을 통일적인 것으로 보고 그 속에서 선정을 닦도록 한다면, 선종은 敎外別傳을 강조한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 깨달음과 이타행을 함께 할 것을 주장한다면, 선종은 깨달음을 법칙으로 내세우고(以悟爲則) 이타행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선을 말하더라도 천태는 敎觀一致를 표방하고 달마는 교외별전을 보였다. 이렇게 다양한 용어와 수행방법, 의례, 수행의 차이점이 있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불교사상의 다양화된 한 형태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추구하는 바가 바로 부처님이 보이신 법에 이르는 길, 즉 해탈과 자비를 완성함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평등하며 평등한 인간의 마음은 변덕스러운 불평등에 장애 되는 일이 없다. 다만 외적인 만상에 의하여 덮여 가려지고, 겉으로 나타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사람은 모두 凡人도, 聖人도, 평등하게 진실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력하게 외친 종교가 불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진실한 자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시켜 그 마음의 진실을 파악함으로써 본성인 불성이 나타나게끔 하는 데 모든 교리와 실천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망상에 의하여 덮여 가려진 본성을 꿰뚫어서 본래의 참된 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는 않는 듯하다. 여기에서 많은 교리가 나오게 되고 실천 방법도 또한 다양해질 수 밖에 없다. 망상을 쉬게 하는 수행의 일환으로 數息觀과 같은 四念處法(즉 네개의 관찰 방법)에 의한 習禪의 선은 인도에서 진작부터 발생하여 初期 선의 원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선은 인도의 초기 선과는 다르다. 다분히 중국의 문화 속에서 배태된 선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直指人心) 본래의 불성을 뚜렷이 인식함으로써 부처가 될 뿐(見性成佛), 글로 표현된 경전에 구애받지 않는(不立文字) 선이다. 따라서 정통교리와는 동떨어진 전통(敎外別傳)을 수립하였다.
인간의 실존을 문제 삼는 선종은 교종의 기성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서 관념화된 교종중심 불교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종은 관념적 사상체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선종은 고려시대에 선교통합의 사상체계를 설립시켰고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구체적인 예가 선종에서의 修禪社의 結社였고, 주인공은 知訥이였다. 지눌은 定慧結社文.眞心直說.修心訣.圓頓成佛論.看話決疑論 등 여러 종류의 선적을 저술했다. 그는 먼저 온건하고도 기본적인 인식방법으로써 선종 각파의 주장을 정리하여 頓悟漸修, 先悟後修를 표방하고, 돈오점수의 기본 입장에 서서 교종이 강조하는 수행의 장점도 인정하여 定慧雙修를 주장하는 敎禪일치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고려 말 普愚와 慧勤 등이 각기 중국으로부터 임제종을 받아들임으로 선종 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임제종은 자성의 깨침을 강조하면서 거기에 방해가 되는 일체는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냉정하게 떨쳐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가령 부처.祖師.羅漢, 그리고 부모와 친척일지라도 죽여버려야만 최상의 자유, 즉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수행을 강조한 家風이 임제종 가풍이다. 조선시대의 배불 숭유의 정책 속에서도 큰 별로 떠오른 西山은 더욱 간결한 표현을 하였다.즉"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규정하면서, 처음 배우는 이는 교(敎理)부터 배우고 나서 선으로 들어가 전념할 것을 강조하는 捨敎入禪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서산은 임제선을 주장하면서도 지눌이 제창한 경절문의 간화선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입장에 섰다. 그리고 話頭를 구체적으로 드는 公案공부로써 그의 선은 일관하였다.
이후 우리 불교는 서산 이래의 전통을 이어 받아 禪敎一致의 입장을 견지해왔다. 경허선사는 바로 이 전통법맥을 이은 근대선의 중흥조인 것이다.
그의 사상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먼저 경허의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차별 평등사상이다. 깨달은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悟道歌에서 경허는 차별의 현상계가 타파된 평등세계를 읊고 있다. 牧童과 樵童들이 소를 부르고 말을 부르는 일이 보현보살의 행일 수 있으며, 張서방이나 李첨지가 본래 毘盧遮那부처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등의 원리는 자기 속에 내재된 불성을 깨달았을 때 가능하다.
輪廻의 세계를 벗어나야만 차별이 사라지고, 차별이 사라질 때 지옥을 천당으로 만들 수 있는 무차별 평등의 세계가 열린다.
둘째, 禪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경허는 무엇보다도 선이 成佛의 첩경임을 일깨우면서 선의 眞面目을 알리고 禪法의 소중함을 외치고, 특히 선의 화두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제시하면서, 화두를 잡아 공부할 것을 간절히 촉구하고 있다. 경허가 禪을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스스로 선의 체험에서 오는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두로는 是甚�쑠� 조주의 無字를 주로 권하고 있음을 그의 法語에서 읽을 수 있다.
셋째로 경허는 禪만을 주장하는 편협한 선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선교의 대립보다는 일치를 찾고 있었다. '佛祖가 말씀 한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닌데 유별나게 그것을 나누어 놓고 있는 주장들은 부당한 것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넷째, 경허의 尋牛歌와 尋牛頌을 들을 수 있다. 즉 각자에게 내재된 佛性의 성숙 발현의 단계를 소로 상징해 풀이한 것이, 소를 찾는 歌頌이다. 불성을 소로서 상징하고 매우 조직적으로 추구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목우도는 참고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北宋의 중기에서 南宋의 초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나 목우도가 일반에 보급되기는 元.明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여러 형태로 유행했던 목우도는 대략 줄잡아봐도 11종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普明의 목우도송과 郭庵의 十牛圖頌 그리고 巨徹의 白 牛圖가 크게 풍미했으나 그 중에 특히 유행했던 것은 곽암의 십우도송과 보명의 목우도송이다.
경허도 심우가와 송을 지었는데 심우가는 곽암의 서설과 같은 산문형식이고 심우송은 그의 게송과 같은 詩(五言絶句)이다. 경허의 목우사상을 다음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해 보면
첫째, 경허는 목우가.목우송.목우도.법문등으로 목우사상을 담고 있으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궁극적인 경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종래의 10단위의 숫자도 무시하기도 하며 도식적인 그림도 그리려들지 않았다.
둘째, 黑牛가 白牛로 변하는 과정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본래부터 원만구족한 그 自性자리를 강조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셋째, 그러므로 소의 발자국이 있음을 좋아하면서도 애써 無心을 강조하고 있음은 길들여 가는 牧牛 중심의 圖頌으로써 소의 성격을 단련하려는 모습보다는 그 無心에 우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넷째, 垂手入廛에서 '바랑을 지고 저자에 놀며 요령을 흔들고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실로 일 마친 사람의 경계여라'라고 하여 중생 속에 들어가 세상 속에 묻혀 利他生活로 일관하는 대자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분명히 그 모습은 일 마친 사람이 하는 중생제도의 원력실천임이 틀림없으나 이점에서 어딘가 그의 萬行을 스스로 암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으로 경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看話門(禪門)과 念佛門을 궁극적인 면에서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간화문」중에서 『惺惺寂寂』을 평등하게 가지면 반드시 見性을 한다고 말하듯이, 염불문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한마음만 어지럽지 않으면 결정코 往生한다고 한다. 염불문중에서 말하는 한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함이, 어찌 간화문중의 성성적적을 평등하게 가짐이 아니랴. 만일 한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으로서 他力을 삼을진댄 간화문중의『惺惺寂寂』을 고루 가짐이 어찌 타력이 아니리요. 그러므로 성성적적을 고루 가짐을 自力이라 한다면, 한마음이 어지럽지 않음도 자력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경허는 淨慧를 행하는 것이 佛家를 이루는 길이라고 보아 淨慧修行을 강조했지만 정토행을 하는 자도 정혜의 결사에 입참할 것을 허용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을 살펴 볼 때 일면 경허의 사상이나 행적이 원효대사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즉 원효나 경허 모두 학문의 범위가 넓었으며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는 露呈의 오래된 무덤 속에서 문득 생사의 문제를 깨닫고 入唐을 포기하고 돌아와 저술과 대중 교화에 몰두한 점이나 경허가 풍우를 피해 들어 간 마을에서 호열자로 인한 시신들 틈에서 생사의 문제를 절박하게 느끼고 돌아와 용맹정진후 깨친 점등이 상당히 근사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상의 것보다 더 중요한 유사점은 바로 깨닫은 후의 행적들이다. 원효는 스스로를 小姓居士라 하면서 지방의 촌락,街 浦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길로 생사를 벗어 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며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으니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는 眞과 俗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眞 가운데 俗이 있으며 俗 가운데 眞이 구현되는 불교의 진수를 몸소 보여준 예가 될 것이다.
경허 역시 그가 남긴 무수한 일화 속에서 보여지듯 대중 속에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참된 자비의 가르침을 중생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참된 보살은 나 홀로 孤高하지 않고(和光) 세속과 더불어 산다는(同塵) 대승불교의 참뜻을 구현했기에 그의 행적은 원효의 그것에 비견되는 면이 있다 여겨진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 땅의 불교 여명기와 암흑기에 각기 출현하여 佛祖의 법을 몸소 실천했고 또 그 파격적인 기행들로 해서 동시대인 뿐아니라 후세인들에게까지도 일견 찬탄과 함께 오해도 불러일으키는 이 두드러진 두 분에 대한 비교연구를 해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5. 맺는 말

선종이 깨달음을 일체중생에게 개방하고 당면문제로 삼은 것은 대승적이다. 하지만 선종은 大乘의 이타적 실천까지는 수용하지는 못했다. 깨달음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기에 진정한 보살행은 막연한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경허선사야말로 근세 禪佛敎의 부흥을 이루었음과 동시에 더 큰 의미 즉, 참된 無碍行, 보살행의 경지를 보여줌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도 先驅者 역할을 하였다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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